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문(還滅門)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寂滅에 돌아가는 문이란 뜻. 수행한 공덕으로 말미암아 번뇌를 끊고 生死의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의 본원으로 향하는 部門의 인과를 말하는 것.
참고
유전문(流轉門) : 중생이 無始以來로 무명의 번뇌로 선악의 업을 지어 고락의 果를 받는 것. 곧 惑業苦가 차례로 緣起되는 迷惑의 因果를 말함. 四諦 가운데 苦·集의 2諦는 流轉門에 해당하고 滅·道의 二諦는 苦·集을 끊는 還滅門에 속한다.
무명(無明) : 범어 avidya의 번역.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不如實智見을 말함. 곧 진리에 어두워서(迷) 사물에 통달치 못하고 사물과 현상이나 도리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不達不解不了) 정신상태로 愚癡를 그 내용으로 하며, 十二緣起의 第一支가 無明支이다. 또 俱舍宗이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心所(마음의 작용)의 하나로 하는 癡라 한다. ① 十二緣起의 無明支를 해석하는데 阿含經에서는 佛敎의 진리(四諦)에 대한 無智라 하고 渴愛와 表裏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有部에서는 十二緣起를 三世兩重의 因果로 說한 것으로 보고 無明을 과거의 煩惱의 位에 있어서의 五蘊을 가리킨다고 하며, 모든 煩惱중에 이 無明의 작용이 가장 무겁고 돋보임으로 無明이라고 이름하였다. 唯識宗에서는 二世一重의 因果로 해석하고 無明과 行과 識 등의 五果의 種子를 끌어 들이는 能引支로 보고, 그 가운데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癡로서 善惡의 業을 일으키는 것을 無明이라 한다고 했다.
혹업고(惑業苦) : 또는 惑業事·惑業生이라고도 함. 迷의 인과를 나타내는 말. 惑은 탐·진·치 등의 번뇌, 業은 惑을 근거로 하는 선악의 행위를 짓는 것, 苦는 이 業에 의하여 받게 되는 과보인 三界에 유전하는 것. 이것은 중생이 윤회한 순서를 제시한 것으로 三道라 함.
연기(緣起) : ① 모든 존재(有爲法)는, 여러가지 조건 곧 인연에 의해서 잠정적으로 그와같은 모습으로 성립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조건 여하에 따라 여러가지로 변화하므로(無常), 독립적 존재성을 가질 수 없고(空·無我), 서로 의존한다. 이와 같이 인연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는 존재를 緣生, 緣生法, 또는 緣已生, 緣已生法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의 因과 조건인 緣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된다는 것으로 獨立·自存적인 것은 없으며 제 조건·원인이 없으며 결과(果)도 없다는 說이다. 나아가 일체 현상의 生起消滅의 법칙을 연기라 한다. 그 간단한 형태는 중아함경 권47에「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그것이 없고, 이것이 생기면 그것이 생긴다. 이것이 멸하면 그것도 멸한다(因此有彼·無此無彼·此生彼生·此滅彼滅)」는 등으로 표현된다. 이와같이 중생이 생사·유전의 고통을 받는 경우의 연기는 流轉연기, 수행하여 해탈로 향하는 연기를 還滅연기라고 한다. 원시불교 이래의 四諦說(4종의 근본진리)도 일종의 연기설로서 苦·集 2諦는 유전연기, 滅·道는 환멸연기를 나타낸다. 연기설의 일반적 형태는 無明·行·識·名色·六入·觸·受·愛·取·有·生·老死의 12항목(十二緣起)이 순차적으로 발생·소멸하는 것을 나타내는 12연기이다. 아함경에「緣起를 보는 자는 法을 보고, 法을 보는 자는 緣起를 보고, 緣起를 보는 자는 佛을 본다」고 說하는 것과 같이 연기는 법과 동일한 것으로 불교의 중심사상이다. 따라서 연기에 대하여 원시불교 이래 대승·소승 불교에서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다. 이렇게 볼 때 緣起의 思想은 불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세계관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阿含經典의 十二緣起說(十二因緣)을 처음으로 하여, 唯識宗의 賴耶緣起說, 楞伽經등의 如來藏緣起說, 華嚴宗의 法界緣起說, 眞言宗의 六大緣起說 등 불교의 역사를 통해 일관하고 있는 사상이다.
