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明)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범어 vidya의 번역. 어리석음의 어둠을 깨고 진리를 깨닫는 성스러운 지혜를 말한다. 능히 어둠을 제거하기 때문에 慧를 自性이라 하지만, 無明의 반대이므로 無癡善根을 自性으로 한다고도 말한다(佛地經論卷二). 원시불교에서는, 八聖道를 닦아서 四諦의 이치를 깨달으면 眼·智·明·覺(어느 것이나 다 지혜를 나타낸 말)을 이루어 涅槃에 들 수 있다고 하고, 大毘婆沙論 卷百二에는 善의 有漏慧는 능히 通達理解하기는 하지만 四聖諦에 있어서 決擇(의심을 결단하여 진리를 분별하는 것)하여 現觀(앞에 있는 四聖諦를 覺知하여 觀하는 것)할 수가 없기 때문에 明이라 부르지 않고 無漏의 聖慧만을 明이라 이름하며, 여기에 學(아직 배울 것을 남겨 두고 있는 聖者)과 無學의 2종의 구별이 있다. 또 無學의 聖者중에서 그 소질능력이 殊勝한 이는 六神通가운데 宿住·生死·漏盡의 三通을 얻어 과거·현재·미래의 三際의 愚闇을 깨뜨려 없애므로 이것은 無學의 三明이라 하지만 이 가운데 앞의 둘을 明이라 함은 無漏인 眞明(第三의 漏盡明)에 따라 줌으로 그것을 끌어들여서 겨우 明相을 얻게 되기 때문에 거짓으로 이렇게 이름 붙여 두는 것이다. 또 明은 學問·知識을 의미하고 인도에서는 聲明 등 5종의 學藝를 五明이라 한다. 또 眞言 등에도 癡闇을 제거하고 障難을 터는 힘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明이라 하고, 밀교에서는 印契와 眞言을 倂稱하여 印明이라 한다. 佛陀는 三明 및 身口의 行業을 원만하게 구비했으므로 十號의 하나로 明行足이라 존칭하며, 初地 이상의 보살은 諸法의 實相을 觀하여 그 마음이 明了하기 때문에 五種菩提 가운데 明心菩提를 初地이상의 보살이 깨닫는 菩提라고 한다. 즉 舊譯華嚴經 卷二十八의 十明品에는, 十地보살이 갖추는 10종의 智明을 說하여, (1) 他心智明(2) 天眼智明(3) 宿命智明(4) 未來際智明(5) 天耳智明(6) 神力智明(7) 分別言音智明(8) 色身莊嚴智明(9) 眞實智明(10) 滅定智明의 十明을 들지만, 新譯에서는 이것을 神通으로 번역하여 十通으로 했다.
참고
성혜(聖慧) : 성스러운 지혜.
자성(自性) : 諸法 그 자체의 不變不改의 存在性을 말한다. 다른 것과 混同하지 않고 改變함이 없는 獨自의 體性, 곧 本性을 말한다. 여기에 徧計自性 · 依他自性 · 圓成自性의 三性을 말하기도 하고 四卷楞伽經卷一에는 集成自性 · 性自性 · 相性自性 · 大種性自性 · 因性自性 · 緣性自性 · 成性自性의 7종自性을 說하고 있다. 또 中論 등에서는 일체의 현상계는 인연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無自性이라고 하여 自性을 부정하기도 한다.
① 七種自性. 여래에 7종의 性自性이 있으니, 性은 곧 不變遷의 뜻이니, 이 不變遷의 性 곧 如來의 自性이므로 性自性이라 한다.
(1) 集性自性. 집은 곧 聚의 뜻이니 그 性自性은 곧 萬善聚集의 因이 되므로 이렇게 말함.
(2) 性自性. 앞의 第一義心에 의해 集聚된 바의 萬善의 因의 근원이 되는 自性이 그 안에 존재하므로 이것을 性自性이라 한다.
(3) 相性自性. 보아서 분별할 수 있는 것이 相이다. 앞의 第一義心에 의해 集聚된 바 萬善의 因으로 말미암아 각 自性이 밖으로 나타나므로 相性自性이라 한다.
(4) 大種性自性. 大種은 곧 地 · 水 · 火 · 風의 四大의 종자이다. 이 四大가 각각 自性이 있음을 표준하여 말한 것이며, 大種은 본래 凡聖에 속하지만 여기서는 聖報에 준해서 말한 것이다. 이 大種의 性自性이 곧 法性五陰의 果이므로 이것을 大種性自性이라 한다.
(5) 因性自性. 因은 能生의 뜻이니 무엇을 생겨나게 함을 말한다. 앞의 제 4의 大種의 果는 반드시 그 因을 내는 因이 되는데, 그것이 곧 제一義因인 心이므로 因性自性이라 한 것.
(6) 緣性自性. 緣은 緣助의 뜻이니 第一義의 自性의 果德을 證得하는 것은 因心으로 말미암는데, 모름지기 뭇 緣助를 빌려서 顯成하므로 이것을 緣性自性이라 함.
(7) 成性自性. 成은 곧 成就의 뜻이다. 因緣和合하여 果를 이루는 것으로, 如來第一義의 果德을 成就하기 때문에 成性自性이라 한다.
② 因明(論里學)에서는 論證할 바의 名題(宗이라 함)의 主語를 自性이라 한다.
③ 數論哲學에서는 神我와 결합하는 것에 의해서 일체의 현상을 展開하는 물질적 원리, 물질적 根本因을 自性이라고 한다.
무명(無明) : 범어 avidya의 번역.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不如實智見을 말함. 곧 진리에 어두워서 (迷) 사물에 통달치 못하고 사물과 현상이나 도리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不達不解不了) 정신상태로 愚癡를 그 내용으로 하며, 十二緣起의 第一支가 無明支이다. 또 俱舍宗이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心所(마음의 작용)의 하나로 하는 癡라 한다.
① 十二緣起의 無明支를 해석하는데 阿含經에서는 佛敎의 진리(四諦)에 대한 無智라 하고 渴愛와 表裏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有部에서는 十二緣起를 三世兩重의 因果로 說한 것으로 보고 無明을 과거의 煩惱의 位에 있어서의 五蘊을 가리킨다고 하며, 모든 煩惱중에 이 無明의 작용이 가장 무겁고 돋보임으로 無明이라고 이름하였다. 唯識宗에서는 二世一重의 因果로 해석하고 無明과 行과 識 등의 五果의 種子를 끌어 들이는 能引支로 보고, 그 가운데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癡로서 善惡의 業을 일으키는 것을 無明이라 한다고 했다.
