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中道)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二邊. 곧 양극단이 따로 떨어지므로 얻을 수 있다. 치우치지 않는 中正인 道의 뜻. 中路 혹은 단순히 中이라고도 함. 中道는 佛敎의 근본적 입장을 말하고 있어 대승 · 소승에 걸쳐서 중요시되고 있다. 따라서 그 뜻하는 바에도 深淺이 있지만 각 종파에서 이 語句를 가지고 교리의 핵심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중도의 意義를 中道義, 중도의 眞理를 중도의 理, 중도의 敎說을 中道敎(三時敎의 하나), 중도를 종지로 하는 종단을 中道宗(법상종에선 唯識中道를 주장하므로 자신이 中道宗이라 한다), 중도를 觀하는 것을 中道觀(자세히 말하면 中道第一義諦觀이라 하여 三觀의 하나)이라고 한다. 또 중도는 우주만유의 진실상을 나타내므로 중도는 곧 實相이라는 뜻에서 中道實相이라 한다.
① 阿含의 八聖道의 실천은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로 치우친 생활태도를 버리고 중도에 의해 지혜를 완성하여 열반의 證得으로 가는 도이므로 팔성도를 中道라 한다(中阿含經卷五十六). 또 十二緣起의 진리를 옳게 이해하는 것은 常見(중생의 생명의 주체인 我는 영원히 존속한다는 생각)과 斷見(死後엔 아주 滅無로 돌아간다는 생각). 또 有見(자연적입장, 世間의 상식)과 無見(허무주의)등과 같은 치우친 견해로부터 떠나는 것으로, 십이연기를 옳게 觀하는 것이 중도의 正見에 住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잡아함경 권십이등). 초전법륜에서 석존이 설한 것인데 前者는 실천상의 중도이며 後者는 思想上의 중도이다.
② 部派불교의 중도. 大毘婆沙論卷四十九나 成實論卷十一등에서 아함의 교설을 받아 들여 중도는 斷 · 常의 二見을 떠난 입장이라고 주장한다.
③ 대승의 中觀派에서는 般若波羅密을 근본적인 조건이라 하고 모든 집착이나 분별의 경지를 떠난 無所得의 상태에 있는 것을 중도라 한다. 中論 卷一 觀因緣品에, 緣起의 理法은 生 · 滅 · 斷 · 常 · 一 · 異 · 去 · 來의 여덟 가지의 잘못된 견해(八邪 · 八迷 · 八過 · 八計 · 八謬 · 八事 · 八迷의 戱論)를 타파하여 空의 진리를 밝힌 것이다. 萬有는 그 緣起의 道理에 순응하여 존재하는 것이므로 원래 八邪를 여의었으며 실체가 없어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밝힌다. 이와 같이 八邪가 떨어져 無得正觀(無所得의 바른 견해)에 住하는 것을 중도라 하고 이것을 八不中道 · 八不正觀 · 無得中道 · 八不中觀이라 한다. 여기에 八不이란 생멸 등의 八邪를 否定하는 不生 · 不滅 · 不斷 · 不常 · 不一 · 不異 · 不去 · 不來를 가리킨다. 이에 의하여 모든 邪執이 파멸되어 諸法이 그대로 實相인 도리가 나타난다. 八不중에서도 不生 · 不滅이 그 근본이다. 특히 팔불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不生이 팔불 속에 들어갈 수 있다 한다.
吉藏의 中論疏卷二에 의하면 不生은 嬰兒闡提, 不滅은 邪見闡提, 不斷은 斷見의 聲聞, 不常은 常見의 聲聞, 不一 · 不異는 外道, 不來와 不去는 獨覺 및 初發心 보살들의 각각의 邪執을 파괴시킨다고 한다. 삼론종은 八不中道의 설에 입각하여 세 가지 중도를 주장한다. 즉 中論疏 卷一에는 八不中道를 二諦에 關係시켜 설명한다.
(1) 因緣에 의해 거짓 존재하는 現象面으로 말하면, 모든 사물은 실체가 아니고 空이면서 거기다 거짓 현상으로 존재하므로 無生滅의 生滅이니 生이나 不生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을 俗諦中道 · 世諦中道라고 일컫는다.
(2) 사물의 진실한 실재의 측면 곧 본체면으로부터 말하면 모든 사물은 거짓 현상으로 존재하면서 또 그 本體는 空이기 때문에 生滅의 無生滅로서 不生이라고도 非不生이라고도 할 수 없다고 하여 이것을 眞諦中道라고 한다. 이 두 가지를 二諦各論中道라고 한다.
