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有學)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① 有學이라 함은, 이미 불교의 진리인 四諦의 理를 知見하여 自覺하고는 있으나, 아직 번뇌를 다 끊지 못했으므로, 漏盡 곧 번뇌를 斷盡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항상 戒 · 定·慧의 三學을 學修하는 것을 말한다. 곧 四向四果중, 최후의 阿羅漢果를 除한 다른 四向三果의 七로, 여기에 대해서 阿羅漢果를 無學이라 한다. ② 有學에 18의 類別이 있어서, 十八有學 · 有學十八 · 十八學人이라 한다. 통상 다음과 같이 말한다. 隨信行 · 隨法行 · 信解 · 見至 · 身證 · 家家 · 一間 · 預流向 · 預流果 · 一來向 · 一來果 · 不還向 · 不還果 · 中般 · 生般 · 有行般 · 無行般 · 上流般. 中阿含經 권30에서는, 譯語는 다르나 이와 같다. 順正理論 卷六十五에서는 身證을 除하고 阿羅漢向을 더하여, 配列의 순서도 四向三果를 처음에 둔다. 成實論 卷一에는 조금씩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참고
사제(四諦) : ① 諦는 범어 satya, 파리어 sacca의 번역으로 진리란 뜻. 자세히는 四聖諦 · 四眞諦라 하며 4가지의 틀림없는 진리를 말한다. 四諦는 대체로 12緣起의 뜻을 교리적으로 조직화한 것으로 원시불교의 교리의 대강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最勝法說’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석존 최초의 설법(곧 初轉法輪)에서 설한 것이라고 한다. 4가지 진리의 제1은 「迷惑의 이 세상은 다 苦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며, 제2는 「苦의 因은 구하고 탐하여도 그치지 않는 執着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다. 제3은 그 執着을 완전히 끊어 없애 버림으로 苦를 멸한 때가 궁극의 理想境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며, 제4는 「이와 같이 苦가 없는 열반경에 도달하기 위하여 八正道의 옳은 修行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가르침이다. 이 4가지는 순서와 같이 苦聖諦 · 苦集聖諦 · 苦滅聖諦 · 苦滅道聖諦라고 불리운다. 이를 약하여 苦諦 · 集諦 · 滅諦 · 道諦라고도 한다. 이 苦 · 集 · 滅 · 道의 四諦 가운데 苦와 集은 迷妄의 세계의 因果를 나타내고, 滅과 道는 證悟의 세계의 인과를 나타낸다. 四諦의 이치가 三段階인데 여기에 각각 4가지의 行相을 붙여서 說할 때 이것을 三轉十二行相이라고 한다. 곧 三轉이란 제1轉 「이것은 苦諦(集 · 滅 · 道諦)이다」라고 하는 示轉, 제2轉은 「이 苦諦(集 · 滅 · 道)는 徧知(永斷 · 作證 · 修習)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勸轉, 제3轉은 「이 苦諦(내지 道諦)는 이미 徧知(내지 修習)되었다」고 하는 證轉이 그것이다. 12行相이란 이 三轉에 각각 眼 · 智 · 明 · 覺(옳은 智慧에 의한 이해를 뜻하는 4개의 同義語)의 四行相을 假設하고 각각의 諦에 12行相이 있다고 한 것. 그러나 다른 견해에 따르면 眼 · 智 · 明 · 覺을 고려하지 않고 一諦에 三轉이 있어 四諦全體로서 모두 12行相이 있다고도 해석한다.
