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非有想非無想處의 다른 이름으로 無色界의 제4天. 이 하늘은 3界의 가장 높은 곳에 있으므로 有頂天이라고도 한다. 이 하늘에 사는 이는 下地와 같은 거칠은 생각이 없으므로 非想 또는 非有想이다. 그러나 자세한 생각이 없지 아니하므로 非非想 또는 非無想이라 한다. 非有이므로 外道들은 眞涅槃處라 하고, 非無想이므로 불교에서는 이것도 生死하는 곳이라 한다.
참고
무색계(無色界) : 無色天 · 無色行天이라고도 한다. 欲界 · 色界와 합하여 三界의 하나. 곧 물질을 초월한 세계로 물질적 비중이 큰 것(色想)을 厭離하여 四無色定을 닦은 이가 死後에 태어나는 天界. 또 그와 같은 有情의 생존을 말한다. 물질이 없으므로 場處(空間)를 갖지 않기 때문에 공간적인 高下의 차별은 없지만 果報의 勝劣에 따라 4계급으로 나눈다. 곧 닦은 四無色定에 따라 이것을 空無邊處 · 識無邊處 · 無所有處 · 非想非非想處의 四無色界로 나누고 三界를 九地로 나눌 때는 후반의 넷을 四地라 한다. 그러므로「空無邊處地」라 하여「地」자를 덧붙여서 부르기도 하고, 또 天界에 속하므로「空無邊處天」이라 하여「天」자를 첨가하여 부르기도 하며, 그 가운데 非想非非想處天은 世界(有情의 生存)의 最高位라 하여 有頂 · 有頂天이라고도 한다. 無色界의 有情들은 男根은 없으나 모두 남자이며 그 壽命은 차례로 2 · 4 · 6 · 8萬 劫을 산다고 한다. 또 分別論者는 無色界에도 細色이 있다고 주장한다.
삼계(三界) : 중생이 생사에 流轉하는 迷의 세계. 곧 有情의 경계를 셋으로 나눈 것. 生死輪廻하는 迷惑의 生存界(즉 有)의 분류이므로 三有生死라고도 하고 단순이 三有라고도 한다. 즉 欲界(欲有) · 色界(色有) · 無色界(無色有)의 셋을 말한다. 그 중에서 색계 · 무색계는 욕계보다 위에 있으므로 上二界 또는 上界라 한다(단 欲界 중의 六欲天까지도 포함한 天上界 전체를 가리켜서 上界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 경우 인간계를 下界라고도 한다). 三界는 끝이 없어 大海와 같은 迷 · 苦의 영역이므로, 苦界 · 苦海라고 한다.
삼계는 다시 여러 세계로 각각 세분되며 그 가운데 욕계는 지옥 · 아귀 · 축생의 3惡趣(아수라를 더한 4惡趣)와 天 · 人의 五(六)趣로 분류된다. 欲界의 하늘은 여섯이 있으므로 六欲天이라 한다. 색계는 初禪天에서 제 3禪天까지는 각각 3天이 있고 제四禪天은 九天(無想天을 제하고 八天이라고도 한다)이므로 色界 18天이라고 한다. 그 제四禪天 가운데 제5淨居天을 하나로 하고, 거기에 4洲의 4, 4惡趣(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의 4, 6欲天의 6, 梵天의 1, 無想天의 1, 四禪天의 4, 四無色天의 4를 합하여 二十五有라 한다. 여기에 淨居天을 5天(無煩 · 無熱 · 善現 · 善見 · 色究竟)으로 나누어 二十九有라고도 한다. 또한 欲界를 합하여 1地, 色界는 初禪天에서 제4禪天까지 4地, 無色界는 空無邊處天에서 非想非非想處天까지 4地로 하여 이것을 三界 九地라 한다.
유정천(有頂天) : 非想非非想天의 다른 이름. 3界(欲界 · 色界 · 無色界)를 9地에 나눈 가운데에 이 하늘은 無色界의 가장 높은 하늘이므로, 有의 頂이란 뜻이다.
