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유정(無性有情)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唯識宗에서 세운 五性各別의 하나. 人天乘性이라고도 한다. 佛性을 가지지 않은 有情(살아 있는 것)이란 뜻. 佛性이 없는 種性을 말함. 無漏智의 종자가 아주 없어져서 佛果나 성문 · 연각은 영원히 될 수 없고 生死界에 윤회하며 겨우 五戒나 十善戒를 닦아서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것으로서 그 極果를 삼는 중생을 말함.
참고
유식종(唯識宗) : 法相宗 · 應理圓實宗 · 普爲乘敎宗 · 唯識中道宗 · 中道宗이라고도 하며, 이 宗의 所依經典은 解深密經 · 成唯識論 · 瑜伽師地論이다. 佛滅 후 1천년경 북인도 사람인 無着과 世親이 세우고, 중국에서는 인도의 戒賢論師에게 법을 배운 玄奘이 窺基에게 전하다. 窺基는 慈恩寺에서 주석하였으므로 慈恩宗이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의 圓測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玄奘에게 瑜伽論과 唯識論을 배우고 唯識疏抄를 저술하였다. 또한 경덕왕 때에는 眞表律師가 金山寺에서 戒法과 占察法을 수행하고 법상종의 宗旨를 寶宗 · 永深 · 信芳 등에게 전하여 法住寺와 桐華寺에서 크게 성하였다. 이 宗은 우주 만유의 本體보다도, 현상을 자세히 분류 설명하였으므로 법상종이라 하고, 유식종이라 함은 일체 萬有는 오직 識이 변해서 이루어 진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불교의 唯識論으로서 萬有는 오로지 아뢰야식으로 緣起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 緣起의 本體인 能變의 처음은 제 8識이요, 2能變은 제 7識, 3能變은 通 6識이라 하고, 이것들은 모두 內心으로 外境을 變現하는 것이므로 三界唯一心과 心外無別法이라 말한다.
萬有를 분류하여 五位百法으로 정하며, 만유의 진정한 理 · 事 · 迷 · 悟를 밝히기 위하여 遍計所執性 · 依他起性 · 圓成實性의 3性을 말한다. 識이 外境을 인식하는 과정에 나아가서는 이것을 4分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萬法唯識의 이치를 깨달아 알게 하는 방법으로 5重唯識觀을 세웠다. 중생의 해탈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중생의 성품에는 선천적으로 菩薩定性 · 緣覺定性 · 聲聞定性 · 三乘不定性 · 無性有情의 5性이 각각 다르므로 영구히 해탈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 宗의 三乘敎만이 옳고, 다른 종파의 一乘敎는 假說이라 하므로 이 宗을 權大乘이라 부른다.
오성각별(五性各別) : 五種姓 · 五種種姓 · 五種乘姓 · 五乘種性이라고도 하고, 姓字는 性으로도 쓴다. 法相宗에서는, 중생이 선천적으로 갖추고 있는 성질, 素性에 5종이 있고, 그것은 본래적으로 阿賴耶識중에 가지고 있는 本有種子에 의해서 결정되고,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이라 하여, 五姓各別의 說을 세운다. 五姓(五性)이라 함은 菩薩定姓(定性菩薩) · 獨覺定姓(定性緣覺) · 聲聞定姓(定性聲聞) · 三乘不定姓(不定種性) · 無姓有情(無種性)의 다섯으로, 이 중 앞의 3은, 각기 佛果 · 辟支佛果 · 阿羅漢果를 얻는데 정해진 決定性이고, 제2·제3을 합쳐서 定性二乘이라고 한다. 제4는 보살 및 독각·성문의 三類의 本有種子를 아울러 갖추고, 二乘의 수행을 한 뒤 大乘에 轉向해서 佛果를 깨닫는 등, 果가 결정적이 아닌 것으로, 여기에는 三乘의 전부, 혹은 보살 · 독각의 2, 보살 · 성문의 2, 성문 · 독각의 2의 종자를 갖춘 4종류의 구별이 있다. 제5는 영원히 迷界에 빠져서 苦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고, 겨우 五戒·十善의 善因을 닦아서 人이나 天에 태어날 수가 있게 된다. 이 五姓各別의 說은 楞伽經 권二와 解深密經 권二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이 입장에서 보면, 법화경 등과 같이 모든 중생이 다 成佛할 수 있다고 하는 說에 대해, 그것은 不定性인 자를 인도하여 大乘에 들어가게 하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 說이라고 해석한다.
