열반(涅槃)이란?

大方等大集經의 空 · 密 思想

근와(槿瓦) 2015. 7. 24. 00:40

大方等大集經의 空 · 密 思想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대승경전에 그 사상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많다. 그 중 대방등대집경과 유마경 사이에 더욱 관계깊은 인용상의 문제라 하겠다. 한역 대집경은 僧祐에 의하여 594년에 편집된 17개의 경들의 혼합물이다. 그러나 이 경들 즉 몇 개는 이미 이전에 곧 2세기 3세기 초에 번역되었다.

歷代三寶記에 따르면 竺法護가 大哀經을 291년에 阿差末菩薩經을 308년 1월 10일에 黙言童子經을 번역한 연대는 미상이다. 이와 같은 대집경은 Vimalakirti와 그의 가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7개의 문헌(즉 유마힐경, 유마힐소설경, 설무구칭경, 대방등정왕경, 대승정왕경, 선사동자경, 월상여경)과 깊은 역할이 부여된 것이다.

이와 같은 관계가 깊은 대방등대집경은 이미 3세기 심지어는 더 나아가서 2세기경에는 이미 이루어져 있음을 우리는 위에서 말한바 있다.

 

대집경속에서 유마힐의 이름이 나오는 곳도 한두곳이 아니다. 이는 유마경과 대집경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동방에 무량이라는 세계가 있고 그곳에 오공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처가 항상 묘법을 설하며 중생을 교화한다.

또한 그곳에는 日密이라는 이름을 가진 보살이 있으니 법을 지심껏 경청하고 허공을 쳐다본다. 그는 동방에서 서방으로 가는 무량무변한 보살들을 보고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부처께 묻는다. 오공덕부처는 일밀에게 샤아카무니께서 구원겁이전에서부터 발원한 서원을 쫓아 이 보살들은 동방사바세계에 모여 그곳으로 법을 광포하기 위하여 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오공덕부처님은 일밀에게 신통력 있는 5종다라니(如實陀羅尼, 蓮華陀羅尼, 空行陀羅尼, 無願陀羅尼, 欲淨陀羅尼)를 주며 사바세계를 구원제세하라고 한다.

 

오공덕부처님은 보살이 두려워함과 주저함을 보고「일밀아, 너는 사바세계의 유마힐이지 않느냐? 너는 어찌하여 두려움과 주저함이 있느냐?」라고 말한다. 그 보살(日密)은 구원겁 전에 자기가 유마힐이었다고 하면서「네, 저 유마힐은 바로 저이옵니다. 나는 白衣像(재가신도)의 몸을 바꾸어 그 사바세계에 나타나서 중생들에게 진리의 안목과 그 요제를 선설하였습니다. 나는 중생들을 조복시키기 위하여 어떤 때는 바라문상으로, 찰제리상으로, 毘舍상으로 혹은 수타라상으로, 童男상으로, 童女상으로, 축생상으로, 아귀상으로, 혹은 지옥상으로, 나타났었습니다. 결국 일밀은 5종다라니를 갖추어 샤아카무니가 계신 곳에 가서 전법도생을 일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과거세에 있어서 31일동안 毘舍浮佛이 이 세상에 나타나서 四衆에게 법을 설하셨다. 그때 그곳에 弗沙耶若라는 큰 바라문이 있었고 그는 삼보에 귀의하여 오계를 청정히 수지하고 불과증득의 온갖 정진을 다하는 착실한 사람이었다. 또한 그에게는 8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하도록 열심히 권장하여 그결과 이들 모두가 5계를 수지정행하며 아뇩다라삼약삼보오디를 얻게 한다.

