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상(總相)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총괄적 보편적인 양상을 總相, 개별적 특수적인 양상을 別相이라 한다. 예를 들면, 모든 有爲法에 통하는 無常·無我 등의 相이 總相인데 대해, 물에만 있는 濕相과 같은 것이 別相이다. 또 佛陀의 像을 보는데도 전체를 보는 것을 總相觀이라 하고 부분적으로 하나 하나를 보는 것을 別相觀이라 한다.
참고
별상(別相) : ① 6相의 하나. 事事物物이 제각기 다른 모양. ② 총괄적 모양인 總相 위에 있는 부분적 모양.
육상(六相) : 화엄종에서 말하는 萬有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六種의 相. 總相 · 別相 · 同相 · 異相 · 成相 · 壞相.
(1) 總相. 萬有의 일체법을 한 體로 보아 관찰하는 평등적 부문. 마치 자동차의 전체를 보아 한 대의 차라고 함과 같은 것이다.
(2) 別相. 일부분적으로 관찰하는 차별적 부문. 이것은 마치 자동차를 이루고 있는 엔진 · 차대 · 바퀴 등을 하나하나 떼어서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3) 同相. 하나하나의 차별이 동일한 목적으로 사용되어 상호간에 협력과 조화를 이루는 통일적인 부문. 마치 엔진 · 차대 · 바퀴 등등의 부분이 협력 조화하여 하나의 자동차를 이룸과 같은 것이다.
(4) 異相. 하나하나의 부품이 자기의 本位를 지켜 피차의 고유한 상태를 잃지 않고, 서로 다른 점이 있는 것. 마치 네 개의 바퀴는 차대를 받치고 있고, 차대는 엔진을 실어 제각기 본분을 지키어 서로 다른 힘을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5) 成相. 낱낱이 서로 의지하여 同一體의 관계를 이룬 것. 마치 수 많은 부품이 조립되어 한 대의 차를 이룸과 같은 것이다.
(6) 壞相. 그 하나하나가 어떤 一體인 관계를 가졌으나 오히려 각자의 本位를 잃지 않는 것. 마치 엔진과 차체와 바퀴가 서로 의지하여 하나의 차를 이루면서도 각자의 모양을 지켜 그 부분을 잃지 아니함과 같은 것이다.
유위법(有爲法) : 인연법에 의해 爲作 · 造作되는 法. 곧 인연에 의해 離合集散하는 생멸하는 法을 말한다.
인연법(因緣法) : 범어 pratitya-samutpada. 緣起와 같음. 인연의 도리. 십이인연의 가르침.
무상(無常) : 범어 anitya의 음역. 物 · 心의 모든 현상은 한 순간에도 生滅 變化하여 常住하는 모양이 없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2種이 있다.
(1) 刹那無常. 찰나 동안에도 生 · 住 · 異 · 滅하는 것.
(2) 相續無常. 한 평생 동안에 生 · 住 · 異 · 滅의 四相이 있는 것을 말함.
