ㄹ~ㅁ(리을~미음)

무지(無知)

근와(槿瓦) 2018. 6. 27. 00:23

무지(無知)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을 染汚無知不汚無知의 두 無知로 나눈다. 染汚無知染無知라고도 하며, 그 성질이 染汚(不善有覆無記)無知라는 뜻이니 곧 진리를 덮어 지혜를 방해하는 번뇌로서의 無知를 말하고 無明로 한다. 不染汚無知不染無知·不染愚라 하며, 번뇌로 더럽힌 것이 없어진 無知를 말함. 대상에 대하여 집착하지는 않지만 (. 나무를 베고난 그루터)을 보고 사람이라 생각하듯 여러 가지 사물을 확실히 알 수 없는 劣慧이며 有漏이긴 하지만 또는 無覆無記어서 無明과 꼭 같지는 않다. 이것은 또 所知障에 해당하는데, 대승에서는 無明로 한다고 설한다. 有部에선성문의 아라한이나 연각은 染汚無知를 다 단절해 버리지만 不染汚無知는 끊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現行하는 것)고 하며, 佛陀만이 두 無知를 완전히 단절하여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한다.고 한다.

 

참고

염오무지(染汚無知) : 2無知의 하나. 染汚는 번뇌의 異名. 無知對境了達(解了通達의 약칭으로 이치를 사무쳐 알아서 통달하므로 밝게 精通함을 뜻함)하지 못하는 것. 染汚無知· · · 4의 참뜻을 모르고, 萬有事相에 먼 無明煩惱를 말한다. 3중에는 無記중의 有覆無記에 해당한다.

 

불염오무지(不染汚無知) : 2無知의 하나. 根性闇昧해서 事物의 도리, 法門義理를 알지 못하는 것을 일컬음. 이것은 無始이래의 不學의 결과로서 事物에 집착하는 不淨의 성분과는 구별되므로 不染汚라 한 것.

 

염오(染汚) : 染汚라 함은 번뇌의 흐림에 물들어 더러워져 있다는 뜻. 雜染, 이라고도 한다. 有漏法, 깨달음에의 길을 방해하는 것. 不善有覆無記染汚라고 하고, 無覆無記不染汚라고 한다(俱舍論 卷七). 그렇더라도 成唯識論述記 卷二 末에는, 雜染이라고 하는 경우는, 染法(不善有覆無記)뿐만이 아니라, 有漏法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한다. 大乘莊嚴經論 卷三에는 染汚(雜染), 煩惱染汚(煩惱를 말함) · 業染汚(번뇌에 의해서 일으키는 을 말함) · 生染汚(그 결과로서의 生存을 말한다)3종의 染汚(三雜染)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순차로 · · 三道에 해당한다. 起信論에는, 心體는 본래 淸淨한데 不覺에 의해서 無明을 일으키어 번뇌에 더럽혀지기 때문에, 染心이 된다고 말하고, 染心6(六染心)이 있다고 한다. 執相應染(我執을 말함) · 不斷相應染(分別起法執을 말함) · 分別智相應染(俱生起法執을 말함) · 現色不相應染(所取의 경계를 나타내는 妄心) · 能見心不相應染(能取妄心) · 根本業不相應心(迷妄染汚心의 자체)으로, 이것들은 수행에 의해서 차례로 끊어진다고 한다.

 

불선(不善) : 진리를 어겨서 現世來世를 그르치는 것을 不善이라 한다.

 

유부무기(有覆無記) : (1) 도 아니고 도 아니지만 智慧의 발생을 방해하는 점에서 더럽혀져 있는 것. 煩惱에 가려져 있으나 이라고 明記할 수 없는 것은 無覆無記. (2) 눈에는 안보이나 가려져 있는 것.

 

진리(眞理) : 참된 이치. 참된 도리. 佛法을 말함. 만인에게 보편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인식의 내용.

 

불법(佛法) : 부처가 하신 佛法이라고 한다. 成實論卷一에는 여섯 가지 동의어를 들고 있다. 이것을 佛法六名이라고 한다. (1) 善說(있는대로 하기 때문). (2) 現報(現世에 있어서 果報를 얻게 하기 때문에) (3) 無時(吉凶이 때를 가리지 않고 따라오기 때문에) (4) 能將(正行으로써 중생을 잘 이끌어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5) 來嘗(자신이 깨달아야 하기 때문에) (6) 智者自知(지혜있는 사람은 스스로 잘 信解하기 때문에

부처가 중생을 가르쳐 인도하는 敎法. 出世間의 법을 불법이라고 하는데, 국왕이 백성을 통치하기 위하여 만든 국법을 王法이라 한다. 眞宗에서는 王法爲本 · 仁義爲先이라고 해서,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국법을 준수하고 윤리도덕을 실천해야 한다고 한다.

불타가 얻은 법(緣起道理法界의 진리 ). 부처가 알고 있는 법(一切法). 불타가 갖추고 계신 여러 가지 功德(十八不共法)을 불법이라 하는 수도 있다.

 

지혜(智慧) : 六波羅蜜의 하나. 일체의 諸法을 통달하여 得失邪正을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 智慧山, 智慧海 등에 비유함. · 두글자를 특히 구별하여 쓸 경우에는 解了, 照見의 뜻.

 

번뇌(煩惱) : 범어 klesa의 번역. 吉隷捨로 음역하고, 이라고도 번역한다. 중생의 몸이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미혹하게 하여 더럽히게 하는 정신작용의 총칭. 그 성질은 不善 有覆無記이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서 업을 일으키고, 괴로움의 를 받아 미혹의 세계(生死)에 매어 있게 된다. 이것을 惑業苦三道라 한다. 그래서 불교는 번뇌를 끊고 열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번뇌는 그 작용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갖는다. 隨眠·(이치에 어둡고 現象의 세계에 대해 미혹하여 알지 못하는 것··結使·····暴流····使··株杌·燒害··稠林(번뇌의 수가 많은 것을 무성한 삼림에 비유한 것塵勞·塵垢·客塵·諍根(다툼의 근본)이라고도 하고, 또 번뇌의 그것을 正使(다만 使라고도 한다), 를 멸해도 역시 남아있는 관습의 기운을 習氣라고 한다. 모든 번뇌는 因力(아직 번뇌가 끊기지 않은 것境界力(욕심 등에 순응하는 대상이 나타나는 것加行力(대상에 대해서 非理·作意를 일으키는 것)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한다.俱舍論 卷二十혹은 境界力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도 있다고도 한다.入阿毘達磨論 卷上

구사종이나 유식종에서는 번뇌를 근본번뇌와 枝末번뇌의 두 번뇌로 나눈다.

