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마음..., “사람의 지(智)·정(情)·의(意)의 움직임. 또 그 움직임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상태의 총체. 감정.”...이렇게 국어사전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불교에서 정의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본 블로그의 “마음이란?”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상당한 분량에 걸쳐 설명되어 있습니다만, 그에 대해서는 나중 아래 부분에 카피하여 놓을 것이니 참고하시기 바라며, 지금부터는 가급적 불교적 측면에서가 아닌 제가 직접 경험한 부분과 이와 관련된 부분을 통해 이어갈까 합니다. 카테고리 “영혼에 대해서”에서 두-세 차례에 걸쳐 그 당시의 유체이탈 후의 장면과 이후 다시 육체로 돌아온 후의 장면을 세세하게 설명하여 놓긴 하였습니다만, 지금엔 좀 더 다른 측면으로 접근해 볼 까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6년 전인 35세 때였습니다.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고 하던 불교와는 전혀 무관했던 그런 시절이었었는데 성철큰스님의 말씀이 담긴 월간잡지에서 불교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부분을 간략하게 옮겨 놓은 저서중의 말씀을 읽어내려가다가 그만 격한 감정이 솟아올라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 이후부터는 오로지 틈만 나면 불서(佛書)를 구매하여 읽고 또 읽고 하는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술을 마시면 공부에 곤란하고, 고기도 먹으면 역시 공부에 곤란하다고 느낀 이후부터 그냥 끊어버리고 공부를 이어 갔습니다. 제법 퉁퉁하였던 몸매가 채식만을 하여 조금씩 줄어들면서 날씬해져 갔고 너무 날씬해진 나머지 주변의 동료들로부터 혹시 어디 아픈 데가 있는 것 아니냐 하는 우려섞인 말들을 수없이 들었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공부에 열을 올렸습니다. 불서(佛書)를 읽으면서 세상에서의 공부처럼 글을 읽고 외우고 하는 정도만으로는 제대로의 공부가 아니라고 판단이 들었고, 이에 여느 불교단체에서나 여느 절에서의 교육을 통함이 아닌 불서에서의 표현된 좌선방법을 얻어 읽고 그 설명대로 앉아서 좌선이라는 것을 하여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앉아서 하는 참선이 아닌 누워서 한번 해보면 어떨까 싶어 반듯이 누워서 호흡(복식)에 들어갔습니다. 누워보니 천정이 보였고 그 천정에 형광등이 켜져 있기에 그대로 형광빛을 주시(백열전구의 빛과는 달라서 그리 눈이 부시거나 하지는 않았음)하면서 호흡을 하여 가다가 형광등의 빛이 흩어퍼져 있었다고 표현해야 옳을 그 빛중에서 어느 일정 시간이 지나면서 작은 크기의 원이라고 해야할까 하는 것이 생겼고, 그 작은 원과 같은 빛덩어리와의 계속된 주시를 통해가던중 일정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작은 원이 점차 조금씩 커져갔으며 그 제법 커진 원과 밀당(밀고 당김)이라고 해야할까요...저의 주시된 초점과 원과의 거리가 좁혀졌다 멀어졌다 하는 실랑이를 벌이다가...어느 순간에 저의 주시된 그 뭐라고 할 수가 없는(지금 생각하여보면 나름의 의식이 아닌가 합니다) 그 무엇이 그 원형의 빛덩어리로 빨려들어갔다고 느꼈고, 이내 영혼의 몸이 되어 방의 중간 공중에 누워있는 형태로 둥둥 떠있게 되었음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방안을 휘 둘러보았는데 방안의 조명상태는 전반적으로 어두웠고 형광등이 켜져 있었던 상태였음에도 어두웠었습니다. 또한 방안에는 저의 낳은지 얼만안된 딸아이가 누워서 잠을 청하는 사방에 칸막이로 되어 있는 침대도 놓여있음이 보였고, 좌선하면서 약간의 더움이 느껴져서 방문을 조금 열어놓았던 것도 보였으며, 그 외에 방안에 있던 모든 물건들이 보였는데...영혼의 눈으로 본 그 모든 물건들이 어떻게 보였는가 하면...지금의 육안으로 보는 또렷함이 아닌 반투명정도이면서 흐릿하기도 하며 매우 엷게 보였다고 해야 하나요...여하튼 그 당시의 장면을 리얼하게 표현하자면 그러했습니다. 