② 有部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相應無明과 不共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前者를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하여 같이 일어나는 것, 또 後者는 相應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不共無明은 홀로 일어남으로 獨頭無明이라고 하는데, 唯識宗에서는 不共無明을 다시 恒行不共無明과 獨行不共無明으로 나눈다. 前者는 第七 末那識과 相應하는 無明으로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하여 일어나나 모든 凡夫의 마음속에 늘 쉬지 않고 나타나는 作用이란 점에서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無明과 다르기 때문에 不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後者는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無明으로 다른 근본번뇌와 상응하지 않고 홀로 일어남으로 獨行不共이라고 일컫는다. 이 獨行不共無明은 隨煩惱와 함께 일어나지 않고 홀로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다시 主獨行無明과 無主獨行無明으로 나눈다. 또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種子와 現行으로 나누고 늘 衆生을 따라 다니며 第八阿賴耶識 속에 숨어 잠자고 있는 無明의 種子를 隨眠無明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표면에 나타나 現在意識으로 작용하고 있는 無明의 現行을 衆生에 붙어서 衆生을 얽어 生死(迷의 世界)에 묶어 놓는다는 의미에서 纒無明(전무명)이라 한다. 이 纒無明에는 相應하는 것과 不共이 있어서 隨眠·纒·相應·不共의 四種이 있게 되므로 이것을 四種無明(四無明)이라 부른다. 또 根本과 枝末과 共과 不共과 相應과 不相應, 迷理와 迷事, 獨頭와 俱行, 覆業과 發業과 種子子時와 行業果와 惑의 15種의 無明으로 나눌 때도 있다.
③ 勝鬘經에서는 見惑 및 三界의 修惑인 貪 등과 相應하는 相應無明을 四住地(見一處住地·欲愛住地·色愛住地·有愛住地의 넷으로 처음의 一은 見惑, 뒤의 三은 三界의 修惑을 의미한다)의 惑이라고 부른다. 獨行不共의 無明을 無始無明住地의 惑이라 하고(합하여 五住地의 惑) 이 無明住地는 모두 번뇌가 일어나는 根本이며 오직 如來의 菩提智만이 이것을 끊을 수 있다고 한다.
④ 起信論에서는, 無明을 不覺이라고 하고 이 不覺을 根本無明과 枝末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根本無明은 根本不覺·無始無明·元品無明·忽然念起無明이라고도 한다. 또 元初一念이라고도 한다. 곧 眞如平等의 眞理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忽然히 차별·대립의 念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그 元初라고 하는 것은 모든 煩惱의 元始이고 迷妄의 시작이므로 다른 煩惱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忽然」이라고 한다. 지극히 微細하므로 心王(마음)과 心所(마음의 作用)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즉 無始無明住地의 惑이 아닐 수 없다고 보인다. 枝末無明은 枝末不覺이라고도 불리우며 根本無明에 의하여 일어난 末稍的 染汚心으로 三世微麤의 惑業이다.
⑤ 天台宗에서는 空·假·中의 三觀에 의하여 각기 見思·塵沙·無明의 三惑을 끊는다고 한다. 無明과 非有非空의 진리에 迷惑되어 中道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無明을 끊음에 있어서는, 別敎에서는 十廻向位에서 항복하여, 初地이상의 12階位에서 12品의 無明(모두 12품의 무명이 있다고 한다)을 다 끊어 마친다고 한다. 이 경우 十廻向의 最後의 第十廻向에서 처음의 無明을 끊고 初地에 들어가지만 이 처음의 無明을 또 三品으로 나누어 끊으므로 이것을 三品無明이라고도 한다. 圓敎에서는 初地 이상의 42階位에서 42품의 無明(모두 42品의 無明이 있다 한다)을 끊어 마치는데, 이 경우 제51位인 等覺의 最後心에 의해 妙覺智 또는 佛智가 나타나고 이에 의해 끊어지는 最後의 無明을 元品無明·無始無明·最後品無明이라 한다. 다만 이것은 일반적인 說로서 실은 圓敎에서는 三觀에는 순서와 차례를 세우지 않고 一心을 가지고 觀함으로 三惑은 동체로 동시에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불지경론(佛地經論) : 7권. 인도의 親光菩薩 지음. 당나라 현장 번역. 佛地經의 문장을 해석한 것. .....불지경(佛地經)→1권. 당나라 현장 번역. 부처님이 妙生보살을 위해 佛地의 5相과 淸淨法界·四智를 설함.
원시불교(原始佛敎) : 釋尊在世時부터 20부파가 분열하기 시작할 때까지의 佛敎. 곧 불교의 초기에 敎理가 아직 다양하게 전개 또는 정리되지 않았을 때의 불교. 또는 석가시대로부터 아쇼카왕(B.C. 268~B.C. 232)시대까지의 불교. 초기불교라고도 한다. 석존의 연대론에는 약 100년의 차이를 갖는 두 개의 설이 있어, 이 시대를 약 100년간 혹은 200년간으로 보고 있다. 대체로 석존의 2대 법손 또는 그 다음 세대까지를 가리키며, 이 시대에 석가께서 교리를 펴시고 그의 입멸 후에 그의 가르침을 모아 이것을 포교할 제도가 확립되었다. 현재 원시불교의 자료라고 일컫는 것은 여러 가지의 것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모든 것을 佛說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이른바 5부 4아함의 經藏과 律藏은 그 태반의 교리가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불설을 거의 그대로 받들고 교단의 결속도 단단하여 점차 교세를 넓혀 중인도 일대에서 활약하게 되었으나 그 가운데서 보수와 진보의 두 파가 갈려, 불교의 다음 시대인 부파불교시대로 옮겨간다.
팔성도(八聖道) : 八聖道支·八正道分·八賢聖道·八正聖路·八正法·八直道·八品道라고도 한다. 불교의 실천 수행하는 중요한 종목을 8종으로 나눈 것. 즉 팔정도는 욕락과 고행 등의 극단을 떠난 中道이며 올바른 깨침에 인도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올바른 방법으로 되어 있다. 이 팔정도는 中正·中道의 완전한 수행법이므로 正道, 성인의 道이므로 聖道, 또 8종으로 나누었으므로 支, 또는 分이라 한다.
(1) 正見. 바른 견해이며, 불교의 바른 세계관과 인생관으로서의 인연과 四諦에 관한 지혜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 지혜를 확립하지 않은 자에게는 바른 신앙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어떤 사업을 하는 경우의 전체적인 계획이나 전망이 正見에 해당된다.
(2) 正思惟란 身語에 의한 행위를 하기 전에 바른 의사 또는 결의를 가리킨다. 출가자라면 출가자다운 柔和와 자비와 충정의 마음으로 思念思惟하는 일이다. 일반 사회에 있어서도 학생이나 직장인이나 사업가 등 자기의 입장을 언제나 바르게 생각하고 意思하는 것이 正思惟이다.
(3) 正語란 正思惟 뒤에 생기는 바른 언어적 행위이다. 妄語·惡口·兩舌·綺語를 하지 않고 진실하고 남을 사랑하며 융화시키는 유익한 말을 하는 일이다.
(4) 正業이란 正思惟 뒤에 생기는 바른 신체적 행위이다. 살생·투도·사음을 떠나서 생명의 愛護·施與慈善·성도덕을 지키는 등의 선행을 하는 일이다.
(5) 正命이란 바른 생활이다. 이것은 바른 직업에 의해 바르게 생활하는 것이지만 일상생활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수면·식사·업무·운동·휴식 등에 있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건강이 증진되고 일의 능률도 행상되며, 경제생활과 가정생활이 건전하게 수행되는 것이다.
(6) 正精進이란 용기를 가지고 바르게 노력하는 것이다. 정진이란 이상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며, 그것은 종교적·윤리적·정치적·경제적·육체 건강상의 모든 면에서 이상으로서의 善을 낳고 증대시키되, 이에 어긋나는 악을 줄이고 제가하도록 노력하는 것을 가리킨다.