무아(無我) : 非我라 번역하기도 한다. 我는 영원히 변하지 않고(常), 독립적으로 自存하며(一), 핵심적인 所有, 곧 주인공으로서(主), 지배적 능력이 있는 주체(宰)로 생각되는 영혼적 또는 本體的 實體를 의미한다. 모든 物體에는 이런 我가 없고 我가 아니라고 설하는 것을 諸法無我라고 하며 無我를 觀하는 것을 無我觀이라 한다. 無我는 불교의 근본교리로서 三法印의 하나인 無我印에 해당된다. 이 諸法無我印에서의 我의 뜻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我의 뜻과는 구별해야 할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인도에서는 고래로 brahman교의 교설에 의해 atman(我) 사상이 젖어 있었기 때문에 釋尊은 일차적으로는 그런 의미의 我의 관념을 부인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석존은 我가 될 수 없는 것, 我가 있지 않은 것, 我라는 집착에서 떨어질 것, 我가 아닌 것을 我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으며, 我라는 관념, 나의 것이라는 觀念을 배제하는 사고방식, 我는 존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었다. 팔리어 聖典에서의 無我의 원어는 anattan이다. 그 뜻은 「我가 아니다」라는 의미와 「내가 있지 않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초기 佛敎에선 결코 「我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은 없었다고 한다. 원래는 「我에 대한 집착에서 떨어진다」는 뜻이다. Upanisad 철학에서는 我를 實體視하는 것에 비해서 佛敎에서는 이런 見解를 거부한 것이다. 이것은 我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고 客體的, 기능적인 我를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반대한 것이다. 我의 存在 · 不存在라고 하는 形而上學的 문제에 대한 대답은 석존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참다운 나의 문제는 존재적 존재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문제이므로 존재 · 非存在의 관념적 · 논리적 차원을 초월한 영역이기 때문에 석존은 일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석존은 다만 곧 「나의 것」이라는 觀念을 버리라고 가르쳤다. 원시불교에서는「五蘊의 하나하나가 苦이므로 非我이다」라는 敎說, 또「無常이므로 無我이다」라는 敎說(雜阿含經 卷三)이 있다. 이것은 我가 아닌 것을 我, 곧 我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특히 身體를 나의 것, 我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라는 觀念」을 排除하고자 했다. 說一切有部에서는 人無我를 말하며 아를 부정하였으나 諸法을 實有라 하고 法無我는 말하지 않았다. 뒤에 와서 차차 「我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無我說이 확립되었으며, 이런 입장은 說一切有部, 초기 大乘佛敎에도 계승된다.
이렇게 하여 無我에는 人法二無我의 說이 있게 됐다. 有情(살아 있는 것들 : 衆生) 은 五取蘊(凡夫의 생존을 이루는 物心의 다섯가지 요소(五蘊))의 假和合的 존재이므로 이런 五蘊的 假和合體를 實體的인 생명의 주체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人無我라고 칭한다. 또 모든 것은 因緣(結果를 내는 親因은 因, 結果를 내는데 보조되는 것은 緣)에 따라 나타난 것(假로 성립되는 것)이므로 그것에는 원래 고유한 獨自的 本性(自性)이 없다고 하는 것을 法無我라고 한다.
① 阿含에는 모든 것은 조건에 의존하며, 이에 따라 변천하고 사라져 가는 無常한 것이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 苦이므로 無我라고 한다.
② 有部에서는 我空法有라 하여 人無我를 說하고 있지만,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는 각각 自性이 있다고 보아 法無我를 설하지 않는다.
③ 成實論에서는 五蘊안에 참된 自我가 없다고 보고 人無我를 觀하는 것을 空觀, 五蘊의 法이 다 無常이어서 참된 自性이 없다고 보아 法無我를 觀하는 것을 無我觀이라고 한다.
④ 대승불교에서는 이 無我說이 空觀과 관련되어 無我란 사물에서 나(영원불멸의 本體, 고정적 실체)가 없다. 곧 無自性의 뜻이 있다고 論하여(中論 卷二二 · 二三) 無我(人無我와 法無我 我法二空) 를 설했다. 〔二種無我相謂人無我及法無我 楞伽經卷一〕특히 唯識宗에서는 三性說에 따라 三無我를 세우고 또 阿賴耶識과 관련시켜 無我를 고찰하여서 阿賴耶識의 本性은 空이므로, 諸法은 阿賴耶識중의 種子의 顯現에 불과함으로 無我라고 論하고 있다. 實我實法은 情有理無로 참된 我의 相이 없으므로 無相無我, 依他起의 似我似法은 如幻假有로서 집착된 我의 相과는 다르므로 異相無我, 圓成實은 識의 實性으로 無我의 상태에서 나타난 眞如를 自相이라고 하므로 自相無我라고 한다.