② 有部敎學의 修證論에서는 우선 四善根位에서 4諦의 하나를 觀하는데 4種의 行相이 있으므로 합하여 十六行相을 가지고 四諦를 觀한다. 곧 苦諦에서 非常 · 苦 · 空 · 非我(恒存性이 없는 苦이며 假의 존재로 實體性이 없다)의 四行相, 集諦에서는 因 · 集 · 生 · 緣(執着을 苦의 원인으로 하여 苦를 모으고 생기게 하는 苦의 助緣이다)의 四行相, 滅諦는 滅 · 靜 · 妙 · 離(苦滅의 理想境은 繫縛을 끊고 번뇌를 가라앉혀서 殊妙의 境地에 이르러 災禍를 여읜다고 함)의 四行相, 道諦에는 道 · 如 · 行 · 出(苦滅의 聖道는 聖者實踐의 正道이고 正과 理가 합하여 迷의 生存을 超出하는 것이다)의 四行相이 그것이다. 이 四善根位의 다음에 見道에 들어 無漏의 眞智를 가지고 四諦를 現觀한다. 이 見道는 預流向에 속하는 일로서 預流果 이후로는 修道에 속하는데 이 預流向 · 預流果를 통하여 16心으로 四諦를 現觀한다. 이것을 聖諦現觀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최후의 제16心만이 預流果에 속하고 앞의 제15心은 見道에 속한다.
지견(知見) : 지견(智見)→正智見, 또는 知見이라고도 함. 意識에 의해 아는 것을 知, 眼識에 의해 보는 것을 見이라 한다. 또 推求를 見, 覺了를 見이라고도 한다. 또 三智를 知, 五眼을 見이라 한다. 事理를 證知하는 慧의 작용을 일컫는다.
자각(自覺) : 三覺의 하나. 부처님은 스스로 깨달은 自覺과 남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覺他와 이와 같은 깨달음의 내용과 그 작용의 힘을 究竟的으로 완성한 覺行窮滿의 덕을 갖추고 있다. 이 가운데 自覺은 스스로 깨달아 증득하여 알지 못함이 없는 깨달음을 뜻하며, 또 自覺은 범부에 대하여, 覺他는 二乘에 대하여, 覺行窮滿은 보살의 覺에 대하여 일컫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말한다.
삼각(三覺) : 불타를 번역한 覺에 갖춘 세 가지 뜻.
(1) 自覺. 범부들의 자각이 없는 데 대한 것.
(2) 覺他. 성문 · 연각이 자기만 깨닫는 데 노력하고 다른 이를 구하지 않음에 대한 것.
(3) 覺行窮滿. 보살과 구별하여 불타의 覺者인 뜻을 밝힌 것.
누진(漏盡) : 범인의 六根門에서 번뇌를 漏泄하므로 번뇌를 漏라 하고, 三乘의 極果에 이르러 聖智로써 이 번뇌를 끊으므로 漏盡이라 한다.
득오(得悟) : 깨닫는 것.
계정혜(戒定慧) : 佛道에 들어가는 세 가지 要諦. 戒律 · 禪定 · 智慧의 준말. 이를 三學이라 이름한다. 戒는 身 · 口 · 意로 범하는 나쁜 짓을 방지하는 것. 定은 산란한 마음을 한 경계에 머물게 하는 것. 慧는 惑을 깨뜨리고 진리를 깨닫기 위한 四諦 · 十二緣起 또는 眞如 · 實相을 觀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 · 정 · 혜 3학은 실천 방면에서도 불교의 모든 것을 포함하게 된다. 이 세 가지가 서로 도와 證果를 얻는 것이므로 戒에 의하여 定을 얻고, 定에 의하여 智慧를 얻는다. 또는 불교경전을 三學에 배당하여 經藏을 定, 律藏을 戒, 論藏을 慧로 분류하는 說도 있는데 이에는 異說이 있다.