(3) 그렇지만 無生滅의 生滅, 生滅의 無生滅이란 실은 生滅도 아니고 無生滅도 아닌 言語와 思慮를 여읜 究極的인 空이라고 하여 이것을 二諦合明中道 · 非俗非眞中道라 일컫는다. 또 三論玄義卷下에 중도에 一中 내지 四中의 구별이 있다고 했다. 곧 중도가 유일의 청정한 도인 것을 一中, 중도를 二諦에 대해 논하여 「世諦의 中」과「眞諦의 中」으로 분류하는 것을 二中, 그「二諦의 中」에「非眞非俗의 中」을 더하여 三中이라 한다. 四中이란 다음 네 가지이다. (1) 對偏中. 斷 · 常의 偏見에 대해서 설한 中. (2) 盡偏中. 그들 偏見이 滅盡되어 중도의 意義가 나타난 것. (3) 絶對中. 거기 나타난 中은 언어와 사려를 초월한 不偏不中인데, 억지로 이름을 붙여서 中이라 한 것. (4) 成假中. 非有非無인 絶對中에 의해 현상으로서의 거짓 존재(有無)를 성립시켜 중생을 교화하는 수단(方便)을 말한다.
④ 천태종에서는 空 · 假 · 中의 三諦의 설을 주장하여 모든 존재를 一面으로만 생각하는 空 · 假를 초월한 절대적인 본체는 언어와 사려의 대상이 아님을 中諦라고 한다. 이 중제는 化法의 四敎중 別 · 圓의 二敎로 설명된다. 그러나 別敎에선 三諦를 각각 독립된 진리라고 생각하고(隔歷三諦), 空 · 假의 二諦는 현상면, 中諦는 본체면으로부터 말한 것이라 하여 但中, 圓敎의 三諦는 서로가 개별적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一諦중에 三諦를 갖추고 있어 셋이 별개가 아니고 융합되어 있다고 보며(圓融三諦), 卽空 · 卽假 · 卽中으로서의 中諦이므로 이것을 不但中이라고 한다. 또 通敎에선 三諦의 설은 없지만 거기서 주장하고 있는 空理 가운데 중도가 들어 있다고 설명되고 있으므로 통교를 含中敎라고도 한다. 그리고 천태종에서는 중도의 理는 우주의 진실한 모습인 만큼 이 진리를 깨달으면 佛 내지 地獄의 十界를 敎化시키는 대상자에게 맞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應化의 本源이 중도에 있다는 뜻에서 中道應本이라고 한다. 藏敎와 通敎의 보살은 이것을 갖추고 있지 않으므로 前者는 本惑을 끊지 못하고 남겨 두어 三界에 남아 있고 後者는 誓願을 세워 煩惱의 習氣를 붙들어 三界에 태어나고 중생을 교화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
⑤ 유식종에선 有 · 空 · 中의 三時敎의 敎判을 세워서 解深密經 등의 설처럼 有 · 空의 二邊(兩極端)을 여의고 非有非空의 중도의 진리를 완전하게 나타낸 敎를 中道了義敎라 하고, 有 · 空에 치우친 敎를 不了義敎라고 한다. 그 중도란 소위 唯識中道로서 곧 (1) 범부가 실재한다고 본 바의, 有情의 실체적 생명으로서의 我나 萬有의 구성요소로서의 法은 迷情의 집착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情有理無의 非有이다. (2) 萬有는 인연의 假有的 화합에 의해 존재하는 것으로 아뢰야식의 變現이므로 즉 識은 理有情無의 非無이다. (3) 또 만유는 고정된 본성(自性)이 없고 空이므로 자유자재로 현상될 수 있는 것으로 곧 공은 眞空妙有의 非無라고 한다. 이와 같이 宇宙의 眞相은 非有非無(非有非空)의 중도로 파악되는데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中道了義敎라고 한다. 三性說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我와 法은 遍計所執性에 해당하고 識은 依他起性, 空은 圓成實性에 해당한다(成唯識論 卷七).