근본번뇌라 함은 번뇌의 그것으로서,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되는 번뇌로, 本惑·根本惑 혹은 다만 번뇌라고도 부르며, 有部에서는 隨眠이라고도 한다. 經部에서는 隨眠을 번뇌의 종자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서 번뇌의 現行(현재에 일어나서 활동하는 것)()이라 한다. 유식종에서도 隨眠이란 번뇌의 종자를 가리킨다고 말하며, 근본번뇌에 ·····(惡見)번뇌(六隨眠)가 있는데, 有身見·邊執見·邪見·見取見·戒禁取見五見으로 나누어 등의 다섯과 합해서 번뇌(隨眠, 十使)라고 한다. 이 가운데 등의 다섯은 推察尋求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그 작용이 느리고 둔하기 때문에 五鈍使(五惑), 五見推察尋求하는 성질이 있고 그 작용이 빠르고 날카롭기 때문에 五利使라고 한다. 六隨眠 가운데 欲界의 탐과 上二界(색계·무색계)으로 나누어 이것을 각각 欲貪·有貪이라고 하며 합하여 七隨眠(七使)이라 하고, 혹은 十隨眠 중에 을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로 나누어 欲貪·色貪·無色貪으로 하고 十二隨眠(十二使)이라고도 한다. 唯識宗에서는 십종의 근본번뇌 가운데 제七識과 상응하여 항상 일어나는 我癡(無我의 이치에 미혹하여 나의 에 어두운 번뇌로 無明을 말함我見(我執을 말하며 有身見의 일부我慢(나를 집착하고 나를 믿고 우쭐하는 거만我愛(나를 집착하여 나에 탐착하는 것)의 넷을 四煩惱(四根本煩惱, 四惑)라고 한다. 또 탐··치는 모든 악을 낳게 하는 근본()이며, 대표적인 번뇌이기 때문에, 三不善根·三毒·三垢·三縛 등이라고 한다.

지말번뇌라 함은  근본번뇌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종속적인 번뇌로, 隨惑·枝末惑·隨煩惱라고도 한다. 단 수번뇌란 말은心王에 붙어다니는 번뇌란 뜻으로 풀어 근본번뇌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지말번뇌에는, 구사종에서는 放逸·懈怠·不信·惛沈·掉擧·無慚·無愧·忿··········睡眠·惡作十九를 말하며, 유식종에서는 睡眠·惡作을 버리고 失念·散亂·不正知를 더하여 二十으로 하기도 한다.

俱舍宗 등에서는 迷理·迷事二惑을 나누어, 불교의 보편적인 진리 곧 四諦의 이치에 迷惑하고 있는 思想上知的인 번뇌를 迷理이라 하고, 구체적인 개개의 事象에 미혹한 바의, 곧 인간성에 바탕한 情意的인 번뇌를 迷事이라고 한다. 自相·共相二惑을 나누어서, ·등 각자 개개의 특수한 고유의 (自相)해서 각각의 법을 대상으로 일으키는 번뇌를 自相이라 한다. ·無我 三世의 모든 것에 공통된 (共相)함으로 많은 법을 대상으로 하여 일으키는 번뇌를 共相이라 한다. 앞의 것에는 ··또는 ····이 있고 뒤의 것에는 五見··無明이 있다고 한다. 唯識宗에서는 煩惱障·所知障二障을 나누어, 我執에 의해 일어나서 중생을 미혹의 세계(生死)流轉시킴으로 열반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煩惱障이라고 하며, 法執에 의해 일어나서 알아야 할 대상인 진리를 막음으로 보리를 깨닫는 길을 방해하는 所知障이라 한다. 번뇌장은 일체의 번뇌를 로 하고 반드시 所知障을 수반한다. 번뇌장은 所知障依支處로 하기 때문이다. 所知障은 함께 번뇌를 로 하지만, 반드시 번뇌장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發業(주로 다음에 말하는 分別起의 혹으로 특히 제六意識相應無明이 그것이다)이라고 하고 이에 대해서 迷界의 중생을 윤택하게 하고 삼계의 중생을 받게 하는 혹을 潤生의 혹(다음에 말하는 俱生起의 번뇌로 특히 제六意識相應로 한다)이라고 한다. 또 어떻게 해서 번뇌가 일어나는가 하는 점에서 나누면, 二障 공히 각기 분별기와 구생기가 있다. 邪師·邪敎·邪思惟 등 밖으로부터의 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을 분별기의 혹이라고 하며, 태어나면서부터 자연히 일어나는 본능적인 것을 구생기의 혹이라고 한다. 근본번뇌중에서, 의심과 邪見見取見戒禁取見과의 는 분별기뿐이며, 다른 二十隨惑은 양쪽에 모두 공통한다.

번뇌를 끊어야 할 수행단계의 相異에 따라 번뇌를 나누면 見惑修惑(思惑)二惑이 있다. 전자는 見道에 의해서 없애야 할 번뇌(見道所斷)이며 후자는 修道에 의해서 끊어야 될 번뇌(修道所斷)이다. 俱舍宗에서는 迷理見惑, 迷事修惑이라고 하고, 唯識宗에서는 分別起見惑, 俱生起修惑이라 한다. (1) 俱舍宗에서는 三界 四諦의 각각을 대상으로 하여 일으키는 見惑에 총 八十八이 있다. 欲界苦諦에 관해서는 근본번뇌와 集諦滅諦에 관해서는 身見·邊見·戒禁取見을 뺀 근본번뇌, 道諦에 관해서는 戒禁取見을 더하여 근본번뇌가 있으므로, 합하면 欲界三十二, 色界·無色界에는 이 없기 때문에 四諦의 하나하나에 을 뺀 각 二十八, 計 八十八이 된다. 이것을 見惑八十八使라고 한다. 修惑欲界···, 色界·無色界에 각기 ··의 셋이 있어 합하면 열이 되므로 여기에 見惑八十八을 더하면 九十八隨眠 또는 九十八使라고 한다. 修惑은 성질이 遲鈍애매하여 분명히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九地의 각 위에 강약의 정도에 따라 九品(上上品에서 下下品까지의 아홉 品階)의 구별을 세워, 九地九品思惑, 修惑 八十一品 등이라고 한다. 九十八使遍行非遍行으로 나눈다. 遍行이라 함은, 三界九地 중에서 自界自地五部(見道에 있어서 四諦觀行과 이것을 거듭하여 닦는 修道)에 널리 작용하여 五部을 더럽히는 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 五部 중의 自部에만 작용하는 非遍行이라고 한다. 九十八隨眠 중에서 널리 五部의 모든 有漏法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고, 널리 그것들과 隨順하고 그것들에 의해서 더욱 더 增長하고(隨增하고), 이 되어서 널리 五部染法(번뇌 등의 染汚法)을 낳게 하는 힘이 강한 遍行으로 三界의 각각에 있어서 苦諦에 헤매는 五見··無明集諦에 헤매는 邪見·見取見··無明과의 十一이 있다. 이것을 十一遍行이라 한다. 이 중 ·二見은 다만 自界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自界緣이라고 하지만 나머지 다른 아홉은 自界는 물론 또 다른 上界까지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他界緣이라고 하고, 이 아홉은 上界上地까지도 이 있다고 하는 의미로 九上緣이라고도 한다. 九十八使有漏法을 대상으로 하는 有漏緣無漏法을 대상으로 하는 無漏緣으로 나누면 滅道二諦邪見(邪見·에 상응해서 일어나는 相應無明과 및 독립으로 일어나는 不共無明)六惑無漏緣이며, 그밖의 것은 有漏緣이다. (2) 唯識宗에서는, 見惑에는 欲界四諦 각각에 근본번뇌(欲界四十), 색계·무색계에 성냄()을 뺀 근본번뇌(色界三十六·無色界三十六) 百十二번뇌를 들고, 修惑에는 欲界·邪見·見取見·戒禁取見을 뺀 근본번뇌, 색계·무색계에 각기 다시 을 뺀 각 근본번뇌, 計 十六번뇌를 들므로 見修二惑을 합하여 百二十八번뇌가 된다.

