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차(穀茶·曲茶)

아무나 곡차를 마시면 되느냐

근와(槿瓦) 2016. 7. 22. 00:09

아무나 곡차를 마시면 되느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만암스님이 그토록 엄히 당부를 했건만, 젊은 승려들 가운데에는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만 탁발한 양식을 퍼주고 막걸리를 몇 잔 마시고 들어오는 이가 더러 있었다. 하루종일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이집저집 시주를 얻어오자면 다리도 아프고 갈증이 나기도 하여 곡차삼아 마신다는 핑계를 슬금슬금 계율을 어기는 젊은 승려들의 객기를 만암스님이 모를 리가 없었다.


어느 날 저녁, 만암스님은 지친 몸을 이끌고 탁발에서 돌아온 대중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하였다.


오늘 이중에 술냄새를 풍기는 자가 있으니 썩 앞으로 나서도록 해라!”


불시에 만암스님의 불호령을 듣게 된 대중들은 서로 수군거리며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도 앞에 나서는 이가 없었다.

허어! 어서 썩 나서지 않으면 내가 끌어낼 것이니라!”


그제야 한 젊은 승려가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앞에 나섰다.


, 스님! 소승이 한잔하고 왔습니다.”


그 젊은 승려는 채 취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공손치 못하게 만용을 부렸다.


너 이놈! 너는 대체 어디다 쓰겠다고 탁발을 했더냐?”


만암스님의 노발대발한 음성에 다른 대중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떠는데 그 젊은 승려는 도무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게 오히려 당당하기만 하였다.


아이구, 주지스님! 곡차 몇 잔 마시고 왔기로서니 뭘 이렇게 노발대발이십니까요? 그대신 제가 내일은 더 많이 해오겠.”


젊은 승려의 시건방진 말대꾸가 채 끝나기도 전에 만암스님의 주장자가 사정없이 내리쳐졌다.


너 이놈! 백양사 중창불사에 쓸 기왓장과 서까래를 네 뱃속에 처넣고 오고도 네가 지은 죄를 모르더란 말이냐?”


이 무렵 우리 불교계는 왜색불교에 젖을 대로 젖어서 출가승려가 부인을 얻고 자식을 두는가 하면, 술 마시고 육식을 하는 등 청정계율이 날이 갈수록 무너져가고 있었다. 열 살의 어린 나이로 동진출가하여 청정계율을 목숨처럼 지켜오던 만암스님은 누구보다도 우리 불교의 왜색화 경향을 가슴 아프게 여겨오던 터였다.


그러한 때에 젊은 수행자가 벌써부터 술을 마시고 다니는 걸 보았으니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문제였다.


너는 탁발을 나갈 적에 백양사 중창불사에 기왓장 한 장이라도 보태겠다고 다짐하고 나갔고, 탁발을 할 적에도 그것을 빌미로 했을 터인데 그 재물로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왔다. 이는 부처님을 속이고, 조사님들을 속이고, 대중들을 속이고, 시주님네까지 속인 죄를 지었느니라. 게다가 너는 승복을 입은 채 주막에서 술을 마셨으니 세상사람들에게 타락한 승려상을 보여 신심을 잃게 한 죄 또한 크도다. 그러니 너는 마땅히 이 산에서 나가야 할 것이다.”


만암스님으로부터 추상 같은 꾸지람을 듣고도 그 젊은 승려는 자못 기세등등하게 나왔다.


, 나가라면 나가지요, 스님. 그런데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요.”


당돌하기가 그지없고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젊은 승려의 태도에 그 자리에 있던 대중들이 술렁거렸다.


제가 알기로는 말씀에요, 스님! 옛날에 원효대사께서도 곡차를 마시셨고, 진묵대사, 그리고 저 유명한 경허선사께서도 곡차를 마시셨다는데.”


그런데 어찌하여 너라고 곡차를 마시면 안 된다는 말이더냐, 그걸 묻고 싶단 말이렷다!”


만암스님은 술 취한 승려가 지껄이는 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즉각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내 너에게 묻겠다. 너는 그럼 원효대사처럼 교학에 통달했느냐?”


…….”


너는 과연 원효대사처럼 걸인들을 구제하고 나병환자들을 구제하고 자비행을 실천했더냐?”


…….”


너는 과연 원효대사처럼 생사의 도리를 깨닫고 불도를 이루었더냐?”


만암스님의 서릿발 같은 질문에 감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그 젊은 승려는 취기가 싹 가신 얼굴로 고개를 떨구는 것이었다.


너는 물론이거니와 여기 있는 대중들은 다들 들어라!”


만암스님은 그 젊은 승려에게 다시 한 차례 따끔한 주장자를 내린 다음에 회중을 휘둘러 보았다.