물론 육신의 몸과 비슷한 윤곽의 형체를 띤 영혼의 몸은 윤곽의 표면에서 광채를 발하고 있었으며, 잠시 방안을 훑어보다가 이내 “이러다가 뭔가 잘못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바로 육신의 몸으로 빨려들어갔으며 곧바로 형광등을 주시한 채로의 눈이 떠져있었던 육신이었습니다. 위와 같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저 나름대로 유추하여 볼 수 있는 것은, 마음이란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 라고 함에 대해서인 것입니다. 마음은 한자(漢字)로 심(心)이라고 표기합니다. 유식종(唯識宗)에서는 제팔식(第八識)에 대해 이 마음 심(心)이라는 것을 적용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팔식은 곧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하는 것이겠죠. 아뢰야식은 모든 것을 머금고 있다 하여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전오식(前五識), 제육식(第六識), 제칠식(第七識), 제팔식(第八識) 등에 공통으로 통하는 것은 식(識)이 될 것입니다. 식(識)은 우리가 육안(肉眼)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도 역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몸은 영혼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 나름의 몸이라고 표현되는 것이며, 영혼을 영적(靈的)인 차원이 아닌 지금의 현실에서의 육안(肉眼)으로 보는 측면에서 본다면 식(識)이라고 볼 수도 있음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비록 영혼의 몸은 형상을 갖고 있긴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라면..., 영혼의 몸이고 영혼의 눈이었기에, 현실에서의 사고(思考)와 즉 생각들과 모든 움직임 등을 주관한다고 판단되는 그 뇌(腦)의 존재 없이도 잠깐의 생각이 있었었고 보았던 방안의 장면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어가자면, 위에서 언급한 모든 식(識)들이 볼 수가 없고 만져질 수도 없으며 맡아질 수도 없고 들어볼 수도 없는 존재 아닌 존재이기에 어쩌면 당치도 않은 허무맹랑한 차원이 아닌 차원의 존재들이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육안으로 볼 수가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고, 식(識)도 마찬가지로 육안으로 볼 수가 없어서 허공과 같다고도 할 수 있음이며, 현실세계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으로 믿고 있는 그 뇌(腦)가 없이도 생각하고 보는 기능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비물질의 공간에서 이루어졌음에, 영혼의 눈으로 본 그 영혼의 몸과 그 자리에서의 공간은 역시 허공과 같다고 볼 수가 있는 것으로 가닥을 잡을 수가 있는 것이며, 이에 따라 물질의 세계가 아닌 비물질의 세계에서의 공간에서 생각하고 보는 기능이 발휘되었음은 그 무엇으로도 잡혀지지가 않고 그 무엇으로도 확인해 볼 수도 없는 허공중(虛空中)에 그런 기능의 존재가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이어갈 수가 있으며, 이러한 연속선상의 내용들을..., 모든 종류의 종자(種子)들을 함유한 것을 의미하는 존재성의 표현으로 나타내는 제팔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마음 심(心)에 해당시켜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불교에서의 그 식(識)들이 단지 글자만으로의 해석상의 존재감이 아닌 실재의 존재인 것임을 확실한 직접적-입증은 아니지만 간접적-입증(立證)인 유추의 방식으로 존재의 여부를 알아볼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말로 내뱉고 몸으로 행동하고 머리로 생각하는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에 따른 산물(産物)의 모든 것이 그냥 허공중에 흩어져버려서 