知的五利使見惑 등을 見煩惱라고 하고, 情意的五鈍使修惑 등을 번뇌라 하며, 합하여 見愛()번뇌, 見著二法, 愛見이라고 한다. 虛假(헛소리)이기 때문에, 見假·愛假라고도 한다. 勝鬘經에는 四住地번뇌의 이 있다. 번뇌는 見道에 있어서 한때에 끊겨지기 때문에 見一處住地(一切見住地)이라고 부르고 번뇌는 이것을 三界에 나누어 각기 欲愛住地, 色愛住地·有愛住地이라 부른다. 또 이 넷에 다시 모든 의 근본이 되는 無明(無明住地)을 더하여 五住地번뇌, 五住地惑이라 한다. 唯識宗에서는 五住地번뇌 중 앞의 넷은 煩惱障의 종자이며, 뒤의 하나는 所知障의 종자라고 한다. 天台宗에서는 전자를 界內見思, 후자를 界外이라고 한다. 대개 住地라 함은 다른 모든 이 일어나고 의지처가 되며() 을 일으키는 이 된다는 뜻이다. 智度論 卷七에는, 자신에 집착하는 번뇌를 內著번뇌, 外境에 집착하는 번뇌를 外著번뇌라 하며, 전자는 五見··, 후자는 ·에 속한다고 한다.

天台宗에서는 見思·塵沙·無明三惑(三障·三垢)을 말함. 곧 우선 見惑修惑(思惑)見思이라고 부르며, 다음에 티끌()이나 모래()에도 비유할 만큼의 무수한 사물의 하나하나의 事理劣慧(번뇌의 習氣不染汚無知라고도 한다)로 하고, 다른 것을 化導하는 것을 막는 塵沙이라고 부른다. 다음에 모든 의 근본으로, 中道 第一義諦의 도리를 한 가장 적은 번뇌를 無明이라 부른다. 각각 空觀·假觀·中觀에 의해서 끊긴다고 한다. 三惑을 번뇌장·소지장에 配對하면 見思는 번뇌장, 塵沙·無明은 소지장에 해당한다. 見思三乘에 공통하는 이므로 通惑·塵沙·無明은 특히 보살만이 끊는 이기 때문에 別惑이라고 부르고(通別二惑), 見思三界안에서 일으키는 이므로 界內, 無明三界를 넘은 곳에 있는 이기 때문에 界外, 塵沙는 양쪽 모두 통하므로 界內界外이라고 한다. 見思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함부로 사물의 을 집착하여 취하는 번뇌이기 때문에 따로 取相이라고 말하는데, 넓은 뜻으로는 뒤의 二惑도 또한 取相이라고 한다.

번뇌에는 여러 가지 분류가 있다. (1) 三縛. 貪縛·瞋縛·癡縛. 이상의 차례로 ··三受對境을 향해서 일어난다. (2) 三漏. 欲漏(를 뺀 欲界繫의 근본번뇌 및 十纏有漏(를 뺀 上二界繫의 근본번뇌로 이 경우의 有身의 뜻. 의 존재를 말한다. 無漏에 대한 有漏는 아니다無明漏(三界). (3) 三結. 有身見結·戒禁取結·疑結. 五見 근본번뇌가 이 중에 포함된다. 三結이 다하면 預流果에 이른다라고 한 經說에 따라 三結이 다하면 그 때 見惑의 모든 것이 끊어진다고 한다. (4) 四暴流(四流). 欲暴流·有暴流·見暴流·無明暴流. 三漏의 분류법에서 을 독립시킨 것. (5) 四軛. 四漏. ···無明의 넷으로 惑體四暴流와 같다. (6) 四取. 欲取·見取·戒禁取(戒取我語取. 俱舍宗에서는 欲界五鈍使 十纏欲取, 五利使 중 앞의 넷을 見取, 戒禁取見(), 上二界···我語取라고 한다. 이어라 함은 내신(자기의 몸)을 말한다. 내신에 의해서 나를 설하기 때문이다. 상이계의 번뇌는 대개 내신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아어취라고 부른다. (7) 四身繫(四身縛·四縛·四結이라고도 한다). 貪欲身繫(貪欲身縛·欲愛身縛瞋恚身繫(瞋恚身縛戒禁取身繫(戒禁身縛此實執取身繫(我見身縛). (8) 五蓋. 欲貪蓋·瞋恚蓋·惛眠蓋·掉悔蓋·疑蓋. 가 섞이지 않는 것을 疑蓋無雜이라고 하는 말도 여기에 연유한다. (9) ()下分結. 有身見·戒禁取見··欲貪·瞋恚. 下分이라 함은 欲界란 뜻. (10) ()上分結. 色貪·無色貪·掉擧··無明. 上分이라 함은 上二界란 뜻. (11) 五結. ····. (12) 六垢(六煩惱垢). ·····. 煩惱垢라 함은 근본번뇌에서 흘러나와 그 모습이 더러워지고 거칠다는 뜻. (13) 七流. 見諦所滅流·修道所滅流·遠離所滅流·數事所滅流·捨所滅流·護所滅流·制伏所滅流(華嚴孔目章 卷三 ) (14) 九結. 愛結·恚結·慢結·無明結·見結·取結·疑結·嫉結·慳結. (15) 十纏. 無慚·無愧···惡作·睡眠·掉擧·惛沈·忿·등의 . 忿·을 빼고 八纏이라 하는 경우가 있다. 枝末번뇌 중에 六垢는 가볍고, 十纏은 무겁다. 九十八隨眠十纏을 더해서 百八번뇌가 된다고 하고, 또 모든 번뇌를 다 말하면 八萬四千의 번뇌가 있다고도 한다.