우리 나라의 원효는 그의 梵網經菩薩戒本私記卷上에서, 「非有非無는 가(邊)를 여읜 중도의 戒를 나타낸 말이니, 그러므로 戒의 體를 말하면 因緣을 따라 생긴 것이지만 그 인연의 본체를 추구해 들어가면 戒의 自性을 얻을 수 없으므로 非有며, 戒가 비록 非有라고 하지만 인연을 따라 생긴 것이므로 토끼 뿔이 없는 것처럼 아주 없는 것은 아니므로 非無라 한 것이다.」라고 하여 戒를 非有非無의 중도의 원리에 입각해서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원효는 이어서 「만일 戒의 業을 말하면 막는다는데 戒의 뜻이 있는 것이니 그 막아야 할 대상은 곧 罪다. 그러므로 계는 결국 인연을 따라서 생기지만 그러나 그 인연의 본체를 추구하여 들어가 따지고 보면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므로 얻어질 실재의 客觀은 없다.」고 하고 한 걸음 나아가 계를 중도에 契合시키는 논리를 다음과 같이 전개했다. 「마음자리를 두고 논하면 뿌리의 자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므로 죄될 요소가 따라 붙을 수 없다. 따라서 그릇됨을 막는다고 하지만 실은 그 절대적인 객관화된 본질적 표준(罪性)이 있음도 아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罪性은 마음의 근본바탕에는 없다. 그렇지만 또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여기에 戒가 중도에 들어 맞는 도리가 있는 바이다.」원효가 一切法에 無碍自在한 一大理論으로 千經萬論을 막힘이 없이 꿰뚫은 것도 다 철두철미하게 一貫 中道에 통달했기 때문이다. 또 華嚴經序에 「원래 無障無碍한 法界의 法門은 法이란 것도 없고 법아닌 것도 없으며 門이 아니고 門 아님도 없도다. 그것은 大도 小도 아니요 促도 奢도 아니며 動도 靜도 아니며 一도 多도 아니다.」라고 했고, 金剛三昧經論序에 「破할 것도 없고 破하지 않을 것도 없으며 세울 것도 없고 세우지 않을 것도 없으니 이른바 아무 이치가 없는 것 같지만 지극한 이치이고 그렇지 않으면서 크게 그러하다」고 했다. 이러한 圓融無碍한 절대의 원리에 입각하여 性 · 相 · 空 · 有 · 一 · 異의 일체의 相對性을 會通시킴으로 立 · 破 · 開 · 合에 조금도 걸림이 없는 중도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고려의 義天도 「대저 法에는 말이나 형상이 없으며 말이나 형상을 여읜 것도 아니니 말이나 형상을 여의면 뒤집힌 迷惑이요, 말과 형상을 집착하면 참으로 迷한 것이다」라고 했고, 「敎學者는 안을 버리고 밖으로 구하며 習禪人은 因緣法을 모르고 안으로만 밝혀서 偏執하므로 二邊을 다 읽는다」고 하여 역시 중도가 究竟임을 누누히 밝혀 주고 있어서, 원효의 중도설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일본에 있어서는 執空說을 취하는 南寺傳의 중도설과 體空說을 취하는 北寺傳의 중도설과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먼저 집공설의 입장을 주장하는 남사전에 의하면 三性對望의 중도설을 주장한다. 곧 진여인 원성실성(眞有)에 의해 의타기성(假有)으로서의 현상이 있다. 그 現象의 相을 實有라고 집착하는 것이 변계소집성(理無)이므로 변계소집은 非有, 의타기와 원성실은 非無이다. 또 三性은 一法上의 三性이므로 三性을 상대로 하여 볼 때 여기에 非有非無인 하나의 중도가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體空說을 취하는 북사전에서는 一法中道說을 주장한다. 예를 들면 변계소집성은 情有이므로 非無, 理無이므로 非有로서 곧 중도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三性이 각각 하나하나 다 중도를 갖추고 있다고 주장하고 나아가서 情有도 단순한 有가 아니라고 하여 많은 一法中道를 주장한다. 단 일법중도설 가운데서 변계소집성은 범부의 迷情이므로 중도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설도 있다.
三性을 상대로 중도를 설명하는 것은 言說로 설명한 중도이므로 言詮中道라 한다. 一法中道는 모든 존재가 본래적인 진실한 相으로는 언어와 사려를 끊어버린 非有非空의 중도라 하여 절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도이므로 離言中道라고 하여 이들을 합해서 二重中道라고 한다. 이것은 중도에 따로 두 개가 있는 것은 아니라 前者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중도, 後者는 자기 스스로의 깨달음의 내용으로서의 중도이다. 또 중도란 말은 能觀의 智를 가리키는 경우에도, 所觀의 理를 가리키는 경우에도 사용된다.
참고
이변(二邊) : 中道를 여읜 兩極端을 말한다. 中論卷四에는, 有 · 無, 혹은 常 · 無常을, 順中論 卷下에는, 常 ·斷을 玄奘譯의 攝大乘論 世親譯 卷一에는, 增益 · 損減을, 止觀補行 卷三에는, 空 · 假를 각기 二邊으로 들고 있다.
중정(中正) : ① 곧고 바름. ② 바른 행위. 중도이며 바른 것. ③ 바른 도덕.
중도실상(中道實相) : 萬有의 實相은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닌 非有非空의 中道임을 말한 것. 宗派에 따라 구체적인 해석 상의 차이가 있다.