인천승성(人天乘性) : 人天敎라고도 한다. (1) 人乘과 天乘. 인간의 道와 하늘의 道. 五乘중의 둘. (2) 불교의 수행에는 들어가지 못함.
불성(佛性) : 범어 buddha-dhatu. 또는 gotra의 번역으로 如來性, 覺性이라고도 한다. 불타의 本性이란 뜻. 佛陀가 될 가능성·因性·종자, 혹은 迷·悟에 의하여 변하는 일이 없이 본래 갖추어진 性品. 如來藏의 다른 명칭이라고도 한다.
北本 涅槃經 卷九에는 이마의 구슬(額珠)에 비유(力士가 씨름을 하다가 眉間에 있던 구슬이 피부속에 들어 박힌 것을 잃어버린 줄로 잘못 알고 있다가 나중에 의사가 이 사실을 알려 줌으로 구슬을 잃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비유. 또는 거울에 비추어 봄으로 귀중한 보배구슬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되는 비유)를 써서 중생들이 본래부터 佛性이 있지만(一切衆生悉有佛性) 범부들은 번뇌에 뒤덮여서 알지 못하고 번뇌를 끊어야 불성이 나타난다고 한다.
① 阿含이나 小乘에서는, 불·보살 이외의 成佛을 말하지 않으므로 佛性은 거의 문제로 삼지 않았다. 그러나 世親의 佛性論卷一에 의하면 有部 등에서는 중생에게는 先天的인 性得佛性은 없지만, 後天的으로 修行을 해서 얻는 修得佛性은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決定無佛性·有無不定·決定有佛性의 세 종류로 중생을 나누며, 이에 대해서 分別部에서는 空을 佛性으로 하고, 모든 중생은 空을 바탕으로 하여 空에서 생긴 것이므로 다 그 本性으로서 佛性이 모두 있다고 전한다.
② 佛性論卷一에는 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고 말씀한 것은 불타가 중생으로 하여금 나 자신은 용렬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버리게 하는 등의 다섯 가지 과실을 없애고 부지런히 佛道에 정진하는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는 등 다섯 가지의 功德을 베풀어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또 同書卷二에는 佛性을 自性住佛性(凡夫의 位에서는 오직 理로서 있는 것)·引出佛性(初發心으로부터 成佛직전의 金剛心에 이르기까지 점차로 修行해서 나타나는 것)·至得果佛性(佛果에 이르러서 원만하게 나타나는 것)의 三位로 나누고 있다.
③ 중국·한국·일본의 諸宗에서는 각기 여러 가지 說이 있어, 서로 論雜했다.
(1) 天台宗에서는 正因佛性(모든 것에 본래 갖추어 있는 三諦 三千의 理)·了因佛性(이치에 비추어 나타나는 지혜)·因緣佛性(지혜를 일으키는 緣이 되는 모든 善行)의 正了緣의 三因佛性의 說을 세워 이 중 前一은 性(선천적), 後二는 修(후천적)이긴 하지만, 性修不二이므로 그대로 융합되어서, 三佛性은 非縱非橫(前後하여 繼起하는 것도 아니고 並列同時的인 것도 아니다)이라고 한다. 또 이 三因佛性에 果性(菩提의 智慧)·果果性(涅槃의 斷德)을 더하여 五佛性이라고 한다. 因果不離이므로 因位·果位가 서로 갖추어 합쳐진다고 한다.
(2) 華嚴宗에서는 중생의 佛性은 因果性相의 모든 것을 원만하게 갖추었다고 하고 또 有情이 갖추고 있는 成佛의 가능성을 佛性·覺性이라고 하고, 非情이 가지고 있는 眞如의 理를 法性이라고 구별하여 成佛을 有情에 국한한다고 하기도 한다.
(3) 眞言宗에서는 삼라만상이 그대로 大日如來의 法身이라고 하여, 그런 의미에서 悉有佛性을 말한다.
(4) 三論宗에서는 佛性에 관한 여러 가지 論이 있어서 因果를 따로 說하는 것을 迷執이라고 하여 廢하고, 非因非果의 無所得 中道를 佛性이라 했다.
(5) 法相宗에서는 理佛性(모든 것의 本體인 眞如의 理)·行佛性(사람마다 阿賴耶識 가운데 숨겨져 있는 成佛의 因이 되는 無漏種子)의 二佛性說을 說하고, 理佛性은 있어도 行佛性이 없으면 成佛할 수 없다고 하여, 菩薩定姓과 不定姓이라야만 行佛性이 있다고 했다.