번뇌를 여의는 것을 離垢, 번뇌가 없는 것을 無垢, 번뇌가 다한 것을 漏盡이라고 한다. 아라한을 漏盡比丘, 漏盡하여 마음에 진리를 了解하는 것을 盡漏意解라고 한다.

 

무명(無明) : 범어 avidya의 번역.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不如實智見을 말함. 곧 진리에 어두워서 () 사물에 통달치 못하고 사물과 현상이나 도리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不達不解不了) 정신상태로 愚癡를 그 내용으로 하며, 十二緣起第一支無明支이다. 俱舍宗이나 唯識宗에서는 無明心所(마음의 작용)의 하나로 하는 라 한다

十二緣起無明支를 해석하는데 阿含經에서는 佛敎의 진리(四諦)에 대한 無智라 하고 渴愛表裏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有部에서는 十二緣起三世兩重 因果한 것으로 보고 無明을 과거의 煩惱에 있어서의 五蘊을 가리킨다고 하며, 모든 煩惱중에 이 無明의 작용이 가장 무겁고 돋보임으로 無明이라고 이름하였다. 唯識宗에서는 二世一重因果로 해석하고 無明 등의 五果種子를 끌어 들이는 能引支로 보고, 그 가운데 第六意識相應하는 로서 善惡을 일으키는 것을 無明이라 한다고 했다

有部唯識宗에서는 無明相應無明不共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前者 등의 根本煩惱相應하여 같이 일어나는 것, 後者相應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不共無明은 홀로 일어남으로 獨頭無明이라고 하는데, 唯識宗에서는 不共無明을 다시 恒行不共無明獨行不共無明으로 나눈다. 前者第七 末那識相應하는 無明으로 등의 根本煩惱相應하여 일어나나 모든 凡夫의 마음속에 늘 쉬지 않고 나타나는 作用이란 점에서 第六意識相應하는 無明과 다르기 때문에 不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後者第六意識相應하는 無明으로 다른 근본번뇌와 상응하지 않고 홀로 일어남으로 獨行不共이라고 일컫는다. 獨行不共無明隨煩惱와 함께 일어나지 않고 홀로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다시 主獨行無明無主獨行無明으로 나눈다. 唯識宗에서는 無明種子現行으로 나누고 늘 衆生을 따라 다니며 第八阿賴耶識 속에 숨어 잠자고 있는 無明種子隨眠無明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표면에 나타나 現在意識으로 작용하고 있는 無明現行衆生에 붙어서 衆生을 얽어 生死(世界)에 묶어 놓는다는 의미에서 纒無明(전무명)이라 한다. 纒無明에는 相應하는 것과 不共이 있어서 隨眠··相應·不共四種이 있게 되므로 이것을 四種無明(四無明)이라 부른다. 根本枝末不共相應不相應, 迷理迷事, 獨頭俱行, 覆業發業種子子時行業果15無明으로 나눌 때도 있다.

勝鬘經에서는 見惑 三界修惑 등과 相應하는 相應無明四住地(見一處住地·欲愛住地·色愛住地·有愛住地의 넷으로 처음의 見惑, 뒤의  三界修惑을 의미한다)이라고 부른다. 獨行不共無明無始無明住地이라 하고(합하여 五住地) 無明住地는 모두 번뇌가 일어나는 根本이며 오직 如來菩提智만이 이것을 끊을 수 있다고 한다.

起信論에서는, 無明不覺이라고 하고 이 不覺根本無明枝末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根本無明根本不覺·無始無明·元品無明·忽然念起無明이라고도 한다. 元初一念이라고도 한다. 眞如平等眞理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忽然히 차별·대립의 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그 元初라고 하는 것은 모든 煩惱元始이고 迷妄의 시작이므로 다른 煩惱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忽然이라고 한다. 지극히 微細하므로 心王(마음)心所(마음의 作用)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즉 無始無明住地이 아닐 수 없다고 보인다. 枝末無明枝末不覺이라고도 불리우며 根本無明에 의하여 일어난 末稍的 染汚心으로 三世微麤惑業이다.

天台宗에서는 ··三觀에 의하여 각기 見思·塵沙·無明三惑을 끊는다고 한다. 無明非有非空의 진리에 迷惑되어 中道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無明을 끊음에 있어서는, 別敎에서는 十廻向位에서 항복하여, 初地이상의 12階位에서 12無明(모두 12품의 무명이 있다고 한다)을 다 끊어 마친다고 한다. 이 경우 十廻向最後第十廻向에서 처음의 無明을 끊고 初地에 들어가지만 이 처음의 無明을 또 三品으로 나누어 끊으므로 이것을 三品無明이라고도 한다. 圓敎에서는 初地 이상의 42階位에서 42품의 無明(모두 42無明이 있다 한다) 끊어 마치는데, 이 경우 제51等覺最後心에 의해 妙覺智 또는 佛智가 나타나고 이에 의해 끊어지는 最後無明元品無明·無始無明·最後品無明이라 한다. 다만 이것은 일반적인 로서 실은 圓敎에서는 三觀에는 순서와 차례를 세우지 않고 一心을 가지고 함으로 三惑은 동체로 동시에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 : 범어 dhatu의 번역으로 䭾都라 음역하며 · · 으로 번역한다. 一定不變하는 사물의 근본으로 차별과 支分 現象界所依 · 本體를 일컫는다. 體信 · 體達 · 體會의 뜻이 있다. 는 통달의 뜻. 곧 이치를 통달함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인다.

 

열혜(劣慧) : 塵沙惑本體. .....진사혹(塵沙惑)三惑의 하나. .....삼혹(三惑)3이라고도 한다. (1) 見思惑. 見道修道에서 끊는 見惑修惑을 말함. 見惑은 세상의 진리를 알지 못하여 일어나는 煩惱이고, 修惑은 모든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하여 일어나는 煩惱이다. (2) 塵沙惑. 塵沙란 많음을 비유한 말이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할 때에 마음이 어두워 한없이 많은 법문을 알아 자재로이 구제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3) 無明惑. 障中道惑이라고도 한다. 根本을 이루어 밝은 지혜가 없는 번뇌이다. 3가운데 見思惑聲聞·緣覺·보살이 함께 끊을 수 있는 것이므로 通惑이라 부르고, 塵沙惑無明惑은 보살만이 끊는 것이므로 別惑이라 한다.