사향사과(四向四果) : 四向四得 · 四雙八輩 · 八補特伽羅 · 八賢聖 · 八聖이라고도 한다. 곧 預流向 · 預流果 · 一來向 · 一來果 · 不還向 · 不還果 · 阿羅漢向 · 阿羅漢果의 총칭. 小乘佛敎에서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어 들어가는 品階. 이는 婆沙論이나 俱舍論 · 賢聖品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① 預流는 범어 srota-apanna의 번역으로 須陀洹이라고 音譯 표기한다. 預流果를 初果라고 하며 見道에서 三界의 見惑을 끊어버림으로 無漏의 聖道(혹은 聖者)의 흐름에 들어간 자리이다. 이 果를 향하여 見惑을 끊고 있는 見道十五心의 사이가 預流向이다. 一來는 범어 sakrdagamin의 번역. 斯陀含이라고 音譯한다. 一來果란 欲界의 修惑에 九品(곧 上上品에서 下下品까지 九品)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앞의 六品까지의 번뇌를 끊어버린 聖者의 位를 말한다. 이 位에 있는 자가 아직 끊을 수 없는 三品의 修惑을 끊기 위해서는 한 번 天界에 태어났다가 다시 人界에 와서 般涅般의 깨달음을 얻어야 하므로 一來라고 한다. 이 6품의 修惑을 끊고 있는 자리를 一來向이라 한다. 不還은 범어 anagamin의 번역으로 阿那含이라 音譯하며 略하여 那含이라고도 한다. 不還果는 欲界의 修惑 9품중의 나머지 3품을 끊어 버려서 다시 欲界에 돌아오지 않는 자리이다. 不還向은 그 修惑을 닦아 끊고 있는 자리를 말한다. 阿羅漢은 범어 arhat의 音譯으로 應供 · 應이라고 번역한다. 阿羅漢果는 極果 · 無學果라고 하여 一切의 見惑 · 修惑을 끊고 영원히 열반에 들어 다시 生死(迷의 세계)에 流轉하지 않는 자리이다. 阿羅漢向(無學向)은 不還의 聖者가 阿羅漢果에 이르기까지의 자리를 말한다. 옛날에는 四果만 설명하고 四向은 설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四果는 또 四沙門果라고도 한다. 雜阿含經 권29에 보면, 預流果는 三結 곧 有身見과 戒禁取見과 疑를 끊는 자리이고 一來果는 三結을 끊어 貪 · 瞋 · 癡가 적은 位에 나아갔음을 말한다. 不還果는 五下分結 곧 三結과 欲貪 · 瞋恚를 끊는 자리를 말한다. 阿羅漢果는 一切의 번뇌를 끊은 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원시적인 해석이다.
② 預流向. 곧 見道에 들어가서 비로소 四聖諦(佛敎의 근본진리)를 명료하게 보는(現觀한다) 無漏淸淨한 지혜의 눈을 얻는다. 이를 淸淨法眼이라고도 하고 淨法眼 또는 法眼淨이라고도 한다. 預流果에 이르면 다시 惡道에 떨어지지 않으므로 預流果를 無退墮法이라고도 한다. 預流果의 聖者는 四果중 가장 긴 迷의 生을 거듭하는 者로서 人界와 天界를 7회 왕복하여 곧 14生을 얻는 가운데 반드시 阿羅漢果를 깨닫는 것으로서 결코 제8의 生 곧 第八有에 이르는 일은 없다. 이를 極七返有 혹은 極七返生이라 한다.
③ 一來向의 聖者중에서 欲界의 修惑의 前三品 혹은 前四品을 끊는 者를 家家의 聖者 또는 家家라고 한다. 家家란 家에서 나와서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곧 人界에서 天界에 태어나 다시 天界에서 人界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欲界九品의 修惑은 그 전체에 따라 欲界에 七大生 곧 人 · 天에 각각 七生을 얻게 된다. 이미 前三品(上上 · 上中 · 上下)의 修惑을 끊은 자는 나머지의 六品의 修惑에 의하여 三大生(人 · 天 각각 三生)을 얻으므로 이를 三生家家라 한다. 이미 四品(上上 · 上中 · 上下 · 中上)의 修惑을 끊은 자는 나머지 五品의 修惑에 따라 二大生(人 · 天 각각 2生)을 받으므로 이를 二生家家라 한다. 三生家家중 天三人三 혹은 人三天三 · 二生家家중 天二人二 혹은 人二天二의 生을 받는 자를 等生家家라 한다. 三生家家 중에서 天三人二 혹은 人三天二 · 二生家家 중에서 天二人一 혹은 人二天一의 生을 얻는 자를 不等生家家라고 한다. 이 중에서 天界 혹은 人界에 있어서 預流果의 깨달음을 얻어 家家의 聖者가 되고 人界에서 阿羅漢果에 이른 자를 人家家라고 부른다.