(7) 正念이란 바른 의식을 가지고 이상과 목적을 언제나 잊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멍청하지 않는 일이다. 사소한 부주의가 얼마나 중대한 참사를 일으키는가를 일반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불교적인 正念이란 무상·고· 무아 등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잊지 않는 일이다.
(8) 正定이란 정신통일을 말하며 四禪定을 가리킨다. 사선정과 같은 깊은 선정은 일반인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도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은 바른 지혜를 얻거나 지혜를 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해 필요하다. 明鏡止水와 같은 흐림이 없는 마음과 무념무상과 같은 마음의 상태는 正定이 진전된 것이다. 여기서 正見은 나머지 일곱이 달성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리고 팔정도는 여덟 가지 항목이지만, 이것은 하나의 聖道를 이루는 각 부문이며 여덟 가지는 일체로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별개의 것이 아니다. 또한 팔정도를 戒·定·慧 三學과 관계지어 보면 正見·正思惟는 慧이며, 正語·正業·正命은 戒이며, 正精進은 三學에 공통이며 正念·正定은 定과 관계지을 수 있다. 곧 부처님이 최초의 법문 가운데서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며, 4諦·12緣起와 함께 불교의 원시적 근본 敎義가 되는 것이다. 이 팔정도는 중생을 미혹세계인 이곳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彼岸으로 건네주는 힘을 가지고 있어 船이나 筏로 비유하여 八道의 船八筏이라고 하고, 또 車輪의 輻과 轂·輞이 하나가 되어 차가 움직이는 것을 비유하여 八輪이라고도 한다. 이에 반하여 邪見·邪思·邪語·邪業·邪命·邪精進·邪念·邪定의 8을 8邪(支)·8邪行이라 한다.
사제(四諦) : ① 諦는 범어 satya, 파리어 sacca의 번역으로 진리란 뜻. 자세히는 四聖諦·四眞諦라 하며 4가지의 틀림없는 진리를 말한다. 四諦는 대체로 12緣起의 뜻을 교리적으로 조직화한 것으로 원시불교의 교리의 대강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最勝法說’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석존 최초의 설법(곧 初轉法輪)에서 설한 것이라고 한다. 4가지 진리의 제1은 「迷惑의 이 세상은 다 苦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며, 제2는 「苦의 因은 구하고 탐하여도 그치지 않는 執着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다. 제3은 그 執着을 완전히 끊어 없애 버림으로 苦를 멸한 때가 궁극의 理想境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며, 제4는 「이와 같이 苦가 없는 열반경에 도달하기 위하여 八正道의 옳은 修行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가르침이다. 이 4가지는 순서와 같이 苦聖諦·苦集聖諦·苦滅聖諦·苦滅道聖諦라고 불리운다. 이를 약하여 苦諦·集諦·滅諦·道諦라고도 한다. 이 苦·集·滅·道의 四諦 가운데 苦와 集은 迷妄의 세계의 因果를 나타내고, 滅과 道는 證悟의 세계의 인과를 나타낸다. 四諦의 이치가 三段階인데 여기에 각각 4가지의 行相을 붙여서 說할 때 이것을 三轉十二行相이라고 한다. 곧 三轉이란 제1轉 「이것은 苦諦(集·滅·道諦)이다」라고 하는 示轉, 제2轉은 「이 苦諦(集·滅·道)는 徧知(永斷·作證·修習)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勸轉, 제3轉은 「이 苦諦(내지 道諦)는 이미 徧知(내지 修習)되었다」고 하는 證轉이 그것이다. 12行相이란 이 三轉에 각각 眼·智·明·覺(옳은 智慧에 의한 이해를 뜻하는 4개의 同義語)의 四行相을 假設하고 각각의 諦에 12行相이 있다고 한 것. 그러나 다른 견해에 따르면 眼·智·明·覺을 고려하지 않고 一諦에 三轉이 있어 四諦全體로서 모두 12行相이 있다고도 해석한다.
② 有部敎學의 修證論에서는 우선 四善根位에서 4諦의 하나를 觀하는데 4種의 行相이 있으므로 합하여 十六行相을 가지고 四諦를 觀한다. 곧 苦諦에서 非常·苦·空·非我(恒存性이 없는 苦이며 假의 존재로 實體性이 없다)의 四行相, 集諦에서는 因·集·生·緣(執着을 苦의 원인으로 하여 苦를 모으고 생기게 하는 苦의 助緣이다)의 四行相, 滅諦는 滅·靜·妙·離(苦滅의 理想境은 繫縛을 끊고 번뇌를 가라앉혀서 殊妙의 境地에 이르러 災禍를 여읜다고 함)의 四行相, 道諦에는 道·如·行·出(苦滅의 聖道는 聖者實踐의 正道이고 正과 理가 합하여 迷의 生存을 超出하는 것이다)의 四行相이 그것이다. 이 四善根位의 다음에 見道에 들어 無漏의 眞智를 가지고 四諦를 現觀한다. 이 見道는 預流向에 속하는 일로서 預流果 이후로는 修道에 속하는데 이 預流向 · 預流果를 통하여 16心으로 四諦를 現觀한다. 이것을 聖諦現觀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최후의 제16心만이 預流果에 속하고 앞의 제15心은 見道에 속한다. 먼저 欲界의 四諦를 觀하는 智를 法智라 하고 上2界(色界와 無色界)의 四諦를 觀하는 智를 類智라고 하는데 이 法智와 類智에 각각 忍과 智가 있다. 곧 無間道에서 忍을 가지고 煩惱를 끊고(斷惑) 解脫道에서는 智를 가지고 진리를 깨닫는(證理)다. 苦諦에는 苦法智忍(약하여 苦法忍이라고도 하며 이에 따라 欲界의 苦諦를 現觀함으로 苦諦에 迷惑되어 있는 煩惱를 끊는다)·苦法智(이것으로 欲界의 苦諦를 現觀함으로 苦諦의 이치를 깨닫는다)·苦類智忍(약하여 苦類忍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가지고 上2界의 苦諦를 現觀함으로 번뇌를 끊는다)·苦類智(이것으로 上2界의 苦諦를 現觀함으로 진리를 깨닫는다)의 四心을 가지고 苦諦를 現觀한다. 集·滅·道의 三諦에도 앞에서와 같이 集法(智)忍·集法智·集類(智)忍·集類智·滅法(智)忍·滅法智·滅類(智)忍·滅類智·道法(智)忍·道法智·道類(智)忍·道類智의 각각의 4心을 說하여 모두 16心이 된다. 이것을 八忍八智라고도 한다. 또 四諦를 觀하는 無漏淸淨의 智를 諦에 따라 나누면 苦智·集智·滅智·道智가 되어 法智ㆍ類智 등과 같이 10智로 된다.
