ᄉ~ㅇ(시옷~이응)

아수(我修)

근와(槿瓦) 2018. 7. 9. 00:32

아수(我修)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無我諸事物 속에 자연히 眞我의 자재가 있다는 것을 알고, 小乘無我의 집착을 물리침.

 

참고

무아(無我) : 非我라 번역하기도 한다. 는 영원히 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自存하며(), 핵심적인 所有, 곧 주인공으로서(), 지배적 능력이 있는 주체()로 생각되는 영혼적 또는 本體的 實體를 의미한다. 모든 物體에는 이런 가 없고 가 아니라고 설하는 것을 諸法無我라고 하며 無我하는 것을 無我觀이라 한다. 無我는 불교의 근본교리로서 三法印의 하나인 無我印에 해당된다. 諸法無我印에서의 의 뜻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 뜻과는 구별해야 할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인도에서는 고래로 brahman교의 교설에 의해 atman() 사상이 젖어 있었기 때문에 釋尊은 일차적으로는 그런 의미의 의 관념을 부인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석존은 가 될 수 없는 것, 가 있지 않은 것, 라는 집착에서 떨어질 것, 가 아닌 것을 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으며, 라는 관념, 나의 것이라는 觀念을 배제하는 사고방식, 는 존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었다. 팔리어 聖典에서의 無我의 원어는 anattan이다. 그 뜻은 가 아니다라는 의미와 내가 있지 않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초기 佛敎에선 결코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은 없었다고 한다. 원래는 에 대한 집착에서 떨어진다는 뜻이다. Upanisad 철학에서는 實體視하는 것에 비해서 佛敎에서는 이런 見解를 거부한 것이다. 이것은 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고 客體的, 기능적인 를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반대한 것이다. 存在 · 不存在라고 하는 形而上學的 문제에 대한 대답은 석존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참다운 나의 문제는 존재적 존재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문제이므로 존재 · 非存在의 관념적 · 논리적 차원을 초월한 영역이기 때문에 석존은 일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석존께서는 다만 곧 나의 것이라는 觀念을 버리라고 가르쳤다. 원시불교에서는五蘊의 하나하나가 이므로 非我이다라는 敎說, 無常이므로 無我이다라는 敎說(雜阿含經 卷三)이 있다. 이것은 가 아닌 것을 , 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특히 身體를 나의 것, 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라는 觀念排除하고자 했다. 說一切有部에서는 人無我를 말하며 아를 부정하였으나 諸法實有라 하고 法無我는 말하지 않았다. 뒤에 와서 차차 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無我說이 확립되었으며, 이런 입장은 說一切有部, 초기 大乘佛敎에도 계승된다.

이렇게 하여 無我에는 人法二無我이 있게 됐다. 有情(살아 있는 것들 : 衆生) 五取蘊(凡夫의 생존을 이루는 物心의 다섯가지 요소(五蘊))假和合的 존재이므로 이런 五蘊的 假和合體實體的인 생명의 주체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人無我라고 칭한다. 또 모든 것은 因緣(結果를 내는 親因, 結果를 내는데 보조되는 것은 )에 따라 나타난 것(로 성립되는 것)이므로  그것에는 원래 고유한 獨自的 本性(自性)이 없다고 하는 것을 法無我라고 한다

阿含에는 모든 것은 조건에 의존하며, 이에 따라 변천하고 사라져 가는 無常한 것이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므로 無我라고 한다.

有部에서는 我空法有라 하여 人無我하고 있지만,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는 각각 自性이 있다고 보아 法無我를 설하지 않는다.

成實論에서는 五蘊안에 참된 自我가 없다고 보고 人無我하는 것을 空觀, 五蘊이 다  無常이어서 참된 自性이 없다고 보아 法無我하는 것을 無我觀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無我說空觀과 관련되어 無我란 사물에서 나(영원불멸의 本體, 고정적 실체)가 없다. 無自性의 뜻이 있다고 하여(中論 卷二二 · 二三) 無我(人無我法無我 我法二空) 를 설했다. 二種無我相謂人無我及法無我 楞伽經卷一특히 唯識宗에서는 三性說에 따라 三無我를 세우고 또 阿賴耶識과 관련시켜 無我를 고찰하여서 阿賴耶識本性이므로, 諸法阿賴耶識중의 種子顯現에 불과함으로 無我라고 하고 있다. 實我實法情有理無로 참된 이 없으므로 無相無我, 依他起似我似法如幻假有로서 집착된 과는 다르므로 異相無我, 圓成實實性으로 無我의 상태에서 나타난 眞如自相이라고 하므로 自相無我라고 한다.