인과(因果) : ① 원인과 결과를 말함. 결과를 낳게 하는 것이 因이고 그 因에 의해 생기는 것이 果이다. 시간적인 因果 관계로 볼 때 因은 앞에 있고 果는 뒤에 있으므로 因果異時라 한다. 그러나 묶은 갈대를 서로 의지해서 세우는 것은 넓은 의미의 인과관계이니 이와같은 인과관계에서 보면 因果同時이다. 唯識派에선 種子에서 종자가 생기는 관계는 因果異時이고 종자에서 現行이 생기고 現行에 의해 종자를 熏하는 관계는 因果同時라 한다. 六因·五果 중에서 異熟因과 異熟果와의 관계 및 同類因·遍行因과 等流果와의 관계는 어느 것이나 因果異時로 俱有因·相應因과 士用果와의 관계는 因果同時이다. 能作因과 增上果와의 관계는 양쪽에 다 통한다. 또 同類因과 等類果와의 관계는 前生의 자기가 因이 되어 後世의 자기를 낳게되는 관계임으로 이것을 自類因果라 한다. ② 우리의 行爲(業에 대해서 異時의 因果를 세울 때 善의 業因에는 반드시 善의 果報가 있고 惡의 業因에는 반드시 惡의 果報가 있다. 이것을 善因善果·惡因惡果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善因樂果·惡因苦果라고 해야 될 것으로 본다. 善한 業을 因으로 善한 業이 생겨 善業이 계속할 경우도 있다. 이는 바로 善因善果이다. 善惡의 業因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에 相應하는 苦樂의 果報가 있다. 因果의 이치가 엄연해서 조금도 흩어지지 않는 것을 因果應報라고 한다. 因果의 이치를 무시해서 인정치 않고 邪見에 빠지는 것을 因果를 撥無한다고 한다.
사제(四諦) : ① 諦는 범어 satya, 파리어 sacca의 번역으로 진리란 뜻. 자세히는 四聖諦·四眞諦라 하며 4가지의 틀림없는 진리를 말한다. 四諦는 대체로 12緣起의 뜻을 교리적으로 조직화한 것으로 원시불교의 교리의 대강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最勝法說’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석존 최초의 설법(곧 初轉法輪)에서 설한 것이라고 한다. 4가지 진리의 제1은 「迷惑의 이 세상은 다 苦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며, 제2는 「苦의 因은 구하고 탐하여도 그치지 않는 執着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다. 제3은 그 執着을 완전히 끊어 없애 버림으로 苦를 멸한 때가 궁극의 理想境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며, 제4는 「이와 같이 苦가 없는 열반경에 도달하기 위하여 八正道의 옳은 修行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가르침이다. 이 4가지는 순서와 같이 苦聖諦·苦集聖諦·苦滅聖諦·苦滅道聖諦라고 불리운다. 이를 약하여 苦諦·集諦·滅諦·道諦라고도 한다. 이 苦·集·滅·道의 四諦 가운데 苦와 集은 迷妄의 세계의 因果를 나타내고, 滅과 道는 證悟의 세계의 인과를 나타낸다. 四諦의 이치가 三段階인데 여기에 각각 4가지의 行相을 붙여서 說할 때 이것을 三轉十二行相이라고 한다. 곧 三轉이란 제1轉 「이것은 苦諦(集·滅·道諦)이다」라고 하는 示轉, 제2轉은 「이 苦諦(集·滅·道)는 徧知(永斷·作證·修習)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勸轉, 제3轉은 「이 苦諦(내지 道諦)는 이미 徧知(내지 修習)되었다」고 하는 證轉이 그것이다. 12行相이란 이 三轉에 각각 眼·智·明·覺(옳은 智慧에 의한 이해를 뜻하는 4개의 同義語)의 四行相을 假設하고 각각의 諦에 12行相이 있다고 한 것. 그러나 다른 견해에 따르면 眼·智·明·覺을 고려하지 않고 一諦에 三轉이 있어 四諦全體로서 모두 12行相이 있다고도 해석한다.
