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산거사(方山居士)에게 보낸 글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편지에 「생각이 잠깐 일어날 때에 그 화두를 드니 이 공(空)이 더욱 미묘합니다」고 하셨습니다. 옛 스님은 말하기를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더디게 깨닫는 것이 두렵다」고 했습니다. 또 「생각이 일어나거든 곧 깨달아라. 깨달으면 곧 없어질 것이다」라고도 했으며, 「생각은 모든 환경을 반연하는데 마음은 분별을 아주 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검고 흰 것을 잘 분별하고 이익과 손해를 살펴 그 구경(究竟)에 이르면 다행이겠습니다.
주신 편지에 청하신 뜻이 못내 간절하여 다시 번거롭게 말합니다.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생사라 합니다. 생사에 다다라 반드시 힘을 다해 화두를 드십시오. 화두가 순일해지면 일어나고 멸함이 없어질 것입니다. 일어나고 멸함이 없어진 곳을 고요함(寂)이라 하고, 고요한 속에서 화두가 없어진 것을 무기(無記)라 하며, 고요한 속에서도 화두에 어둡지 않는 것을 영지(靈知)라 합니다.
이 비고 고요한 영지는 무너지지도 않고 난잡하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이 공을 들이면 머지않아 공을 이룰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화두와 함께 한 덩이가 되어 의지하는 곳이 없고 마음의 가는 곳이 없으면, 그 때는 다만 방산거사(方山居士) 하나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다른 생각을 일으키면 반드시 그림자의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거기서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방산이 어디에 있는가를.
조주(趙州)스님의 <없다>고 말한 뜻이 무엇인가를 완전히 붙들면 새삼스레 벌일 필요도 없어질 것입니다. 물을 마시는 사람이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알 듯이, 천만 가지 의심이 한꺼번에 깨어질 것입니다. 혹시 완전히 깨치지 못하더라도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을 버리고,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하도록 간절히 붙들어야 합니다.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모든 행동에서 한결같이 어둡지 않고, 그저 또록또록하고 분명하게 화두를 들되 하루에 몇 번이나 끊어지는가를 때때로 점검해 보십시오.
그래서 끊어지는 때가 있거든 다시 용맹스런 마음을 내고 공력을 더 들여 끊임이 없게 하십시오. 하루에 한 번도 끊임이 없게 되었다면 정력(定力)을 더욱 기울여 때때로 점검하되 날마다 끊임이 없이 해야 합니다.
만약 사흘 동안 순일하게 끊임이 없으면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에도 한결같고 말하거나 침묵할 때에도 한결같아 화두가 항상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흐르는 여울의 달빛처럼 부딪쳐도 흩어지지 않고 헤쳐도 없어지지 않으며, 휘저어도 사라지지 않고 자나 깨나 한결같으면 크게 깨칠 때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때에는 부디 남에게 캐어 물으려 하지 말고, 또 일 없는 사람과 이야기하지도 마십시오. 그저 스물 네 시간 일상 생활 가운데서 어리석은 사람이나 벙어리처럼 행동하고, 몸과 마음을 모두 버려 죽은 사람같이 하십시오. 안에서 내어놓지도 말고 밖에서 들이지도 마십시오. 거기서 화두를 잊어버리면 그것은 큰 잘못이니, 큰 의심을 깨뜨리기 전에는 화두에 어둡지 말고 내 말대로 하십시오.
그 경지에 이르면 어느 새 무명이 깨어지고 홀연히 크게 깨칠 것입니다. 깨친 뒤에는 부디 본분종사(本分宗師 : 마음을 바로 깨달은 스님)를 찾아가 마지막 인가(印可 :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정함)를 받아야 합니다. 만약 그와 같은 종사(宗師)를 만나지 못하면 열 개에 다섯 쌍이 모두 마군이 될 것입니다. 조심하기를 진심으로 빌고 빕니다.
참고
태고(太古) : 고려 말기 스님. 법명은 보우(普愚). 1346년에 중국에 가서 석옥 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잇고, 우리나라 임제종(臨濟宗)의 초조가 되다. 공민왕의 왕사(王師).
출전 : 불교성전(太古·語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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