팔정도(八正道) : 八聖道支 · 八正道分 · 八賢聖道 · 八正聖路 · 八正法 · 八直道 · 八品道라고도 한다. 불교의 실천 수행하는 중요한 종목을 8종으로 나눈 것. 즉 팔정도는 욕락과 고행 등의 극단을 떠난 中道이며 올바른 깨침에 인도하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올바른 방법으로 되어 있다. 이 팔정도는 中正 · 中道의 완전한 수행법이므로 正道, 성인의 道이므로 聖道, 또 8종으로 나누었으므로 支, 또는 分이라 한다.
(1) 正見. 바른 견해이며, 불교의 바른 세계관과 인생관으로서의 인연과 四諦에 관한 지혜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 지혜를 확립하지 않은 자에게는 바른 신앙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어떤 사업을 하는 경우의 전체적인 계획이나 전망이 正見에 해당된다.
(2) 正思惟란 身語에 의한 행위를 하기 전에 바른 의사 또는 결의를 가리킨다. 출가자라면 출가자다운 柔和와 자비와 충정의 마음으로 思念思惟하는 일이다. 일반 사회에 있어서도 학생이나 직장인이나 사업가 등 자기의 입장을 언제나 바르게 생각하고 意思하는 것이 正思惟이다.
(3) 正語란 正思惟 뒤에 생기는 바른 언어적 행위이다. 妄語 · 惡口 · 兩舌 · 綺語를 하지 않고 진실하고 남을 사랑하며 융화시키는 유익한 말을 하는 일이다.
(4) 正業이란 正思惟 뒤에 생기는 바른 신체적 행위이다. 살생 · 투도 · 사음을 떠나서 생명의 愛護 · 施與慈善 · 성도덕을 지키는 등의 선행을 하는 일이다.
(5) 正命이란 바른 생활이다. 이것은 바른 직업에 의해 바르게 생활하는 것이지만 일상생활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수면 · 식사 · 업무 · 운동 · 휴식 등에 있어서 규칙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건강이 증진되고 일의 능률도 행상되며, 경제생활과 가정생활이 건전하게 수행되는 것이다.
(6) 正精進이란 용기를 가지고 바르게 노력하는 것이다. 정진이란 이상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며, 그것은 종교적 · 윤리적 · 정치적 · 경제적 · 육체 건강상의 모든 면에서 이상으로서의 善을 낳고 증대시키되, 이에 어긋나는 악을 줄이고 제가하도록 노력하는 것을 가리킨다.
(7) 正念이란 바른 의식을 가지고 이상과 목적을 언제나 잊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멍청하지 않는 일이다. 사소한 부주의가 얼마나 중대한 참사를 일으키는가를 일반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불교적인 正念이란 무상 · 고 · 무아 등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잊지 않는 일이다.
(8) 正定이란 정신통일을 말하며 四禪定을 가리킨다. 사선정과 같은 깊은 선정은 일반인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일상생활에서도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집중하는 것은 바른 지혜를 얻거나 지혜를 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해 필요하다. 明鏡止水와 같은 흐림이 없는 마음과 무념무상과 같은 마음의 상태는 正定이 진전된 것이다.
여기서 正見은 나머지 일곱이 달성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리고 팔정도는 여덟 가지 항목이지만, 이것은 하나의 聖道를 이루는 각 부문이며 여덟 가지는 일체로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별개의 것이 아니다. 또한 팔정도를 戒 · 定 · 慧 三學과 관계지어 보면 正見 · 正思惟는 慧이며, 正語 · 正業 · 正命은 戒이며, 正精進은 三學에 공통이며 正念 · 正定은 定과 관계지을 수 있다. 곧 부처님이 최초의 법문 가운데서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며, 4諦 · 12緣起와 함께 불교의 원시적 근본 敎義가 되는 것이다. 이 팔정도는 중생을 미혹세계인 이곳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彼岸으로 건네주는 힘을 가지고 있어 船이나 筏로 비유하여 八道의 船八筏이라고 하고, 또 車輪의 輻과 轂 · 輞이 하나가 되어 차가 움직이는 것을 비유하여 八輪이라고도 한다. 이에 반하여 邪見 · 邪思 · 邪語 · 邪業 · 邪命 · 邪精進 · 邪念 · 邪定의 8을 8邪(支)·8邪行이라 한다.
십이연기(十二緣起) : 凡夫로서의 有情의 生存이 12의 조건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는 것. 또는 12支緣紀 · 12因緣 · 12因緣起 · 12因生 · 12緣生 · 12緣門이라고도 한다.