산문에 들어와 삭발출가한 수행자들 가운데 걸핏하면 계율을 어기고 취처 음주에 육식을 자행하면서 참회는커녕 원효대사도 곡차를 마셨으며 원효대사도 요석공주를 보았고 진묵대사, 경허선사도 곡차를 마셨다고 핑계삼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이는 어리석은 자들이 그림자만 보고 실체를 보지 못함이니 나는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 교학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 깨달음의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자, 자비행은 흉내도 내지 못하는 자가 원효대사, 진묵대사, 경허선사 흉내만 내려면 당장 승복을 벗어놓고 속세로 나가야 할 것인즉, 그 경지를 넘어선 연후에는 내 곡차 마시는 것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다들 내 말을 알아들었느냐?”


만암스님의 표정은 얼음장같이 차갑고 그 음성은 비수처럼 예리하게 대중들의 느슨해진 불심을 찌르는 것이었으니, 술에 취했던 그 젊은 승려는 어느 결에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새벽, 멀리서 도량석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감무화상이 일찌감치 만암스님의 처소로 찾아왔다.


주지스님, 어젯밤 곡차 마시고 돌아온 그 학인 말씀이온데요.”


그래, 그 자가 어찌 됐단 말이던고?”


감무화상은 만암스님의 눈치를 살펴가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글쎄, 간밤에 내려간 줄 알았더니만요그 학인이 밤새도록 법당에서 참회기도를 드리고 있었나보옵니다요.”


감무화상은 잠시 말을 중단하고 만암스님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스님은 무슨 생각엔가 깊이 잠겨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 학인이 법당에서 참회기도를 하고 있으니 어찌해야 좋겠습니까요, 스님?”


참회할 줄 아는 아이라면 그대가 잘 다독거려서 좋은 중을 만들도록 하시게. 한 아이라도 제도해야지 버려서야 되겠는가?”

감무화상은 그제야 얼굴이 펴지며 서둘러 법당으로 나아갔다.


잠시 후, 전날 술에 취해 말썽을 일으켰던 그 젊은 승려가 만암스님 처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지스님께 참회드리러 왔사옵니다.”


참회는 제대로 잘 되었느냐?”


만암스님은 방문을 열고 그 젊은 승려에게 물었다.


그동안 잘못한 죄, 깊이깊이 참회드리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전날 저녁에만 해도 무서운 불호령을 내렸던 만암스님은 언제 그랬냐 싶게 자비로운 모습으로 돌아와 그 젊은 승려를 대해주는 것이었다.


무릇 출가수행자는 계 · · 혜 삼학을 세 가지 보물로 삼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달하여 불도를 성취하고, 그런 연후에는 널리 고해중생을 제도해야 하는 것이니, 바로 이것이 출가수행자의 본분이니라.”


, 스님.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래, 이젠 되었느니라. 그만 가서 공부 열심히 하도록 해라.”


젊은 승려의 눈에서 금새 참회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이러던 중, 만암스님이 전심전력 모든 정성을 다 바쳐서 해나가던 백양사 중창불사가 잠시 중단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겨났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이 극에 달해 있던 그 무렵,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들었던 것이다.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 한다는 옛말도 있었으니 그런 상황에서는 백양사 중창불사도 훗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금년 벼농사 추수할 때까지는 시주고 탁발이고 나가지 말도록 하시게.”


어느 날 산 밑에 내려가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직접 확인하게 된 만암스님은 감무화상을 불러 대중들의 탁발을 금하도록 하였다.


그리고우리 절에 양식이 얼마나 되던고?”


, 스님. 가을까지는 그럭저럭 견딜만 합니다요.”


만암스님은 그 양식으로 백양사 대중들이 죽을 쑤어 먹는다면 가을까지 얼마나 남겠는가를 물었다.


쌀이 세 가마, 보릿쌀이 다섯 가마, 그리구 좁쌀두 두어 가마 됩니다요, 스님.”


잠시 후, 곳간에 가 절 양식을 일일이 헤아려보고 온 감무화상이 그 내역들을 알려드렸다.


참으로 다행이구먼. 그 양식들을 가마니에 잘 담아 묶어서 젊은 학인들에게 짊어지워 마을로 내려가세.”


만암스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을로 내려갈 채비를 서두르는 것이었다.


아니 그럼, 그 양식들을 내다 파시게요, 스님?”


팔기는 이 사람아, 굶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먹여야지! 어서 서두르시게!”


절간 양식도 넉넉지 않은 차에 밥대신 죽을 쑤어 먹기로 하고, 그만큼 절약한 양식을 마을사람들에게 나눠주려는 것이 만암스님의 뜻이었다.


감무화상이 그 갑작스런 지시에 뭐라 할 말을 잊고 있는 사이, 만암스님은 벌써 학인들을 시켜 양식들을 퍼담고 있는 중이었다.



출전 : 고승열전(만암스님편,BBS)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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