③ 大乘佛敎에 따르면 顯揚星敎論 卷七에서는 四諦의 내용을 전개시켜 行苦諦·壞苦諦·苦苦諦·流轉諦(이상은 苦諦의 展開)·雜染諦(苦集 2諦에 해당)·流息諦(滅諦에 해당)·淸淨諦(滅道 2諦에 해당)·正方便諦(道諦에 해당)라고 하여 8諦를 들었다. 또 小乘의 四諦觀은 불완전하므로 有作四涕라 하여 낮추었으며 大乘四諦觀은 완전하므로 無作四諦라고 하고 이를 八諦라 했다. 또 天台宗에서는 제1의 生滅 四諦(四諦의 因果 그대로 生이 있고 滅이 있다고 觀하는 四諦觀)·제2의 無生四諦(또는 無生滅四諦라고도 한다. 四諦迷悟의 因果는 다같이 空無하여 生滅하는 일이 없다는 四諦觀)·제3의 無量四諦(一切의 現象은 無明에서 생기므로 無量의 차별이 있고 따라서 四諦에도 無量의 相이 있다고 하는 四諦觀)·제4의 無作四諦(迷와 悟와 같은 對立矛盾 상태 그대로가 矛盾이 아니라고 觀하는 四諦觀)등을 주장하여 이것을 四種의 四諦라고 하며, 이것을 또 藏·通·別·圓의 四敎에 배당한다. 法相宗에서는 四諦 가운데 滅諦에 自性滅·二取滅·本性滅의 三滅諦, 道諦에 徧知道·永斷道·作證道의 三道諦를 세우는데, 이것은 滅諦와 道諦에 각 三性(遍計所執性·依他起性·圓成實性)을 갖추고 있는 것에 연유한다(成唯識論 권8).
지혜(智慧) : 六波羅蜜의 하나. 일체의 諸法을 통달하여 得失과 邪正을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 智慧山, 智慧海 등에 비유함. 智 · 慧 두글자를 특히 구별하여 쓸 경우에는 智는 解了, 慧는 照見의 뜻.
열반(涅槃) : 滅 · 寂滅 · 滅度 · 寂이라 번역한다. 擇滅 · 離繫 · 解脫 등과 동의어로, 또 般涅槃(般은 범어 pari의 음역으로, 완전의 뜻. 圓寂이라 번역한다), 大般涅槃(大는 뛰어나다는 뜻, 大圓寂)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불어 끈다는 뜻, 불어 끈 상태, 곧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滅盡해서 깨달음의 지혜인 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말한다. 이것은 生死(迷의 세계)를 넘어선 깨달음의 세계로, 불교의 구극적인 실천목적이며, 그러므로 여기에 불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旗印(法印)의 하나로서 涅槃寂靜을 세우게 된다. 불교 이외의 外道에서도 열반을 말하지만, 불교의 열반과는 다르다. 불교에서도 대승 · 소승에서 각기 그 해석에 異說이 많다.
① 部派(소승)불교에서 열반이라 함은 번뇌를 멸하여 없앤 상태라 하고, 여기에 有餘열반과 無餘열반의 2종열반을 세운다. 앞의 것은 번뇌를 끊었지만 육체(「殘餘의 依身」가 아직 있다는 의미로「餘依」또는「餘」라고 한다)는 아직 殘存하는 경우, 뒤의 것은 灰身滅智의 상태로, 모든 것이 滅無로 돌아간 경우를 가리킨다. 有部등에서는 열반을 하나의 본연의 자세인 실체적인 경지로 생각하고, 經量部등에서는 열반은 번뇌가 멸한 상태에 대한 假稱的인 명칭으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② 대승에서는, 열반을 적극적인 것이라 생각하여, 常 · 樂 · 我 · 淨의 四德을 갖추지 않은 소승의 열반을 有爲열반이라고 하는 데 대해서, 이 사덕을 갖춘 열반을 無爲열반이라 하여, 이것을 최상의 목표로 삼는다. 또 南本열반경 卷三에는, 常 · 恒 · 安 · 淸淨 · 不老 · 不死 · 無垢 · 快樂의 8味가 열반에는 갖추어 있다고 하여, 이것을 열반의 八味라고 한다. 常 · 恒은 항상, 安 · 快樂은 樂으로, 不老 · 不死는 我에, 淸淨 · 無垢는 淨에 對應하여 이것을 四德에 배속하는 수도 있다. 唯識宗에서는, 本來自性淸淨열반과 有餘依열반과 無餘依열반과 無住處열반의 4종열반으로 나눈다. 본래자성청정열반은 또 본래청정열반이라고도 性淨열반이라고도 하고 모든 것이 본래의 相에 있어서는 眞如寂滅의 理體 그것이라고 하여 진여를 가리켜서 이와같이 말한다. 무주처열반이라 함은 지혜에 의해서 煩惱障과 所知障을 여의었기 때문에 생사(迷의 세계)에도 停滯하지 않고, 또 大悲를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迷의 세계중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열반의 경지에서도 머무르지 않는 것을 말하고, 대승불교의 열반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地論宗이나 攝論宗에서는 性淨열반 · 方便淨열반(도를 닦음으로 인하여 번뇌의 더러움을 없애고 얻는 열반)의 二열반, 천태종에서는 性淨열반 · 圓淨열반(지론종등의 방편정열반에 상당) · 方便淨열반(불타가 중생을 구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모습을 나타냈다가 緣이 다하여 들어가는 열반으로, 應化열반이라고도 한다)의 3열반을 세운다.
③ 소승의 聲聞이나 緣覺이 무여열반에 들어가서 다시 마음을 바꿔서 대승의 敎에 轉向하는 것을 無餘還生이라고 한다. 또 열반은 모든 차별적인 모습(有爲의 相)을 超離하여 있는데, 이것을 離相이라고 한다. 淨土敎에서는 불타의 정토를 涅槃之城 또는 無爲涅槃界라고도 한다.
④ 이 세상에 사람으로서 나타난 불타(특히 釋尊)의 육체의 죽음을 涅槃 · 般涅槃 · 大般涅槃이라고 하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入涅槃 · 入滅 · 薪盡火滅(薪은 佛身 또는 機緣, 火는 지혜 또는 佛身에 비유한다)이라고 한다. 대개 본래는 석존의 成道를 열반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지금은 아마도 無餘依열반의 의미로 이와같이 말하는 것일 것이다. 석존의 入涅槃의 모습을 본뜬 畵像 또 影像을 涅槃像, 그날(2월 15일)에 석존을 追慕하여 진력하는 법회를 涅槃會 · 涅槃忌 · 常樂會등이라고 한다. 또 승려의 死를 圓寂 · 歸寂 · 示寂 · 入寂등이라고 한다.
유루혜(有漏慧) : 유루지(有漏智)→有漏煩惱의 過를 띠고 있어 迷理의 번뇌를 끊을 수 있는 힘이 없는 지혜를 일컫는다. 이 지혜는 일체의 有爲 · 無爲의 法을 觀緣하지만 주로 世俗의 法을 대상으로 하는 까닭에 世俗智라고 한다. 또한 아무리 수련하여도 번뇌를 끊지 못하는 지혜라고 한다. 여기에 生得慧 · 聞慧 · 思慧 · 修慧의 구별이 있다.
혜(慧) : 범어 mati. 末底 · 摩提라 음역. 心所의 이름. 事理를 분별 · 결정하며 의심을 결단하는 작용. 또는 事理를 통달하는 작용이다. 또한 智와 慧는 비록 通名이지만, 두 가지가 상대하여 有爲의 事相에 達하는 것을 智라 하고, 無爲의 空理에 達하는 것을 慧라 한다. 우주간의 일체 만법을 구사론에서는 75, 유식론에서는 100으로 분류하며, 구사론에서는 慧라는 心所를 大地法의 하나로 하여 모든 心識에 따라서 일어난다 하고, 유식종에서는 어리석고 우매한 마음에는 이 心所가 없다 하여, 바깥 경계에 대하여 邪 · 正과 得 · 失을 판단하여 좋은 것을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는 작용이 있다고 한다.