④ 不還向중에 欲界9品의 修惑 중에 7品 혹은 8品을 끊었지만 아직 1品 혹은 2品이 남아 있으므로 다시 欲界의 人 또는 天에서 1生을 받아야 하는 것을 一間(一生 또는 一品의 惑이 막히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뜻) 또는 一種子 혹은 단순히 一種이라고도 한다. 不還果는 다시 세분된다. 五種不還(果)은 五種阿那含 혹은 五種般이라고도 한다. (1) 中般. 不還果의 聖者가 欲界에서 죽어 色界에 태어날 경우 거기에 이르는 中有의 자리에서 般涅般하는 것. (2) 生般. 色界에 태어나서 얼마 안되어 般涅般하는 것. (3) 有行般. 色界에 태어나 거기서 오랫동안 수행을 쌓고 般涅般하는 것. (4) 無行般. 色界에 태어나 거기거 수행도 못하고 오랜 시간 뒤에 般涅般하는 것. (5) 上流般. 色界에 태어나 다시 차례로 위 하늘에 올라가서 드디어 色界의 最高天인 色究竟天 또는 無色界의 最高天인 有頂天에 태어나 거기서 般涅般하는 것. 그리고 色究竟天일 경우, 이를 樂慧라 하며 有頂天이면 樂定이라 한다. 色界는 지혜가 뛰어나고 無色界에는 定이 뛰어나기 때문이다(樂慧에도 樂定에도 다음의 세가지가 있다. 1. 全超. 色界最下의 梵衆天에 태어나 중간 14天을 전부 넘어서 色界 · 無色界의 最上天에 나오는 자. 2. 半超. 같은 중간의 1天 내지 13天을 넘은 자. 3. 徧沒. 1天도 초월함이 없이 이미 生을 얻은 자). 5種不還에 다음의 두가지를 더하여 7種不還이라고도 한다. 곧 (6) 現般. 欲界에 있는 그대로 般涅般하는 것. (7) 無色般. 곧 行無色. 欲界에서 죽어서 無色界에 태어나 거기서 般涅般하는 것. 9種不還은 (1) 速般 · (2) 非速般 · (3) 經久(이상 세가지는 中般을 다시 세가지로 나눈 것으로 각기 中有에서 차례로 빨리 또는 좀 늦게 혹 오랜시간이 지난 뒤에 般涅般하는 것) · (4) 生般 · (5) 有行般 · (6) 無行般 · (7) 全超 · (8) 半超 · (9) 徧沒의 아홉 가지를 말하고, 이 중에서 제7 이하를 함께 묶어서 하나로 합쳐 七善士趣라고도 한다. 滅盡定에 들어가 涅槃과 흡사한 寂靜의 樂을 몸으로 깨달아 얻은 不還果의 聖者를 身證 또는 身證不還이라고 한다. 欲界九品의 修惑을 끊고 不還果를 얻은 聖者가 다시 欲界에서 번뇌를 일으켜 不還果에서 退墮하는 것을 離欲退라고 한다.
⑤ 大乘莊嚴經論 卷十二에는, 이 小乘의 四果를 본따서 같은 명칭을 가지고 大乘의 四果(菩薩의 四果)를 說한다. 곧 十地 중의 初地 · 第八地 · 第十地와 佛地도 이에 해당한다.
아라한과(阿羅漢果) : 깨달은 자리를 果라고 한다. 수행의 원인에 대한 결과를 말함. 아라한은 소승의 최고의 깨달음.
무학(無學) : 범어 asaiksa의 번역. 極果란 뜻이다. 모든 煩惱를 끊어 없애고, 小乘證果의 極位인 阿羅漢果를 얻은 이를 말한다. 이 地位에 이르면 더 배울 것이 없으므로 無學이라 하고, 이 자리를 無學位라 한다.
십팔유학(十八有學) : 위 본문인 유학(有學)을 말함.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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