업(業) : 범어 karman의 번역. 羯磨라 音譯한다. 造作의 뜻. 行爲·所作·意志에 의한 身心의 활동. 意志에 의한 身心의 생활을 의미한다. ➀ 일반으로 業을 身·語·意의 三業으로 나눈다. 有部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이러한 것을 하려고 하는 뜻이 意業이고, 그 의지를 신체적 행동과 言語的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 身業과 語業(口業이라고도 한다)이라고 한다. 또 業을 意志의 활동인 思業과 思業이 끝나고서 행하는 思已業의 二業으로 나누는데 이 경우, 思業은 意業이고, 思已業은 身·語 二業이다. 三業으로서의 작용의 本體(業體·業性)에 대해서, 有部등에서는 意業은 思(意志), 身·語業은 色法(物質的인 것)이라고 하고, 經量部나 大乘에서는 모두 思(意志)라고 한다. 불교 본래의 입장은 후자라고 생각된다. ➁ 有部등에서는 物質的인 것을 本體로 하는 業(色業) 곧 身業과 語業으로, 表(作 ·敎)와 無表(無作·無敎)가 있다고 한다. 表業은 밖으로 표현되어 타인에게 보일 수 있는 것, 無表業은 無表色이라 이름 지어지는 일종의 色法(보통의 물질과 같이 粗雜하지 않다)을 本體로 하고, 강한 善惡의 業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그 業은 身表業과 語表業과 및 定등이다. 이 無表業에 3종이 있다. 受戒와 定(어느 것이나 다 善)에 의해서 일어난 律儀와, 습관적이고 특히 강한 결단을 가지고 한 惡業에 의해서 일어난 바의 不律儀와, 그 이외의, 때에 따라 선악의 업에 의해서 일어난 非律儀非不律儀(處中의 無表)의 3종이 그것이다. 律儀無表는 戒를 버리고 定에서 나오기까지 계속되고, 그 밖에 無表는 특별한 障害가 없는 한 일생동안 계속된다. 이들 無表 중에서 善한 無表에는 惡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고, 惡한 無表에는 善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어서, 각기 그 사람의 後天的 성격을 형성한다고 한다. 또 身·語의 각기 無表 및 無表業에 意業을 더하여 五業이라고 한다. ➂ 선악의 업을 지으면, 그것에 의해서 그에 상응한 고락의 갚음(果報·異熟)이 생긴다. 이것을 業因에 의해서 業果가 생긴다고 한다. 非善非惡의 無記業은 果를 끄는 힘이 없다. 이 業因과 業果의 관계를, 有部에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業 그것은 三世에 實在하는 것으로서, 업이 현재에 있을 때 이것이 因이 되어서 어떠한 未來의 果를 끌것인가가 결정되고(이것을 取果라고 한다), 업이 지나가 버림으로부터 果에 힘을 주어서 果를 현재에 이끌어 낸다(이것을 與果라고 함). 또한 經量部에서는, 業은 순간에 없어져 버리는데, 그 業은 果를 생하는 종자를 識위에 심어 주어, 그 종자가 果를 끌어 일으킨다고 한다. 이 종자의 思想은 有部의 無表業說과 같은 것이다. ④ 業을 여러 가지로 분류한다. 總體로서의 일생의 果報(갚음)를 이끄는 業. 곧 人間界라든가 畜生界에 태어나게 하는 강한 힘이 있는 業을 引業(牽引業·總報業·引因)이라 하고, 人間界등에 태어난 자에 대해서 개개의 구별을 주어서 개체를 완성시키는 業을 滿業(圓滿業·別報業)이라고 한다.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