상(相) : 표·특징·특성·또는 상태·樣相·形相등의 뜻. 때로는 뒤의 것의 의미로, 體(本體)·用(작용)의 對語로 쓰이며,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의 모습을 의미한다. 그것 자체만이 가지고 있는 相을 自相, 다른 것에도 공통하는 相을 共相이라고 한다. (自相은 또 自性 곧 體와 같은 뜻으로도 쓰인다). 그 밖에 總相(總括的 總體的인 大體의 相)과 別相(차별된 부분적 특수적인 相), 同相과 異相 등의 二相으로 나누어, 因明(論理學)에서는 因의 三相을 설함. 有爲法의 相을 有爲相이라고 하고, 여기에 生 ·住·異·滅의 四相의 구별이 있어, 화엄종에서는 六相圓融의 說을 세운다.
수대(水大) : 4大의 하나. 濕潤을 性으로 하고, 攝引을 작용으로 하면서 온갖 물질에 두루 통하여 있는 이 元素는 물질을 축축히 젖게 하는 성능이 있다. 일체 色法에 모두 통해 있는 原質인 4大를 實의 水大라 하고, 우리의 肉眼으로 보는 물은 造色 중에 다만 水大가 치우쳐 많은 것이므로 이것을 假의 水大라고 한다.
습상(濕相) : 습(濕)→① 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습윤성을 말한. 원소로서의 물의 특성. ② 점착성.
불타(佛陀) : 범어 Buddha. 浮圖 · 浮屠 · 部陀 · 浮頭 · 勃䭾 · 母䭾 · 沒䭾라고도 음역. 意譯하면 깨달은 사람(覺者)이라 하고 줄여서 佛이라고 함.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부처라고 하여 왔다. 특히 불교인들의 완전한 용어로는「부처님」이다.
즉 불타는 B.C. 6세기경에 인도 카필라국에서 출생하여 태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일체의 번뇌를 끊고 우주의 참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위해 설법하였던 석가세존을 존경하는 말이다. 그러나 불타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불타 즉 부처는 석존 한 분에게만 국한된 절대적인 명칭은 아니다. 불타는 一切法, 즉 우주 만법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알아서 더할 수 없는 진리를 체득한 大聖者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러한 대성자가 석존이기 때문에 불타라고 한다. 이러한 부처의 이름은 여러 가지가 있어서 경전에 따라서는 60가지, 108가지, 또는 270가지나 있다. 그러나 佛陀觀은 시대와 종파에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초기 석존의 시대에는 불타라 하면 석존을 가리켰고, 그 제자들에게 있어서 불타는 오직 석존 한 분 뿐이었다. 그러다가 후에 대승불교 시대에 이르는 동안 불타관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불타는 보통사람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德相 즉 신체적 특징인 32相 80種好를 갖추고 정신적인 특수성으로서의 덕성인 十力 · 四無畏 · 三念住 · 十八不共法을 성취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타는 生身 · 法身으로 나눌 수 있는데 부처의 肉身을 生身佛이라 하고, 그 부처가 얻은 그리고 그 부처의 본성인 진리(法)를 法身佛이라 하여, 2,500여 년 전에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역사적 불타인 석존은 생신(肉身)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불타라고 할 때에는 보통 법신불을 말하는데, 이 법신불은 늙지도 병들지도 죽지도 않는 상주불멸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佛身觀에 의하여 三身說(法身 · 報身 · 化身)이 나타났다. 실제에 있어서 불타로서 인류 역사상에 나타나기는 오직 석존 한 분 뿐이지만, 많은 불교성전에는 석존의 이전에 이미 毘婆尸佛 · 燃燈佛 등 과거의 부처와 미륵불 등 미래의 부처와 그리고 阿閦佛 · 阿彌陀佛 등 현재의 부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와 같이 많은 부처들은 모두 역사상의 불타인 석존을 기준으로 한 것으로서, 즉 과거의 여러 부처들은 석존이 因位에 있어서 수행을 쌓을 때 받들어 공양하고 또는 授記를 얻는 데에 관련이 되고, 또 장래의 부처인 미륵불을 비롯한 미래의 많은 부처들은 석존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그 실제의 몸은 오히려 온 세계에 나타나서 교화를 쉬지 않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부처가 출현하지만 이는 모두 하나의 큰 법신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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