① 근본불교의 가장 기초적인 敎義로서, 원래 아함경전에 설해진 것. 12라 함은 無明 · 行 · 識 · 名色 · 六處(六入) · 觸 · 受 · 愛 · 取 · 有 · 生 · 老死이고, 이것들은 凡夫로서의 有情의 生存을 구성하는 12의 요소(곧 十二有支)이며, 이것들이「이것이 있을 때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 하여 저것이 생기며,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 하여 저것이 멸한다」라고 하는 相依相對的인 관계를 설하는 것이 12연기이다. 여기에 두 가지 면이 있는 것 같다.
곧 모든 것은 因과 緣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는 相依的인 것이기 때문에 無常 · 苦 · 無我라고 하는 면과, 또 하나는, 凡夫로서의 인간의 괴로운 생존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流轉門), 또 어떻게 해서 그것을 否定하고 깨달음에 이르는가(還滅門)라고 하는 것을 說하여, 有情의 生存의 가치와 意義를 문제로 하는 쪽이다. 阿含經典에서는, 12支의 緣起說 외에, 10支 · 9支 · 8支 · 7支 등의 緣起까지도 說하는데, 넓은 의미에서는 이들도 12緣起의 說에 수용해도 좋다. 雜阿含經 권12에는, 연기의 법은 부처가 세상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를 불구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로, 부처는 이것을 관하여 깨달음을 열고, 또 중생을 위하여 이 법을 開示한다고 說하고 있다. 前述한 제2의 면에 있어서의 12緣起說의 원래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곧 自覺的인 인간의 생존(有)은 정신의 주체인 識의 활동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그 識의 활동은 생활경험(行)이 되어서, 도리어 그 활동의 축적에 의한 識의 내용이다. 그런데 識의 활동이라 함은, 識이 感覺器官(또는 그 기능)인 眼 · 耳 · 鼻 · 舌 · 身 · 意의 6處를 통하여 인식의 대상인 모든 心이나 物(名色)과 접촉(觸)하여, 이것을 主觀上에 感受(受)하는데 의한다. 범부에 있어서는, 識은 無明(불교진리에 대한 無自覺)을 內相으로 하고, 渴愛(구하여 마지 않는 我欲)를 外相으로 하는 것이어서, 객관적 대상에 작용하는 식의 根基的인 상은 이 渴愛에 불과하며, 또 渴愛는 발전하여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하여 取하려고 하는 執著(取)으로 된다. 그런 까닭에 이와 같은 染汚인 識의 활동(行)에 의해서 내용지어진 識은, 그것에 相應하는 生 · 老死 등에 의해서 대표격이 된 人間苦, 無常苦를 경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에 반하여 聖者에 있어서는, 無明 및 渴愛가 없어졌기 때문에 따라서 人間苦도 없어진다.
② 俱舍論 卷九에는 12緣起에 대해서 4종의 해석을 들고 있다.
(1) 刹那緣起라 함은, 1刹那의 心중에 12지가 갖추어 있다고 하는 것으로, 예컨대 貪하는 마음으로 殺生하려고 하는 순간의 마음에 대해 말하면, 그 한 찰나의 마음 가운데 일어난 愚癡가 있는 것이 無明, 죽이려고 마음 먹은 것이 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2) 連縛緣起라 함은, 이 12支가 간단 없이 연속해서 前因後果의 관계가 되는 것을 말하고,
(3) 分位緣起라 함은, 三世兩重의 因果에 의한 胎生學的인 해석으로, 12의 支分은 有情이 生死에 流轉하는 과정에서의 각기의 位態를 가리키는 것이고,
(4) 遠續緣起라 함은, 까마득하게 먼 生을 隔하여 12支가 계속해서 緣起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有部에서는 제3의 分位說을 쓴다. 곧 無明과 行은 과거世로 번뇌를 일으키어 業을 지었을 때의 有情의 分位 곧 心身(五蘊)을 가리키고, 이 과거世의 2因에 의해서 心識이 비로소 母胎에 託生하는 1刹那의 有情의 分位가 識, 託生의 제2刹那 이후 六根이 아직 갖추지 않은 有情의 分位가 名色, 胎內에서 6根을 갖춘 分位가 6處, 出胎한 뒤 다만 접촉감각만이 있는 2 · 3歲까지가 觸, 感受性이 빼어난 4 · 5歲에서 14 · 15歲까지가 受로, 이상 識에서 受까지를 現在世의 5果라고 한다. 다음에 愛欲이 성한 16 · 17歲 이후가 愛, 貪著의 마음이 뛰어난 30歲 이후가 取, 이렇게 하여 業을 짓는 分位가 生, 그 이후 死에 이르기까지가 老死로, 이들 둘을 未來世의 2果라고 한다. 이와 같이 과거세 · 현재세 · 미래세의 三世에 걸쳐서, 二重의 因果를 세우기 때문에, 이것을 三世兩重의 因果라고 한다. 因중에 惑 · 業을 포함하고, 果는 곧 苦이기 때문에, 12緣起는 惑業苦의 三道에 거두어지고, 因果가 끝없이 계속하여 無始無終이라고 한다. 經部에서는 이 有部의 說을 바르지 않다고 하여, 無明이라 함은 과거의 無智만을 가리키고 결코 五蘊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등으로 說한다.