결택(決擇) : 決斷·簡擇의 뜻. 智慧로써 모든 의심을 決斷하는 것. 四諦의 相을 분별하는 것.
간택(簡擇) : 선택하는 것. 특히 慧의 힘으로 法을 가려 옳은 판단을 하는 것. 簡擇하는 힘을 擇力이라 한다. 涅槃은 이 擇力에 의해 얻는 滅(번뇌의 滅)이므로 擇滅이라고도 한다.
현관(現觀) : 범어 abhisamaya의 번역. 現前에서 직접 明了하게 觀하는 것.
① 俱舍宗에는 見道의 位에 있어서 번뇌를 여읜 지혜인 無漏智를 가지고 四諦의 이치를 觀하는 것.(불교의 진리) 자세히 말하면 聖諦의 現觀이라 한다. 여기에 三現觀이 있다.
(1) 見現觀. 無漏의 지혜로 四諦의 진리를 觀하는 것.
(2) 緣現觀. 無漏의 지혜와 이에 상응하여 일어나는 心·心所가 所緣의 대상으로 작용하는 것.
(3) 事現觀. 無漏의 지혜와 이에 상응하는 心·心所 및 無表色과 四相 등이 서로 협력하여 四諦 가운데 하나에 대해서 각각 知·斷·證·修의 일을 하는 것. 또 大衆部 등에선 一刹那의 마음으로 일시에 四諦를 現觀한다고 하여 頓現觀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有部에서는 八忍·八智의 16刹那로 차례 차례 現觀한다고 漸現觀을 주장한다.
② 有漏·無漏의 지혜로 바로 明了하게 觀하는 것. 成唯識論 卷九에 따르면 여기에 또 六現觀이 있다.
(1) 思現觀. 기쁨의 感受(喜受)와 같이 일어나서 思惟로 되는(思所成) 지혜.
(2) 信現觀. 불·법·승의 三寶에 대해 有漏·無漏의 決定信. 現觀을 도와서 물러나지 않게 하는 까닭이므로.
(3) 戒現觀. 無漏의 戒. 觀을 明了하게 하므로.
(4) 現觀智諦現觀. 見道와 修道에서 眞如를 觀하는 根本智·後得智.
(5) 現觀邊智諦現觀. 그 眞如를 觀하는 지혜의 최후의 邊. 곧 現觀邊에서 일으키는 차별의 법을 관하는 有漏·無漏의 지혜. 이것은 俱舍宗에서는 現觀邊 또는 現觀邊의 世俗智라고 하여서 苦·集·滅의 三類智의 後邊에 미래(畢竟不生法) 世俗智를 닦는다고 하는 것에 해당한다.
(6) 究竟現觀. 究竟位(無學道)에 있어서 無漏의 十智를 말함.
무루(無漏) : 漏는 누설·누락의 뜻으로 모든 번뇌를 말한다. 즉 眼·耳·鼻·舌·身·意의 六根에서 허물을 항상 만들어 누출한다는 뜻이다. 이런 번뇌에서 이탈하여 그것이 없어지고 증가함이 없음을 無漏라 하며 四諦 중의 道諦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가령 7覺支·8正道 등이 그것이다. 소승에서는 번뇌를 增上하지 않음을 말하고 대승에서는 번뇌와 함께 있지 않음을 말한다. 有部에서는 18界 중 後 삼계는 유루·무루에 통하며, 前 15 단계는 유루에만 한한다고 하는데 잡아함경의 무루법설을 이어받아 대중부에서는 佛身 중에 있는 것은 18계 모두 같이 무루라 하는 등 그 구분과 해설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무학(無學) : 범어 asaiksa의 번역. 極果란 뜻이다. 모든 煩惱를 끊어 없애고, 小乘證果의 極位인 阿羅漢果를 얻은 이를 말한다. 이 地位에 이르면 더 배울 것이 없으므로 無學이라 하고, 이 자리를 無學位라 한다.
성자(聖者) : 聖은 正의 뜻. 無漏智를 내어 바른 이치를 증득한 사람을 聖者라고 말함. 三乘의 見道 이상의 사람.
육신통(六神通) : 佛 · 보살 등이 가지고 있는 超人的인 능력. 神足通 · 天眼通 · 天耳通 · 他心通 · 宿命通 · 漏盡通 등 6가지(摩訶止觀).
숙주(宿住) : 과거 세상.
생사(生死) : 輪廻라고도 번역한다. 業因에 의해서 六道의 迷界에 태어나서 죽기를 거듭하면서 윤회하는 것으로서, 涅槃(깨달음)의 逆. 生死가 끝이 없는 것을 밑바닥을 알 수 없는 바다에 비유해서 生死海라고 하고, 번뇌의 세계이기 때문에 生死苦海라고도 한다. 생사의 고해를 건너서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難度海라고도 한다.
① 二種生死. (1) 分段生死. 有漏의 善惡業을 因으로 하고 煩惱障을 緣으로 하여 三界내에 麤한 果報를 받을 때 그 과보는 壽命의 長短이나 육체의 大小 등 일정한 제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分段身이라고 하고, 분단신을 받아 윤회하는 것을 分段生死라고 한다. (2) 變易生死. 不思議變易生死라고도 한다. 아라한·벽지불·大力의 보살은 분단생사를 받는 일은 없으나, 그러나 無漏의 有分別의 業을 因으로 하고 所知障을 緣으로 하여, 界外 곧 三界 밖의 殊勝細妙한 果報의 身, 곧 意生身을 받아 이 몸을 가지고 三界내에 와서 보살의 行을 닦아서 佛果에 이른다. 그 몸은 悲願의 힘에 의해서 수명도 육체도 자유로히 變化改易할 수가 있으므로 일정한 제한이 없기 때문에 變易身이라고 하고, 변역신을 받는 것을 變易生死라고 한다.
② 四種生死. 분단생사를 三界에 배대하여 3으로 구별하고, 여기에 變易生死를 더하여 4로 한다. 또 변역생사를 方便·因緣·有後·無後의 四生死로 나눈다. 또 冥(현세의 卑賤)에서 冥(死後의 惡道)으로 들어가고, 冥에서 明(死後의 善趣)으로 들어가며, 明(현세의 尊貴)에서 冥으로 들어가고, 明에서 明으로 들어가는 4를 4種生死라고 한다.
③ 七種生死. 분단생사를 삼계에 배대하여 나누고, 여기에 변역생사의 4종을 더하여 7로 한다. 단 後世의 해석에서는 이것을 다음의 7종으로 한다. 分段생사·流來생사(眞如의 이치에 迷하여 생사의 迷界에 流來하는 처음을 말한다)·反出생사(發心해서 생사에서 뛰어나는 처음을 말함)·方便생사(見思의 惑을 끊고 삼계의 생사에서 超出하는 入滅의 二乘에 대해서 말함)·因緣생사(無漏業을 因으로 하고 無明을 緣으로 하여 生을 받는 初地이상의 보살에 대해서 말함)·有後생사(有有생사라고도 한다. 최후의 1品의 무명을 남기는 제十地 보살에 대해서 말함)·無後생사(無有생사라고도 한다. 무명을 끊어버려 後身을 받지 않는 等覺 보살에 대해서 말함).
