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말씀

수도승의 거처보다 간소한 간디의 방

근와(槿瓦) 2014. 11. 21. 00:34

수도승의 거처보다 간소한 간디의 방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델리를 한바퀴 도는 전장 10km의 환상도로(Ring Road) 동쪽 야무나 강 기슭에, 이 나라의 위대한 정치가들을 화장했던 드넓은 정원이 잇따라 있다. 샨티 바나(평화의 숲)에는 네루 집안 3대의 화장터가 있는데 1964년 인도의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가, 1980년에는 그의 손자 산자이 간디가 이곳에서 화장되었다. 그리고 1984년 그의 딸 인디라 간디도 이 정원 안에서 화장되었다.

 

이 평화의 숲에서 다시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인도 건국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가 1948년에 화장된 라즈 가트가 있다. 인도에서는 전통적으로 묘지를 쓰지 않고 힌두의 관습대로 타고 남은 재를 강물에 떠내려 보낸다. 간디의 유해도 화장하여 그 재를 야무나 강물에 띄웠었다. 묘지는 아니지만 위대한 혼을 기리는 기념장소로서,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인도 독립운동을 주도한 비폭력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1948년 1월 30일 힌두 극우파의 테러에 의해 쓰러졌다. 바로 그 다음날 세계 시민들의 애도 속에 그의 유해가 이 자리에서 화장되었던 것이다.

아무 장식도 없이 검은 대리석 아홉 조각으로 네모 반듯하게, 마치 어떤 건조물의 기단처럼 간디가 남긴 마지막 말 '오, 신이여!'가 힌두 문자로 새겨져 있을 뿐이다. 아무 장식도 없는 이 기념물은 마치 이 토대 위에 미래의 인도를 세우자는 뜻처럼 보인다.

정면 뒤쪽에 놓인 화로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 헌금함이 놓여 있는데 거기에는 'HARIJAN SEVA'라고 쓰여 있다. 천민(신의 백성)을 돕자는 뜻.

 

나는 이 장소가 너무나도 감격스러워 선뜻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한쪽에 정좌한 채 간디의 생애를 더듬어보았다. 그의 자서전에서 기억에 남은 몇구절이 어둔 밤에 별빛처럼 떠올랐다.

'마하트마의 비애는 마하트마만이 안다.'

'내게는 진리밖에 다른 신은 없다.'

'진리는 굳은 때는 금강석 같으면서도 부드러울 때는 꽃과 같은 것.'

'내 생애의 순간마다 나는 신이 나를 시련대에 올려놓는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말도 상기되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평등시하려면 우선 자기 정화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혼이 정결하지 못한 사람은 진리를 실현할 수 없다.'

 

라즈 가트에서 나와 한길을 건너 멀지 않은 곳에 '간디 기념박물관'이 있다. 이곳에는 마하트마 간디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와 유품, 사진, 도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소금의 행진 때 짚고 다녔던 그 대지팡이도 있고, 간디를 저격했던 총탄 세 발 중 한 개와 권총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총탄에 맞아 핏자국이 밴 남루한 옷과 화장에서 남은 재를 담았던 단지며 안경, 손때 묻은 몇권의 책, 잉크 빛이 바랜 일기장 등을 보고 있으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간디에 대한 친밀감이 솟아올랐다.

전시된 사진을 보면, 어떤 때는 민중의 환호 속에 둘러싸여 있고, 또 어떤 때는 홀로 쓸쓸히 고뇌를 하고 있다. 그의 말년, 힌두와 회교도 사이의 갈등과 대립으로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갈라서게 된 그간의 사정을 사진에 나타난 간디의 표정을 통해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말년은 마음 편할 날 없이 무척 괴로웠을 거라는 걸, 생애의 마지막을 보낸 집을 찾아가 그가 거처하던 방을 보고 나서 확인할 수 있었다.

 

1931년에 완성된 높이 42m나 되는 우람한 인도문(India Gate)에는 제 1차 세계대전 때 식민통치국 영국을 위해 전사한 1만여 명이나 되는 장병의 이름이 그 벽면에 새겨져 있다. 1972년 인도 독립 25주년을 맞아 이곳에 무명전사를 위해 영원한 불꽃이 타오르도록 시설해 놓았다. 이 인도문을 지나 남서쪽으로 한참을 더 가면 마하트마 간디가 생애의 마지막을 보낸 집이 있다. 택시 운전사도 그 집을 잘 몰라 물어물어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여는데 월요일은 쉰다. 입장료는 물론 없다.

 

마하트마 간디는 1947년 9월 9일부터 1948년 1월 30일까지 그의 생애의 마지막 1백44일을 이 집에서 살다가 갔다. 그가 거처하던 방을 보고 나는 놀라는 한편, 속으로 몹시 부끄러웠다. 생전에 거처하던 그의 방은 수도승의 거처보다 훨씬 간소한 데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내 자신 지닌 것이 너무 많아 몹시 부끄러웠던 것이다.

잔디가 깔린 정원으로 향한 유리창문이 있는 밝은 방, 베개, 그 위에 염주와 조그만 기타(힌두 성전 바가밧 기타)책, 기댈 수 있는 부대, 간소한 책상, 물레, 출입문 쪽에 세워둔 대지팡이 하나, 그가 신던 샌들 두 켤레, 그리고 책상 위에 세 마리 원숭이가 있는 장난감 하나, 이것이 살아 생전 간디가 지녔던 소유물의 전부다.

세 마리 원숭이는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원숭이와 귀를 막은 원숭이, 입을 가린 원숭이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교훈의 형상. 이 장난감 원숭이상을 책상 위에 놓아두고 바라보았을 간디의 그때 그 심정을 얼마쯤은 짐작할 것 같았다.

나는 이 방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방 한쪽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는 관리인인 듯한 여자에게 "사진을 찍어도 좋으냐"고 물었더니 "안된다"고 한마디로 거절을 했다. 이 때의 이 일이 나는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미리 물어볼 필요도 없이 모른 척 찍어놓고 나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됐을 것을.....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복잡한 절차를 거쳐 양해를 받아 찍든지, 아니면 좀 뻔뻔스럽게 덤비든지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그러나 비폭력의 성자가 살던 집에서는 차마 무례한 짓을 할 수 없었다. 그날 간디도 기도시간이 되어 정원 한쪽에 있는 기도소로 가다가 흉탄에 맞아 쓰러진다. 한걸음 한걸음 기도소를 향해 걸어가던 그 발자취와 생애를 마친 그 지점을 기념물로 가꾸어 놓고 있다.

기도소는 이곳에서 1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기도소 벽면은 웃옷을 벗은 채 편하게 앉아 있는 간디의 초상과 78년의 생애를 모자이크로 장식해 놓았다.

 

마하트마 간디는 <날마다 한 생각>중에서 이런 표현을 했다.

'기도에는 목소리가 아니라 진정이 필요하다. 진정 없이는 말은 의미가 없다.'

 

 

출전 : 인도기행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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