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의 행(원)

보현의 행(行)

근와(槿瓦) 2014. 8. 15. 00:20

보현의 행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은 녹야원에서 또다시 영취산으로 돌아와 많은 보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때 보현 보살은 회좌(會座)의 대중을 향하여 말하기를,

“불자들이여, 보살은 능히 모든 것에 이름이 없는 것, 자성(自性)이 없는 것, 오는 일도 가는 일도 없는 것, 일체가 무아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보살은 세제(世)에도 제일의제(第一義)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름자에 집착하지 않고 제일의제를 따라 좋은 방편을 가지고 모든 법을 설하여 중생을 인도하는 변재(辯才)는 다함이 없다. 글자 없는 경지에서 글자를 끌어내고 글자의 성(性)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리고 일체의 말을 깨쳐 중생을 이끌며, 의심을 멸하고 때에 알맞게 법우(法雨)를 뿌리는 것이다.


불제자들이여, 보살이 만약 진실한 법을 듣고도 놀라지 않으며, 겁내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즐겁게 따르고 마음을 편히 갖는 습성이 있다면, 그는 음향인(音響忍), 즉 음성에 따라 각을 얻은 것이다. 또 만약 적멸에 따라서 일체의 법을 평등하게 보며 청정하고 올바른 마음으로 모든 법을 분별하고, 깊이 모든 법의 성에 들어간다면 그는 순인(順忍), 즉 모든 법의 자성(自性)에 합당한 각을 얻은 것이다. 또 더 나아가서 법의 생멸을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즉 법에는 생멸이 없다. 생하지 않기에 멸함이 없다. 멸함이 없기에 다함이 없다. 다함이 없기에 번뇌의 때(垢)를 멀리 하고 있다. 때를 멀리 하고 있음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지지 않기에 움직이지 않음을 안다. 그것이 즉 번뇌의 적멸한 경계이며 거기에는 욕도 없고 행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드디어는 대원(大願)이 되는 것이다. 즉, 불토의 장엄에 안주하는 것이다. 이것이 제 3의 무생법인(無生法忍)것이다.


불제자들이여, 보살과 부처의 음성은 안에서도 밖에서도 안팎에서도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깨닫고, 그 음성을 안에서도 밖에서도 또는 안팎에서도 찾지 않는다. 그것은 메아리처럼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일단 음성이 드러나면 법시(法施)를 내리게 하는 것이라고 깨닫는다. 이와 같이 깊이 음성의 비밀에 들어가서 음성에 사로잡히는 오류를 버리고 능히 일체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1) 헤아릴 수 없는 법은 마음에서 일어나 그 허무함은 환상과 같다. 마법사가 갖가지의 현상을 나타내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도 실은 모름지기 무와 같음을 알게 된다. 부처는 모든 것을 환상으로 보시지만 무량한 서원을 세워 도사(導師)가 되어, 대비는 더욱더 널리 중생을 청정하게 만든다. 청정은 환(幻)이 있으므로 환상의 힘에 지탱되어 이 세간에 나타난다.


(2) 지혜는 허공처럼 충만하여 모든 장애를 제거한다. 허공에 형체가 없으니 잡견(雜見)도 없다. 세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며, 지혜 역시 참으로 이와 같은 것이다. 허공에 자성(自性)이 없어서, 단견(斷見)은 있을 수 없다. 처음도 중간도 끝도 없으며 다른 모양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인즉, 지혜도 허망한 모양을 취하지 않으며 다함도 없고 한이 있을 수도 없다.


(3) 하나하나의 털구멍에 한없는 청정한 국토가 있고, 한없는 보배로써 장엄식된 한없는 이름이 있어 한없는 법을 설한다. 그렇지만 부처는 설하기 어려운 노래를 설하고 그 노래는 끊이지 않으며, 풀 수 없는 법륜을 굴리어 하나하나의 법륜을 설하지 못한 가르침을 밝히셨도다. 자성도 설하기 어려우며 부처님을 배알하기란 역시 힘들고 하나하나의 방편도 알기 어렵다. 그저 능히 따르므로써 불성에 드는 것이로다.