비유(非有) : 唯識論에서 說한 中道를 말함. 一切諸法에 3性(遍計所執性 · 依他起性 · 圓成實性)이 있다. 이 3性이 遍計하여 空이 되고 有가 아니므로 非有라 하고 依他圓成은 有가 되고 空이 아니므로 非空이라 한다.
유식론(唯識論) : 두 가지가 있다. ① 成唯識論의 다른 이름. ② 唯識二十論의 약칭.
중도(中道) : 二邊. 곧 양극단이 따로 떨어지므로 얻을 수 있다. 치우치지 않는 中正인 道의 뜻. 中路 혹은 단순히 中이라고도 함. 中道는 佛敎의 근본적 입장을 말하고 있어 대승 · 소승에 걸쳐서 중요시되고 있다. 따라서 그 뜻하는 바에도 深淺이 있지만 각 종파에서 이 語句를 가지고 교리의 핵심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중도의 意義를 中道義, 중도의 眞理를 중도의 理, 중도의 敎說을 中道敎(三時敎의 하나), 중도를 종지로 하는 종단을 中道宗(법상종에선 唯識中道를 주장하므로 자신이 中道宗이라 한다), 중도를 觀하는 것을 中道觀(자세히 말하면 中道第一義諦觀이라 하여 三觀의 하나)이라고 한다. 또 중도는 우주만유의 진실상을 나타내므로 중도는 곧 實相이라는 뜻에서 中道實相이라 한다.
① 阿含의 八聖道의 실천은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로 치우친 생활태도를 버리고 중도에 의해 지혜를 완성하여 열반의 證得으로 가는 도이므로 팔성도를 中道라 한다(中阿含經卷五十六). 또 十二緣起의 진리를 옳게 이해하는 것은 常見(중생의 생명의 주체인 我는 영원히 존속한다는 생각)과 斷見(死後엔 아주 滅無로 돌아간다는 생각). 또 有見(자연적입장, 世間의 상식)과 無見(허무주의)등과 같은 치우친 견해로부터 떠나는 것으로, 십이연기를 옳게 觀하는 것이 중도의 正見에 住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잡아함경 권십이등). 초전법륜에서 석존이 설한 것인데 前者는 실천상의 중도이며 後者는 思想上의 중도이다.
② 部派불교의 중도. 大毘婆沙論卷四十九나 成實論卷十一등에서 아함의 교설을 받아 들여 중도는 斷 · 常의 二見을 떠난 입장이라고 주장한다.
③ 대승의 中觀派에서는 般若波羅密을 근본적인 조건이라 하고 모든 집착이나 분별의 경지를 떠난 無所得의 상태에 있는 것을 중도라 한다. 中論 卷一 觀因緣品에, 緣起의 理法은 生 · 滅 · 斷 · 常 · 一 · 異 · 去 · 來의 여덟 가지의 잘못된 견해(八邪 · 八迷 · 八過 · 八計 · 八謬 · 八事 · 八迷의 戱論)를 타파하여 空의 진리를 밝힌 것이다. 萬有는 그 緣起의 道理에 순응하여 존재하는 것이므로 원래 八邪를 여의었으며 실체가 없어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밝힌다. 이와 같이 八邪가 떨어져 無得正觀(無所得의 바른 견해)에 住하는 것을 중도라 하고 이것을 八不中道 · 八不正觀 · 無得中道 · 八不中觀이라 한다. 여기에 八不이란 생멸 등의 八邪를 否定하는 不生 · 不滅 · 不斷 · 不常 · 不一 · 不異 · 不去 · 不來를 가리킨다. 이에 의하여 모든 邪執이 파멸되어 諸法이 그대로 實相인 도리가 나타난다. 八不중에서도 不生 · 不滅이 그 근본이다. 특히 팔불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不生이 팔불 속에 들어갈 수 있다 한다.
