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적경-1460-292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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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界)이니, 왜냐 하면 저 법계는 분별하는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 속에서 사실대로 분명하게 알면 이것을 이름하여 계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이와 같이 나의 계[我界]와 법계는 평등하고 유정의 계[有情界]와 법계는 평등하며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와 법계는 평등하고 생사의 계[生死界]·열반의 계[涅槃界]와 법계는 평등하나니, 이와 같아서 나아가 허공의 계[虛空界]와 법계의 일체 법계가 모두 다 평등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이치 때문에 평등할 수 있느냐 하면, 공으로 인하여 평등하기 때문에 온갖 법이 평등하고 변함이 없이 평등하기 때문에 온갖 법이 평등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만일 어떤 이가 유위의 계[有爲界]로 증득하여 들어가고 무위의 계[無爲界]로 증득하여 들어감을 설명한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은 곧 한량없고 그지없으므로 만일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를 간택하여 법계에 증득하여 들어가면 이것을 이름하여 계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마땅히 부지런히 계법의 선교를 닦고 익혀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한 까닭에 처법의 선교[處法善巧]를 통달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처법의 선교라 함은 눈[眼]은 곧 공하고 나와 내 것[我所]이 없는 것이므로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눈의 성품을 사실대로 분명하게 알며, 나아가 뜻[意]은 곧 공하고 나와 내 것이 없는 것이므로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뜻의 성품을 사실대로 분명하게 아느니라.
보살마하살이 비록 모든 곳[處]에서 착하지 않은 일은 쌓아 모으지 않고 착한 일은 쌓아 모으며, 그리고 착한 것과 착하지 않은 것 가운데서 두 가지 모양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와 같이 분명히 알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처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눈과 빛깔의 처소에서 선교를 잘 통달하여 분명히 아는가 하면, 사리자야, 눈의 빛깔을 관찰하여 욕심을 여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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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욕심 여의는 것을 증득하려 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분명히 알면 이것을 곧 보살의 처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이와 같이 하여 귀의 소리와 코의 냄새와 혀의 맛과 몸의 접촉과 뜻의 법도 그러하며 곧 이 뜻의 법을 관찰하여 욕심을 여의지만 그러나 욕심 여의는 것을 증득하려 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분명히 알면 이것을 보살의 처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모든 부처님·여래는 미묘한 법을 말씀하시되 혹은 거룩한 곳[聖處]을 말씀하기도 하고 혹은 거룩하지 않은 곳을 말씀하기도 하느니라. 거룩한 곳이라 함은 도법(道法)을 받을 수 있는 곳이요 거룩하지 않은 곳이라 함은 도법을 멀리 여의는 곳이니, 보살마하살은 도에 편히 머물러서 도를 여의고 머무르는 모든 중생들에게 대비(大悲)를 획득하여 도의 처소를 버리지 않게 하느니라. 만일 어떤 보살이 이와 같이 분명히 알아 잘 통달하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처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려고 하면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 처법의 선교를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한 까닭에 제법의 선교[諦法善巧]를 통달했는가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에게는 네 가지의 행이 있어서 제법(諦法)의 선교에 드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하면, 괴로움의 지혜[苦智]와 쌓임의 지혜[集智]와 사라짐의 지혜[滅智]와 도의 지혜[道智]가 그것이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괴로움의 지혜라 하고 나아가 도의 지혜라 하는가 하면, 모든 온(蘊)에 대하여 본래 생김이 없는 지혜인 이와 같은 지혜를 괴로움의 지혜라 하고, 모든 염애(染愛)에 대하여 영원히 끊어 없애는 지혜인 이와 같은 지혜를 쌓임의 지혜라 하며, 온갖 것에 대하여 생김도 없고 무너뜨림도 없는 이와 같은 지혜를 사라짐의 지혜라 하고, 어느 때에나 반연의 대상인[所緣] 모든 법에 대하여 손해나 이익이 없는 이와 같은 지혜를 도의 지혜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 네 가지 진리[四諦]에 대하여 이와 같은 등의 지혜로써 분명하게 알면 비록 또 분명히 통달했다 하더라도 증득하려 하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모든 중생들을 성숙시키기 위해서이니, 이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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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 갖춤을 제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제법선교에도 또 세 가지가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첫째는 세속의 진리[世俗諦]요, 둘째는 으뜸가는 이치의 진리[勝義諦]며, 셋째는 모양의 진리[相諦]이니라.
사리자야, 세속의 진리라 함은 세간의 모든 언어 문자와 음성을 빌려서 설명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지니, 이와 같은 모양을 세속의 진리라 하느니라. 으뜸가는 이치의 진리라 함은 이른바 '만일 이곳에서는 오히려 마음조차도 작용하는 것이 아니거늘 하물며 다시 문자로써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 이와 같은 법을 으뜸가는 이치의 진리라 하느니라. 모양의 진리라 함은 이른바 '모든 모양이 곧 하나의 모양[一相]이요 이와 같은 하나의 모양은 곧 모양이 없는[無相] 것이다'라고 말하면 이것을 모양의 진리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세속의 진리에 대해서 중생들을 위하여 설명하되 게으름이 없고 으뜸가는 이치의 진리에서는 그 안의 것을 증득하려 하면서 물러남이 없으며, 저 모양의 진리에서는 본래의 성품을 깊이 통달하여 모양이 없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힘써 제법의 선교를 닦고 배운다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로서 부지런히 힘써 제법의 선교를 닦고 배우는 이는 또 하나의 진리[一諦]가 있을 뿐, 그 밖의 진리[二諦]가 없음을 사실대로 알아야 하리니, 어떤 것이 하나의 진리인가 하면 사라짐의 진리[滅諦]가 그것이니라.