불자들이여, 부처는 안으로 커다란 자비심을 품고 일체의 중생을 버리는 법이 없다. 마음으로 번뇌의 괴로움을 여의고, 조용히 항상 중생을 관하신다. 부처님은 모든 악마를 쳐부수고 모든 외도를 항복 받으시며 일체의 세계에 나시어 중생들을 인도하여 보는 자를 기쁘게 하고 이익을 가져다 준다. 부처는 바른 믿음으로 귀의하는 자가 있으면 즉각 그 중생 앞에 현현하며 항상 중생들의 선근을 기르고 교화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자재의 힘으로써 항상 몸을 바꾸어 중생들을 위하여 널리 법을 설하신다. 또 부처는 눈의 경계로써 귀의 경계의 불사(佛事)를 이루고 귀의 경계로써 경계의 불사를 이루고 육근이 원융(圓融)하며 일체의 경계에 있어서 불사를 행하신다.


또 부처님은 다함이 없는 공덕의 장(藏)이다. 흔히 중생에게 신심을 일으켜 즐겁게 하며, 아직도 도심(道心)을 발하지 못한 자에게는 지혜를 갖추게 하며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깨닫게 하신다. 혹은 중생들을 가르치되 세간의 어지러움을 싫어하시며 불심에 따르게 하고 혹은 수명이 짧고, 세간에는 낙이 없음을 가르쳐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를 염하면 부처를 뵐 수 있음을 설한다. 또 많은 괴로움을 제거하고 청정한 부처의 도를 일깨워서 일체의 중생을 섭수하며, 깊은 부처의 경계에 들게 하며 방일한 자로 하여금 청정한 계율을 가지게 한다.


지옥의 중생은 부처의 광명에 비추게 하여 수명을 다하고, 도솔천에 태어날 때 미묘한 제신들의 음성을 듣는다. 오오, 여러 신의 아들이여, 가서 부처를 배알함이 마땅하다. 비유컨대, 이 세간이 끝날 때에는 수미산마저 불타 없어지는 것처럼 오욕의 마음도 부처를 염하면 모두 불타 없어진다. 그러니 은혜를 알고 부처를 공경하며 받들어야 한다. 은혜를 모른다면 목숨이 끊어져 다시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 너희들은 옛날 지옥에 있다가 광명의 은혜를 입어 이 천계에 태어났으므로 그 선근(善根)을 기르도록 해야 한다.“


그때 제신들은 이 소리를 듣고 기뻐하며 묻기를,

“보살은 어떻게 잘못을 뉘우칩니까?”


“신의 아들이여, 업장(業藏)은 밖에서 들어와 마음 속에 모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뒤집혀진 생각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중생들의 탐, 진, 치의 업은 실체가 없다. 어디에서 구하더라도 얻을 수가 없다. 소리가 나지 않으면 멸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일체의 업도 또한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도 아니다. 중생은 업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 비유컨대, 청정한 유리 거울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모양들이 나타나지만, 그 모양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사라지는 곳도 없는 것과 같이 모든 업도 체(體)가 없어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다. 게다가 능히 갖가지 과보를 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알게 되면 참으로 청정하게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라 이름할 수 있다.”


지난 세상을 돌아보면 수많은 부처님이 큰 빛을 발하여 시방 국토를 비추셨다.


이리하여 보살은 원하기를 ‘나는 세상의 등불이 되고, 공덕으로써 몸을 기르고 모든 부처의 지혜를 얻으리. 모름지기 세간 중생들은 탐, 진, 치의 불에 타는 끝없는 악도(惡道)의 괴로움을, 나는 그들을 위하여 말하리.’

이렇게 원을 세우고 견고하여 물러서지 않으며 완전히 보살의 행을 닦고 장애 없는 힘을 다하리라.


그때 부처의 미간 백호상(白毫相)으로부터 부처의 법을 밝게 빛내는 광명을 발하여 무한한 빛과 함께 두루 일체 세간을 비추고 한없는 중생들의 심안(心眼)을 일깨워 모든 악도의 괴로움을 멸하고, 되돌아와서는 대중의 둘레를 돌아 어떤 보살의 이마로 들어갔다.


보살은 기쁨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대중을 대신하여 보현 보살(普賢菩薩)에게 말하기를,

“보현 보살이시여, 청컨대 넓고 한없는 여래 성기(如來性起)의 법을 시현해 주십시오.”