(6) 禪宗에서는 중생 본래의 면목을 깨닫는 것으로, 佛性의 有無 등의 문제에 구애되는 것을 否定하는, 狗子佛性 등의 公案이 있다.
(7) 淨土敎에서는, 理佛性을 인정하는 주장과 否定하는 주장이 있는 등 종종의 說이 있는데, 往生은 彌陀의 本願力에 의한다고 하여 淨土宗에서는 이런 의미로 如來가 중생에게 준 信心을 佛性으로 하고 있다.(信心佛性)
④ 諸經典에서는 佛種·佛種性 등의 말이 있고, 成佛의 因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 내용은 說하는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佛性을 말하는 때도 있고 번뇌·보리심·보살의 수행·稱名 등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유정(有情) : 薩多婆 · 薩埵라 音譯하고, 중생이라고도 번역한다. 生存하는 자란 뜻. 有情이라 함은 마음(情識)을 갖는 살아 있는 것을 말하고, 여기에 대해서 草木 · 山川 · 大地 등은 非情(非有情 · 無情)이라고 한다. 그러나 成唯識論述記 卷一에는, 중생이라 함은 有情 · 非情을 아울러서 하는 말이라고 했다.
종성(種性) : 범어 gotra의 번역으로 種姓이라고도 쓴다. 聲聞 · 緣覺 · 菩薩 등의 三乘이 각각의 깨달음을 開得하는 種이 되는 본래적 素性·素質을 말한다. 여기에는 선천적으로 갖추어 가지고 있는 경우와 후천적인 修行에 의해서 얻는 2종의 種性이 있다. 전자를 本性住種性(약하여 性種性)이라 하고 후자를 習所性種性(약하여 習種性)이라 한다. 有部 등의 部派에서는 중생이 선천적으로 갖추어 가지고 있는 이른바 性得의 佛性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후천적으로 이른바 修得의 佛性만을 인정한다. 또 대승의 法相宗에서는 五性이 선천적으로 구별되어 있다고 하여 性種說을 설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또 별도의 習種性을 설하는데, 이것은 護法의 學流에 속한다. 곧 種性이 선천적인 것인가, 후천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唯識宗 그 가운데도 異說이 보이고 있으니, 成唯識論卷二에 의하면, 種子에 대한 견해의 相違로부터, 護月은 本有性種性(선천적)만을, 難陀는 新熏習種性(후천적)만을, 護法은 兩方을 다 인정하는데, 法相宗에서는 이 護法說을 따른다. 이에 반해서 천태종 · 화엄종 등에서는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佛性을 갖추고 있다고 설한다. 또 三乘의 種性을 가지고 마침내 三乘의 果에 이르게 되는 有種性(有性)과 아무리해도 迷惑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無種性(無性)의 二種性으로 나누고도 있어서 五性의 구별을 하는 唯識宗에서는 이것을 인정하고 無性有情의 존재를 허용하고 있다. 또 種性의 의미를 轉用하여 보살의 階位를 보이기도 한다. 곧 仁王般若經卷上에는 習種性·性種性·道種性의 三種性을 세워서 차례로 보살의 十信心·十住心·十堅心에 배당했으며, 瓔珞本業經卷上에는 習種性·性種性·道種性·聖種性·等覺性·妙覺性의 六種性을 세워서 순차로 보살의 十信·十住·十行·十廻向·十地·等覺·妙各의 階位에 배당했는데, 이 가운데 妙覺性을 제외하고 五種性이라 한다. 또 大集經卷八 등에는 凡夫性·信行性(善知識의 가르침을 듣고 믿어서 그대로 수행하는 三賢位)·法行性(선지식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佛陀의 설하신 법에 따라 修行하는 것, 四善根位)·八忍性(八忍七智를 갖춘 것, 見道位)·須陀洹性·斯陀含性·阿那含性·阿羅漢性·辟支佛性·佛種性의 十種性을 說하고 있다.
무루지(無漏智) : 眞理를 더욱 자라게 하고, 모든 번뇌의 허물을 여읜 淸淨한 지혜를 말함. 小乘에서는 四諦의 이치를 證한 지혜라 하여 法智와 類智의 두 가지를 세우고, 大乘唯識에서는 無漏智에 根本智와 後得智의 두 가지를 세운다. 根本智는 唯識의 性인 眞如의 이치를 證得한 無分別智를 말하고, 後得智는 그 根本智에서 나와 唯識의 相인, 因緣으로 일어난 모든 萬象을 아는 지혜이다.
