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말씀

더 깊은 산 속으로

근와(槿瓦) 2013. 9. 25. 01:48

더 깊은 산 속으로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면 우선 낡은 옷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모든 길과 소통을 가지려면 그 어떤 길에도 매여 있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안락한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이다.

 

법정은 1992년 4월 19일 강원도의 한 두메산골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가 그 시간에 그곳에 있으리라는 것은 그의 제자들도 그의 지인들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본인 이외에는.

 

"어느 깊숙한 두메산골에 화전민이 살다가 비운 오두막이 있다는 말을, 한 친지로부터 전해 듣고 결심을 단행하게 된것이다."

 

법정은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서 17년이나 지내온 불일암으로 돌아가지 않고 떠나온 것이다. 법정이 글이나 대화가 아닌 마치 젊은 날처럼 직접 조직을 구성하고 세상을 좀 더 올바르고 좋은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몸을 일으킨 데에는 단 한 번의 깨달음으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과정은 몹시 고단했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의 한 두메산골에서 법정은 조금 불편함을 느꼈지만 그것도 잠깐, 홀로 있는 그 오붓함에 빠져들었다. 시냇물소리와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어둠이 내리자 영롱한 별들이 쏟아질 듯 빛을 발했고 소쩍새와 머슴새가 번갈아가면서 밤새 울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머릿속이 아주 개운했다. 법정은 시냇가에 나가 흘러가는 물을 양껏 떠마셨다. 문명의 발톱이 할퀴지 않은 곳이라 흐르는 시냇물인데도 물맛이 아주 좋았다. 법정은 애초 이 오두막을 찾아갈 때는 사람이 거처할 만한 집인지 둘레가 어떤지 제 눈으로 살펴보고 한 이틀 쉬었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룻밤 쉬어보니 그대로 눌러 있고 싶어졌다.

 

법정은 별 준비 없이 그 오두막에서 꼬박 열하루를 지냈다. 그 오두막에서 지내는 동안 법정에게 다행하고 고마운 일은 무엇보다도 사람 그림자를 전혀 볼 수 없는 점과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미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에게 시달린 처지라 사람꼴 안 보니 얼마나 좋았는지 몰랐다."

 

법정을 산으로 보낸 것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변할 줄 모르는 한국의 상황이었다. 훗날 그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겼다.

"우리는 마약 중독자처럼 습관적으로 신문을 펼쳐보고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보도된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득보다는 해가 훨씬 많다. 특정 정당의 대권 후보 경선이 무엇이기에 언론에서는 날마다 머리기사로 다루고 까불어대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그런 보도가 우리들의 삶에 무슨 득이 될 것인가. 양식과 형평을 잃고 한쪽으로만 몰아가는 언론의 횡포가 우리들의 맑은 의식을 얼마나 얼룩지게 만들고 있는지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뒷날 산을 내려와 배달된 신문을 펼쳐보고, 솔직히 말한다면 이건 시끄러운 소음이요 쓰레기 더미구나 싶었다."

 

법정은 완전히 불일암에서 떠났다. 그리고 본인의 말에 따르면 "불일암에서 지낸 몇 년보다도 훨씬 신선하고 즐겁고 복된 나날을 누릴 수 있어 고마웠다."

 

살짝 틀어서 생각해 보면 함석헌 선생이 이 세상을 떠났던 1989년 이후 법정은 조용하게 보낼 날이 없었다. 그리고 주변에 해괴한 일도 빈번하게 벌어져 그토록 오랫동안 지켜왔던 불일암의 터전에 속된 말로 정나미가 떨어지고 있었다.

