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큰스님 말씀

삼매(三昧)는 마음의 정립

근와(槿瓦) 2014. 11. 23. 00:40

삼매(三昧)는 마음의 정립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그래서 먼저 참선(參禪)을 하든지 염불(念佛)을 하든지 하여 번뇌를 쉬고 망상을 끊어야 합니다. 번뇌망상을 쉬는 방법이 팔만사천 가지로 많은데, 자꾸 마음 공부를 해서 마음을 안정해야 합니다. 가령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의 염불일념(念佛一念)에 들어도 하루 종일 여섯 자 그 소리뿐이지 다른 잡념 망상은 다 없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을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었다고 합니다. <삼매>란 인도 말이고 우리 말로 하자면「마음이 똑바로 정해졌다. 제자리에 들어섰다」는 뜻입니다. 이리저리 끌리고 현상에 이끌리고 사랑에 이끌리고 돈에 목매어 번뇌 망상에 흔들리고 했는데, 이런 모든 것, 무엇을 보나 아무 생각이 없을 때, 그때엔 마음이 제자리에 따로 선 것입니다.「일체 생각없이 마음 저 혼자 아무 상대없이 꼭 제대로 마음이 섰다.」대체로 이런 의미를 가진 말이 <삼매(三昧)>입니다.

 

요새 정립(定立)이란 말을 쓰는데 인생관이 정립됐다, 국가관을 정립한다, 확실하게 결정을 해서 흔들리지 않고 튼튼하게 서 있다, 그런 뜻입니다. 불교에는 또 선정(禪定)이란 말이 있습니다. 참선을 하는데 다른 생각 하나도 없이 화두(話頭)만 뚜렷한 그것을 선정이라 하고 삼매에 들었다고 합니다. 염불이나 참선이나 진언이나 어떤 공부를 해서 내 몸뚱이도 없고 생사도 없고 그렇다고 자는 것도 아니며, 허망한 환상에 빠진 것도 아닌 깨끗한 정신입니다.

 

우리는 동서남북으로 마음이 갈갈이 찢겨져서 잠도 못자고 마음도 편치 못한데 이 마음이 딱 정립이 돼서 가장 깨끗한 기분, 잡념이 하나도 없는 또렷한 마음만 남아 있을 때, 마음이 정립되어 선정 삼매에 들어섰을 그 때에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안락한 때입니다.

 

잡념 때문에 잠을 못자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안 되고 그랬는데 이제 삼매에 들어서 망상이 끊어졌으니, 성인의 지위에 처음 들어섰다, 참여했다는 뜻으로 초과(初果)라 하고 입류(入流)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수다원>이라 합니다.

 

우리 마음이 동서남북 하늘 땅 천당 지옥으로 쏘다닙니다. 어디에 가면 좋은 음식 좀 얻어 먹을까. 어디 가면 좋은 사람을 만날까 이런 번뇌 망상으로 잠을 못자고 부산 갔다 대구 갔다 하며 이런 짓거리 저런 짓거리로 업(業)을 짓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번뇌의 마음을 버리고 대구 부산 생각하던 그 마음이 없어진 것 뿐이지 대구나 부산 생각하던 마음자리까지 어디로 간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니고 <마음자리>만은 영원히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종류에 들어섰다고 해서 어디로 들어갔거나 올라간 게 아니고 아무 데도 들어선 데가 없습니다.

 

미친 사람 역시 때가 되었는지 밤인지 낮인지 시간도 분간 못하고 밤새도록 떠들고 돌아다닙니다. 그래도 굶었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몸이 축 안 나고 그것도 마음 하나이기 때문에 기운이 그렇게 세어집니다. 누구든지 때려 뉘일 자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기운을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암탉이 성을 내서 달려들면 개도 도망을 가고 고양이도 도망을 갑니다. 마음으로 지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암탉이 모성애(母性愛)에서 무서운 마음으로 달려드는 때문입니다. 정신이 통일되면 마음에 힘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 것도 안 먹었으니 어쩌나 하는 이런 것 때문에 해탈이 잘 안됩니다. 견성을 해 놓고도 깊이는 못깨달아 앞으로 점차로 보임(保任)해 가지만 돈오(頓悟)를 해서 자꾸 올라갑니다. 처음에는 깨치고도 범부 때와 마찬가지여서 때가 되면 꼭 밥 먹어야 되고 밤 되면 자고 그렇지만 나중에는 그게 먹는다 굶는다 낮이다 밤이다 사흘 되어서도 아무 생각없이 되고 모든 사물을 무심코 대하게 되어 그 때는 상(相)이 상이 아닙니다. 산이라고 보면 다 산이고 물이라고 보면 태평양 바다가 되고 불이라고 볼 때는 그 놈이 큰 불바다가 되고 그러니 그때는 보는대로 마음 쓰는대로 다 되어 버립니다. 이 자리가 우주의 시간 공간의 본체이다 보니까 현상계는 다 본체의 그림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데, 도가 거기까지 안 가면 그렇게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소위 팔지보살(八地菩薩)을 6학년 졸업이라 치면 5학년 2학기쯤 되는 정도에 가면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 되어서 만물이 그 앞에서는 공해 버립니다.