吉藏의 中論疏卷二에 의하면 不生은 嬰兒闡提, 不滅은 邪見闡提, 不斷은 斷見의 聲聞, 不常은 常見의 聲聞, 不一 · 不異는 外道, 不來와 不去는 獨覺 및 初發心 보살들의 각각의 邪執을 파괴시킨다고 한다. 삼론종은 八不中道의 설에 입각하여 세 가지 중도를 주장한다. 즉 中論疏 卷一에는 八不中道를 二諦에 關係시켜 설명한다.
(1) 因緣에 의해 거짓 존재하는 現象面으로 말하면, 모든 사물은 실체가 아니고 空이면서 거기다 거짓 현상으로 존재하므로 無生滅의 生滅이니 生이나 不生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을 俗諦中道 · 世諦中道라고 일컫는다.
(2) 사물의 진실한 실재의 측면 곧 본체면으로부터 말하면 모든 사물은 거짓 현상으로 존재하면서 또 그 本體는 空이기 때문에 生滅의 無生滅로서 不生이라고도 非不生이라고도 할 수 없다고 하여 이것을 眞諦中道라고 한다. 이 두 가지를 二諦各論中道라고 한다.
(3) 그렇지만 無生滅의 生滅, 生滅의 無生滅이란 실은 生滅도 아니고 無生滅도 아닌 言語와 思慮를 여읜 究極的인 空이라고 하여 이것을 二諦合明中道 · 非俗非眞中道라 일컫는다. 또 三論玄義卷下에 중도에 一中 내지 四中의 구별이 있다고 했다. 곧 중도가 유일의 청정한 도인 것을 一中, 중도를 二諦에 대해 논하여 「世諦의 中」과「眞諦의 中」으로 분류하는 것을 二中, 그「二諦의 中」에「非眞非俗의 中」을 더하여 三中이라 한다. 四中이란 다음 네 가지이다. (1) 對偏中. 斷 · 常의 偏見에 대해서 설한 中. (2) 盡偏中. 그들 偏見이 滅盡되어 중도의 意義가 나타난 것. (3) 絶對中. 거기 나타난 中은 언어와 사려를 초월한 不偏不中인데, 억지로 이름을 붙여서 中이라 한 것. (4) 成假中. 非有非無인 絶對中에 의해 현상으로서의 거짓 존재(有無)를 성립시켜 중생을 교화하는 수단(方便)을 말한다.
④ 천태종에서는 空 · 假 · 中의 三諦의 설을 주장하여 모든 존재를 一面으로만 생각하는 空 · 假를 초월한 절대적인 본체는 언어와 사려의 대상이 아님을 中諦라고 한다. 이 중제는 化法의 四敎중 別 · 圓의 二敎로 설명된다. 그러나 別敎에선 三諦를 각각 독립된 진리라고 생각하고(隔歷三諦), 空 · 假의 二諦는 현상면, 中諦는 본체면으로부터 말한 것이라 하여 但中, 圓敎의 三諦는 서로가 개별적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一諦중에 三諦를 갖추고 있어 셋이 별개가 아니고 융합되어 있다고 보며(圓融三諦), 卽空 · 卽假 · 卽中으로서의 中諦이므로 이것을 不但中이라고 한다. 또 通敎에선 三諦의 설은 없지만 거기서 주장하고 있는 空理 가운데 중도가 들어 있다고 설명되고 있으므로 통교를 含中敎라고도 한다. 그리고 천태종에서는 중도의 理는 우주의 진실한 모습인 만큼 이 진리를 깨달으면 佛 내지 地獄의 十界를 敎化시키는 대상자에게 맞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應化의 本源이 중도에 있다는 뜻에서 中道應本이라고 한다. 藏敎와 通敎의 보살은 이것을 갖추고 있지 않으므로 前者는 本惑을 끊지 못하고 남겨 두어 三界에 남아 있고 後者는 誓願을 세워 煩惱의 習氣를 붙들어 三界에 태어나고 중생을 교화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⑤ 유식종에선 有 · 空 · 中의 三時敎의 敎判을 세워서 解深密經 등의 설처럼 有 · 空의 二邊(兩極端)을 여의고 非有非空의 중도의 진리를 완전하게 나타낸 敎를 中道了義敎라 하고, 有 · 空에 치우친 敎를 不了義敎라고 한다. 