 

1989년의 여름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렸다. 일조량이 부족해 농사에 차질이 빚어질 정도였다. 법정은 일이 있어 그해 8월 하순 한 닷새 집을 비웠다가 돌아왔다. 그새 비가 들이쳐 부엌 아궁이에 물이 가득 고였다. 벌써 세 번째였다. 물을 퍼낼 통을 가지러 우물가로 갔다가 법정은 섬뜩한 광경에 온 몸이 굳어졌다. 우물가 바닥에는 뒤꼍에 놓아둔 돗자리가 깔려 있었고,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뒤꼍 선반 위에 상자에 담아서 끈으로 묶어둔 마루의 커튼이 그곳에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베개로 쓰인 듯 말려 있었는데 섬뜩한 것은 흰색 커튼에 빨간 입술연지가 수없이 찍혀 있었다. 곁에는 먹다만 빵 봉지와 음료수 깡통이 늘어져 있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순간 법정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맥이 풀렸다. 그는 서둘러 커튼을 빨았다. 법정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런 일을 치르고 나니, 정들여 살던 산에서 마음이 뜨려고 했다. 이 터에 인연이 다했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큰절에 일이 있어 일을 보고 밤 아홉시가 넘어 암자로 올라온 법정은 불일암 아래채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 그 안에 누가 있소?"

"어! 잠시만요."

 

여자 목소리였다. 법정은 커튼을 버려놓은 놈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법정은 격해지려는 감정을 가까스로 억제하며 재촉했다.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나오시오."

 

잠시 후 30대 중반쯤 되는 깡마른 몸매의 여자가 나타났다. 그 여자는 뭐라고 횡설수설하는데 제정신이 아니었다. 법정은 손전등을 하나 주면서 말했다.

"큰절 객실에 내려가서 자고, 할 이야기가 있으면 내일 올라와서 얘기하시오."

 

법정의 말을 알아들었을 터인 데도 여인은 머뭇거렸다. 법정은 하는 수 없이 불일암 아래 개울가까지 데려다주고 올라왔다. 법정은 돌아오자마자 아래채 문에 쇠를 채웠다.

법정이 불쾌함에 잠 못 이루고 있는데 한참 있으니 인기척이 났다. 불을 켜고 내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여자였다.

"왜 돌아왔소?"

"무서워서요. 그리고..."

여자는 법정의 물음에 뭐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잔말하지 말고 썩 물러나시오."

 

여자와 다음날까지 씨름한 법정은 불일암으로 올라오면서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우울함에 빠졌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해 초여름에도 서울에서 왔다는 미친 여자가 며칠 동안 애를 먹이다가 간 적이 있었다. 법정이 왜 왔느냐고 했더니, 그 여자는 고시 준비를 하는데 스님 곁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법정이 중 혼자 사는 데서는 그럴 수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이런 경우 자비심이라는 걸 내보이면 떠날 줄 모르는 것이 정신질환자들의 공통적인 심리였다. 법정은 하는 수 없이 눈을 부라리고 고함을 쳐서 노잣돈까지 얹어서 보냈다.

 

법정은 이듬해인 1990년 송광사 수련원장직을 내놓았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1년이 지난 1991년 보조사상연구원의 일까지 내려놓았다. 이해에 수련원장직과 보조사상연구원 모두에서 손을 씻었다.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면 우선 낡은 옷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낡은 옷을 벗어버리지 않고는 새 옷을 입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길과 소통을 가지려면 그 어떤 길에도 매여 있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안락한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이다."

 

그리고 마침내 1992년 강원도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법정은 오두막에 들어설 때 세속의 나이로 61세, 만 60세 무렵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 오히려 해온 것에 대해 애정이 깊어지는 나이가 돼서 길을 다시 떠난 법정은 앞서 말했듯 인간이 싫기도, 우리나라의 실정에 대한 불만족 등이 그의 발길을 되돌리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종교인으로서 종교란 무엇인가 원론적인 물음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서였다.

 

법정은 강원도 오두막에 들어서기 전에 조계종 종단이 시끄러워지자 문득 자신에게 왔던 오래된 편지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중 사형이자 전대 송광사 방장으로 있었던 구산 스님이 1982년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펼쳤다. 그 편지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부쳐온 것이었다.