 

유루(有漏) : 漏泄의 의미로 번뇌를 말함. 번뇌가 있는 것을 有漏라 하고, 없는 것을 無漏라 한다. 有漏는 또 有染 · 有染汚 · 有諍이라고도 한다. 染汚도 번뇌를 말함. 또 잘못된 견해를 내는 依處이기 때문에 見處라고도 한다. 有部에서는 번뇌를 隨增하는 것(곧 번뇌에 隨順하여, 번뇌를 增長한다)有漏法이라 하고, 그렇지 않는 것을 無漏法이라고 한다. 四諦중에서 苦集二諦諸法有漏法이고, 滅道二諦諸法無漏法이다. 有漏의 육체를 有漏身, 有漏境界(의 경계)有漏路라 하고, 無漏淸淨佛身無漏身, 無漏淸淨境界(의 세계)無漏路라고 한다. 많은 世俗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는 지혜를 有漏智라 하고, 四諦證見하는 見道이후의 聖者의 지혜를 無漏智라 한다. 見道에 이르기까지의 범부가 일으키는 有漏善이라 하고, 見道에 들어가서의 聖者가 일으키는 번뇌의 더러움이 없는 無漏善이라 한다. 有漏智를 가지고 행하는 세속의 행위를 有漏行, 有漏智를 가지고 닦는 六行觀有漏道라 하고, 無漏智를 가지고 닦는 四諦觀行 등을 無漏行, 無漏道라 한다. 有漏道를 가지고 번뇌를 끊는 것을 有漏斷, 無漏道를 가지고 번뇌를 끊는 것을 無漏斷이라고 한다. 有漏行人間 · 天上등의 五趣有漏果(有漏의 번뇌나 으로 해서 생긴 有漏果報. 人間 · 天上 35의 몸과 국토를 말한다)를 초래하기 때문에 有漏因이라 하고, 無漏行은 열반의 깨달음인 無漏果를 얻기 때문에 無漏因이라 한다. 凡夫六行觀을 닦아서 하는 四禪 · 四無色定 · 四無量心定 등의 禪定有漏定 · 有漏禪이라 하고, 聖者無漏智發得하는 禪定無漏定 · 無漏禪이라 한다. 無漏定無漏九地(未至定 · 中間定 · 四根本定 · 下三無色定)에 있어서 일어난다. 法相宗에서는 佛果淨識無漏識이라 하고, 佛果에 이르기 이전의 有漏識이라고 한다. 第六識 · 第七識初地入見道에서 1轉識得智하여 無漏識이 되고, 前五識第八識佛果에 이르러서 비로소 無漏識이 된다고 한다. 無漏의 깨달음의 본래 寂然無漏無爲라 하고, 그것이 작용하여 起動하는 無漏有爲라 한다.

 

() : 不善無記(不善도 아닌 것)를 더하여 三性이라고 한다. 현재 · 미래에 걸쳐서 自他에 이익을 주는 白淨이라 하고, 이에 하는 것을 不善()이라고 한다.

앞에 것을 , 뒤에 것을 이라고도 한다.

二善. (1) 有漏善無漏善을 일컬음. 有漏善이라 함은 번뇌의 더러움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世間으로, 이로 인하여 미래에 즐거운 果報를 받지만, 有漏善法性의 이치에 꼭 들어맞지는 않으며 차별적인 을 취해서 닦는 有相善이기 때문에, 그 의미로 相善이라고도 한다. 無漏善이라 함은 번뇌의 더러움과는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出世間으로, 이것에 의하여 미래의 과보를 받게 되는 수는 없다. 더욱 無漏善涅槃(이것도 마찬가지로 無漏善이다)의 깨달음을 얻는 데에 필수의 이다. (2) 止善(소극적으로 不善을 물리쳐 制止하는 것)行善(적극적으로 을 행하는 것)을 말함. (3) 定善(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하고 산란한 妄念을 그쳐서, 定心에 의해서 닦는 散善(산란한 마음, 곧 평상시의 마음가짐으로 을 그치고 을 닦는 것)의 일컬음.

世福 · 戒福 · 行福三福을 각기 世善(世俗善) · 戒善 · 行善이라고도 한다.

三善. 初善 · 中善 · 後善을 일컬음.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법화경의 序分 · 正宗分 · 流通分三分(三段)이라고도 한다.

四種善. 勝義善(涅槃을 말함)自性善(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인 것. 無貪 · 無瞋 · 無癡三善根· 2)相應善(自性善相應하는 것에 의해서 이 되는 · 心所)等起善(自性善과 상응하는 으로부터 引起)되어 이 되는 · 二業 · 四相 · 二無心定)을 일컬음.

四種不善. 四種善의 반대. 勝義不善 · 自性不善 · 相應不善 · 等起不善을 일컬음.

七種善. 生得善(先天的으로 가지고 있는 )聞善思善修善(이상의 3聞法思惟禪定의 노력의 결과로서 얻어진 이른바 加行得善)學善(有學位에서 일으키는 )無學善(無學位에서 일으키는 )勝義善(涅槃)의 일컬음. 이 가운데 前四見道(비로소 無漏智가 생기는 자리)에서 앞의 )때 일으키는 으로 有漏善이며, 後三見道 이후의 聖者가 일으키는 으로 無漏善이다(俱舍論光記卷二).

七善. 頓敎가 가진 7종의 . 時善(時節善이라고도 한다. 前出三善과 같은 것으로 序分 · 正宗分 · 流通分인 것) · 義善(의미가 深遠) · 語善(言語巧妙) · 獨一善(純一無雜) · 圓滿善(완전 圓滿) ·  調柔善(極端으로 편벽된 더러움이 없음) · 無緣慈善(淸淨無緣의 자비의 이 있음)<法華文句 卷七>.

十一善. 唯識宗에서 세우는 11心所. · · · 無貪 · 無瞋 · 無癡 · · 輕安 · 不放逸 · 行捨 · 不害의 일컬음.

기타 雜善(他力念佛에 대한 自力諸善), 雜毒(三毒 · · 의 번뇌를 섞인 凡夫), 世善(世俗善이라고도 한다. 有爲, 有漏善, 世福을 말함) 등이 있다.