그 중도란 소위 唯識中道로서 곧 (1) 범부가 실재한다고 본 바의, 有情의 실체적 생명으로서의 我나 萬有의 구성요소로서의 法은 迷情의 집착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情有理無의 非有이다. (2) 萬有는 인연의 假有的 화합에 의해 존재하는 것으로 아뢰야식의 變現이므로 즉 識은 理有情無의 非無이다. (3) 또 만유는 고정된 본성(自性)이 없고 空이므로 자유자재로 현상될 수 있는 것으로 곧 공은 眞空妙有의 非無라고 한다. 이와 같이 宇宙의 眞相은 非有非無(非有非空)의 중도로 파악되는데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中道了義敎라고 한다. 三性說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我와 法은 遍計所執性에 해당하고 識은 依他起性, 空은 圓成實性에 해당한다(成唯識論 卷七). 우리 나라의 원효는 그의 梵網經菩薩戒本私記卷上에서, 「非有非無는 가(邊)를 여읜 중도의 戒를 나타낸 말이니, 그러므로 戒의 體를 말하면 因緣을 따라 생긴 것이지만 그 인연의 본체를 추구해 들어가면 戒의 自性을 얻을 수 없으므로 非有며, 戒가 비록 非有라고 하지만 인연을 따라 생긴 것이므로 토끼 뿔이 없는 것처럼 아주 없는 것은 아니므로 非無라 한 것이다.」라고 하여 戒를 非有非無의 중도의 원리에 입각해서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원효는 이어서 「만일 戒의 業을 말하면 막는다는데 戒의 뜻이 있는 것이니 그 막아야 할 대상은 곧 罪다. 그러므로 계는 결국 인연을 따라서 생기지만 그러나 그 인연의 본체를 추구하여 들어가 따지고 보면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얻어질 실재의 客觀은 없다.」고 하고 한 걸음 나아가 계를 중도에 契合시키는 논리를 다음과 같이 전개했다. 「마음자리를 두고 논하면 뿌리의 자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므로 죄될 요소가 따라 붙을 수 없다. 따라서 그릇됨을 막는다고 하지만 실은 그 절대적인 객관화된 본질적 표준(罪性)이 있음도 아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罪性은 마음의 근본바탕에는 없다. 그렇지만 또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여기에 戒가 중도에 들어 맞는 도리가 있는 바이다.」원효가 一切法에 無碍自在한 一大理論으로 千經萬論을 막힘이 없이 꿰뚫은 것도 다 철두철미하게 一貫 中道에 통달했기 때문이다. 또 華嚴經序에 「원래 無障無碍한 法界의 法門은 法이란 것도 없고 법아닌 것도 없으며 門이 아니고 門 아님도 없도다. 그것은 大도 小도 아니요 促도 奢도 아니며 動도 靜도 아니며 一도 多도 아니다.」라고 했고, 金剛三昧經論序에 「破할 것도 없고 破하지 않을 것도 없으며 세울 것도 없고 세우지 않을 것도 없으니 이른바 아무 이치가 없는 것 같지만 지극한 이치이고 그렇지 않으면서 크게 그러하다」고 했다. 이러한 圓融無碍한 절대의 원리에 입각하여 性 · 相 · 空 · 有 · 一 · 異의 일체의 相對性을 會通시킴으로 立 · 破 · 開 · 合에 조금도 걸림이 없는 중도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고려의 義天도 「대저 法에는 말이나 형상이 없으며 말이나 형상을 여읜 것도 아니니 말이나 형상을 여의면 뒤집힌 迷惑이요, 말과 형상을 집착하면 참으로 迷한 것이다」라고 했고, 「敎學者는 안을 버리고 밖으로 구하며 習禪人은 因緣法을 모르고 안으로만 밝혀서 偏執하므로 二邊을 다 읽는다」고 하여 역시 중도가 究竟임을 누누히 밝혀 주고 있어서, 원효의 중도설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일본에 있어서는 執空說을 취하는 南寺傳의 중도설과 體空說을 취하는 北寺傳의 중도설과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먼저 집공설의 입장을 주장하는 남사전에 의하면 三性對望의 중도설을 주장한다. 