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禪者)의 계명(戒命)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선이 절대적 자기 참성품의 회복인 만큼 생명있는 자의 가장 요긴한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상대적인 자기로서 절대적 주체적 자신의 파악은 생명과 우주를 바꾸는 큰 사건인 것이다. 개아와 상대적 관계 속에서 그나마 추상(抽象)적 대관념 속에서 생활하던 습성에서 벗어나 근원적 진아(眞我)를 현발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종교적 윤리적 또는 기능상의 계명이 많이 요구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불교일반이 갖는 계명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특히 선자에 있어서 강조할 몇 조만 열거해 본다.
첫째는 큰 서원을 발하여야 한다. 선자의 수행은 행자 일개인의 멸고(滅苦)해탈 안락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고 일체중생을 제도하고 불국토를 이룩하겠다는 사회적 종교적 책임의 자각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이 서원이 없을 때 수행력이 허약하여 중도에서 폐하게 되거나 이기적 사견에 떨어져 대도로 성장하지 못한다.
둘째는 철저히 선지식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앞서 말한 바이지만 선지식에 의해서 수행자는 길이 열리고 눈을 얻으며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선지식의 가르침에 복종하고 그 참 뜻을 알아 행하도록 진실하게 친근하고 진실하게 받들어 행하여야 한다. 선지식 없는 참선은 이룰 수 없고 설사 난행고행을 하더라도 길을 잘못 들기 쉽다. 경에 이르기를「말세중생이 수행하고자 하거든 마땅히 목숨바쳐 선지식을 섬기고 공양하라.」하였다. 선지식의 지시없이 공부방법을 바꾸거나 화두에 견해를 일으키는 것은 금물이다.
셋째는 어느 때나 좌선의 마음 자세를 놓지 말아야 한다. 앉을 때는 반드시 좌선자세로 앉고 서나 걸으나 잊지 않고 처소를 가리지 않고 즉처 즉처에서 선을 하도록 한다.
넷째는 일을 당하여 오직 일을 할 뿐이요 잡념을 일으키지 아니한다. 일을 대립적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 일체가 된다. 마음을 오로지 하여 공부를 지어가는 사람은 그의 생활이 언제나 한결같은 순일성을 유지하게 되므로 처처에 대립없는 순일성을 나타내게 된다.
다섯째는 항상 밝고 쾌활한 표정으로 산다. 찬란히 빛나는 태양을 삼킨 사람이 바로 선자의 표정이며 기상이다. 따라서 선자의 미간은 활짝 펴있고 빛이 나는 법이다. 미간을 찌푸리고 어두운 표정을 하는 것은 운명의 창조자인 선자의 얼굴이 아니다.
여섯째는 긍정적 말을 하고 남의 허물을 보지 않는다. 내가 본 남의 허물은 내 마음의 허물이며 내 자신의 허물이다. 그리고 마음에 있는 것은 반드시 나타난다는 원리를 선자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선자는 남의 단점을 말하거나 실패를 말하거나 불행을 말하거나 악한 말이나 추한 말을 하지 않는다. 법성 진여로 살고 그 광명으로 말하는 사람은 오직 밝고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밝은 말을 한다.
일곱째는 자비와 공심으로 산다. 선자는 언제나 대립없는 모두와 함께 살고 이기(利己)를 멀리 벗어난 대법성에 효순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선자에게 특히 엄정한 계행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이와 같이 법성으로 살고 모두와 함께 한 자비의 체온으로 살며 역사와 상황 속에 주체적 자성으로 살기 때문이다. 동시에 청정한 계행에서 심신의 안정이 오고 심신의 안정에서 수행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므로 더욱 이 점이 강조되는 것이다.
여덟째는 선자는 적어도 불조의 기초적인 가르침을 이해하여야 한다. 반드시 많은 문자를 익히자는 말은 아니다. 문자나 지식이 선이 아니며 또 문자나 지식으로써 선에 이르는 것도 물론 아니다.「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곧바로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아 성불하는 것(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이 선의 표방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선이 스승의 지시없이도 바로 된다는 것도 아니다. 또 확실한 이해와 믿음이 없는 실천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불조는 최상의 스승이다. 불조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할 때 비로소 길이 바르어지고 진취가 있는 법이다. 그러기에 불립문자(不立文字)문중에 수천의 경권이 전해오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자에게는 반드시 기초적인 불조교칙의 해득이 요구된다. 예부터 선을 배우기 앞서 율과 교육을 배우게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박맹(拍盲)으로 둔공(鈍工)을 드려 오도한 선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심신을 바쳐 의지한 선지식이 있었으며 또한 그것은 예외에 속한다. 예외를 표준삼고 무사자오(無師自悟)를 자처할 수는 없다. 문자 지식이 없는 조사중 대표로 꼽히는 혜능(慧能)조사도 그의 법보단경(法寶壇經)에서 보건대 열반경·유마경·법화경·금강경·범망경 등 여러 경전을 자가약롱(自家藥籠)으로 자유로이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은가.
불립문자는 무지나 무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출전 : 이것이 선의 길이다(광덕큰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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