 

제유(諸有) : 諸法. 衆生·有情. 모든 것. 중생의 果報도 있고 도 있기 때문에 라 함. 또한 에는 三有·四有·九有·二十五有 등의 구별이 있으므로 총괄적으로 諸有라 한다.

 

진아(眞我) : 外道 · 凡夫妄我에 대해서 열반의 我德眞我라 한다. 열반에 갖추고 있는 八自在는 진실한 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 이것을 大我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五蘊身假我라고 하는데 대해 外道 · 凡夫들은 이것을 實我라고 집착하는 것을 眞我라 한다. <俱舍論卷三十>

 

八自在 : (1) 能示一身爲多身(능히 一身을 보여서 多身이 된다) · (2) 示一塵身滿大千界(一塵身을 보여서 大千界에 가득 차게 한다) · (3) 大身輕擧遠到(大身을 가볍게 한다) · (4) 現無量類常居一土(중생의 에 따라 無量의 형상을 나타내지만 늘 一土에 있다) · (5) 諸根互有(一根에 잘 諸根을 갖춘다) · (6) 得一切法無得想(一切法을 얻었으나 無法想과 같다) · (7) 說一偈義經無量劫(一偈義經無量劫한다) · (8) 身遍諸處猶如虛空(몸이 모든 곳에 周遍하여 마치 허공과 같게 한다 함). <열반경 23>

 

자재(自在) : 음대로 무엇이나 자유롭지 않은 것이 없고 장애할 것이 없음을 일컫는 말. ·보살이 갖춘 功德의 하나. 그래서 自在人이라고도 한다. 보살이 가진 自在力에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다.

二種自在.

(1) 觀境自在. 眞如와 다른 경계 곧 현상계를 아울러 하는 自在.

(2) 作用自在. 說法敎化의 활동이 自在한 것.

四種自在. 八地 이상의 보살이 갖춘 自在力.

(1) 無分別自在. 分別을 여의고 任運無功用自在.

(2) 刹土自在. 淨土自在. 자유로 種種國土에 나서 그 국토를 淸淨하게 하는 自在.

(3) 智自在. 第九地에 이르면 無礙智成就하므로 說法敎化自在하게 되는 것.

(4) 業自在. 第十地에 오른 보살은 번뇌와 業縛이 없는 自在를 성취함. 또 모든 보살이 있는 神通와의 4종의 自在四種自在라 한다.

十種自在.

(1) 命自在. 壽命伸縮하는 自在.

(2) 心自在. 三昧에 들어가는 自在.

(3) 財自在. 資具自在, 財物에 관한 自在.

(4) 業自在. 行業 行爲自在.

(5) 生自在. 受生自在. 을 받는 것을 自在로 하는 것,

(6) 願自在. 원하는 대로 깨달음을 얻는 自在.

(7) 信解自在. 解自在. 온 우주에 遍滿함을 보는 自在.

(8) 如意自在. 神力自在. 神通變化의 힘으로 不思議함을 보이는 自在.

(9) 智自在. 智慧를 얻어서 깨달음을 여는 自在.

(10) 法自在. 無量說示하는 自在를 말함.

 

소승(小乘) : 범어 hinayana. 은 싣고 운반하는 뜻.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가 되기에는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수레라는 뜻. 대승의 . 이 교법 중에서 ···가 모두 深遠 광대하고, 따라서 수행하는 사람도 大器利根機類를 요하는 것을 대승이라 하고, 이와는 달리 아라한과와 벽지불과를 구하는 것을 소승이라 한다. 소승에는 성문승과 연각승이 있다.

(1) 聲聞乘. 四諦의 이치를 관하여 성문의 四果를 증득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을 교리로 한다.

(2) 緣覺乘. 12인연을 하여 辟支佛果에 이르는 것을 敎體로 한다. 이것은 모두 몸을 태우고 를 멸하여 空寂 열반의 깨달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최후 목적으로 생각한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100년에 上座部大衆部로 분열하였고, 이 대중부는 또 다시 9부로, 上座11부로 나뉘어져 결국 도합 20부가 되었다. 스승이나 지역 관계가 분열의 원인이 되었는데, 이와 같은 분열은 한편으로 교세의 확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각 부의 敎義는 서로 영향을 받았으며, 거기다가 이상적 질서를 부여한 것은 중국의 敎判으로, 窺基八宗判, 法藏十宗判 등이다. 이 이름은 대승이 有部煩瑣 연구를 소승이라고 낮추어 부른 데서 비롯한다. 대표적인 부파는 有部·經量部·正量部·大衆部 등이다. 인도의 상좌부·대중부 등의 20분파와 東土의 구사종·성실종·율종 등이다.

 

집착(執着) : 事物이나 道理를 고집하여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 ··計着이라고도 한다. 貪愛心에 집착하는 것을 染着이라고도 한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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