종자(種子) : ① 穀類의 싹이 종자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物 · 心의 모든 존재 현상을 나게 하는 因種을 가리키는 말. 또 種이라고도 하며 곡류등의 종자를 外種 또는 밖의 種子(外種子)라고 하는데 대해, 唯識宗에서는 같은 이치로 우리의 마음의 종자가 아뢰야식 가운데 藏識(감추어져 있음)되어 있다고 하여 이것을 內種 또는 內種子라고 한다. 이 內種子는 生果의 功能(결과를 내는 작용)을 가리키며, 이것은 現行의 諸法(현재 나타나서 작용하는 모든 현상)에 의해서, 흡사 향을 담았던 상자에 향내가 배어서 나는 것처럼 아뢰야식 가운데 熏習되어 있는 일종의 慣習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習氣라고도 한다. 이 種子說은 하나의 비유로 阿含經에 보이며, 部派佛敎 당시에는 化地部에서 窮生死蘊의 識 가운데 物心의 種子가 항상 존재한다는 說을 세운바 있으며, 經量部에서는 色法(물질)과 心法(정신)이 상호 種子로서 다른 것(相體)을 熏附(서로 영향하고 相依함)하여 보존한다고 하여 色心互熏說을 세우기도 했다.
② 唯識宗에서는 種子는 아뢰야식 가운데 藏在해 있다고 하며 그 관계를 成唯識論 卷二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뢰야식은 體, 種子는 用, 혹은 아뢰야식은 果, 種子는 因이라고도 하며 또 그 관계는 不一不異라고 하고, 또 種子는 아뢰야식의 相分[四分→相分(주관적인 心에 인식되는 객관의 형상), 見分(相分을 인식하는 주관의 心작용), 自證分(自體分이라고도 하며 見分과 다음의 證自證分과를 證知하는 인식작용), 證自證分(自證分을 다시 證知하는 인식작용)] 가운데 존재한다고 한다.(단, 이상은 有漏種子에 대한 해석임). 또 同卷二에서, 種子는 다음의 여섯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여 이것을 種子六義라고 했다. 곧 (1) 刹那滅. 不動不變의 無爲法이 아니라 生滅變化하는 有爲法일 것. (2) 果俱有. 種子로부터 생긴 現行 곧 果를 여의지 않고 존재하는 것. 다시 말하면 果가 발생하는 현상과 반드시 동시에 존재하며 現前에 和合하여 떨어지지 않는 것. (3) 恒隨轉. 항상 간단 없이 轉起하여 一類相續하는 것. (4) 性決定. 種子를 熏附한 現行의 善惡을 따라서 그 種子로부터 생긴 現行의 善惡을 결정하여 索亂하지 않은 것. (5) 待衆緣. 많은 緣이 和合하는 것을 기다려서 비로소 種子가 現行을 내는 것. (6) 引自果. 色 · 心이 각각의 自果를 따로 따로 引生하는 여섯. 種子가 어떻게 하여 일어났느냐 하는데 대해서는 本有說(護月의 說) · 新熏說(難陀 · 勝軍의 說) · 新舊合生說(護法의 說)의 三說이 있어서, 이것을 주장하는 學流를 각각 本有家 · 新熏家 · 新舊合生家라고 일컫는데, 法相宗에서는 第三說을 옳다고 한다. 곧 種子에는 無始이래로 아뢰야식 가운데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本有種子(本性住種)와 후천적으로 現行의 諸法에 의해 熏附된 新熏種子(習所成種)가 있어서 이 2種의 種子가 합하여 現行法으로서의 모든 現象을 낸다고 한다. 다만 見道에 이르러 처음으로 無漏智를 내는 것은 本有無漏種子에 의한다고 하고, 또 五姓의 차별을 일으키는 것을 이 本有無漏種子의 種別이나 그 有無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本有說에 있어서는 本有種子만을 세워서 新熏種子를 인정하지 않고 現行의 熏習이 新熏種子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本有種子를 增長할 따름이라고 주장하는데 대해, 新熏說에서는 新熏種子만을 인정하고 本有種子를 인정하지 않는다. 일반으로 菩提의 因인 無漏種子의 2종의 種子가 있어서, 有漏種子에는 또 名言種子와 業種子의 2종의 種子가 있다. 