누진(漏盡) : 범인의 六根門에서 번뇌를 漏泄하므로 번뇌를 漏라 하고, 三乘의 極果에 이르러 聖智로써 이 번뇌를 끊으므로 漏盡이라 한다.
신통(神通) : 佛 · 菩薩등이 가지고 있는 超人的인 능력. 神足通 · 天眼通 · 天耳通 · 他心通 · 宿命通 · 漏盡通 등 6가지.(摩訶止觀) 범어 abhijna의 번역. 旬이라 음역하고, 神通力 · 神力 · 通力 · 通이라고도 함. 禪定을 修行함으로써 얻는 無礙自在한 超人間的인 不思議한 작용. 여기에 神足 · 天眼 · 天耳 · 他心 · 宿命의 五神通이 있다. 또 漏盡通을 합해서 六神通이라 한다. 또 특히 神足通만을 神通이라 하는 경우도 있다.
(1) 신족통은 神境智證通 · 神境通 · 如意通 · 身如意通 · 身通이라 한다. 智度論 卷五 · 卷28에는 생각하는 곳에 마음대로 갈 수 있는 能到(飛行), 마음대로 相을 바꾸는 轉變(變化), 外界의 對境(6境)을 자유자재로 하는 聖如意(隨意自在)의 셋이 있다. 뒤에 것은 부처님만이 갖추고 있다고 함.
(2) 천안통은 天眼智證通 · 天眼智通이라 함. 世間의 모든 것에 遠近 · 苦樂 · 麁細등을 모두 관찰하는 작용.
(3) 천이통은 天耳智證通 · 天耳智通이라 함. 세간의 모든 소리를 듣는 작용.(이것은 眼이나 耳는 色界인 인간의 세계를 초월한 天의 세계의 四大種所造의 맑은 色(物質)으로 됨으로 「天」이라 함.
(4) 타심통은 他心智證通 · 知他心通이라 함. 타인이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는 善惡을 모두 아는 작용.
(5) 숙명통은 宿住隨念智證通 · 宿住智通 · 識宿明通이라 함. 自他의 過去世의 生存상태를 모두 아는 작용.
(6) 누진통은 漏盡智證通이라고도 함. 번뇌를 모두 끊을 수 있어 두번 다시 迷界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通力이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갖고 있는 숙명 · 천안 · 누진의 3통은 특히 殊勝함으로 3明이라 한다. 이 경우 천안은 미래세의 중생의 死生時期나 그 모습을 내다 보는 通力이다. 또 死生智證通이라고도 한다. 俱舍論권27에는 6神通은 모두 慧를 본질(自性)로 하고 그중에서 5신통은 4禪을 닦음으로써 증득하므로 聖者뿐만 아니고 범부도 얻을 수 있지만 누진통만은 오로지 聖者만이 얻을 수 있다 하였으며, 智度論권28에는, 보살은 5通, 부처님은 6通을 갖고 있다고 했다. 成實論권16에는 佛敎이외의 外道에서도 역시 5通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5通을 얻은 仙人을 5通仙人이라고 부른다.
신통에는 鬼畜이나 諸天과 같이 태어나서부터 갖고 있는 것(生得)과 禪定을 닦음으로 증득한 것(修得) 등이 있다고 했다. 大乘義章권二十에는 신통을 얻는 방법에 四禪天에 태어남으로 그 果報로서 자연히 얻어지는 신통, 仙人이 藥의 힘으로 하늘을 자유로이 날으는 것 같은 業通(業에 의해 얻는 통력), 婆羅門이 呪文을 오래 갖고 있음으로 모양을 바꾸는 呪通, 선정을 닦음으로써 통력을 얻는 修通의 네 가지가 있다고 했다. 業通과 呪通은 外道에서 행하는 것이다. 宗鏡錄권15에는 크게 통력을 분류해서 五種通(5通)이라 한다.
(1) 道通. 中道의 理를 깨달은 뒤에 無心이 되어 능히 사물에 따라 萬有를 나타내는 통력.
(2) 神通. 선정에 의해 마음이 寂靜하게 되어 사물을 觀察思惟해서 宿命을 아는 등의 통력.
(3) 依通. 藥이나 부적 · 주문 등에 의해 얻는 통력.
(4) 報通. 業의 報答(果報)으로서 자연히 얻는 통력.
(5) 妖通. 妖怪한 것이 갖고 있는 통력.
누진명(漏盡明) : 三明의 하나. 漏盡智證明의 줄인 말.
누진지증명(漏塵智證明) : 범어 asraraksaya. 三明의 하나로 阿羅漢이 有漏의 번뇌를 끊고, 生死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지혜.
오명(五明) : 범어 panca-vidya. 다섯가지의 學藝. 明이란 배운 것을 분명히 한다는 뜻. 자세히는 5明處(明處는 범어 vidya-sthana의 번역)라 한다. 인도에서 사용한 學問과 技藝의 분류법. 內五明(佛敎徒로서의 學藝)과 外五明(세속일반의 學藝)이 있다. 內五明은 聲明(言語·文學·文法을 분명히 밝힌 학문)·因明(正邪를 연구해서 眞僞를 분명히 하는 印度論理學)·內明(佛敎의 眞理 특히 自宗의 宗旨를 밝힌 학문)·醫方明(醫學·藥學 등을 알게 하는 학문)·工巧明(여러가지 공예·기술·曆數에 관한 학문)의 다섯 가지. 外五明은 보통 聲明·醫方明·工巧明·呪術明·符印明의 다섯가지를 말한다.