보현보살이 대답하기를,

“불제자들이여, 부처의 성기법(性起法)은 헤아릴 수 없다. 그것은 한없이 많은 인연을 가지고 깨달음을 얻어 세상에 출현했기 때문이다. 즉 한없는 지혜를 일으켜 일체의 중생을 버리지 않고, 한없는 오랜 시간을 두고 깊이 바른 마음을 가지고 선근을 닦고, 한없는 자비심을 가지고 중생을 제도하고 한없는 행을 닦아서 대원을 버리지 않고, 게다가 한없는 방편의 지혜를 자아내어 법의 실의(實義)를 설한 것이다. 비유컨대, 커다란 구름이 비를 뿌리는데 그 수가 어느만큼인가를 어떤 사람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불제자들이여, 내리는 비가 일미(一味)일지라도 그 장소에 따라서 차별이 있는 것과 같이 부처님의 대비(大悲)의 일미인 물도 여러 중생들의 기근(機根)에 따라서 그 응화(應化)가 일정하지 않다. 이 부처의 성기(性起)의 법은 모든 부처의 평등한 지혜가 일으키는 바이다. 그리고 그 일미의 지혜는 한없는 공덕을 낳게 되는 것이다. 중생들은 ‘이런 공덕은 부처라야 능히 지을 수 있는 것이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러나 이것은 부처의 힘으로써 짓는 바는 아니다. 한 명의 보살일지라도 일찍이 부처의 밑에서 선근을 심지 않으면 그 적은 지혜마저 얻을 수 없다. 그저 모든 부처는 일체의 중생들을 위해 선지식이 되므로, 그들은 이에 의지하여 뛰어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중생들은 공덕을 짓는 것도 없고 짓는 사람도 없다.


불제자들이여, 대자(大慈)는 중생의 의지처가 되며 대비는 중생을 구한다. 이것은 부처의 방편의 지혜에 의한 것이며, 방편의 지혜는 부처에 의한다. 그리고 부처는 의지하는 곳이 없이 장애가 없는 지혜의 빛을 발하며 널리 시방(十方) 세계를 비춘다.


불제자들이여, 부처의 성기(性起)에 대한 법은 그 행에 한이 없으므로 공덕에도 한이 없다.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으므로 평등하기 때문에 허공과 같다. 다함이 없기 때문에 일체의 중생들에게는「아」도「아소」도 없다. 변전하는 일이 없으므로 일체의 국토는 다함이 없으며, 물러나는 일이 없으므로 미래제(未來際)가 끝나는 일이 없다. 평등하게 일체의 제법을 보매 부처의 지혜에는 장애가 없게 된다. 본원(本願)을 회향(廻向)하여 자유자재로 기쁘게 하므로 평등의 정각(正覺)은 중생을 풍요하게 하는 것이다.


법에 변함이 없고 공(空)하여 더러움이 없으며 허공과 같다.

모든 것은 동일하니 부처 또한 공으로써 유(有)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바른 법은 모든 언어의 도를 여읜 고요함이라. 경(境)도 또한 언어의 도를 떠나 하늘에 새 발자국이 없는 것처럼 고요함이라.

고요한 가운데 가이없고 원에 보답하여 청정한 몸이 되어 크게 불가사의를 나타내도다. 그러니 깊은 부처의 법을 알고자 생각할진대, 허공처럼 그 마음은 청정해지리라.

허망한 생각과 사악한 견해를 여의고 청정한 도를 닦는다면, 마침내 청정한 마음을 얻을지니.


불제자들이여, 비유컨대 해가 떠서 어둠을 멸하고 모든 것을 길러 냉기를 제하며, 하늘을 비추어 중생들에게 보시하고 못을 비추어 연꽃을 피게 하며 모든 빛과 모양을 나타내어 일체의 세간사를 이룩하게 한다. 왜냐하면 태양은 한이 없는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부처도 또한 그와 같이 악을 멸하고 선을 길러 지혜의 광명은 사람들의 어둠을 제하고 대자비는 그들을 풍요하게 하여 각에 이르게 한다.


(1) 해가 뜨면 처음에는 높은 산을 비추고 다른 산에 미치며, 유곡(幽谷)과 고지를 비추면서 세계의 대지에 이르는 것. 부처의 지혜의 빛도 먼저 수승한 마음를 지닌 중생을 비추고, 차츰 모든 중생들에게 이르노라.

그렇다고는 하나 지혜의 빛에는 ‘내가 비춘다’는 생각 같은 것이 없고, 청정한 태양이 세상에 떠올라도 눈먼 사람은 볼 수 없으나 몸을 포근히 하며 즐거움을 얻는 것과 같도다. 부처의 태양도 또한 세상에 나와 신(信)의 눈이 어두운 자에게도 베푸니, 혹은 음성을 듣고 혹은 빛에 닿으면 마침내 지혜까지도 얻게 되는도다.