곧 진여인 원성실성(眞有)에 의해 의타기성(假有)으로서의 현상이 있다. 그 現象의 相을 實有라고 집착하는 것이 변계소집성(理無)이므로 변계소집은 非有, 의타기와 원성실은 非無이다. 또 三性은 一法上의 三性이므로 三性을 상대로 하여 볼 때 여기에 非有非無인 하나의 중도가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體空說을 취하는 북사전에서는 一法中道說을 주장한다. 예를 들면 변계소집성은 情有이므로 非無, 理無이므로 非有로서 곧 중도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三性이 각각 하나하나 다 중도를 갖추고 있다고 주장하고 나아가서 情有도 단순한 有가 아니라고 하여 많은 一法中道를 주장한다. 단 일법중도설 가운데서 변계소집성은 범부의 迷情이므로 중도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설도 있다. 三性을 상대로 중도를 설명하는 것은 言說로 설명한 중도이므로 言詮中道라 한다. 一法中道는 모든 존재가 본래적인 진실한 相으로는 언어와 사려를 끊어버린 非有非空의 중도라 하여 절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도이므로 離言中道라고 하여 이들을 합해서 二重中道라고 한다. 이것은 중도에 따로 두 개가 있는 것은 아니라 前者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중도, 後者는 자기 스스로의 깨달음의 내용으로서의 중도이다. 또 중도란 말은 能觀의 智를 가리키는 경우에도, 所觀의 理를 가리키는 경우에도 사용된다.
이변(二邊) : 中道를 여읜 兩極端을 말한다. 中論卷四에는, 有 · 無, 혹은 常 · 無常을, 順中論 卷下에는, 常 ·斷을 玄奘譯의 攝大乘論 世親譯 卷一에는, 增益 · 損減을, 止觀補行 卷三에는, 空·假를 각기 二邊으로 들고 있다.
중정(中正) : ① 곧고 바름. ② 바른 행위. 중도이며 바른 것. ③ 바른 도덕.
중도실상(中道實相) : 萬有의 實相은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닌 非有非空의 中道임을 말한 것. 宗派에 따라 구체적인 해석 상의 차이가 있다.
외도(外道) : 범어 tirthaka. 인도에 있어서 불교이외의 敎. 불교를 內道라고 하는데 대한 對稱. 外敎 · 外法 · 外學이라고도 하고, 後世에는 邪法 · 邪義의 의미를 갖는 貶稱으로 쓰인다. 인도의 外道로 알려지고 있는 것에 六師外道, 六派哲學派(數論 · 瑜伽 · 勝論 · 正理 · 聲論 · 吠檀多)가 있는데, 이 밖에 다음과 같은 분류가 있다.
[1] 外道四執. 또 外道四見 · 外道四計 · 外道四宗 · 四種外道라고도 한다. ①(1) 一切法은 同一하다고 하는 說(數論外道). (2) 一切法은 別異하다고 하는 說(勝論外道). (3) 一切法은 同一하고도 또 別異하다고 하는 說(尼犍子外道). (4) 一切法은 同一하지도 않고 別異하지도 않다고 하는 說(若提子外道, 또는 邪名外道)[外道小乘四宗論] · ②(1) 世間은 항상하다는 說. (2) 世間은 無常하다는 說. (3) 世間은 常하고 또 無常하다고 하는 說. (4) 世間은 常도 아니고 無常도 아니라고 하는 說(智度論 卷七) · ③(1) 邪因邪果(大自在天外道). (2) 無因有果(常見外道). (3) 有因無果(斷見外道). (4) 無因無果(因果의 도리를 否定하는 外道).[三論玄義 卷上]. ④ 기타. 瑜伽論 권65에는 我와 蘊의 卽離라고 하는 점에서 또 中觀論疏 卷七에는 苦의 自作 · 他作 등의 점에서 四執을 나누고 있다.