밀교(密敎) : 秘密佛敎의 약칭. 일반적인 불교를 顯敎라 하는 것에 대한 말. 석가모니 부처님 혹은 報身의 아미타불 등을 교주로 하는 모든 대승 顯敎에 대하여 法身의 大日如來를 교주로 하며 우주를 이 법신 自在證의 경계로 보고 한 字 한 字의 진언다라니는 신비력이 있으며 그 三密의 秘法은 가볍게 전수할 수 없다고 하는 데서 밀교라고 한다. 보통 밀교를 미신적인 呪術의 체계이며, 性力(범어 sakti)을 숭배하는 타락된 불교로 인식되고 있으나 그것은 힌두교의 탄트라(범어 tantra) 신앙과 결합되어 말기에 나타났던 左道密敎를 가리킬 따름이다. 정통적인 밀교사상은 개체와 전체의 신비적 合一을 목표로 하며, 그 통찰을 全身的으로 파악하는 실천과 儀禮의 체계이다. 밀교에 해당하는 인도의 호칭은 金剛乘(범어 vajrayana)으로 금강승은 후기 대승불교를 대표한다. 금강승은 實在와 현상을 자기의 한 몸에 융합하는 卽身成佛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다양한 것의 통일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그 통일원리는 空과 慈悲의 일치 즉 반야와 方便의 일치로 나타난다. 종교의식상에서 여러 가지의 비법과 火祭 등을 행하는 것은 소위 탄트리즘으로 베다(veda)의 옛적부터 인도에서 행하여졌으며, 이런 법을 불교에서도 최초에는 배척하고 있었으나 석존 멸후 얼마 안가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의식 또는 瑜伽觀行에 응용될 뿐 교리 체계에는 관계가 없다. 이것을 雜部密敎라 하며, 이는 교리체계를 명료하게 법신 大日說로 전개하여 舊敎를 일변시킨 純部밀교와는 대립된다. 즉 현세적 욕망을 처리하는 주술적인 것과 극단적인 신비주의 속에서 발달한 상징의 철학으로 구분된다. 전자인 雜密(또는 呪密)은 禁忌 · 符籍 · 呪法 등으로 표현되는 것에 반해 후자인 純密(또는 通密)은 7세기 전후에 성립된 大日 · 金剛頂의 두 大經에 의하여 그 체계를 확립하였다. 전자는 서인도에서 후자는 남인도에서 성립하였다. 그 사상계통도 다소 다르지만 모두 대일법신의 自證化他의 양 방면을 믿음과 행동의 양면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바로잡았다. 이것이 善無畏 · 金剛智 · 不空 등에 의해서 중국에 들어왔다. 회교의 침입(1027~1087) 이후 성립된 俱生乘(sahajayana)과 時輪乘(kalacakrayana), 그리고 금강승에서 갈려 나온 탄트라승(tantrayana), 吉祥乘(bhadrayana) 등은 정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인도에서 티베트 · 네팔 등으로 전파되어 오늘날에도 행해지고 있는 것은 구생승 계통이며 티베트에 들어가 발달된 것이 라마교이다. 중국 · 한국 · 일본은 토속신앙과 결합된 요소가 많다.
인계(印契) : 本尊의 印契를 千眼印이라 하고, 千臂經에 나오는 말. 두 손의 小指 無明指 中指를 가지고 각각 손등을 서로 붙이고, 그 두 人指를 세우고, 두 大指를 넓혀, 人指의 제2의 文의 곁에 붙임. 팔뚝을 다섯치 정도로 펴서, 眉間上에 놓고 眞言을 외운다(千光眼秘密法經).
진언(眞言) : 범어 mantra의 번역으로 曼怛羅라 음역하며 呪·神呪·密呪·密言 등으로 번역한다.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말이란 뜻. 밀교에서의 三密에서는 三密중에 語密에 해당하며 眞言秘密이라고도 하고 佛·보살·諸天 등의 誓願이나 德, 또 그 別名, 敎의 깊은 의미 등을 가지고 있는 秘密의 語句를 가리키며 중국·한국·일본 등에서는 그 뜻을 번역하지 않고 原語를 音譯하여 그대로 읽는다. 이것을 외우고 그 文字를 觀하면 그 眞言에 應하여 각각의 功德이 있고 卽身成佛의 깨달음을 여는 것과 동시에 세속적인 願을 성취한다고 한다. 예컨대 不空羂索毘盧遮那佛大灌頂光眞言經에 說한 光明眞言은 이 진언을 듣는 이의 죄를 모두 消滅하며 또 光明眞言을 외워서 土砂에 加持하고 그 모래를 死骸 혹은 묘에 뿌리면 그 힘으로 죄가 소멸하므로 亡者가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한다.
① 만다라는 본래 思惟를 나타내는 用具, 곧 文字·言語를 의미하는데 특히 神·鬼 등에 대해 말하는 神聖한 語句를 가리킨다. 따라서 만다라를 외우는 일이 고대사회 특히 인도에서는 예부터 행해졌음이 吠陀(베다)에 보인다. 다만 만다라 문학에서는 만다라를 思惟解放의 뜻으로 풀었으니 특히 생사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의 思惟를 해방하여 인류의 목적을 달성하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
② 眞言을 明(學問·知識의 뜻), 陀羅尼(總持)라고도 한다. 다만 입으로 말하는 것을 眞言陀羅尼라고 하고 몸으로 나타내는 것을 明이라 하여 구별하는 경우도 있으며, 혹은 眞言의 긴 것을 陀羅尼, 여러 句로 이루어진 것을 眞言, 한 자 두 자 등으로 된 것을 種字라고 한다.
③ 文字·言語를 빌려서 표현하는 密呪를 가리켜서 眞言이라고 할뿐 아니라 널리 法身佛의 설법을 眞言이라 하며, 한 걸음 나아가 密敎에서는 密敎經典 내지 顯密兩敎의 經典은 표면적으로는 일반적인 言語를 사용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大日如來의 秘密·加持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眞言秘密藏이라고도 하며, 또 산의 松風이나 내의 흐르는 水聲이 그대로 眞如實相을 說하는 如來의 說法이므로 眞言이라고도 한다.
④ 眞言은 如來·보살·二乘·諸天·地居天의 5종(앞의 3을 聖者眞言, 뒤의 2를 諸神眞言의 둘로 나누기도 한다), 佛部·蓮華部·金剛部의 3종, 息災法 등의 4종, 혹은 多子(陀羅尼)·一字(種子)·無字(實相) 등으로도 나눈다. 또 1尊의 眞言에 廣·中·略이 있을 경우에는 각각 大呪(大心呪)·中呪(心呪)·小呪(心中心呪)라고 한다.
불타(佛陀) : 범어 Buddha. 浮圖 · 浮屠 · 部陀 · 浮頭 · 勃䭾 · 母䭾 · 沒䭾라고도 음역. 意譯하면 깨달은 사람(覺者)이라 하고 줄여서 佛이라고 함.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부처라고 하여 왔다. 특히 불교인들의 완전한 용어로는「부처님」이다.
즉 불타께서는 B.C. 6세기경에 인도 카필라국에서 출생하시어 태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일체의 번뇌를 끊고 우주의 참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위해 설법하였던 석가세존을 존경하는 말이다. 그러나 불타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불타 즉 부처는 석존 한 분에게만 국한된 절대적인 명칭은 아니다. 불타는 一切法, 즉 우주 만법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서 더할 수 없는 진리를 체득한 大聖者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러한 대성자가 석존이시기 때문에 불타라고 한다. 이러한 부처의 이름은 여러 가지가 있어서 경전에 따라서는 60가지, 108가지, 또는 270가지나 있다. 그러나 佛陀觀은 시대와 종파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초기 석존의 시대에는 불타라 하면 석존을 가리켰고, 그 제자들에게 있어서 불타는 오직 석존 한 분 뿐이었다. 그러다가 후에 대승불교 시대에 이르는 동안 불타관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불타는 보통사람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德相 즉 신체적 특징인 32相 80種好를 갖추고 정신적인 특수성으로서의 덕성인 十力 · 四無畏 · 三念住 · 十八不共法을 성취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타는 生身 · 法身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부처의 肉身을 生身佛이라 하고, 그 부처가 얻은 그리고 그 부처의 본성인 진리(法)를 法身佛이라 하여, 2,500여 년 전에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역사적 불타인 석존은 생신(肉身)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타라고 할 때에는 보통 법신불을 말하는데, 이 법신불은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는 상주불멸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佛身觀에 의하여 三身說(法身 · 報身 · 化身)이 나타났다. 실제에 있어서 불타로서 인류 역사상에 나타나기는 오직 석존 한 분 뿐이지만, 많은 불교성전에는 석존의 이전에 이미 毘婆尸佛 · 燃燈佛 등 과거의 부처와 미륵불 등 미래의 부처와 그리고 阿閦佛 · 阿彌陀佛 등 현재의 부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으시다. 이와 같이 많은 부처님들은 모두 역사상의 불타이신 석존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서, 즉 과거의 여러 부처들은 석존이 因位에 있어서 수행을 쌓을 때 받들어 공양하고 또는 授記를 얻는 데에 관련이 되고, 또 장래의 부처인 미륵불을 비롯한 미래의 많은 부처들은 석존께서 이미 세상을 떠나셨으나 그 실제의 몸은 오히려 온 세계에 나타나서 교화를 쉬지 않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부처가 출현하지만 이는 모두 하나의 큰 법신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삼명(三明) : 불타와 아라한이 얻는 3종의 神通. 지혜의 광명을 가지고 어둡고 어리석음을 깨뜨리기 때문에 3明이라 하고, 3達이라고도 한다.