(2) 부처의 음성, 저절로 법계에 충만하여 들리지 않는 곳이 없도다.

중생들이 만약 그 음성을 들었다면 길이 망집의 바다를 벗어나리.

비유컨대 계곡에 의하여 부르면 메아리가 들려 오는 것과 같도다. 그것은 갖가지의 연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듣는 자도 동일할 수 없도다.

그렇지만, ‘나는 갖가지의 소리를 낸다’하고 메아리는 생각함이 없도다.

소리는 여러 사람들에 따라 한없는 계속의 소리를 내어 구원하도다.


불제자들이여, 부처의 마음은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오직 한없는 지혜로써 알 수 있을 뿐이다. 이 부처의 지혜는 모든 지혜의 의지처로서 따로 의지처가 없다.


비유컨대, 허공은 만물의 의지처이지만 그곳에는 의지처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비유컨대, 사대(四大)의 해수는 사천하(四天下)의 땅과 80억의 작은 주(州)들을 윤택하게 하고 있으므로, 사람이 만약 물을 구한다면 도처에서 얻지 못할 바 아니지만, 대해는 결코 ‘우리는 모든 것에 물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이 부처의 지혜도 모든 중생들의 마음을 윤택하게 하고 있으므로, 중생들이 만약 각기 가르침의 도에 의하여 선근을 닦는다면 모두 지혜의 광명을 얻는다. 그러나 부처는 결코 ‘나는 중생들에게 지혜를 준다’고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일은 없다.


불제자들이여, 부처의 지혜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왜냐하면 중생들에게 부처의 지혜가 구족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들은 생각이 전도되어 부처의 지혜를 알지 못한다. 염을 여의면 일체지, 무상(無相)을 알게 되는 지(智), 장애 없는 지혜가 생길 것이다. 다만 어리석은 자는 전도된 상념에 가리어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심신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뿐이다. 부처는 장애 없는 천안(天眼)에 의하여 일체의 중생들을 돌보고 말씀하시기를 ‘기이하도다. 기이하도다. 무엇 때문에 부처의 지혜를 모름지기 몸 속에 갖추고서도 중생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들에게 가르쳐서 성인의 도를 깨닫게 하며 길이 망상을 여의고 부처의 지혜가 체내에 스며 있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알려 주어야겠다’고 하셨다.


(1) 비유컨대 진여(眞如)는 다함이 없어,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손잡이가 없으면 이를 구(求)함에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부처의 경계는 무량한 것. 삼세(三世)를 떠나 그 성(性)은 모두 한 가지인 것을.

새가 허공을 나는데 백, 천년을 지나더라도 가는 곳, 가지 않는 곳 모두 헤아리기 어려운 것과 같음이라. 사람도 만약 한없는 시간을 지나 부처의 행을 설하고 펼지라도, 설하는 바나 설하지 않는 바, 모두 헤아리기 어려움과 같도다.


(2) 비유컨대, 금시조왕(金翅鳥王)이 허공에 안주(安住)하면서 용궁을 내려다보고 날개를 치며 바닷물을 헤치면서 명을 다하려고 용을 붙드는 것과 같은 것. 부처는 부처의 행에 안주하면서 지(止)와 관(觀)의 날개로써 애욕의 해수를 헤쳐나가, 선근(善根)이 원숙한 자로 하여금 번뇌의 바다를 벗어나게 하도다.

또는 해와 달이 허공을 돌아서 중생을 안락하게 하는데도, 조금도 그 상념이 없는 것처럼, 모든 법계(法界)에 노닐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도 내가 능히 제도한다는 상념이 없도다.


불제자들이여, 부처의 지혜는 모든 의리를 알고 의심을 제거하며 이변(二邊)을 여의고 중도에 머무르며 모든 문자와 언어를 뛰어넘어 일체 중생들의 마음, 행, 번뇌, 습성을 알고 일념으로 삼세(三世)의 모든 법을 안다. 비유하면, 대해에 일체의 색상(色像)이 찍힘으로 인(印)이라 이름하는 것처럼, 부처의 정각을 이룬 지혜의 바다 속에도 일체 중생들의 신념이나 감각이 모름지기 나타나며, 그렇지만 또 나타나는 곳도 없다. 그러므로 부처를 일체각(一切覺)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불제자들이여, 부처는 정각을 얻었을 때 방편으로써 일체 중생들에게 차등이 없는 몸을 얻게 하고 일체의 법, 일체의 국토, 일체의 삼세(三世), 일체의 부처, 일체의 언어, 일체의 법계와 아울러 열반계에 차등 없는 몸을 얻게 하신다. 그리고 음성도 마음도 몸과 같은 것이다.