名言種子는 名言(言語的表象)에 의해서 아뢰야식 가운데 熏附된 種子로서 物 · 心 일체의 현상이 현재에 나타나서 작용하는(現行의) 직접의 因이 되는데, 여기에 또 2種이 있다. 表義名言種子는 의미를 나타내는 言語(곧 表義名言)를 第六意識이 반연하여(곧 인식하여) 그 언어에 따라 諸現象을 變現할 때 熏習되는 種子를 말하며, 顯境名言種子는 心 · 心所法인 前七識의 見分(主觀)등 (곧 顯境名言)이 對境을 반연할(곧 인식)지음에 熏習된 種子를 가리킨다. 心 · 心所法이 名言은 아니지만 名言이 각각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처럼 心 · 心所가 對境을 變現하므로 顯境名言이라 한다. 대저 名言種子는 種子와 같은 종류의 現行(現象)을 생기게 하므로 等流習氣라고도 한다. 다음에 業種子는 능히 異熟(果報)을 내는 직접적인 因인 名言種子를 도와서 善惡業에 따른 異熟을 생기게 하는 작용이 있는 種子로서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善惡의 思(意志의 정신작용인 業의 體)에 의해서 熏附된다. 異熟은 無記이므로 異熟을 내는 名言種子는 無記이며 따라서 스스로 現行하는 힘은 없지만 善惡의 業種子의 힘이 강하면 그것이 增上緣이 되어 異熟을 生한다. 그러므로 業種子를 異熟習氣라고도 한다. 또 名言種子 가운데 我執에 의해서 熏習되고 그것에 의해서 自他의 차별을 감지하고 迷惑의 바탕인 我見 · 我所見을 일으키는 種子를 특히 我執習氣라 한다. 我執習氣 · 名言習氣 · 有支習氣(業種子에 해당)를 三種習氣라고 한다. 또 山河大地처럼 많은 有情에 공통한 환경을 내는 名言種子를 共相名言種子(共種子)라고 하는데 대해, 육체처럼 그 사람만이 받아 가지고 쓰는 것을 일으키는 種子를 不共相名言種子(不共種子)라고 하며, 이런 名言種子가 現行을 내기 위해서는 共業 · 不共業의 業種子의 도음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③ 種字라고도 쓰는 경우가 있다. 곧 密敎에서는 불 · 보살등의 諸尊을 表象하는 梵字를 가리킨다. 이것을 種子라고 하는 것은 一字에서 多字를 生하고 또 多字는 一字에 歸結됨을 뜻하는 말. 혹은 種字를 관하면 佛智를 깨닫고(了因), 種字로부터 三昧耶形등을 일으키며(生因), 種字는 본래의 性德이고 軌範으로서 모든 事物의 근원인 本有란 뜻이 있으며 여러 諸尊의 眞言의 一字를 사용한다. 예컨대 胎藏界의 大日如來의 種字를 अ(아)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一尊에의 種字 밖에 1類의 諸尊에 통하는 通種字도 있다. 種字만을 쓴 曼茶羅를 種字曼多羅, 種字에 의해서 觀行하는 것을 種字觀이라고 한다.
불과(佛果) : 修行한 因으로 하여 極果에 이르는 부처님의 지위.
성문(聲聞) : 소리를 듣는 사람이란 뜻으로 제자라고도 번역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을 가리킨다. 원래는 佛在世時의 제자를 말하지만 緣覺 · 菩薩에 대해 二乘 · 三乘의 하나로 열거할 때는 부처님의 敎說에 따라 수행을 하지만 자기 혼자만 해탈하는 것을 목적하는 出家의 聖者를 뜻한다. 佛敎徒 가운데 성질 · 능력이 얕은 下根機 또 四諦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쌓아 四妙門果를 깨닫고 마침내는 心身을 다 滅盡하여 灰身滅智의 無餘涅槃에 들어가는 것을 목적하는 사람들의 뜻이다. 성문을 위한 敎를 聲聞乘, 그 교를 설한 經典을 聲聞藏이라 한다. 聲聞乘은 緣覺乘과 같이 소승에 속한다. 법화경 卷二에는 성문이 마음을 바꾸어서 대승으로 轉向하는 경우, 이를 聲聞이라 칭하는 것은「다른 사람을 제도하고자 가르침을 다른 사람에게 설하여 들려주는 사람이란 뜻이다」라고 하며 이것을 大乘聲聞(佛道聲聞)이라 부른다.