[2] 六苦行外道. 自餓外道 · 投淵外道 · 赴火外道 · 自坐外道 · 寂黙外道 · 牛狗外道(소나 개의 흉내를 냄으로 生天을 원하는 외도)[涅槃經 卷十六].
[3] 外道十六宗. 또 十六異論 · 十六外道 · 十六計라고도 한다.
곧 因中有果宗(雨衆外道라고도 雨際外道라고도 일컬어지는 數論의 說) ·
從緣顯了宗(聲論 · 數論一派의 說) ·
去來實有宗(勝論 · 時論外道의 說) ·
計我實有宗(數論 · 勝論 · 離繫 등의 일체의 外道 및 小乘犢子部의 說) ·
諸法皆常宗(數論外道 등의 說) ·
諸因宿作宗(宿作外道라고도 宿作因論師라고도 하는 離繫外道 곧 耆那敎의 說) ·
自在等因宗(大自在天外道의 說) ·
害爲正法宗(肉食하기 때문에 殺生까지도 正法이라고 하는 說) ·
邊無邊等宗(세계의 有限 · 無限 등을 주장하는 說) ·
不死矯亂宗(Sanjaya의 詭辯論) ·
諸法無因宗(無因外道) ·
七事斷滅宗(斷見外道) ·
因果皆空宗(空見外道 · 邪見外道) ·
妄計最勝宗(婆羅門은 最勝이라는 說) ·
妄計淸淨宗(現法涅槃外道 등의 說) ·
妄計吉祥宗(日月星宿 등 祭祀하는 것을 吉祥이라고 하는 曆算外道의 說)[義林章 권一, 瑜伽論 권六 · 七의 說].
[4] 二十外道. 外道小乘涅槃論의 說로 이중에는 小乘불교도 포함된다. 小乘外道論師 · 方論師 · 風論師 · 韋陀論師 · 伊賖那論師 · 裸形外道論師 · 毘世師論師 · 苦行論師 · 女人眷屬論師 · 行苦行論師 · 淨眼論師 · 摩陀羅論師 · 尼犍子論師 · 僧佉論師 · 摩醯首羅論師 · 無因論師 · 時論師 · 服水論師 · 口力論師 · 本生安茶論師.
[5] 30종外道. 時 · 地等變化 · 瑜伽我 · 建立淨 · 不建立無淨 · 自在天 · 流出 · 尊貴 · 自然 · 內我 · 人量 · 遍嚴 · 壽 · 補特伽羅 · 識 · 아賴耶 · 智者 · 見者 · 能執 · 所執 · 內知 · 外知 · 社怛梵 · 意生 · 儒童 · 常定生 · 聲顯 · 聲生 · 非聲 및 總我의 各外道(大日經 권一의 說).
[6] 기타. 順世外道 · 出家外道(出家한 外道를 말함. 在俗外道의 對稱) · 塗灰外道(獸主外道) · 附佛法外道(불교에 依託하여 있으면서 邪義를 주장하는 자) · 迦婆離(結鬘)外道 등이 있다.
[7] 六十二見. 梵網經의 說에서는 다음과 같은 外道의 邪見이 있는 것으로 說하고 있다.
過去에 관한 說(本劫本見) 18종
自我와 세계의 常住論 4종
自我와 세계의 一分常住論 4종
世界의 邊 · 無邊論 4종
詭辯論(異問異答論) 4종
自我와 세계의 無因論 2종
未來에 관한 說(末劫末見) 44종
死後有想論 16종
死後無想論 8종
死後非有想非無想論 8종
斷滅論 7종
現在生涅槃論 5종
他에 大品般若經의 說, 涅槃經의 說, 法華文句記의 說 등 數種의 세는 방법이 있다.