불제자들이여, 일체의 문자와 일체의 언어는 모두 법륜을 굴리는 것으로 보라. 그것은 부처의 음성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또 법륜은 메아리와 같은 것이라고 알라. 그것은 오는 곳도 가는 곳도 없다. 그것은 진실한 법성(法性)이기 때문이다. 또 일체의 음성이 한 가지 소리임을 알라. 부처는 그것에 의하여 법륜을 굴린다. 그리고 부처의 법륜을 굴리려면 주재자(主宰者)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불제자들이여, 부처는 다만 중생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하여 세상에 나타나 근심하고 슬퍼하고 사모하며 멸도를 시현하셨다. 그러나 부처는 세상에 나오는 일도 없거니와 멸도에 드시는 일도 없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는 법계에 상주하기 때문이다.


불제자들이여, 설사 해가 세상을 비춰 모든 그릇의 물에 그림자를 깃들게 하더라도 ‘나는 일체의 청정한 물에 깃든다’는 상념은 없다. 그때 그 그릇이 깨어지면 해의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것은 해의 잘못이 아니다. 물이 담긴 그릇이 깨어졌기 때문이다. 부처의 원만한 지혜의 해는 일념에서 나타나 모름지기 일체의 세계, 일체의 중생들을 비추고 때를 제거하며 항상 청정한 마음의 그릇 속에 나타난다. 다만 깨진 그릇, 마음이 탁한 중생들은 항상 부처의 법신을 보지 못하므로, 특히 부처의 돌아가심을 보고 경악하여 비로소 구원을 바란다. 그러므로 부처는 멸도를 나타내 보이신다. 그러나 기실, 부처는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영구히 돌아가시는 일도 없다. 또 비유하면 세계에 큰 불이 일어나 초목을 태워버림에 만약 풀이나 나무나 상가나 마을이 없는 곳에 이르면 그 불은 저절로 꺼지고 만다. 그렇다고 세간에 불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부처도 일체의 세계에 구원의 불을 태우고 구원의 풀이 없는 곳에 멸도를 나타내지만, 세간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린 것은 아니다.


불제자들이여, 부처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는 자는 삼세에 걸쳐서 사람의 행(行)에 들며, 그 선과 불선의 행에 들며, 일체의 중생들을 구제하고 일체의 중생들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기 때문에 대비(大悲)의 마음을 일으킨다. 또 지니는 모든 것을 희사하기 때문에 보시를 첫째로 삼고 일체의 불법을 구하기 때문에 일체지(一切智)를 염하는 것을 주로 한다. 그리고 염하기를 ‘깨달음은 마음을 근본으로 한다. 마음이 청정하면 능히 모든 선근(善根)이 모여 충만한다. 만약 마음이 자재롭다면 위 없는 지혜를 갖추어 큰 덕행을 이루고 모든 원을 충만케 하며 일체 중생들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을 보현의 행이라 일컫는다.


불제자들이여, 부처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는 자는 경계(境界)의 자재(自在)를 갖는다. 곧 각의 경계에 있으면서 망집의 경계에 나타나고, 열반의 정적한 경계에 있으면서 번뇌로 어지러운 중생의 경계를 버리지 않는다. 그는 대비와 지혜의 원을 일으켜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혼탁한 세간에 태어나 욕의 구속에 빠져 처자나 권속을 양육하게 된다. 그것은 한쪽에 치우쳐 중생을 가르치며 베풀고 싶기 때문이다. 마음에 염하기를 ‘나는 이 번뇌 속에 있더라도 지혜, 해탈, 선정 등에 미혹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부처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는 자는 일체의 법을 걸쳐 자재를 얻고 지혜에 안주하며 행을 닦아 각의 언덕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또 그의 마음은 일체의 지혜를 갖추어 견고하고 정직하며 크고 장엄하게 꾸며져 있기 때문에 어떤 난처한 일이나 악인 속에 있더라도 그 일체지의 보배를 잃는 일이 없다. 비유컨대, 정광(淨光)이라 이름하는 수주(水珠)는 탁한 물 속에 있더라도 성(性)이 변하지 않을 뿐더러, 그 탁한 물을 모두 맑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불제자들이여, 그에게는 불태우는 힘이 있다. 곧 교화를 성취하므로 중생은 세계를 태운다고 일컬으며, 더러움을 태워 남김없이 청정하게 하므로 법의 세계를 태운다고 일컬으며, 모든 행을 다하므로 부처를 태운다고 일컬으며, 일체 중생들의 고통을 제거하고 무상의 즐거움에 안주하므로 대자비를 태운다고 일컬으며, 또는 일체의 법에 대하여 밝게 알고 있으므로 일체의 제법을 태운다고 일컫는다.