 

무부무기(無覆無記) : 무기(無記)도 아니고 不善도 아닌 것. 등으로 기록할 수 없다는 뜻이다. 無記異熟果를 끌어들이지 않아서 異熟果(善惡의 과보)를 기록하지 않으므로 無記라고 한다도 있으나 이것은 有漏法에만 타당한 해석일 뿐 일반적인 은 아니다. 無記的無記法이라고 하고 이에 대해 또는 不善有記法이라고 한다. 無記有覆 · 無覆二無記로 나눈다. 有覆無記無記이므로 異熟果를 끌어들이지는 않지만 聖道를 덮어 씌워서 방해하고 마음을 가려서 不淨하게 하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上二界의 번뇌나 欲界의 번뇌에도 身見 邊見같은 것은 이에 해당하며 不善과 더불어 汚染性이 있는 것이다. 無覆無記淨無記라고도 하며 순수한 無記임을 뜻하며, 聖道를 덮어 가리거나 방해하거나 마음을 不淨하게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欲界無覆無記心을 넷으로 나눠 四無記라 한다. (1) 異熟無記異熟生心 · 報生心을 말한다. 前世業因에 의해서 招來果報로서의 을 말한다. (2) 威儀(또는 威儀路)無記威儀心 · 威儀路心을 말하며, · · · 등의 威儀動作을 일으키고 혹은 이것을 으로 하는 을 가리킨다. (3) 工巧(工巧處)無記工巧心 · 工巧處心을 말하며, · 工巧(工作 · 회화 · 詩歌)를 말하고 혹은 그것을 으로 하는 을 말한다. (4) 通果無記變化無記라고도 하고 能變化心 · 變化心 · 通果心을 말한다. 에 들어간 결과로서 얻은 神通自在한 작용을 일으키는 을 말한다. 다시 여기에 自性無記(山河大地와 같은 · · · )勝義無記(虛空非擇滅의 두가지 無爲法)등을 더하고 有覆無記를 합해서 七無記라고 한다. 唯識宗에서 모든 無記法能變無記(· 心所) · 所變無記(色法種子) · 分位無記(不相應行法) · 勝義無記의 넷으로 나누어 四無記라고도 하며, 成實論卷八에서는 無記法의 번뇌를 가르쳐 隱沒無記라 한다.

물음에 대하여 그 可否를 답하지 않는 것을 일컫는 경우가 있다. 外道로부터 열네가지 물음 곧 14에 대한 물음을 받고 釋尊은 말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고 하여 可否를 대답하지 않으셨는데 이것을 十四無記(十四不可記)라고 하며, 四記答 가운데 捨置記에 해당한다. 열네가지 問難이란 (1) 世界 (시간적으로 無限)인가, (2) 無常(시간적으로 有限)인가, (3) 이고 無常인가, (4) 無常도 아닌가, (5) 有邊(공간적으로 有限)인가, (6) 無邊(공간적으로 無限)인가, (7) 有邊인 동시에 無邊인가, (8) 有邊無邊도 아닌가, (9) 如來(여기에서는 중생을 의미한다)死後인가, (10) 인가, (11) 인 동시에 인가, (12) 도 아닌가, (13) 은 동일한 것인가, (14) 다른가의 열넷이 그것이다. 이상에서 (3)(4)(7)(8)을 빼고 四類十問을 열거하는 수도 있다.

 

소지장(所知障) : 唯識宗에서 세운 二障의 하나. 智障이라고도 함. · · 등의 번뇌가 객관(所知)의 진상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되므로  所知障이라 한다.

 

대승(大乘) : 摩訶衍那·摩訶衍이라 음역하며, 上衍, 上乘이라고도 한다. 은 타는 것이란 뜻이며, 迷惑此岸으로부터 깨달음의 彼岸에 이르는 敎法을 가리킨다.

阿含經에서는 불타의 가르침을 존중하여 大乘이라 했다.

대승·소승이란 말은 釋尊入滅 후 그 言行傳承을 중심으로 불교(原始佛敎)로부터 그 註釋的 硏究의 불교(部派불교)가 전개되는 것과 동시에 따로 보살도를 하는 불교(대승불교)가 또한 발달되었는데, 이때에 후자의 敎徒가 자신들이 받들고 있는 殊勝한 것으로 규정하여 대승이라 불렀으며, 전자를 낮추어서 小乘이라 이름하게 된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전자의 敎徒로부터는 대승은 부처님이 말씀한 가 아니라고 非難하는 이른바 大乘非佛說이 주장되었다. 그러나 思想史的으로 보면 小乘大乘敎學의 기초 내지 前驅라고 하는 의미를 갖는다.

소승은 자신의 解脫만을 목적으로 하는 自調自度(調는 번뇌를 制伏하여 없애는 것. 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聲聞·緣覺이며, 대승은 涅槃의 적극적인 의미를 인정하여 自利·利他兩面을 다 갖춘 보살의 도라 할 수 있다.

小乘에는 반야경·四分律·五分律 등의 , 婆沙論·六足論·發智論·俱舍論· 成實論 등이 있고, 대승에는 般若經·法華經·華嚴經 등의 中論·攝大乘論·大乘起信論 등의 이 있다.

대승이 殊勝한 이유로서, 菩薩善戒經 卷七등에서는 , 世親攝大乘論釋 卷六에서는 十一을 들고 있는데, 보살선계경에서 말하는 七大乘이란 十二部經 가운데 最上의 경인 毘佛略에 기초를 두고(法大), 菩提心을 일으켜서(心大), 그 교를 이해하고(解大), 청정한 마음으로(淨大), 보살의 복덕과 지혜가 몸에 나타나며(莊嚴大), 三大阿僧祗劫의 수행을 쌓아(時大), 마침내 相好를 갖추며 無上菩提를 얻는 것(具足大)이라고 했다.

印度의 대승에는 대략 中觀·瑜伽2系統과 밀교가 있다.

중국에서는 대승의 諸經論에 기초한 많은 敎派(三論·涅槃·地論·淨土··攝論·天台·華嚴·法相·眞言 등의 諸宗)가 있어서 각각 自宗의 우월한 점을 나타내기 위해 대승에 관한 종종의 구별을 세웠다. 예컨대 진언종에서는 顯敎·密敎, 華嚴宗이나 천태종에서는 대승(대승 가운데 方便에 해당하는 五性各別을 세운 대승(대승 가운데 眞實敎. 모든 중생이 成佛하게 된다는 가르침)등으로 나누어진다. 有相大乘·無相大乘2종대승, 혹은 法相·破相·法性3大乘으로 나누는 이 있다.

우리 나라·중국·일본의 불교는 전통적인 대승불교이며, 서장불교, 몽고의 라마교 등도 대승의 계통에 속한다. 미얀마·태국·스리랑카 등의 불교는 대승교도로부터 고래로 小乘으로 불리워 온 계통에 속하는 불교다.

천태종에서는 小乘에는 經律論三藏이 확실히 구별되어 갖추고 있는 점에 비추어 小乘敎三藏敎(藏敎)라 일컫는다.(화엄종에서는 小乘敎라 이름한다). 또 천태종에서는 小乘 가운데 有門(發智論·六足論 )空門(成實論), 그리고 亦有亦空門(毘勒論, 이 논은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음)非有非空門[迦旃延經(가전연경), 중국에 들어오지 않았음四門이 있다고 하고 이것을 小乘敎四門 또는 小乘四分이라고 했다.

智顗(지의)金光明玄義에는 理乘(모든 存在本質眞如 理性隨乘(對象隨應해서 작용하는 智慧得乘(스스로 깨달음을 얻음과 동시에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는 證果)三大乘했는데 이것은 順次眞性·觀照·資成三軌에 해당시킨 분류다. 起信論에는 大乘本體衆生心이라고 記述하고 있다.