사리자야,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 하나의 진리에서 더할 것이 없음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통달하시며, 이미 통달하신 뒤에는 더함이 있는 데에 처한 모든 중생들에게 이와 같은 하나의 진리에 대한 법을 자세히 설명하시어 그들이 닦고 배워서 더함이 없는 까닭을 깨치게 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어떤 보살이 이와 같이 알게 되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제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다시 제법의 선교를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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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자야, 제법의 선교란 모든 거룩한 진리[聖諦]를 잘 통달하기 때문이니, 어떤 것들을 거룩한 진리를 통달한다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苦聖諦]란 5수온(受蘊)의 그 성품은 진실로 괴로운 것이므로 이것을 괴로움의 진리라 하고, 보살마하살이 이 진리에서 5온은 모두가 괴로움의 모양이니, 저 괴로움의 모양이란 곧 공한 모양임을 통달하면 이러한 것을 곧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쌓임의 거룩한 진리[集聖諦]란 5수온의 원인은 수면(隨眠)인 애착[愛]과 견해[見]이니, 이것을 쌓임의 진리라 한다. 보살마하살이 이 원인의 법인 애착과 견해에 대하여 더함도 없고 취함도 없고 미혹됨도 없음을 분명하게 통달하면 이러한 것을 곧 쌓임의 거룩한 진리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사라짐의 거룩한 진리[滅聖諦]란 만일 5수온이 마지막까지 없어졌다하면 이것을 사라짐의 진리라 하나니, 보살마하살이 이 진리의 법을 관찰하여 과거에도 나지 않았고 미래에도 나지 않으며 현재에도 머물지 않음을 분명하게 통달하면 이러한 것을 곧 사라짐의 거룩한 진리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도의 거룩한 진리[道聖諦]란 만일 저 도(道)에 의거하여 괴로움의 지혜와 쌓임의 지혜와 사라짐의 지혜를 증득하여 그 밖의 지혜가 없으면 이것을 도의 진리라 하나니,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진리를 분명하게 통달하여 분별함이 없으면 이것을 곧 괴로움이 사라지는 행에 나아가는 거룩한 진리[趣苦滅行聖諦]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 진리에 대하여 지혜로써 관찰하고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관찰하여 분명히 알게 하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제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이 진리의 법에 대하여 또 마땅히 관찰하여 이와 같은 네 가지 진리를 알아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괴로움의 진리냐 하면, 모든 것에 대하여 느끼는 주체[能受]와 느낌을 주는 대상[所受]이 모두 괴로움의 진리이니, 이와 같은 것 속에서 잘 간택해야 하며 곧 이 지혜의 성품으로 잘 간택하여 깨달아 분명하게 통달하면 이것을 보살의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쌓임의 진리인가 하면, 만일 이 원인으로부터 모든 온(蘊)이 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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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일어나면 이것은 모두 쌓임의 진리이고 이와 같은 원인을 사실대로 분명하게 알면 이것을 보살의 괴로움이 쌓이는 거룩한 진리[苦集聖諦]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사라짐의 진리인가 하면, 모든 느낌이 영영 쉬어져서 느낌을 깨달음이 없으면 이것을 사라짐의 진리라 한다. 비록 느낌의 사라짐을 관찰한다 하더라도 증득하려 하지 않으면서 이와 같이 통달하면 이것을 보살의 괴로움이 사라지는 거룩한 진리[苦滅聖諦]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도의 진리인가 하면, 만일 느낌을 여의는 거룩한 방법을 잘 닦아 익히면 이것을 도의 진리라 하나니, 마치 배나 뗏목과 같아서 느낌을 구하지도 않고 도(道)도 구하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의 괴로움이 사라지는 행에 나아가는 거룩한 진리[趣苦滅行聖諦]라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사리자야,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실제로 관찰하면 고요한 선정에 의거하여 네 가지의 견해를 일으키려니와 그러나 이 네 가지의 견해는 최종의 깨끗함이 아니니, 만일 이와 같은 법을 잘 통달하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제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이 제법의 선교를 통달함에 있어서 만일 사라짐에서 증득하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나니, 생겨남이 없음[無生]을 관찰하는 지혜를 곧 괴로움의 지혜[苦智]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유위(有爲)로 생기는 연(緣)에 대하여 이것은 있다·없다·없지도 않다고 관찰하면 이와 같은 지혜를 쌓음의 지혜[集智]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모든 나는 것은 곧 남이 없는 것이므로 이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도무지 사라질 것도 없나니, 이 사라짐이 없는 지혜를 이름하여 다하여 사라짐의 지혜[盡滅智]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이와 같은 도(道)를 헤아릴 것도 없고 따라 찾을 것도 없으며 관찰할 것도 없으면 이것을 넓고 큰 지혜라 하나니, 이와 같은 지혜를 도의 지혜[道智]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이 진리의 법을 잘 정립하여 진리와 지혜에 대하여 머물러 집착[住著]함이 없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제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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