 

「법정 아우님에게,

외국에 나와 한국불교를 바라볼 때, 세인들에게 지탄을 받거나 불훈에 배치된 일들을 아우님이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하겠는가. 이사간(이론과 실제 행동)에 여법수행과 여리 행해를 갖춘 사람이 누구인지, 산문 밖에서 보는 것과 산문 안에서 보는 것은 천지현격이네. 자네도 냉철하게 관찰하여 보시고 나성 고려사 (로스엔젤레스)로 답을 바라네.」

 

법정은 1980년대 후반 이후 송광사의 미국 분원인 고려사 등과 세계 각국으로 설법을 하러다니면서 견문을 넓혀 왔었다. 그리고 1991년에 들어서는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 일대의 문화유적답사와 한국 사찰에서의 초청 강연을 위해 출국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도여행을 통해 종교의 본질을 새삼 깨달았다. 그가 여행을 통해 얻은 종교의 본질은 그 전에 그가 정리해 온 것과 다르지 않았다.

 

"종교의 본질, 근본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따뜻한 가슴이에요. 영성이니 참선이니 하는 것은 모두 한가한 소리에요. 저 자신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가 느꼈던 부끄러움은 바로 그 자신의 출가수행자로서의 소임을 다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도 있었지만 자신이 속한 종단에 대한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강원도 오두막으로 떠나기 전 고속버스 안에서의 일이었다.

"아니, 보살님 아니십니까?"

"아이고, 법정스님을 이런 곳에서 뵙다니....."

 

우연히 만난 노보살은 봄을 맞아 여러 곳의 사찰을 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물었다.

"스님, 그런데 보살계를 많이 받으면 죽어서 좋은 데 간다면서요? 그래서 저는 가는 곳마다 보살계를 받고 있답니다."

"........."

 

법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계는 어떻게 살겠다는 다짐이요 맹세다. 그것은 온갖 모순과 갈등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들 삶의 질서요 청정한 생활규범이다. 계를 받는 것은 죽은 뒤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그 청정한 규범으로 개선하는 데 근원적인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법정은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종교를 믿는 그 보살도 문제였지만 불사를 주관하는 주최 측에도 문제가 있었고 자신은 그 당사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프로그램으로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이끌 것인지 연구하고 반성하기보다는 불사에 몇 사람이 동참했느냐에만 관심을 둔 결과였다.

 

법정은 그때 한참 지구촌을 시끄럽게 했던 걸프전쟁의 한 장면을 더올렸다. 그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앞두고 이라크의 후세인도 미국의 부시도 모두 제각기 자신의 종교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어떤 종교의 성전에는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신이 자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형상대로 (혹은 자신들의 상상력으로) 신을 창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한 것이 진실이고 사실이라면, 그의 피조물인 인간 또한 신처럼 완전한 존재여야 한다. 그러나 너나없이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도리어 자신들의 창조주의 신을 농락하고 욕되게 하는 일이 부지기수이다."

 

법정은 종교인으로서 시선을 다시 우리나라 종교에 대해 두고 있었다. 그는 다시 우리들에게 묻는다.

"오늘날의 절과 상당한 교회는 순수한 신앙보다는 세속적인 상업주의에 너무도 많이 오염되어 있다. 돈 없이는 절이나 교회에 나갈 수 없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마치 신심을 돈으로 재려는 경향마저 없지 않다. 우리는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듣는다. 종교가 무엇이고 깨달음이 어떤 것이며 선의 세계가 어떻다고 외치는 소리가 정기적인 집회마다 시끄럽게 넘친다.

그러나 곰곰이 귀를 기울여보면 얼마나 메마르고 공허하고 관념적인 소리인지 그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 스스로 깨달았노라고 자기 선전을 하는 사람치고 그에게서 깨달음의 행을 본 적이 있는가?"

 

출전 : 무소유의 행복(법정스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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