연각(緣覺) : ① 범어 pratyeka-buddha(各自가 깨닫다는 뜻)의 번역. 獨覺이라고도 번역하고, 또 辟支佛로 音譯. 불타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道를 깨달은 이로, 寂靜한 고독을 좋아할 뿐 說法敎化하지 않는다고 하는 일종의 聖者. 聲聞과 같이 二乘의 하나. 또 聲聞 ․ 보살과 같이 三乘의 하나.
② 여기에 部行獨覺과 麟角喩獨覺(麟喩獨覺)의 2종의 獨覺이 있다. 앞의 것은, 먼저 聲聞이었을 때에 不還果까지를 얻은 사람이, 제4의 阿羅漢果를 證得할 때, 불타의 敎導를 받지 않고 홀로 스스로 깨닫는 것을 말하고 뒤의 것은 獨居하여 百大劫동안 깨달음을 위한 善根功德을 쌓아 홀로 깨닫는 자를 말한다. 여기에 部行이라 함은, 聲聞이었을 때에 많은 部黨을 조직하여 단체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이름하고, 麟角喩라 함은 기린의 한 뿔에 비유해서 처음부터 伴侶가 없는 獨住者임을 가리킨다.
③ 緣覺은 다만 自利의 行만이 있고 利他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大悲心을 가지고 중생을 구원하는 일이 없고, 따라서 佛果에 이르지 못한다. 이것을 獨覺의 捨悲障이라고 한다.
④ 緣覺으로서의 階位를 辟支佛地, 약하여 支佛地라 부르고, 通敎의 十地(三乘을 통하여 10으로 나눈 佛子의 階位)의 제8에 자리(位)하고, 또 支佛地 자체도 十地에 분류된다.
⑤ 특히 이것을 緣覺이라 번역하는데 대해서 大乘義章 卷十七에는, 十二因緣을 깨달기 때문에, 또 바람이 나무를 움직인다(飛花落葉)등의 外緣에 의해서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오늘의 학자 사이에는 아마도 緣覺의 번역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생사(生死) : 輪廻라고도 번역한다. 業因에 의해서 六道의 迷界에 태어나서 죽기를 거듭하면서 윤회하는 것으로서, 涅槃(깨달음)의 逆. 生死가 끝이 없는 것을 밑바닥을 알 수 없는 바다에 비유해서 生死海라고 하고, 번뇌의 세계이기 때문에 生死苦海라고도 한다. 생사의 고해를 건너서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難度海라고도 한다.
① 二種生死. (1) 分段生死. 有漏의 善惡業을 因으로 하고 煩惱障을 緣으로 하여 三界내에 麤한 果報를 받을 때 그 과보는 壽命의 長短이나 육체의 大小 등 일정한 제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分段身이라고 하고, 분단신을 받아 윤회하는 것을 分段生死라고 한다. (2) 變易生死. 不思議變易生死라고도 한다. 아라한 · 벽지불 · 大力의 보살은 분단생사를 받는 일은 없으나, 그러나 無漏의 有分別의 業을 因으로 하고 所知障을 緣으로 하여, 界外 곧 三界 밖의 殊勝細妙한 果報의 身, 곧 意生身을 받아 이 몸을 가지고 三界내에 와서 보살의 行을 닦아서 佛果에 이른다. 그 몸은 悲願의 힘에 의해서 수명도 육체도 자유로히 變化改易할 수가 있으므로 일정한 제한이 없기 때문에 變易身이라고 하고, 변역신을 받는 것을 變易生死라고 한다.
② 四種生死. 분단생사를 三界에 배대하여 3으로 구별하고, 여기에 變易生死를 더하여 4로 한다. 또 변역생사를 方便 · 因緣 · 有後 · 無後의 四生死로 나눈다. 또 冥(현세의 卑賤)에서 冥(死後의 惡道)으로 들어가고, 冥에서 明(死後의 善趣)으로 들어가며, 明(현세의 尊貴)에서 冥으로 들어가고, 明에서 明으로 들어가는 4를 4種生死라고 한다.