 

이 자체는 본래 공한 것인데 참말로 있는 거라는 그 망상때문에 정말 있는 것 같이 되어 있고 바윗돌은 중력이 있는 건데 하는 생각 때문에 아무리 들려 해도 안 들리고 조그만 것은 한 손으로 들리고 그래집니다. 그런데 그 중량이 다 마음으로 정한 것이지 중량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진공입니다. 현실도 하나의 꿈인데 여기는 밝은 광명이 나오니 보이고 저기는 광선이 막혀서 캄캄하고 한 이것이 하나의 우리 망상이지 사실로 이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보리존자께서 이런 공한 도리를 잘 알고 계시고 구공자리까지 잘 체득한 어른이니까 부처님께「들어간 게 없고 오고 간 게 없고 얻었다는 생각이 없습니다.」하고 사뢰었던 것입니다.

 

마음 스스로는 그렇지만 또 그게 불입색성향미촉법(不入色聲香味觸法)이며 또는 저 물질 세계에도 안 들어갑니다. 만일 거기가서 좋다 궂다 생각 안 낸다면 그게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산 보고 좋다 궂다 하든지 남녀가 서로 보고 좋다 궂다 그러면 벌써 들어간 것이니 남자에게 들어가고 여자에게 들어가고 빠진 것입니다. 색(色)이란 형상 ․ 물질계 ․ 현상계니 그리고 과학적 ․ 철학적으로 따지는 생각은 무조건 다 내 버리고 나면 산 보고 산이라고 해도 산이란 생각도 산 아니란 생각도 없이 무심이 됩니다. 그리고 거기 소위 남이 날 보고「미친 놈아, 도적 놈아.」해도 나는 탓을 안하고 조금도 언짢아하지도 않으며 또 거룩하고 장하다고 오체투지(五體投地)해서 존경해 줘도 나는 좋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되면 거기 안 들어간 것입니다. 조금만 칭찬하면 좋아서 우쭐하고 욕하면 성내고 그러면 들어간 것입니다. 남이 나를 비방하고 욕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다 거짓말이고 헛소리인 것인데 무슨 입장이 곤란합니까. 육신에나 입장이 통하지, 말하는 마음자리한테는 입장이 없습니다. 칭찬하고 헐뜯는데 끄달리면 벌써 거기 빠진 것이고 그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벌써 누구한데 매여 가지고 이렇게 저렇게 넘어가는 것이고 요리조리 놀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요새 보면 일본서 나온 좋은 향을 절에서 많이 갖다 씁니다. 냄새맡기 좋다고 부처님이 좋아하시겠지 하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구린내나는 것을 가지고 불공을 한다 해도 싫다 안하고 향내를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불공하는 사람 자기 정성일 뿐이지 물질이 좋고 궂고는 아무 상관없는 겁니다. 같은 값이면 남이 좋아하는 것 가져오고 싶어서 그러지만 역시 수다원 초과만 증득해도 자기가 오고 가지도 않는 항상 그대로일 뿐 아니라 일체의 객관에도 안 들어갑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좋지도 않고, 궂은 음식이라도 싫지도 않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어떤 큰 부자가 부처님의 비구스님네와 바라문교의 승려를 초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바라문교는 우리 나라의 민속신앙이나 기독교처럼 창조주인 브라만 신이 있다고 믿는 외도(外道)였습니다. 이 장자가 바라문교의 거두들을 수백 명 초청하고 또 부처님 제자들을 오백 명 초청해서 점심 대접을 잘 했는데 그 나라 국왕도 잘 못먹어 보는 진미 공양을 차려놓고 가만히 지켜 봅니다. 거지 밥 주듯이 먹든지 말든지 줘 놓고 보지도 않으면 그건 또 실례이므로 가만히 지켜보는데 이 바라문들은 생전 처음 먹는 음식을 얻어 먹으니까 마음이 좋아서 얼굴에 희색이 만면해서 입도 뻥끗뻥끗하고 눈도 끔뻑끔뻑 코도 쯩긋쯩긋 하고 어떻게나 좋아하는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머리를 빡빡 깎고 누더기 옷을 입은 비구승들은 좋아서 먹는지 싫어서 먹는지 알 수 없이 담담하게 먹습니다.

 

