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法華經)

법화경 성립의 역사적 배경

근와(槿瓦) 2015. 6. 15. 00:57

법화경 성립의 역사적 배경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기원전 4세기 무렵에 석존은 여든살로 이 세상을 떠나셨다. 유해는 말라족의 묘에서 화장되었으나 유골(사리)은 부처님의 유언에 따라, 비구승단에는 넘기지 않고 여덟 사람의 왕에게 나누어져, 그 나라마다 유골을 모시는 탑이 세워졌다.

 

기원전 268년에서 232년에 걸쳐 인도 전역을 통치한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오카왕은 여덟 개의 탑을 발굴, 부처님의 사리를 다시 세분하여 온 나라에 많은 탑을 세웠다. 그와 같은 탑을 받든 것은 출가한 승려들이 아니었다. 탑을 중심으로 모이고, 거기에 예배하는 것으로 해서 돌아가신 부처님을 사모하려는 일은 재가신도들, 그 중에도 도시의 부유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승려들은 탑을 관리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남기신 가르침을 정리하고 그것을 전도하기에만도 바빴기 때문이다. 그 위에 가르침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보수파와 진보파로 갈라지고, 그것이 다시 여러 부파로 나누어져 이십파를 헤아리게 되었다.

 

그들은 각기 敎義를 전통적으로 고수하여, 보통 사람들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어려운 주석서를 만들어내어 자기만족에 취해 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본래 생생한 힘에 넘치고 있었는데, 어느 새 번잡한 철학처럼 딱딱한 이론으로 굳어져버린 것이다. 승려들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요즘 空腹高心한 일부 승려들처럼, 재가신도들이 절을 하여도 본체만체 하는 비인간적인 무리들만 늘어갔다. 이것이 기원전후 무렵의 불교 교단의 모습이었다.

 

한편 탑을 중심으로 모인 신도들은 불탑은 곧 부처님이라고 생각하여 아침 저녁으로 예배를 하며 깊은 종교적인 갈등에 젖어 그들끼리 굳게 결속되었다. 그들은 다 넉넉한 재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탑에 대한 재물의 보시는 막대한 것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자신의 깨달음으로 이끌려는 자각이 생겨 자기네를 菩薩(깨달음을 구하는 자) 즉 求道者라고 부르게 되었다. 보살이란 말은 본래 釋尊이 전생에 구도자로 있을 때 부른 이름이었으나, 그것을 자기네의 호칭으로 했다는 데에 불탑신도들의 발랄한 의기를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승단에 대해서는 그전처럼 경건한 태도로 대하였다.

 

변한 것은 오히려 비구승단 쪽이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불탑신도들에 공감하여 그 존재 意義를 인정하는 이가 나타나 승단의 보수적인 장로들을 당황케 했다. 그중에도 급진적인 사람들은 승단에서 탈퇴하여 신도단체에 가담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그 안에는 재가의 보살과 출가의 보살 두 갈래로 나누어지게 되지만 초기에는 아무런 구별도 없이 하나의 신도단체로서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 승단의 많은 사람들은 불탑을 예배하고 사리를 공양하는 일은 무지한 재가신도들이나 할 일이며, 그것은 생활수단이나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멸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불탑 주변의 경제력은 점점 무시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그들도 불탑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전후해서는 승단의 각파 사이에는 전면적으로 불탑신앙이 유행되어 더 많은 불탑이 여기저기에 세워져 예배 공양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불탑신앙이 전면적으로 번지자, 보살단의 상징인 탑도 그 보람이 희미해지기 마련이었다. 오히려 보살단의 순수한 신앙을 침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숲속에 살면서 傳道의 길에 나서는 것을 바탕으로 걸식하던 청정한 원시불교교단이, 사원을 기증받고 생활이 넉넉해짐에 따라 사원에 등대고 안이한 생활로 이론이나 캐면서 타락해 가던 것과 마찬가지로 보살단도 그 길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일대혁신운동이 일어난다. 그것이 이른바 새로운 경전의 결집인 종교문학 운동인 것이다.

 

그 운동의 횃불은 기원 50년경 남인도에서 일어나 반야경이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그처럼 방대하지 않던 반야경이었지만, 서인도 북인도로 전해감에 따라 어느 새 대반야경이라 부를만큼 방대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뒤이어 중인도의 바이샤알리이를 중심으로 유마경이, 서북인도에서는 법화경이 만들어졌다.

 

법화경의 신해품에는, <長者窮女>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장자가 임종할 때에는 국왕이나 대신들이 참례할 만큼 대권력자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아마 자본을 축적하고 금융을 행사했을지 모른다. 이와 같은 대자본가는 화폐경제가 발달한 시대가 아니고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다. 인도의 화폐경제는 기원후 37년경에 급격히 발전되었다고 하므로, 법화경의 가장 오래된 부분이 성립된 것도 대개 기원후 40년경일 거라고 학계에서는 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경전을 만들어 내는 대담하고 급진적인 운동이 저항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다. 먼저 내부에서부터 일어났다. 보살단에 들어간 사람 가운데에서도, 경전을 만든다는 급진적인 행동에 놀라 어쩔 바 모르던 보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을 법화경 자체는 법사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약왕이여, 어떤 보살들은 법화경을 듣고 놀라 의심하거나 두려워하리라. 마땅히 알라. 그들을 新發意라고 하느니라.」보살단에 일단 들어간 사람들은 아무리 놀라거나 어쩔바 몰랐다 했을지라도, 언젠가는 납득이 갈만한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납득될 수 없는 것은 비구승단 쪽이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면, 으레 자기들이 口誦으로 전해 내려온 석존의 말씀만을 가리킨 것인데, 전문으로 수행하는 비구도 아닌 재가 보살들이 그것을 석존의 이름으로 새로운 경전을 만들기 때문에 비난이 빗발쳤을 것은 능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이러한 사정은 법화경 여러 군데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법화경을 결집한 보살의 단결은 굳게 맺어져 마침내는 보수적이고 퇴영적인 비구승단에 대항하는 大乘佛敎敎團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출처 : 동국역경원(李耘虛, 1967.05.25)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