 

유부(有部) : 설일체유부의 약칭. 소승종의 일파. 범어 음역은 薩婆多. 有爲 · 無爲의 일체법이 모두 實有에서 세웠기 때문에 설일체유부라고 말한 것이다. 불멸후 300년 초에 상좌부에서 분립된 것임.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 20의 하나. 聖根本說一切有部·薩婆多部·說因部· 因論先上座部·一切語言部·有部라고도 한다. 佛滅 3백년경 迦多衍尼子가 새 교리를 주장함에 대하여 舊風上座들이 雪山에 있으면서 雪山部를 세움에 迦多衍尼子를 중심으로 하여 마침내 한 를 이루어 說一切有部라 부르다. 我空法有三世實有法體恒有의 뜻을 세우고, 또한 一切 萬法575으로 나누었다. 소승 20가운데서 가장 뛰어났으며, 大毘婆沙論發智論·六足論 등은 說一切有部敎理를 서술한 것이며, 俱舍論도 대부분 이 교리를 밝히고 있다.

 

성문(聲聞) : 소리를 듣는 사람이란 뜻으로 제자라고도 번역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을 가리킨다. 원래는 佛在世時의 제자를 말하지만 緣覺 · 菩薩에 대해 二乘 · 三乘의 하나로 열거할 때는 부처님의 敎說에 따라 수행을 하지만 자기 혼자만 해탈하는 것을 목적하는 出家聖者를 뜻한다. 佛敎徒 가운데 성질 · 능력이 얕은 下根機 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쌓아 四妙門果를 깨닫고 마침내는 心身을 다 滅盡하여 灰身滅智無餘涅槃에 들어가는 것을 목적하는 사람들의 뜻이다. 성문을 위한 聲聞乘, 그 교를 설한 經典聲聞藏이라 한다. 聲聞乘緣覺乘과 같이 소승에 속한다. 법화경 卷二에는 성문이 마음을 바꾸어서 대승으로 轉向하는 경우, 이를 聲聞이라 칭하는 것은다른 사람을 제도하고자 가르침을 다른 사람에게 설하여 들려주는 사람이란 뜻이다라고 하며 이것을 大乘聲聞(佛道聲聞)이라 부른다.

世親法華論 卷下에는, 성문을 넷으로 분류했다.

(1) 소승에 처음부터 끝까지 관계를 같이하는 決定성문,

(2) 人無我에 집착함으로 성문에 만족하여 慢心을 일으키는 增上慢성문,

(3) 대승에 뜻을 두었으나 바꾸어 성문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대승으로 향하는 退菩提心성문,

(4)  ·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거짓으로 성문이 되어 나타난 應化성문이다. 法華玄論 卷四에는 여기에 다시 佛道성문을 넣어서 五種성문이라 한다.

 

아라한(阿羅漢) : 범어 arhan音譯. 이것은 男性, 主格, 單數이니, 原形arhat. 阿羅訶· 阿囉呵·阿盧漢·遏囉曷帝라고도 쓰고, 하여 羅漢·囉呵라고도 한다. 應供··殺賊·不生·無生·應眞·眞人이라고 번역한다. 보통 狹義로 풀이하여, 小乘불교에 있어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이를 가리킨다고 하는데, 廣義로는 大乘·小乘을 통하여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應供이라 함은 供養을 받는데 응하는 이, 相應한 이, 공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이라는 의미인데,供養云云補足한 말로,은 확실히 이 말의 번역이다. 應供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大應供이라 하고, 보통 佛陀異名이다. 殺賊이라 함은, 번뇌의 을 죽였다는 의미이며, 不生 또는 無生이라 함은, 영구히 열반의 깨달음에 들어가서 다시 미혹의 세계에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이들 두 번역은 原語語義에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다. 이를 應供·殺賊·不生三義阿羅漢三義라고 한다.

如來十號의 하나. 이 경우는 佛陀異名.

四沙門果. 聲聞四果중에서는 최후의 자리. 여기에 다시 를 나눈다. 해서 수행하고 있는 사이가 阿羅漢向이고, 확실히 그 에 도달한 때가 阿羅漢果이다. 阿羅漢果聖者已達大德이라 한다. 이것은 최후의 理想세계로, 여기에 도달하면 모든 것을 다 배워서 다시 더 배워야 할 一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無學 또는 無學果라 하고, 無學正見 내지 無學正定八聖道無學解脫·無學正智10종의 無漏法을 완성한다고 한다. 이것을 十無學支라고 한다.

俱舍論25에 의하면 아라한을 6종으로 분류해서, 6종 아라한을 세운다. ,

(1) 退法(또는 退相) 아라한(이미 얻은 아라한의 깨달음으로부터 退失하기 쉬운 사람).

(2) 思法(또는 死相) 아라한(退失이 두려워서 自害하려고 생각하는 사람).

(3) 護法(또는 守相) 아라한(退失하지 않으려고 防護하는 자).

(4) 安住法(또는 住相) 아라한(防護하지 않더라도 대개는 退失하지 않지만 또한 增進하기도 어려운 자).

(5) 堪達法(또는 可進相) 아라한(增進해서 빨리 다음의 不動法을 통달하는 자).

(6) 不動法(또는 不壞相) 아라한(전혀 退失하지 않는 자). 이들 중에서 앞의 5는 성품이 遲鈍한 자(鈍根)時解脫이라고도, 時愛心解脫이라고도 하고, 뒤의 1은 성품의 예리한 자(利根)不時解脫이라고도, 不動心解脫이라고도 한다. 또 아울러서 2羅漢이라고 한다. 時解脫은 좋은 이 있는 때를 기다려서 에 들어가 번뇌를 해탈하는 자, 不時解脫은 때를 기다리지 않고 入定하여 해탈하는 자, 時愛心解脫은 이미 얻은 아라한의 깨달음을 항상 애호해서 번뇌를 해탈하는 자, 不動心解脫은 번뇌 때문에 아라한의 깨달음에서 退失하지 않고 해탈하는 자를 의미한다. 不動法아라한 중에서, 본래 利根(예리한 성격자)不退()(또는 不退相) 아라한이라 하고, 수행의 힘에 의해서 不動法아라한에 나아간 자를 不動法아라한이라고 하여 둘로 나누고, 이것을 앞의 5에 더해서 7종 아라한이라고 하며, 不動法아라한을 不動아라한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다시 緣覺을 더하여 9종 아라한 또는 九無學이라고 한다.