불제자들이여, 그는 또한 많은 손을 가지고 있다. 일념으로 부처의 정법을 믿고 지니므로 믿음의 손이다. 구하는 자가 있으면 기쁘게 해줄 수 있으므로 제물에 집착하지 않는 손을 갖는다. 한없는 공덕을 길러 항상 즐거움으로 일체의 부처를 공양하는 손이 있다. 중생들의 갖가지 의혹을 제거해 주므로 잘 이해하고 많이 듣는 손을 가진다. 번뇌의 흐름에 표박하는 중생들을 구하므로 각의 경지에 안주하는 손이 있다. 번뇌의 어둠을 제거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법의 광명을 나타내므로 지혜의 보배인 손을 가지고 있다.


불제자들이여, 그는 법을 구하기 때문에 마음은 곧고 허위와 아첨을 여의고 정려하여 게으르지 않고 신명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자생(資生)의 밑천을 구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이익을 위하는 일을 하지 않고 다만 중생들의 번뇌를 끊고 그들을 돌보기 위하여, 또한 깊은 지혜를 얻기 위하여, 갖가지 의혹을 없애기 위하여, 불법을 충만하게 하기 위하여 법을 구한다.


불제자들이여, 그에게는 10종의 악마가 덮친다.


첫째, 신심마(身心魔)로서 몸과 마음에 집착되는것.

둘째, 번뇌마(煩惱魔)로서 번뇌에 감염되는 것.

셋째, 업마(業魔)로서 장애를 일으키는 것.

넷째, 심마(心魔)로서 오만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

다섯째, 사마(死魔)로서 이 세상에서 떠나는 것.

여섯째, 천마(天魔)로서 마음이 오만하고 방일한 것.

일곱째, 선근을 잃는 마로서 마음에 뉘우침이 없는 것.

여덟째, 삼매마(三昧魔)로서 선정(禪定)에 집착하는 것.

아홉째, 선지식마(善知識魔)로서 인도하는 스승에게 헛되이 집착하는 것.

열째, 정법의 지혜를 알지 못하는 마로서 모든 원을 낳지 못하는 것 등의 열 가지이다.


불제자들이여, 이러한 것들의 마는 방편으로써 재빨리 멀리 해야 한다.

불제자들이여, 또 그에게 많은 마업이 있다. 지혜를 잃고 선근을 닦으며 악심을 가지고 베풀며, 노여움의 마음으로 계를 지니고 성질이 악한 사람이나 게으른 자를 버리고, 마음이 흐트러진 무지한 중생을 경시하고 싫어하는 자 등은 모두 마의 업이다. 또한 정법에 인색하고 법의 그릇인 사람을 꾸짖으며 이양(利養)을 탐하고 자진하여 남을 위해 법을 설하는 것도 또한 마의 업이다. 좋은 친구를 멀리하고 나쁜 친구를 가까이하며, 정법을 헐뜯고 가르침을 듣지 않으며 들어도 찬탄치 않는 것도 마의 업이다. 만약 업의 스승이 있어서 법을 설해도 공경하는 마음이 없이 ‘나의 설은 좋고, 그의 설은 좋지 않다’라고 하는 것도 마의 업인 것이다. 세간의 학문을 배우고 또한 그 그릇이 아닌 중생에게 깊은 법을 설하는 것도 마의 업이다.


불제자들이여, 그에게는 아직도 10종의 부처의 경계가 나타난다.


첫째는 무착불(無着佛)로서 열반계에도 생사계에도 집착되지 않고 능히 미세(迷世)의 안식에서 각을 얻는 것.

둘째는 원불(願佛)로서 도솔천에 태어나서 반드시 부처가 되는 경지를 얻는 것.