③ 成唯識論 卷八에서는, 無明에서 有까지를 因, 生 · 老死를 果로 하여, 1重의 因果를 세우는데, 因과 果는 반드시 異世이고, 따라서 이것을 二世一重의 因果라 한다. 無明 · 行의 二支는 識에서 受까지의 5支를 당겨 일으키는 因이기 때문에, 2支는 能引支이고, 5支는 所引支라고 하여 이 7支를 牽引因이라고도 한다. 愛 · 取 · 有의 三支는 因이 되어서 미래의 生 · 老死의 二支를 生하기 때문에, 3支를 能生支 또는 生起因이라 하고, 이에 대해서 生 · 老死를 所生支 또는 所引生이라 한다.
④ 천태종에서는 思議生滅 · 思議不生不滅 · 不思議生滅 · 不思議不生不滅의 4종의 12因緣을 세워서, 이것을 化法의 四敎(藏 · 通 · 別 · 圓)에 배속시킨다. 최후의 圓敎에서는 12因緣은 佛性이라 일컫고 緣에 의해서 생긴 현상의 그대로가 中道의 理와 다르지 않다고 한다.
⑤ 12緣起를 觀하는 것은, 四諦觀과 같이 중요한 觀法으로 되어, 석존은 이것을 觀하여 깨달음을 열었다고도 전한다. 雜集論 卷四에는 無明에 의해서 行이 있다 등으로 차례로 迷의 生起를 觀하는 것을 雜染順觀, 老死 등의 각기에 苦集滅道의 四諦를 세워서 老死에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迷의 生起를 觀하는 것을 雜染逆觀, 無明이 없어지면 行이 없어진다 등으로 現成을 차례로 觀하는 것을 淸淨順觀, 老死의 滅은 生의 滅에 因한다 등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서 깨달음의 現成을 觀하는 것을 淸淨逆觀이라고 하고, 婆沙論 卷24에는, 迷惑의 生起를 觀하는 流轉門에서는 無明 · 行을 버린 10支, 깨달음의 現成을 觀하는 還滅門에서는 12支를 觀한다고 함(단 巴利文의 律의 大品에 의하면, 流轉門을 順觀, 還滅門을 逆觀으로 불러야 하는데, 지금은 이 說이 행해지고 있다). 또 천태종에서는 三世兩重 · 二世一重 · 刹那一念의 3종의 12因緣觀에 의해서 각기 차례로 斷見 常見 · 著我見 · 性實見의 3종의 잘못된 견해를 깨뜨린다고 說한다.
정견(正見) : 八正道의 하나. 有 · 無의 모든 편견을 여읜 正中의 見解. 곧 불교의 바른 진리를 시인하는 견해를 말한다.
정견(正見,바른 소견)-[301. 가전연경(迦旃延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나리(那梨)라고 하는 마을 깊은 숲 속에 있는 대빈사(待賓舍)에 계셨다. 그 때 존자 산타가전연(陀迦旃延)이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의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물러나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시는 바른 소견[正見]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것을 바른 소견이라고 하며, 어떤 것을 세존께서 시설하신 바른 소견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산타가전연에게 말씀하셨다.
"세간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유(有)와 혹은 무(無)이다. 취함[取]에 부딪히고, 취함에 부딪히기 때문에 혹은 유에 의지하고 혹은 무에 의지한다. 만일 이 취함이 없다면 마음과 경계를 얽어매는 번뇌를 취하지 않고, 머무르지 않으며, 헤아리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 괴로움이 생기면 생겼다고 보고, 괴로움이 소멸하면 소멸했다고 보아 그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아는 것을 바른 소견이라고 한다. 이것이 여래가 시설한 바른 소견이니라.
왜냐 하면 세간의 발생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알고 본다면 세간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세간의 소멸을 사실 그대로 알고 본다면 세간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을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이른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즉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기 때문에 행이 소멸하고 ……(내지)……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존자 산타가전연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해탈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출처→잡아함경-464쪽[301번.가전연경(迦旃延經)]
무소득(無所得) : 無相의 이치를 얻어 마음 속에 집착 분별함이 없음.
무소득중도(無所得中道) : 三論宗에서 중도는 언어나 사고의 영역이 아니므로 有라고도 空이라고도 할 수 없다고 하는 주장. 중도의 이치는 온갖 것을 부정하여 끝난 곳에 나타나는 긍정이기 때문이다.