없어지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자기의 마음에 소리없이 차곡차곡 쌓여 저장되는 것이 간접적으로나마 조금이라도 증명이 된다라는 측면이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여, 식(識)도 허공이며, 영혼도 허공이며, 비물질의 공간인 동시에 육안에서의 공간인 허공과도 차별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는 영적(靈的)공간에서, 보는 것과 생각함이 존재한다 라는 것에 대하여, 마음에 해당되는 제팔식인 아뢰야식을 포함한 모든 식(識)들이 단지 보이지가 않는다 함에 따른 상상력만의 그리고 그에 따른 글자로만의 존재 차원이 아닌 존재감있는 존재들임을 누차 말씀드리고자 함과 아울러, 항상 본 블로그에 올리는 내용들의 맨 위-오른편에 위치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의 절대적인 말씀과 위에서 언급한 내용속에 포함되어 있는 일부분인 “...영혼의 눈으로 본 그 모든 물건들이 어떻게 보였는가 하면...지금의 육안으로 보는 또렷함이 아닌 반투명정도이면서 흐릿하기도 하며 매우 엷게 보였다고 해야 하나요...”라는 내용과 연계시켜 나름대로의 상상과 생각의 깊이를 더하신다면 사구게(四句偈)인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에서의 말씀이 뜻하는 바가 어느 정도의 감은 잡히시리라 믿는 바입니다. 참고 마음(寶積經 迦葉品) 부처님이 카샤파에게 말씀하셨다. 「애욕에 물들고 분노에 떨고 어리석음으로 아득하게 되는 것은 어떤 마음인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과거의 마음이라면 그것은 이미 사라진 것이다. 미래의 마음이라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이고, 현재의 마음이라면 머무르는 일이 없다.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다른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형체가 없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고 인식할 수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것이다. 마음은 어떠한 여래도 일찌기 본 일이 없고 지금도 보지 못하고 장차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마음이라면 그 작용은 어떤 것일까. 마음은 환상과 같아 허망한 분별에 의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마음은 바람과 같아 멀리 가고 붙잡히지 않으며 모양을 보이지 않는다. 마음은 흐르는 강물과 같아 멈추는 일 없이 나자마자 곧 사라진다. 마음은 등불의 불꽃과 같아 인(因)이 있어 연(緣)이 닿으면 불이 붙어 비춘다. 마음은 번개와 같아 잠시도 머물지 않고 순간에 소멸한다. 마음은 허공과 같아 뜻밖의 연기로 더럽혀진다. 마음은 원숭이와 같아 잠시도 그대로 있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움직인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 여러 가지 모양을 나타낸다. 마음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서로 다른 의혹을 불러 일으킨다. 마음은 혼자서 간다. 두번째 마음이 결합되어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왕과 같아 모든 것을 통솔한다. 마음은 원수와 같아 온갖 고뇌를 불러 일으킨다. 마음은 모래로 쌓아올린 집과 같다. 무상한 것을 영원으로 생각한다. 마음은 쉬파리와 같아 더러운 것을 깨끗한 것으로 생각한다. 마음은 낚시바늘과 같아 괴로움인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한다. 마음은 꿈과 같아 내것이 아닌 것을 내것처럼 생각한다. 마음은 적과 같아 항상 약점을 기뻐하며 노리고 있다. 마음은 존경에 의해서 혹은 분노에 의해 흔들리면서 교만해지기도 하고 비굴해지기도 한다. 마음은 도둑과 같아 모든 선근(善根)을 훔쳐 간다. 마음은 불에 뛰어든 부나비처럼 아름다운 빛깔을 좋아한다. 마음은 싸움터의 북처럼 소리를 좋아한다. 마음은 썩은 시체의 냄새를 탐하는 멧돼지처럼 타락의 냄새를 좋아한다. 마음은 음식을 보고 침을 흘리는 종처럼 맛을 좋아한다. 