[8] 95종 外道. 96종 外道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六師外道에 각 15인의 제자가 있기 때문에 90인이 되고, 여기에 六師를 보태어 96종으로 하는 등, 그 셈하는 방법에 異說이 많다.
열반(涅槃) : 滅 · 寂滅 · 滅度 · 寂이라 번역한다. 擇滅 · 離繫 · 解脫 등과 동의어로, 또 般涅槃(般은 범어 pari의 음역으로, 완전의 뜻. 圓寂이라 번역한다), 大般涅槃(大는 뛰어나다는 뜻, 大圓寂)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불어 끈다는 뜻, 불어 끈 상태, 곧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滅盡해서 깨달음의 지혜인 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말한다. 이것은 生死(迷의 세계)를 넘어선 깨달음의 세계로, 불교의 구극적인 실천목적이며, 그러므로 여기에 불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旗印(法印)의 하나로서 涅槃寂靜을 세우게 된다. 불교 이외의 外道에서도 열반을 말하지만, 불교의 열반과는 다르다. 불교에서도 대승 · 소승에서 각기 그 해석에 異說이 많다.
① 部派(소승)불교에서 열반이라 함은 번뇌를 멸하여 없앤 상태라 하고, 여기에 有餘열반과 無餘열반의 2종열반을 세운다. 앞의 것은 번뇌를 끊었지만 육체(「殘餘의 依身」가 아직 있다는 의미로「餘依」또는「餘」라고 한다)는 아직 殘存하는 경우, 뒤의 것은 灰身滅智의 상태로, 모든 것이 滅無로 돌아간 경우를 가리킨다. 有部등에서는 열반을 하나의 본연의 자세인 실체적인 경지로 생각하고, 經量部등에서는 열반은 번뇌가 멸한 상태에 대한 假稱的인 명칭으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② 대승에서는, 열반을 적극적인 것이라 생각하여, 常 · 樂 · 我 · 淨의 四德을 갖추지 않은 소승의 열반을 有爲열반이라고 하는 데 대해서, 이 사덕을 갖춘 열반을 無爲열반이라 하여, 이것을 최상의 목표로 삼는다. 또 南本열반경 卷三에는, 常 · 恒 · 安 · 淸淨 · 不老 · 不死 · 無垢 · 快樂의 8味가 열반에는 갖추어 있다고 하여, 이것을 열반의 八味라고 한다. 常 · 恒은 항상, 安 · 快樂은 樂으로, 不老 · 不死는 我에, 淸淨 · 無垢는 淨에 對應하여 이것을 四德에 배속하는 수도 있다. 唯識宗에서는, 本來自性淸淨열반과 有餘依열반과 無餘依열반과 無住處열반의 4종열반으로 나눈다. 본래자성청정열반은 또 본래청정열반이라고도 性淨열반이라고도 하고 모든 것이 본래의 相에 있어서는 眞如寂滅의 理體 그것이라고 하여 진여를 가리켜서 이와같이 말한다. 무주처열반이라 함은 지혜에 의해서 煩惱障과 所知障을 여의었기 때문에 생사(迷의 세계)에도 停滯하지 않고, 또 大悲를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迷의 세계중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열반의 경지에서도 머무르지 않는 것을 말하고, 대승불교의 열반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地論宗이나 攝論宗에서는 性淨열반 · 方便淨열반(도를 닦음으로 인하여 번뇌의 더러움을 없애고 얻는 열반)의 二열반, 천태종에서는 性淨열반 · 圓淨열반(지론종등의 방편정열반에 상당) · 方便淨열반(불타가 중생을 구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모습을 나타냈다가 緣이 다하여 들어가는 열반으로, 應化열반이라고도 한다)의 3열반을 세운다.