成實論 , 中阿含經 十三에는, 緣覺·대신 慧解脫·俱解脫을 더한 또 다른 형의 9종 아라한(九無學)하고 있다. 그 중 慧解脫은 지혜의 힘에 의해 번뇌를 해탈한 아라한을 말하고, 俱解脫慧解脫人이 다시 滅盡定을 얻은 경우를 말한다. 이것을 俱解脫이라고 일컫는 것은, 滅盡定을 얻은 것이 心解脫을 의미하고 있고 따라서 마음과 ()해탈을 얻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慧解脫俱解脫2羅漢이라 하고, 여기에 無疑解脫을 더하여 3羅漢이라고 한다. 無疑解脫이라 함은, 俱解脫 중에서 일체의 文義에 통달하여, 四無礙解를 얻은 자를 말함.

天台宗에서는 아라한이 不淨觀을 닦는 경우 그 對境의 차이를 따라 壞法·不壞法2羅漢으로 나눈다.

 

연각(緣覺) : 범어 pratyeka-buddha(各自가 깨닫다는 뜻)의 번역. 獨覺이라고도 번역하고, 辟支佛音譯. 불타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를 깨달은 이로, 寂靜한 고독을 좋아할 뿐 說法敎化하지 않는다고 하는 일종의 聖者. 聲聞과 같이 二乘의 하나. 聲聞 · 보살과 같이 三乘의 하나.

여기에 部行獨覺麟角喩獨覺(麟喩獨覺)2종의 獨覺이 있다. 앞의 것은, 먼저 聲聞이었을 때에 不還果까지를 얻은 사람이, 4阿羅漢果證得할 때, 불타의 敎導를 받지 않고 홀로 스스로 깨닫는 것을 말하고 뒤의 것은 獨居하여 百大劫동안 깨달음을 위한 善根功德을 쌓아 홀로 깨닫는 자를 말한다. 여기에 部行이라 함은, 聲聞이었을 때에 많은 部黨을 조직하여 단체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이름하고, 麟角喩라 함은 기린의 한 뿔에 비유해서 처음부터 伴侶가 없는 獨住者임을 가리킨다.

緣覺은 다만 自利만이 있고 利他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大悲心을 가지고 중생을 구원하는 일이 없고, 따라서 佛果에 이르지 못한다. 이것을 獨覺捨悲障이라고 한다.

緣覺으로서의 階位辟支佛地, 약하여 支佛地라 부르고, 通敎十地(三乘을 통하여 10으로 나눈 佛子階位)의 제8에 자리()하고, 支佛地 자체도 十地에 분류된다.

특히 이것을 緣覺이라 번역하는데 대해서 大乘義章 卷十七에는, 十二因緣을 깨달기 때문에, 또 바람이 나무를 움직인다(飛花落葉)등의 外緣에 의해서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오늘의 학자 사이에는 아마도 緣覺의 번역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현행(現行) : 有爲諸法(모든 것)이 현재에 나타나서 나오는 것. 有部宗에선 모든 법은 雜亂하게 하고 있는 미래라는 영역에서 인연의 화합으로 現行한다고 생각한다. 유식종에서는 아뢰야식으로 일체의 것으로 생기는 능력이 있다고 보고, 種子라 한다. 이 종자에서 모든 것이 생기는 것, 혹 그렇게 생긴 (現行法)現行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인연의 화합에 의하여 아뢰야식이 갖고 있는 종자가 現行하는 것을 種子生現行이라고 한다. 다음에 그 현행법은 반드시 새로운 種子(新熏種子)를 아뢰야식 위에 熏附하여 저장한다. 이것을 現行熏種子라고 한다. 먼저 종자와 현행법과 신훈종자와의 세 가지에 있어서 현행법은 현행법대로 신훈종자를 하므로 種子生現行現行熏種子와의 因緣果는 동시에 행해진다. 이것을 三法展轉 因果同時라고 한다.

 

불타(佛陀) : 범어 Buddha. 浮圖 · 浮屠 · 部陀 · 浮頭 · 勃䭾 · 母䭾 · 沒䭾라고도 음역. 意譯하면 깨달은 사람(覺者)이라 하고 줄여서 이라고 함.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부처라고 하여 왔다. 특히 불교인들의 완전한 용어로는부처님이다.

즉 불타께서는 B.C. 6세기경에 인도 카필라국에서 출생하시어 태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일체의 번뇌를 끊고 우주의 참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위해 설법하였던 석가세존을 존경하는 말이다. 그러나 불타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불타 즉 부처는 석존 한 분에게만 국한된 절대적인 명칭은 아니다. 불타는 一切法, 즉 우주 만법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서 더할 수 없는 진리를 체득한 大聖者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러한 대성자가 석존이시기 때문에 불타라고 한다. 이러한 부처의 이름은 여러 가지가 있어서 경전에 따라서는 60가지, 108가지, 또는 270가지나 있다. 그러나 佛陀觀은 시대와 종파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초기 석존의 시대에는 불타라 하면 석존을 가리켰고, 그 제자들에게 있어서 불타는 오직 석존 한 분 뿐이었다. 그러다가 후에 대승불교 시대에 이르는 동안 불타관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불타는 보통사람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德相 즉 신체적 특징인 3280種好를 갖추고 정신적인 특수성으로서의 덕성인 十力 · 四無畏 · 三念住 · 十八不共法을 성취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타는 生身 · 法身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부처의 肉身生身佛이라 하고, 그 부처가 얻은 그리고 그 부처의 본성인 진리()法身佛이라 하여, 2,500여 년 전에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역사적 불타인 석존은 생신(肉身)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타라고 할 때에는 보통 법신불을 말하는데, 이 법신불은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는 상주불멸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佛身觀에 의하여 三身說(法身 · 報身 · 化身)이 나타났다. 실제에 있어서 불타로서 인류 역사상에 나타나기는 오직 석존 한 분 뿐이지만, 많은 불교성전에는 석존의 이전에 이미 毘婆尸佛 · 燃燈佛 등 과거의 부처와 미륵불 등 미래의 부처와 그리고 阿閦佛 · 阿彌陀佛 등 현재의 부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으시다. 이와 같이 많은 부처님들은 모두 역사상의 불타이신 석존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서, 즉 과거의 여러 부처들은 석존이 因位에 있어서 수행을 쌓을 때 받들어 공양하고 또는 授記를 얻는 데에 관련이 되고, 또 장래의 부처인 미륵불을 비롯한 미래의 많은 부처들은 석존께서 이미 세상을 떠나셨으나 그 실제의 몸은 오히려 온 세계에 나타나서 교화를 쉬지 않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부처가 출현하지만 이는 모두 하나의 큰 법신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ㄹ~ㅁ(리을~미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질애(無質礙)   (0) 2018.07.01
무아수(無我修)  (0) 2018.06.28
마등가선인(摩蹬伽仙人)  (0) 2018.06.27
맺힘을 푸는 일(불교성전)  (0) 2018.06.23
무승국(無勝國)  (0) 2018.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