마음은 기름접시에 달라붙는 파리처럼 감촉을 좋아한다. 이와 같이 남김없이 관찰해도 마음의 정체는 알 수 없다. 즉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얻을 수 없는 그것은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고 현재에도 없다. 과거나 미래나 현재에 없는 것은 삼세를 초월해 있다. 삼세를 초월한 것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은 생기는 일이 없다. 생기는 일이 없는 것에는 그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는 것에는 일어나는 일이 없다. 일어나는 일이 없는 것에는 사라지는 일이 없다. 사라지는 일이 없는 것에는 지나가 버리는 일이 없다. 지나가 버리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다. 죽는 일도 없고 태어나는 일도 없다. 가고 오고 죽고 나는 일이 없는 것에는 어떠한 인과(因果)의 생성도 없다. 인과의 생성이 없는 것은 변화와 작위(作爲)가 없는 무위(無爲)이다. 그것은 성인들이 지니고 있는 타고난 본성인 것이다. 그 타고난 본성은 허공이 어디에 있건 평등하듯이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타고난 본성은 모든 존재가 마침내는 하나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 본성은 몸이라든가 마음이라는 차별에서 아주 떠나 있으므로 한적하여 열반의 길로 향해 있다. 그 본성은 어떠한 번뇌로도 더립힐 수 없으므로 무구(無垢)하다. 그 본성은 자기가 무엇인가를 한다는 집착, 자기 것이라는 집착이 없어졌기 때문에 내것이 아니다. 마음의 본성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진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결국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점에서 평등하다. 그 본성은 가장 뛰어난 진리이므로 이 세상을 초월한 것이고 참된 것이다. 그 본성은 본질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없어지는 일도 없다. 그 본성은 존재의 여실성(如實性)으로서 항상 있으므로 영원한 것이다. 그 본성은 가장 수승(殊勝)한 열반이므로 즐거움이다. 그 본성은 온갖 더러움이 제거되었으므로 맑은 것이다. 그 본성은 찾아보아도 자아가 있지 않기 때문에 무아(無我)다. 그 본성은 절대 청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진리를 구할 것이고 밖으로 흩어져서는 안된다. 누가 내게 성내더라도 마주 성내지 않고, 두들겨 맞더라도 마주 두들기지 않고, 비난을 받더라도 마주 비난하지 않고, 비웃음을 당하더라도 비웃음으로 대하지 않는다. 자기의 마음속으로「도대체 누가 성냄을 받고 누가 두들겨 맞으며 누가 비난받고 누가 비웃음을 당하는 것인가」라고 되살핀다. 수행인은 이와 같이 마음을 거두어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출전 : 불교성전 심(心) : ① 범어 citta의 번역. 質多라 음역. 心法이라고도 한다. 어느 대상을 포착하여 思惟하는 작용을 하는 것. (1) 心王 및 心所法의 총칭. 色(物質) 또 몸(肉體)에 대한 것. 5蘊중에서 受·想·行·識의 4蘊이 여기에 해당된다. (2) 心王을 말함. 5位의 하나. 5蘊 중의 識蘊에 해당된다. 마음의 統一的 主體이다. 六識 또는 八識을 말한다. (3) 心·意·識의 3은 有部에서는 동일한 것에 다른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하고 唯識宗에서는 제8阿賴耶識을 「心」이라 함. 이것은 積集의 뜻이 있으므로 集起心이라고 불리기 때문이다. 곧, 아뢰야식의 種子를 熏習하여 축적하는 것을 뜻한다. 이에 대해서 前6識을「識」제7末那識을「意」라 한다. ② 肉團心·眞實心·堅實心이라 번역한다. 原語는 心·精神·心臟을 뜻하는 中性名詞로 樹木의 心과 같이 그 자체가 갖고 있는 本質, 中心이 되는 心, 모든 것이 갖고 있는 眞如 法性의 眞實心, 如來藏心을 말하는 것으로, 思惟하는 작용을 갖고 있는 心(緣慮心)이 아니다. 楞伽經 卷一에는 이 마음을 自性 第一義心이라 하고, 大日經疏卷四에는 肉團心(心臟)을 말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心」은 이것이니 생각컨대 般若皆空의 心髓精要라는 뜻이다. 