셋째는 업보불(業報佛)로서 한량없는 공덕으로써 몸을 장엄하는 것.

넷째는 지불(持佛)로서 죽은 후일지라도 불법에 의지하는 힘을 갖는 것.

다섯째는 열반불(涅槃佛)로서 이 세간에 멸도를 시현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일으켜 신속히 불법에 들게 하는 것.

여섯째는 법계불(法界佛)로서 육신이 멸하여도 오히려 다함이 없는 법계로써 몸을 삼는 경지.

일곱째는 심불(心佛)로서 대자비를 쏟아 중생들로 하여금 자비 가운데 부처가 있음을 알려 주는 것.

여덟째는 삼매불(三昧佛)로서 항상 생사의 번뇌 중에서도 괴로워할 줄 모르고 삼매에 마음을 머물게 하며 열반의 정적에 이르는 경지.

아홉째는 성불(性佛)로서 중생들에게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의 이치를 깨닫게 하고 무상의 지혜를 체득하게 하는 것.

열째는 여의불(如意佛)로서 마음 내키는대로 중생들 앞에 나타나서 법을 설하고 교도할 수 있는 것 등의 10종이다.


불제자들이여, 부처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는자가 만약 게으른 마음을 일으켜 부처의 정법을 버리고 탐내어 지겨움을 모른다면 마에 사로잡힌 자인 것이다. 또 자신만을 구할 것을 생각하고 번뇌를 여읜 적정만을 원하여 실제의 인생을 버리는 것도 마에 사로잡힌 자이다. 모든 중생들을 인도하여 가르칠 마음을 버리고 정법 속에 의심을 일으키고 불법을 헐뜯는 것도 마에 사로잡힌 자이다. 이러한 것은 당장 멀리 해야 한다.


불제자들이여, 그가 만약 모든 것은 무상한 것으로 괴로움이며, 일체의 법은 무아(無我)이고 열반은 번뇌의 적멸한 바임을 안다면, 법에 섭수된 자인 것이다. 또 바르지 못한 생각이 갖가지 망집을 일으킨다. 이 바르지 못한 생각이 멸하고 망집도 멸한다는 것을 안다면 법에 섭수된 자인 것이다. 일체의 국토, 일체의 법, 일체의 중생, 일체의 세간은 부처의 경계임을 알아 일체의 염을 끊고 일체의 집착을 버려 열반에 따른다면 법에 섭수된 자인 것이다.“


(1) 그렇게도 깊은 지혜의 바다에 정법 일미(一味)의 물이 있어 각의 보배가 충만하여도 중생은 헤아리지 못하니,

바른 마음, 청정하고 또한 넓게 일체의 지혜를 조수로 하는 보살의 바다는 설할지라도 다함이 없네. 보살은 수미산(須彌山), 높게 세간을 뛰어넘어 신통과 삼매의 봉우리는 견고하여 움직이는 일이 없도다.


(2) 깊은 마음은 금강과 같고 삼보의 믿음은 무너지지 않아야 하네. 불을 일으키고 법의 천둥을 진동시켜 중생을 제도하는 도다.

청정한 법을 성으로 하고 지혜를 울타리로 삼으며 참괴(愧)를 해자로 삼아 공해탈(空解脫)의 문을 나와 삼계(三界)에 비길 데 없는 깃발을 세워 모든 마를 멸각시키리.


(3) 보살 청량(淸凉)의 날, 필경공(畢竟空)의 허공에서 노니며, 빛을 드리워 삼계를 비추고 모든 중생의 심법(心法)을 드러내리. 헤아릴 수 없는 방편의 땅을 중생에게 베풀면서 청정한 자비의 물로써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끄도다.

사나운 지혜의 불, 번뇌와 그 습기를 태우고 바람과 같이 달리면서 시방에 불사를 이루었네.

여의주 같은 보배로써 중생들의 빈핍을 떠나 지혜는 금강과 같아서 모든 사견을 부수도다.


(4) 보살은 공덕의 강물과 같아 바른 도의 흐름을 따라, 또한 생사의 다리가 되어 사람을 제도하며 쉬지 않도다. 보살은 정법의 배와 같아 모든 소원의 바다에 뜨며 지혜는 충만하여 중생들을 피안으로 건너게 한다. 보살은 청정한 동산과 같고 정법은 해탈의 꽃이어서 그 열매는 중생을 즐겁게 하고 또한 그 지혜는 궁전이니라.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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