 

그러나 그 제자들은 삼보에 귀의할 것과 보리심을 일으킬 것을 거부하고 스승에게「만일 스승께서 천년동안 두 개의 威儀 즉 惟行과 惟住만 하고 앉지도 눕지도 않고 7일간 一揣만 먹고 천년동안을 이 난행을 지킨다면 그때 우리들은 삼보에 귀의하겠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弗沙耶若바라문은 그것을 지킬 것을 약속하고 이 난행을 즐겨 지킨다. 이때 공중에서 한 목소리가 나오니 弗沙耶若바라문이 현겁 중에 어느날 샤아카무니불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와 같이 대집경은 신행이 없는 사바세계의 중생을 어떻게 제도하고 어떻게 구원하는가를 잘 표현하고 있다. 모든 사바세계의 중생은 선근보리를 일으키게 하기 위하여는 먼저 구원하려는 뜻을 세운 자가 그 무리 속의 중생처럼 현현하여 구원하여야 한다는 것은 日密보살의 발원성취이며 또한 제자보다 더한 난행 고행을 하면서 정법청정과 상락아정의 무유정법의 요제를 시설하기 위하는 弗沙耶若바라문의 신앙인 것이다.

그러므로 선견자, 선지자가 고행과 싸우며 진리를 표방하고 진리를 실천하는 세계는 곧 정토이지만 진리를 보고만 있고 진리 속에 안위안락하는 해태심은 바로 지옥인 것이다.

 

이와 같이 진리를 표방하고 진리를 실천구도하기 위하여 대방등대집경의 교설은 어떠한가. 대승 경전의 무릇 사상이 대동소이함이 있듯이 그 찬집에 의하여 이룩된 사상은 다방면에서 변천되었다.

특히 대방등대집경은 반야공관의 사상과 밀교적인 사상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교학상의 공관과 실천면의 밀교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이 아닌가 한다.

 

불교의 대표적 중심사상은 연기법이다. 연기는 제법의 존재양상을 이루게 하는 현상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이 세상에 나타나시건 안 나타나시건 간에 모든 사물의 성격이나 그가 지닌 속성의 인과법은 항구불변의 진리처럼 생멸의 범주 속에 현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기법의 진리는 불교수행방법면에서 살펴보면 四聖諦 안에서 해결되고 그 해결된 방법이 곧 열반의 구경지로 성립될 가능성이 많이 있는 것이다. 즉 모든 법은 무상하며 고통스러운 것이며 我가 없는 것이다. 법이 무상하고 我가 없다지만 이것은 어떤 법에 조건지워져 있으며 원인과 결과를 연쇄반응케 하는 연기의 원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기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없어지면 또한 저것도 없어진다」는 상대적 관계를 지닌 것이다. 모든 것은 절대적이고 상일주재한 것은 없다. 공이라 하여도 없다는 완전공이 완전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가화합에 이룩된 것이 주체성을 나타낼 <아>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법이란 모든 법이요, 모든 법이란 곧 불법이니 이와 같이 불법의 성품이 동일한 것은 모든 법의 성품이며, 모든 법의 성품이 동일한 것은 곧 불법의 성품이어서 불법과 모든 법은 그 성품이 차별없고 모든 법이 고요하다면 불법도 고요하며 모든 법이 공하다면 불법도 공하나니 또한 모든 법이란 곧 십이인연이며 보리도 또한 십이인연이다.

 

이러한 모든 법은 無生하고 非壞한다. 고유한 성격이 없는 모든 법은 생성됨이 없고 소멸됨도 없다. 왜냐하면 공한 제법에서 태어나는 공한 제법은 실제로는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공한 제법은 태어나지 않으므로 괴멸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연기속에 의존하는 모든 현상의 생성은 비생성이다.

 

모든 법이 공이라 하므로 원인을 낳는 그 원인의 법은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인의 출생은 실제적인 것이 못된다. 곧 원인에 의존하는 것은 공이라고 말한다. 공을 아는 자는 미혹함이 없다. 그러나 모양없고 글귀없고 문자가 없어서 청정하고 고요하며, 공한 이치, 모양없는 이치, 덩어리없는 이치, 필경 나옴이 없는 이치, 깨달아 아는 이치는 말할 수 없고 볼 수도 없음이니, 볼 수 없는 것을 고요한 이치라 하고 고요한 이치는 공한 이치, 공한 이치는 덩어리 없는 이치, 덩어리 없는 이치는 진실한 이치, 진실한 이치는 필경 나오지 않는 이치, 필경 나오지 않는 이치는 멸하지 않는 이치, 멸하지 않는 제법은 머뭄이 없는 진리, 머뭄이 없는 제법은 곧 법의 성품이다. 법의 성품이란 곧 불법이라 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모든 진리는 머무는 것이 아니고 머물 바의 것도 아니다. 이것은 생성됨도 아님과 마찬가지의 논법으로 괴멸될 이 법도 아닌 공의 진리인 것이다.