팔불현실(八不顯實) : 諸法實相의 묘체는 不生 · 不滅 · 不去 · 不來 · 不一 · 不異 · 不斷 · 不常의 8不에 의하여 나타난다는 것.
무득정관(無得正觀) : 無所得 中道의 正觀이라고도 한다. 三論種에서 모든 법의 眞相은 상대적인 空을 空하여 버린 不可得의 空이라고 觀하는 바른 觀法을 뜻함.
팔불(八不) : 不生·不滅·不斷·不常·不一·不異·不去·不來의 여덟 가지의 부정. 「中論」의 최초에 설하고, 三論宗에서는 究極의 진리를 설하여서 보였다고 존중한다. (三論玄義)
중론(中論) : 중관론의 약칭. .....중관론(中觀論)→4권. 용수보살이 저술하고, 구마라집이 번역함. 구마라집은 여기에 梵志 靑目의 해석을 붙이다. 十二門論·百論과 함께 三論宗의 所依論. 그 내용은 가장 철저한 中道를 주장하여 空과 假를 破하고 다시 中道에 집착하는 견해도 破하여 八不中道 곧 無所得의 中道를 말하다. 주석서로 碩법사가 저술한 疏 12권, 元康이 저술한 疏 6권이 있음.
삼론종(三論宗) : 中論 등의 三論(中論,十二門論,百論)에 의하여 宗을 세운 까닭에 三論이라 이름한다. 일명 性宗 · 空宗 · 破相宗이라 함. 인도 대승불교의 中觀系 · 瑜伽系 중의 중관계에서 시작되어 중국에서 크게 번성한 종파. 용수보살이 지은 <中論> <十二門論> 과 提婆가 저술한 <百論>의 3부를 주요 경전으로 하고, 성립한 宗旨로서 이를 相承한 것을 말하면 문수 · 마명 · 용수에까지 이르러 2파로 갈리다. 그 중 1파는 용수· 제바 · 라후라 · 청목 · 사거왕자수리야소마 · 수리야발타 · 구마라집이고, 다른 1파는 용수 · 용지 · 청변 ·지광 · 사자광에 전하다. 또한 구마라집 문하에서 승조 · 승예 · 도생의 英俊들이 나오고, 다시 도생 · 담제 ·도당 · 승전 · 법당 · 길장으로 차례로 이어왔는데 승전에서 길장까지의 敎義가 크게 이루었다. 길장 이전을 古三論, 이후를 新三論이라 구별함. 특히 중국에서는 구마라집이 中論 · 百論 · 十二門論 · 智度論을 번역하고, 그 제자들이 모두 三論 大義를 품수하고 嘉祥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다가 禪宗이 들어오면서부터 점점 쇠퇴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 때 원효대사가 三論의 宗要를 짓고, 백제의 慧顯이 三論을 강설했으며, 고구려의 慧灌이 일본에 이 宗을 전하다.
삼론현의(三論玄義) : 1권. 隋나라 嘉祥寺의 吉藏이 저술함. 삼론종의 근본 경전인 中論·百論·十二門論의 大要를 적은 책. 내용은 처음에 大歸를 서술한 뒤에 여러 品을 해석함에 二門으로 나누고, 다음에 처음 문에서 破邪·顯正의 둘을 세워, 파사에서는 外道·毘曇·成實·大執의 넷을 파하고, 顯正에서는 人正·法正으로 나누어, 人正에서는 용수보살의 인격을 비판하여, 대승의 實理를 말한 一人者라고 단정하고, 法正에서는 용수가 中論에 말한 것은 정히 대승의 실리를 말한 것으로 단정하고, 맨 끝에 여러 품을 해석하는 1項에 13科를 나누어 八不中道觀의 要諦를 말하였음.
팔부중도(八不中道) : 八不正觀 · 八不中觀이라고도 함. 삼론종에서 生 · 滅 · 去 · 來 · 一 · 異 · 斷 · 常 등 8종의 迷한 고집을 부정하는 데서 나타나는 不可得한 중도의 이치. 중도를 말함에 있어 중생들의 迷하고 삿된 견해를 없애고, 다시 따로 중도라는 어떤 법이 있다고 하는 다른 이의 주장에 대하여, 삼론종에서는 삿된 것을 破하는 외에 정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迷하고 삿된 견해를 끝까지 없애는 그것(8不)이 곧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팔불중도의 이치라 하며, 따라서 팔불중도의 참뜻을 알면 일체의 迷하고 삿된 견해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팔불중도라는 생각까지도 있지 않다는 것.