(1) 宿住智證明. 自·他의 過去世(宿世)의 相을 밝게 아는 지혜. 곧 宿命明이라고도 한다.
(2) 死生智證明. 미래의 중생의 死生의 相을 밝게 아는 지혜로 天眼明이라고도 한다.
(3) 漏塵智證明. 4諦의 理, 곧 불교의 진리를 밝게 證知하고 漏 곧 번뇌를 斷滅하는 지혜로, 漏塵明이라고도 한다.
십호(十號) : 부처님께 있는 功德相을 일컫는 열 가지 명호.
(1)如來. 범어 tathagata. 多陀阿伽陀 ∙ 多陀阿伽度라 음역. 이 말 뜻에는 이 말을 조성한 두 단어를 나누는 것이 좋다. 첫 말을 tatha 또는 tatha, 둘째 말을 gata 또는 agata라고 하는 차이가 있다. tatha는 진실 ∙ 진리란 뜻. tatha는 같이, 곧 如是 또는 如實의 뜻. gata는 가다(逝)의 뜻. agata는 도달 ∙ 오다(來格)의 뜻. 그러므로 tatha+gata라 하면 지금까지의 부처님네와 같이 저들과 같은 길을 걸어서 열반의 피안에 간 사람이란 뜻. 곧 善逝 ∙ 到彼岸 등과 같은 뜻. 또한 tatha+agata라 하면 진리에 도달한 사람이란 뜻. tatha+agata라 하면 지금까지의 諸佛과 같이 저들과 같은 길을 걸어서 동일한 이상경에 도달한 사람이란 뜻. 또 이 밖에도 agata를 오다(來格)의 뜻이라 하면 여래라는 것은 부처님과 같은 길을 걸어서 이 세상에 來現한 사람, 또는 여실한 진리에 수순하여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보여주는 사람이란 뜻.
(2) 應供. 범어 arhat. 阿羅伽를 번역한 말. 온갖 번뇌를 끊어서 인간 ∙ 천상의 중생들로부터 공양을 받을만한 덕있는 사람을 뜻함.
(3) 正徧知. 범어 samyaksambuddha(삼먁삼불타)의 번역. 또 三耶三佛檀이라고도 쓰고, 正眞道 ∙ 等正覺 ∙ 正等覺 ∙ 等覺 ∙ 正覺이라고도 번역함. 부처님은 일체의 지혜를 갖추어 온갖 우주간의 물심 현상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뜻.
(4) 明行足. 범어 vidyacarana-sampanna(綼多庶羅那三般若). 열반경에 의하면, 明은 無上正遍智, 行足은 脚足이란 뜻으로 계 ∙ 정 ∙ 혜 3학을 가리킴. 부처님은 3학의 脚足에 의하여 무상정변지를 얻었으므로 명행족이라 한다.
(5) 善逝. 범어 sugata. 修伽陀 ∙ 須伽陀라 음역. 好去 ∙ 妙往이라고도 번역함. 因으로부터 果에 가기를 잘하여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 부처님은 여실히 저 언덕에 가서 다시 생사의 바다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함.
(6) 世間解. 범어 lokavid. 路迦憊라 음역. 부처님은 능히 세간의 온갖 일을 다 아신다는 뜻으로 이렇게 이름함.
(7) 無上士. 범어 anuttara(아뇩다라)의 번역. 부처님은 일체 중생 가운데서 가장 높아서 위가 없는 大士라는 뜻.
(8) 調御丈夫. 범어 purusa-damya-sarathi. 富樓沙曇藐娑羅提라 음역함. 부처님은 大慈 ∙ 大悲 ∙ 大智로써 중생에 대하여 부드러운 말, 간절한 말, 또는 여러 가지 말을 써서 조복 制御하고 正道를 잃지 않게 하는 이라는 뜻.
(9) 天人師. 범어 sasta-devamanusyanam. 舍多提婆摩㝹沙喃이라 음역함. 부처님은 天과 人의 스승이라는 뜻.
(10) 佛世尊. 범어 baddha-lokanatha. 佛陀路迦那他라 음역. 불타는 智者 또는 깨달은 사람이라 번역하며, 세존은 세상에서 가장 존중하다는 뜻. 그러나 이 가운데 佛과 세존을 나누면 11호가 된다. 그러나 성실론 등에 無上士와 調御丈夫는 합하여 一號이므로 세존은 정히 十號가 된다 하였음. 앞의 九號를 갖추어 세상이 존중하므로 세존이라 함.
명행족(明行足) : 위 십호(十號)에서 참조하십시오.
실상(實相) : 모든 것의 있는 그대로의 참 모습. 실상을 관찰하는 것을 實相觀이라 하고, 唯識觀은 事觀임에 대하여 이것을 理觀이라고 한다. 또 諸法의 실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大乘佛敎의 印, 곧 標幟로 이를 實相印이라 한다. 大乘에서 一法印을 주장하는 것은 小乘佛敎가 三法印(無常 · 無我 · 涅槃)을 주장하는 것에 대조가 된다.
오종보리(五種菩提) : 보살 修道를 다섯 종류의 階位로 나눈 것.
(1) 發心菩提. 10信位의 보살이 한 없는 生死 중에서 無上의 菩提를 위하여 큰 마음을 발하는 것.
(2) 伏心菩提. 10住·10行·10廻向位의 보살이 일체의 번뇌를 항복받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敎化의 수행을 행하는 것.
(3) 明心菩提. 初地 이상의 보살이 3世諸法의 本末·總相·別相 등을 관하여 일체법의 실상을 명백히 아는 것.
(4) 出到菩提. 제 8·9·10地의 보살이 지혜를 닦음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여 無性의 이치를 증득하고 一切智에 이르는 것.
(5) 無上菩提. 보살이 等覺과 妙覺의 지위에 이르러 일체의 번뇌를 멸하고 위 없는 깨달음을 얻는 것.
명심보리(明心菩提) : 위 오종보리(五種菩提)에서 참조하십시오.
십통(十通) : (1) 숙명통(宿命通). (2) 천이통(天耳通). (3) 타심통(他心通). (4) 천안통(天眼通). (5) 현신력(現神力). (6) 현다신(現多身). (7) 속왕래(速往來). (8) 능찰토장엄(能刹土莊嚴). (9) 현화신(現化身). (10) 漏盡通. (華嚴經離世間品)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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