密敎에서는 범부의 汗栗駄(肉團心 곧 심장)를 8葉의 연꽃(곧 心蓮)이라고 觀하여서 佛身을 열어서 나타내는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중생의 自性眞實心을 汗栗駄라 일컫는다. 아뢰야식(阿賴耶識) : 阿賴耶는 범어 alaya의 音譯. 阿梨耶識이라고도 쓰고, 약하여 賴耶·賴耶識이라고도 한다. 八識(眼·耳·鼻·舌·身·意·末那·阿賴耶의 각 識)의 하나. 九識(八識에 阿摩羅識을 더함)의 하나. 無沒識·藏識이라 번역하고, 제8識·本識·宅識 등 가지가지의 명칭이 있다. 無沒識이라 함은 諸法을 執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며, 藏識이라 함은 諸法展開의 의지할 바탕이 되는 근본 마음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또 八識의 최후에 두기 때문에 제8識, 諸法의 근본이기 때문에 本識이라고도 하고 따라서 諸識 중 특히 識主라고도 한다. ① 成唯識論 卷二에 의하면, 藏識의「藏」에 能藏·所藏·執藏의 三義가 있다. 이것을 賴耶三藏이라고도 藏三義라고도 한다. 能藏이라 함은 이 識이 諸法을 展開生起하는 種子(能力·原因)를 攝持하고 감춘다는 의미이며, 所藏이라 함은 이 識이 諸法을 生起하는 種子를 諸法으로 훈습하여 감춘다(藏)는 의미이며, 執藏이라 함은 이 識이 末那 곧「思量의 뜻」을 가지고 스스로를 愛著한다는 의미이다. 增一阿含經에 의거해서, 阿賴耶에 愛·樂·欣·憙의 四義가 있다고 說하는(이것을 四阿賴耶라고 한다)것도 , 여기서 말하는 執藏과 같은 의미라고 하겠다. ② 能藏과 所藏의 관계는, 阿賴耶識이 그 種子의 작용에 의해서 諸法 곧 우리들의 현실세계를 만들어 가매(이런 경우, 阿賴耶識의 相分 곧 對境으로서의 객관적 境界는 종자와, 眼·耳·鼻·舌·身의 五根에 의해서 드러나는 육체와, 山河大地 등의 器界이며, 이것을 種根器라고 한다), 만드(作)는 것에 의해서 逆으로 諸法에서, 다시 새로이 諸法을 창조하고자 하는 종자를 自己 중에 轉變·變異·成熟시켜, 감추어(藏) 간다고 하는 相依相待·展轉·緣起의 관계이고, 執藏은 이와 같은 아뢰야식의 轉變이, 諸法에 있어서 자기의 모습을 보려고 하는 아뢰야식 스스로의 愛著 작용을 原動力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執藏은 확실히 아뢰야식의 自相이다. 또 아뢰야식은 과거에 있어서의 善·不善의 業의 결과(곧 異熟·果報)에 의해 끌리므로 이 점은 아뢰야식의 果相이며, 그래서 아뢰야식을 異熟識(곧 果報識)이라 한다. 또 아뢰야식이, 모든 法을 生起하는 種子를 감춘(藏)다는 점에서, 그 因相으로서의 의미에 의해 아뢰야식은 一切種識(또는 種子識)이라 불리워진다. 이를 自相·果相·因相을 賴耶의 三相이라고 한다. 唯識敎學은 이상과 같은 구조아래 일체를 아뢰야식의 變現으로서 唯心論을 樹立한다. 이것은 일체를 아뢰야식에서 緣起한 것이라고 說하기 때문에, 이것을 賴耶緣起라고 한다. 제칠식(第七識) : 末那는 意라 번역하고, 思量의 뜻을 말한다. 末那識은 八識의 하나로, 제七識이라고 하며 思量을 본질로 하는 識이다. 제六意識과의 혼란을 피하기 위한 것도 범어를 음역해서 末那識이라 한 하나의 이유가 된다. 이 식은 我癡·我見·我慢·我愛의 4煩惱와 相應하여, 제八阿賴耶識의 見分을 항상 審思하여 「我·我所」라 하고 집착하는 恒心思量을 성격으로 하고, 我執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染汚意라고 하며, 思量識·思量能變識이라고도 하는데 舊譯에서는 執著識이란 뜻으로 阿陀那識이라고도 한다. 無始이래로 미세하게 相續하여, 힘들이지 않고 자연히 일어나며 그 성질은 有覆無記라고 했다. 제육식(第六識) : 意識의 다른 이름. 의식은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의 六識 가운데 마지막인 여섯 번째이므로 이렇게 이름함. .....의식→六識(眼識·耳識 ·鼻識·舌識·身識·意識)의 하나. 제6識이라고도 한다. 意根을 의지하는 곳으로 하여 法境을 認識·推理·追想하는 마음이지만, 실은 과거·미래·현재의 三世의 一切法에 대해서 작용하기 때문에 廣緣의 識이라 한다. 전오식(前五識) : 다섯 가지 감각 작용. 唯識宗에서는 마음의 작용을 여덟로 나눈 가운데서 객관의 대상을 감각 지각하는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의 五識을 일컫는 말.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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