장자는 그 다음에 먼저 왔던 그 분들을 한 번 또 청했습니다. 그 때는 꽁보리밥에다 텁텁한 된장 좀 지지고 시래기 좀 무치고 생비지에 간장 좀 하고 먹으라고 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바라문들은 생전 그런 건 구경도 못한 맛없는 음식이므로 억지로 숟가락을 놨다가 댔다가 하면서 상을 찡그리고 안 먹을 수 없어서 몇술씩 뜨고는 숟가락을 놓습니다. 거지 차림의 비구승들은 가만히 보니 역시 먼저 번과 같이 담담하게 한 그릇씩 반찬 하나도 안 남기고 싹싹 다 긁어 먹습니다. 그 얼굴을 보아도 좋은지 궂은지 모르겠고 아무런 표현이 없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나중에 공양을 마친 뒤에 비구승에게 물어봤습니다.「스님네들, 죄송합니다. 먼저 번의 초청은 제가 복을 지으려고 힘껏 차렸었는데 바라문 승려들은 그때 참 기쁜 마음으로 자시는 걸 제가 보고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스님네들은 억지로 먹는지 좋은 마음으로 자시는지 얼굴에 나타나질 않아서 하도 궁금하여 이번에 일부러 내가 시험삼아 그래 본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스님들은 담담히 다 잡수시고 반찬 한 젓갈도 안 남겨 놓았고 그것도 싹싹 씻어 그 물까지 다 마시고 그러니 그것 먹기 싫은 걸 조작으로 억지로 그렇게 잡수십니까. 좋은 음식을 자시든 나쁜 음식을 자시든 똑같은 얼굴로 자시는 그 내력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노장 비구승 한 분이 일어서며「비구승 입은 아궁이와 같습니다. 불 때는 아궁이는 썩은 놈을 때도 아무 말도 안하고 장작 좋은 것 폭탄터지듯이 잘 타는 놈을 때도 좋다고 안하는 것이나 한 가지입니다. 무심함으로 해서 그걸로 생사를 초월하려고 하는데 음식 좀 맛있으면 좋다고 까불고 나쁜 거 준다고 찡그리고 하면 도가 어디에 있고 언제 생사를 면하겠습니까.」그런 뜻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백용성(白龍城)스님이 통도사(通度寺) 건너 안산이 소금강이라 하여 경치도 좋은 데고 해서 거기 내원암(內院庵)에 계실 적입니다. 부산의 혜월(慧月)스님이 물 떠오라고 해서 물 떠오니까 그게 불법이라고 하듯이 그와 같은 도인입니다. 백용성 스님이 초심 학인들 데리고 수고를 한다니까 혜월 스님이 수박을 하나 사가지고 왔었습니다. 마침 오니까 용성 스님이 점심 상을 받아놓고 다시마 튀김을 입에 넣고 씹는 판이라 혜월 노장스님이 막 들어가 밥상 머리에 앉자마자 다짜고짜로「아 그거 맛이 어떻습니까. 맛이 좋습니까 나쁩니까.」그러니까「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용성 스님 대답이, 좋아서 먹는 것도 아니고 나빠서 먹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그럼 거 무슨 맛으로 먹습니까.」「그저 먹을 뿐입니다.」달리 또 어렵게 하는 법도 있지만 쉽게 남도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다 같은 도인들끼리의 경지이니 이렇게 마음이 통하고 말이 통합니다.

 

나도 한 번 흉내낸다고 지금부터 한 30년 전 해방 전입니다. 어떤 신도가 내가 항상 다 떨어진 장삼을 입고 다니니까 모시 장삼을 해 왔습니다. 내가 입을는지 안 입을는지 그것도 물어보지 않고 또 스님네 여러분을 청량리 청량사로 청해 가지고 음식을 차려놓고 대접을 합니다. 나는 무슨 사연인지도 모르고 따라가서 대접을 받았는데 나중에 장삼을 내 앞에 내 놓고 절을 하고 그럽니다. 그래도 나는 가만히 내버려 두고 앉아 있었습니다. 스님을 새로 정하고 불명이나 하나 지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그리해 준다는 말도 안 하고 안해 준다는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서 남의 말처럼 그것도 남의 말이니까 덤덤히 있으니, 거기 같이 갔던 스님들이 화를 내고 야단났습니다. 대보살 신도가 와서 절을 하고 이러는데 본체만체하고 앉아 있으니 네가 뭐 그리 대단하냐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면구해서 못 앉아 있겠다는 겁니다. 그래도 나는 말도 안 하고 있습니다. 칼을 가지고 나를 찔러도 그건 자기네 일이고 내 일이 아닙니다. 그런 뒤에 나를 대단히 좋지 않게 여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촉(觸)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부딪친다 대지른다 닿는다는 말인데 남과 서로 부딪치는 겁니다.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촉이 있지만 가령 남녀간의 촉이 제일 무겁습니다. 의복도 좋은 것 부드러운 것 비단을 입으면 몸뚱이가 촉감이 좋아지고 색정(色情)이 통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거친 걸 입으라는 겁니다. 전에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70노인이 아들 딸도 없이 홀로 사는데 어떤 처녀가 스스로 자원해서 시집을 갔는데 처음에 명주 옷을 해 주어서 색정을 회복시켜 가지고 아들을 낳아서 큰 인물로 길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수다원과만 얻어도 이런 촉법에 안 걸립니다. 그러나 이런 선정삼매(禪定三昧)를 얻어도 쓸데없는 객진번뇌(客塵煩惱)를 좋다 싫다 하는 그런 마음쓰는 작용은 그대로 있는데 그게 어디 나가고 들어가고 했습니다. 그건 어디 나가서 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 들어와서 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 그대로니까 또 그게 나가 버렸다 해서 어디 오고 간 것도 아니고 그 자체 그대로니까 본연한 자체뿐이란 뜻입니다.

 

 

출전 : 마음에서 마음으로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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