③ 七種生死. 분단생사를 삼계에 배대하여 나누고, 여기에 변역생사의 4종을 더하여 7로 한다. 단 後世의 해석에서는 이것을 다음의 7종으로 한다. 分段생사 · 流來생사(眞如의 이치에 迷하여 생사의 迷界에 流來하는 처음을 말한다) · 反出생사(發心해서 생사에서 뛰어나는 처음을 말함) · 方便생사(見思의 惑을 끊고 삼계의 생사에서 超出하는 入滅의 二乘에 대해서 말함) · 因緣생사(無漏業을 因으로 하고 無明을 緣으로 하여 生을 받는 初地이상의 보살에 대해서 말함) · 有後생사(有有생사라고도 한다. 최후의 1品의 무명을 남기는 제十地 보살에 대해서 말함) · 無後생사(無有생사라고도 한다. 무명을 끊어버려 後身을 받지 않는 等覺 보살에 대해서 말함).
윤회(輪廻) : 범어 samsara의 번역으로, 僧婆洛이라 音譯하고, 淪廻라고도 쓴다. 또 生死라고도 번역하고, 生死輪廻 · 輪廻轉生 · 流轉 · 輪轉이라고도 한다. 수레바퀴가 굴러서 끝이 없는 것과 같이, 중생이 번뇌와 業에 의해서 三界 六道의 迷한 生死世界를 거듭하면서 돌고 돌아 그치지 않는 것. 이 윤회설은 사람이 죽은 후 영혼이 그 몸에서 떨어져 草 · 木 · 鳥 · 獸 등에 깃들인다는 轉住說로부터 발달한 것. 이 생각은 인도에서 유명한 業說과 결합되어 멀리 우파니샤드시대로부터 끊임없이 베단타(Vedanta)를 통하여 전해졌다. 샹캬라(Samkara)도 이를 채택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인도교 가운데 스며 들어와 보편적인 사상 또는 감정으로 되었다.
이 윤회는 불교에서 輪廻轉生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확실하게 윤회설을 브라흐만이 채택한 것은 고대 우파니샤드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B.C. 5세기 경에 배출된 六師外道 등으로 불리우는 여러 자유사상가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것을 주장하여 積集說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소위 육파철학에서도 베단타 학파 외에 상캬(Samkhya)학파는 윤회를 非情世間 즉 일반 자연물에게 까지 미치는 것으로 보고 그 해탈을 인생의 목적이라고 하고 바이세시카(Vaisesika)학파는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요가행의 수행을 역설하였다. 즉 윤회는 인도사상의 보편적이고도 뚜렷한 한 특색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個物이나 특수를 무시하고 보편자에 순종하여, 나아가서는 현세 초월적인 인도인의 사유방법의 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윤회하는 세계에 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 · 인간 · 하늘의 六道가 있다고 說한다. 이것에 의하면 현재 우리들 앞에 있는 축생, 예를 들어 파리나 벌레 등도 전생에는 인간이었던 것이 바뀌어 태어났는지도 모르며, 또 장차 우리들이 저승에서 파리나 짐승 등으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6道 중의 어느 세계에 태어나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와의 총체인 業(karma)에 의하는 것이라 하며 또한 이 業은 이승에 있는 우리들을 초월하여 생각되고 있어, 간단히 말하자면 善業에 의하여 善의 세계에, 惡業에 의하여 惡의 세계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한편 부분적이긴 하나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사상가 중에도 이 윤회전생을 말한 이가 상당수가 있어, 예를 들면 니체의 永劫回歸의 사상 등은 그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한다.
오계(五戒) : 범어 panca-sila의 번역으로 在家佛子가 지켜야 할 다섯가지 戒.
(1) 중생을 죽이지 말라.
(2) 훔치지 말라.
(3) 음행하지 말라.
(4) 거짓말 하지 말라.
(5) 술마시지 말라.
이 다섯가지는 재가신자가 지녀 남자는 우바새가 되고 여자는 우바니가 된다고 함. 大毘婆娑論에는 5學處라 하고, 大莊嚴經에는 五大施라 하며, 俱舍論에는 近事律儀라 한다.
