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가 오로지 꿈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인생은 꿈 같은 것이 아니라 그대로 꿈입니다. 꿈으로 한 일, 그게 사실로 한 게 아니고 모두 거짓말로 한 것입니다. 성불했다는 것도 역시 거짓말입니다. 성불 아닌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성불했다는 말이 있는 거지 성불해야겠다는 말까지도 그게 꿈입니다.
정말 실상(實相)자리에서 보면 본래 제대로 돼 있으니 누가 꿈꿀 사람도 없습니다. 조신 대사가 눈깜빡하는 사이에 눈 뻔히 뜨고 잠도 아니고 정신이 희미해 진 것도 아니고 부처님 법을 배우려는 이 생각 그대로 팔십이 돼 버린 것입니다. 이건 깜빡 잠자는 순간에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사실로 꿈에서 한 일이니 거짓말이고 헛일입니다. 그러므로 또 일 초 동안에 꿈을 꾸어서 그 일 초 동안에 했다는 그것도 거짓말입니다. 그러니까 견성을 했다는 것도 역시 그런 내용이고 나중에 아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확실히 체득해서 부처가 됐다는 것도 역시 그렇게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몽중지사(夢中之事)입니다.
그런데 몽중가외몽중몽(夢中可畏夢中夢)이라, 꿈 가운데 겁낼만한 꿈은 꿈 속에서 또 꿈꾸는 일입니다. 홋꿈도 겨운 일인데 꿈속에 또 한겹 더 들어가서 또 꿈을 꾸니 언제 생사를 면할는지 그것 참 큰일 날 일입니다. 몽중막작몽중몽(夢中莫作夢中夢)하소, 꿈가운데서 또 꿈꾸는 것은 아예 하지 마소. 헛 꿈이나 꾸라는 것입니다. 일초에 돈파생사몽(一超頓破生死夢)하면 하루 아침에 몽땅 생사대몽(生死大夢)을 탁 부수고 나면 산하진처역무몽(山河盡處亦無夢)이라, 산하대지 없어진 곳에 또한 꿈도 없어졌다. 전부 꿈만 가지고 마음 깨치는 글을 지은 시인데, 우리가 돌아다니는 이 현실이 모두 그런 형편이란 것을 표현한 겁니다.
그러니「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어떤 결정된 모양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할 뭐가 있느냐.」그런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다 그렇게 됐다고 하시지만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아닙니다. 또 부처님은 이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저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고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존재이고 제망중중(帝網重重)의 존재이고 무슨 짓을 해도 그게 완전합니다.
돌이 되고 바위덩이가 되어 가지고 길 가에 있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이 돌이 아닙니다. 또 돌 중에도 완전한 돌이고, 바위 그대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그런데도 두들겨 부셔서 가루로 만들어 봐도 돌가루지 그게 다른 것은 아닙니다. 제망중중도 없고 그것도 하나의 신통(神通)입니다. 이미 중생이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있고 부처님도 역시 그렇게 만듭니다. 우리와 같이 아무런 나무를 쪼개 봐도 오동나무는 오동나무고 감나무는 감나무이지 오동나무 속에 감나무 성질이 안 들어 있고 돌은 돌이고 나무는 나무입니다. 우리 중생과 똑같이 신통을 부립니다. 그렇게 나타나기도 하고 또 그러면서 그게 단불(單佛)이냐 하면 단불이 아니고 제망중중의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체가 곧 하나로만 보이고 하나가 곧 일체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내용이 있어서 또는 어떤 모양을 쳐들어서 부처님이「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 법이다 진리다.」그렇게 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정된 법이 없는데 그렇다고 결정된 법이 없는 것으로 말하고 말면 또 내용이 결정됩니다. 그러니까 측량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가 그러한 실재이고 실상자리입니다.
범부가 처음에「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다는데 그것을 얻어서 내가 성불해야겠구나, 견성해야겠구나.」하는 이런 이론을 확실히 믿고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고 또 그런 생각 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이론을 의지해서 그런 개념을 얻어야 비로소 성불할 수 있으니 성불할 수 있는 공부를 할 수 있고 견성을 할 수 있고 참선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역시 성불하는 마음이지 딴 마음은 아닙니다. 도둑질하는 마음도 아니고 협잡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성불하려는 마음이니까 그래도「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 아닌 것도 아니고 범부로써 마음 낼 수도 있는 겁니다. 또 그래 가지고 견성을 할 수 있는 거니까 그것이 또 한쪽 견성(見性)이지만 보살초심(菩薩初心)까지 이룰 수 있겠다 생각하고 애를 쓰고 그렇게 견성을 합니다.
그래가지고 사실「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체득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어떤 내용이냐 하고 정면으로 따져들려면 또 범부가 처음에 이론으로 발심한 것도 딱 맞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렇게 해 놓고도 그 발심을 가지고 근기(根機)가 약해서 참선하다가 미쳐 나가는 수도 있습니다. 뭐 어디 조금만 이상한 게 보이면「아, 이제 다 된 게 아니냐.」이래가지고 방향없이 덤비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 근사하게 발심을 가졌지만 그게 도깨비도 되고 미친 놈도 되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틀림없이 견성한다.」그렇게도 못 믿어집니다.이를테면 배우기는 똑같은 선생한테 똑같이 배워 가지고 열이 앉아서 참선한다 하더라도 열이면 열이 다 같이 옳게 견성을 하느냐 하면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열이면 아홉은 견성을 하고 하나는 잘못되는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다음 생에 어느 때인가는 잘못된 그 한 사람도 견성해서 성불하는 날이 있겠지만, 그러나 만일 그 법이 꼭 결정된 법이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다 금생에 성불해야 할 것이며 만에 하나라도 낙오자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근기에도 달려 있고 또 발심을 부족하게 한 데도 달려 있어서 그런 것도 알아야 합니다.
출전 : 마음에서 마음으로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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