③ 소승의 聲聞이나 緣覺이 무여열반에 들어가서 다시 마음을 바꿔서 대승의 敎에 轉向하는 것을 無餘還生이라고 한다. 또 열반은 모든 차별적인 모습(有爲의 相)을 超離하여 있는데, 이것을 離相이라고 한다. 淨土敎에서는 불타의 정토를 涅槃之城 또는 無爲涅槃界라고도 한다.
④ 이 세상에 사람으로서 나타난 불타(특히 釋尊)의 육체의 죽음을 涅槃 · 般涅槃 · 大般涅槃이라고 하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入涅槃 · 入滅 · 薪盡火滅(薪은 佛身 또는 機緣, 火는 지혜 또는 佛身에 비유한다)이라고 한다. 대개 본래는 석존의 成道를 열반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지금은 아마도 無餘依열반의 의미로 이와같이 말하는 것일 것이다. 석존의 入涅槃의 모습을 본뜬 畵像 또 影像을 涅槃像, 그날(2월 15일)에 석존을 追慕하여 진력하는 법회를 涅槃會 · 涅槃忌 · 常樂會등이라고 한다. 또 승려의 死를 圓寂 · 歸寂 · 示寂 · 入寂등이라고 한다.
생사(生死) : 輪廻라고도 번역한다. 業因에 의해서 六道의 迷界에 태어나서 죽기를 거듭하면서 윤회하는 것으로서, 涅槃(깨달음)의 逆. 生死가 끝이 없는 것을 밑바닥을 알 수 없는 바다에 비유해서 生死海라고 하고, 번뇌의 세계이기 때문에 生死苦海라고도 한다. 생사의 고해를 건너서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難度海라고도 한다.
① 二種生死. (1) 分段生死. 有漏의 善惡業을 因으로 하고 煩惱障을 緣으로 하여 三界내에 麤한 果報를 받을 때 그 과보는 壽命의 長短이나 육체의 大小 등 일정한 제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分段身이라고 하고, 분단신을 받아 윤회하는 것을 分段生死라고 한다. (2) 變易生死. 不思議變易生死라고도 한다. 아라한·벽지불·大力의 보살은 분단생사를 받는 일은 없으나, 그러나 無漏의 有分別의 業을 因으로 하고 所知障을 緣으로 하여, 界外 곧 三界 밖의 殊勝細妙한 果報의 身, 곧 意生身을 받아 이 몸을 가지고 三界내에 와서 보살의 行을 닦아서 佛果에 이른다. 그 몸은 悲願의 힘에 의해서 수명도 육체도 자유로히 變化改易할 수가 있으므로 일정한 제한이 없기 때문에 變易身이라고 하고, 변역신을 받는 것을 變易生死라고 한다.
② 四種生死. 분단생사를 三界에 배대하여 3으로 구별하고, 여기에 變易生死를 더하여 4로 한다. 또 변역생사를 方便·因緣·有後·無後의 四生死로 나눈다. 또 冥(현세의 卑賤)에서 冥(死後의 惡道)으로 들어가고, 冥에서 明(死後의 善趣)으로 들어가며, 明(현세의 尊貴)에서 冥으로 들어가고, 明에서 明으로 들어가는 4를 4種生死라고 한다.
③ 七種生死. 분단생사를 삼계에 배대하여 나누고, 여기에 변역생사의 4종을 더하여 7로 한다. 단 後世의 해석에서는 이것을 다음의 7종으로 한다. 分段생사·流來생사(眞如의 이치에 迷하여 생사의 迷界에 流來하는 처음을 말한다)·反出생사(發心해서 생사에서 뛰어나는 처음을 말함)·方便생사(見思의 惑을 끊고 삼계의 생사에서 超出하는 入滅의 二乘에 대해서 말함)·因緣생사(無漏業을 因으로 하고 無明을 緣으로 하여 生을 받는 初地이상의 보살에 대해서 말함)·有後생사(有有생사라고도 한다. 최후의 1品의 무명을 남기는 제十地 보살에 대해서 말함)·無後생사(無有생사라고도 한다. 무명을 끊어버려 後身을 받지 않는 等覺 보살에 대해서 말함).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