 

공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연기법의 철학에서 온 하나의 공관 불교의 논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절대적인 제법실유면에서 생성된 법이 없으므로 모든 법은 상대적 견지에서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연기가 상대적 개념이고 보면 대집경은 이와 똑같은 견해를 표명한다.

 

법은 표징이 없다. 사물의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은 법을 찾는 것이 아니고 사물의 목적만을 구한다. 법이란 본래부터 존재하지도 않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 때문에 물질이 공한 것이 아니다. 물질 밖에 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물질은 공이고 공은 물질이다. 이것은 항구한 비생성은 그것이 타자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인위적인 것이 아닌 까닭에 법의 고유한 성품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전도된 시각의 힘으로 이와같은 성품은 이 시각의 전도된 없어진 성자에게 있어서는 보여지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며, 그리하여 이와같은 성품이 제법의 고유한 형태 고유한 성질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 특성은 제불이 규정하듯이 인위적인 아닌 타자에 의존치 않는 고유한 자성으로써 이해되어야만 한다. 비생성을 본질로 하는 사물의 이와같은 자성은 그 어떠한 것도 아닌 까닭에 그리고 단순히 비존재인 까닭에 오직 비자성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 즉 사물의 유일한 존재의 성품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같은 까닭이 있으므로 부처님은 만일 <나>에 집착한다면 魔의 일을 더할 것이니 보살마하살은 <나>있음도 알고 <나>없음도 아느니라. 만일 어떤 법이 <나>있음도 아니고 <나>없음도 아니라면 한 법이 더하고 덜함이 없을 것이며 모든 중생은 무명에 덮이게 되므로 보살은 그들을 위하여 위없는 대승을 장엄하려고 하느니라. <나>를 위하기 때문에 장엄하는 것이 아니고 장엄하고는 생각을 하되「누가 법을 장엄하여 견고해서 파괴되지 않게 하겠는가. 내 마땅히 장엄하리니 내 또한 중생 · 수명 · 장부를 파괴하기 위해 장엄하는 것이 아니고 중생들이 <나>에 집착하여 삿되게 중생 · 수명 · 장부 따위의 소견에 의혹됨을 파괴하기 위하여 장엄하리라. 중생은 뒤바뀌어서 다섯 가지 쌓임의 상락아정이라고 보나니 나는 마땅히 그들을 위하여 이와같은 것을 덧없고 괴롭고 <공>하고 <나없음>이라고 말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참된 지혜를 얻게 할 것이라」라고 한 것은 무집착 무계박에서 오는 참다운 자유인 열반을 쟁취항유하라고 한 것이다.

 

이와같은 열반은 증득하기 위하는 그 수행방법으로 다라니, 만트라가 이 경에 많이 가미되고 있는 것은 실천적 종교로 승화시키려는 日密이나 弗沙耶若 등의 구도관이 엿보이기도 한다. 대방등대집경은 북방중국과 서장지방에 널리 유포된 것으로 보더라도 유가행파의 실천궁행의 철학이 스며있는 다라니가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도 이 경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睦哲宇>

 

참고

대방등대집경 : 大乘의 교리를 가장 많이 모은 經이며 가장 많은 구도자들이 傾聽했고 또 읽어온 經이다.

                     불교의 慈悲思想을 根幹으로 해서 海印三昧에 이르는 길을 說하고 있는 이 經은 般若와 密敎

                     의 思想을 담고 있다. 略하여 大集經이라고도 한다.

 

 

 

출처 : 동국역경원(李耘虛, 1969.01.15)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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