실상(實相) : 모든 것의 있는 그대로의 참 모습. 실상을 관찰하는 것을 實相觀이라 하고, 唯識觀은 事觀임에 대하여 이것을 理觀이라고 한다. 또 諸法의 실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大乘佛敎의 印, 곧 標幟로 이를 實相印이라 한다. 大乘에서 一法印을 주장하는 것은 小乘佛敎가 三法印(無常·無我·涅槃)을 주장하는 것에 대조가 된다.
일법인(一法印) : 小乘의 三法印에 대해서 大乘의 實相印을 一法印이라고 한다. 大乘에서는 生死가 곧 涅槃이요, 열반이 곧 生死라 하여 生死에 즉하여 寂滅相을 말하는 것을 大乘의 標幟로 하므로 一法印을 세워 小乘과 구별함.
부단중(不但中) : 空 · 假의 두 가지를 여의고, 따로 中道의 한 이치가 있다고 하는 것을 但中이라 함에 대하여, 空 · 假 두 가지에 即하여 중도를 말하는 것.
중도응본(中道應本) : 천태종의 敎義. 別圓二敎에 의해서, 圓實의 中道로써 應化身의 근본을 삼음을 말한다. 藏通二敎의 뜻에 의하면 實諦는 偏眞의 空理로서 三界의 諸法은 본래 理 밖에 있어서 惑業의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惑을 아주 끊어 없애면 三界의 諸法은 空에 돌아가버리고 만다. 따라서 보살이 길이 三界의 生을 받아 나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혹은 일부러 惑을 남겨 둔다고도 하고 혹은 혹의 習氣의 세력에 의해 惑을 남겨둔다고도 한다. 그러나 別圓二敎의 뜻은 十界의 諸法은 中道의 원리로써 근본을 삼고 있으며 中道의 진리가 緣에 應해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번뇌를 끊음에 따라 中道의 體가 더욱 圓明해지게 되고 또한 十界의 諸法이 顯現하게 되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그 機緣을 따라주어 不思議한 應用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라고 하며, 이것을 中道應本이라 한다.
유식중도(唯識中道) : 一切의 萬法은 阿賴耶識중의 變한 바로서 非有非空의 中道라고 하는 法相宗의 說. 唯識의 理는 遍計所執性 · 依他起性 · 圓成實性의 三性으로 말하면 遍計는 空을, 依他와 圓成은 有를 뜻한다. 遍計를 고집하는 법은 모두 허망한 影像이고, 實有한 법이 아니므로 이것을 情有理無라 하고, 實性의 種子로부터 변하여 생긴 依他起의 諸法은 常住하는 實在는 아니나 無라고 할 수 없으므로 如幻假有라 한다. 그러나 圓成實性의 眞如는 眞空妙有의 法. 그 體는 空寂하지만은 眞實圓滿한 實在이다. 一切의 萬法은 모두 이 三性을 가진 것이므로 동시에 空 · 有의 양면이 있는 것으로 有라고도, 空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으므로, 이것을 空(無) · 不空(有)의 中道라 한다.
진공묘유(眞空妙有) : 偏空偏有의 반대로 곧 空에도 有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따라서 眞空과 妙有는 따로따로의 별개의 것은 아니다. 모든 것(五蘊)은 여러 가지의 조건(因緣)에 의존하는 것으로 實體가 없는 것(空)임과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거짓으로 존재하는 것(有)으로서 세간적 慣用상의 세계에서는 그 存在性이 인정되고 주장되는 도리(五敎章通路記卷二十三). 다시 말하면 非空의 空을 일컫는 말로, 소승에서 말하는 偏執의 但空이 아닌 것을 眞空이라 하고 非有의 有로서 범부의 妄計에 의한 實有가 아니므로 妙有라고 한다. 따라서 眞空이기 때문에 緣起의 諸法이 宛然하고 妙有이기 때문에 因果의 萬法이 一如함을 말한다. 또 唯識에서 세운 三性의 하나인 圓成實性에 갖추어 있는 空과 有를 동시에 말한 것.
언전중도(言詮中道) : 中道의 진리는 말을 여읜 경지(離言中道)이지만 그것을 밖으로 표현해 나타내기 위해서는 言語에 의한 설명이 있어야 함을 말한 것.
비유비공(非有非空) : 唯識論에서 說한 中道를 말함. 一切諸法에 3性(遍計所執性 · 依他起性 · 圓成實性)이 있다. 이 3性이 遍計하여 空이 되고 有가 아니므로 非有라 하고 依他 · 圓成은 有가 되고 空이 아니므로 非空이라 한다.
비유비무(非有非無) : 모든 법의 實相은 있지도 없지도 아니함. 有와 無의 중도임.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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