십선(十善) : 身 · 口 · 意의 三業중에서 현저히 뛰어난 10種의 善惡의 행위를 말한다. 곧 十惡이라 함은 殺生(斷生命) · 偸盜(不與取 · 劫盜) · 邪婬(欲邪行 · 婬妷 · 邪欲) · 妄語(虛誑語 · 虛妄 · 속임) · 兩舌(離間語 · 破語) · 惡口(麤惡語 · 惡語 · 惡罵) · 綺語(雜穢語 · 非應語 · 散語 · 無義語) · 貪欲(貪 · 貪愛 · 貪取 · 慳貪) · 瞋恚(瞋 · 恚 · 害) · 邪見(愚癡)의 10으로 이들을 여의는 것이 10善이다. 이들은 순차로 身業에 속하는 것이 3, 口業에 속하는 것이 4, 意業에 속하는 것이 3이기 때문에, 이들을 身三 · 口四 · 意三으로 따지고, 意三을 덜어서 7支 · 7支業이라고 한다(口四는 語四라고도 한다). 10善 · 10惡은 十善業道(十善道 · 十善根本業道 · 十白業道) · 十不善業道(十惡業道 · 十不善根本業道 · 十黑業道)라고도 하는데, 이들 十業道는, 業이 遂行되는 經過에 加行과 根本과 後起의 三단계가 있는 중의 根本 곧 根本業道에 대해서 세운다. 10善 · 10惡의 說은 大乘 · 小乘의 많은 경전에 說해지고, 阿含에서는 十善은 人 · 天의 세계에 태어나고, 10惡은 지옥 · 아귀 · 축생의 三惡道에 떨어진다고 하고, 有部 등의 部派에서는 10善 · 10惡에 의한 果를 異熟果 · 等流果 · 增上果로 나누는데, 예컨대 10惡에 의해서 三惡道에 태어나는 것이 異熟果, 殺生業에 의해서 多病斷命인 것이 等流果, 殺生業에 의해서 霜雹, 塵穢 등의 害를 만나는 것이 增上果라고 한다. 또 10惡은 어떤 것이나 貪 · 瞋 · 癡의 三不善根중 어느 하나가 加行(준비적 작용)이 되어 일어나고, 그것이 業道가 되어 나타날 때에는 각기 셋중의 특정의 하나 또는 셋중에 어느 하나에 의한다고 한다. 10惡중에서는 殺生 및 邪見이 가장 重하다고 說하고, 新譯 화엄경 권35에는 10善 · 10惡을 하는 자는, 善의 强弱의 정도에 따라서 人 · 天의 果, 三乘의 果, 佛果를 얻고, 惡의 정도에 따라서 三惡道(强은 지옥, 中은 축생, 弱은 아귀)에 태어나고, 또는 人間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斷命 · 多病 그 밖에 不幸을 당한다고 說함. 10善은 惡을 그치고 善을 행하게 하는 戒이기 때문에 十善戒(十善法戒, 十善性戒, 十根本戒)라고도 한다. 瓔珞本業經 卷下에는 下品의 10善을 닦는 자는 人中의 王, 中品의 10善은 栗散王(小國의 王), 上品의 10善은 鐵輪王(轉輪聖王의 1)이 된다고 說하고, 그런 의미에서 王位를 10善의 位, 帝王을 10善의 君이라고 한다. 천태종에서는 圓敎의 十信位의 보살을 十善의 보살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無量壽經 卷下에는 (1) 殺生, (2) 偸盜, (3) 邪婬, (4) 兩舌 · 惡口 · 妄語 · 綺語, (5) 飮酒를 五惡이라 하고, 이에 반하는 것을 五善이라고 說함. 이 가운데 제4에 妄語만을 든다면 5戒와 같은 德目이 되기 때문에 五戒를 지키는 것이 5善, 5戒를 배반하는 것이 5惡이라고도 해석한다.
인천(人天) : 六趣(六道)에서 인간계와 천상계의 중생을 가리킴.
극과(極果) : 지극한 證果란 뜻. 부처님의 正覺을 말함. 대승의 佛果, 소승의 無學果와 같이 至極究竟의 果를 가리킴. 곧 因位 수행의 결과를 말함. 무상 열반의 극과라고도 한다.
중생(衆生) : 有情 · 含識이라고도 번역하는데 이것은 心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含識을 含生 · 含情 · 含靈이라고도 하며, 또 많은 生類라는 뜻으로 群生 · 群萠 · 群類라고도 한다. 대체로 이같은 말들은 "生存하는 것"이란 뜻으로 일체의 生類를 가리킨다. 衆生이란 말은 흔히 迷惑의 세계에 있는 生類를 가리키므로 때로는 넓은 의미로 불 · 보살까지도 포함한다. 雜阿含經 卷四十三에는 眼 · 耳 · 鼻 · 舌 · 身 · 意의 六根(여섯 感官)을 犬 · 鳥 · 蛇 · 狐 · 鰐 · 猿의 6종의 동물에 비유하여 흔히 이것을 六衆生이라 하고 六獸의 喩라고 한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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