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성전)-100-교리문69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제3절 「식」을 불지(佛智)로 바꿈
무주보살은 다시 사뢰었다.
「「八識」이 다 경계로 인연하여 일어나옵는데 어떻게 움직이지 아니하오리까.」
「온갖 경계는 본래 공하고 온갖「식」은 본래 공하여 인연하는 자체가 없다. 무엇을 인연하여 일어나겠는가.」
「온갖 경계가 비었다면 어떻게 보게 되나이까.」
「본다는 것이 망념이니라. 왜냐하면 온갖 것은 나는 것도 없고 형상도 없어서 본래 절로 이름짓지 못할 것이어서 모두가 공적하나니 온갖 법의 모습도 또한 그러하며 온갖 중생의 몸도 또한 그러하다. 몸도 오히려 있지 않거늘 어떻게 보는 것이 있다고 하겠느냐.」
「온갖 경계가 비었고 온갖 몸이 비었고 온갖「식」이 비었다면「깨달음」도 또한 비었겠습니다.」
「하나의 깨달음이란 무너뜨릴 수 없고 부술 수도 없나니 본연의 성품인 까닭이다. 빈 것도 아니요 비지 않은 것도 아니며 비었느니 비지 않았느니 할 것도 없느니라.」
「모든 경계도 또한 그러하여「빈 모습」도 아니요 빈 것이 없는 모습도 아니겠습니다.」
「그렇다. 저 경계란 자성이 본래 결정되어서 결정된 자성은 어떤 처소가 따로 없느니라.」
「깨달음도 그와 같아서 처소가 없겠습니다.」
「그렇다. 깨달음은 처소가 없는 까닭에 청정하나니 청정하므로「깨달음」은 없으며 물건은 처소가 없는 까닭에 청정하나니 청정하므로 물질이랄 것도 없느니라.」
「마음으로 일어나는「눈알음(心眼識)」도 또한 그러하여 헤아릴 수 없겠습니다.」
「마음으로 일어나는「눈알음」도 또한 그러하여 헤아릴 수 없느니라. 왜 그러냐 하면 물질 자체는(공하여) 본래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이름 지을 것이 없으므로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며 눈 자체는(공하여)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보는 것이 없으므로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니며 마음 자체는 본래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더 위가 없으므로 일어나는 곳이 없으며,「식」도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으므로 인연을 따르는 분별이 없이 자성이 다 공적하느니라.
자성이 깨달음 없는 이치를 알 때에 그 깨달음은 곧 깨달음(始覺)이 된다. 선남자여, 깨달음 없는 것을 깨달아 알 때에 모든「식」은 근본으로 돌아간다(心源에 들어감). 왜냐하면「금강지(金剛智)」와「해탈도」의 지위에서 끊게 되며, 끊고는 머무름이 없는 자리에 들어가 나고 들 것이 없다. 마음이 있는 데가 없는 결정성의 경지는 그 자리가 청정하기 유리와 같고 자성이 항상 평등하기 대지(大地)와 같으며, 깨달음의 묘한 관찰(지혜)은 햇빛과 같고 이익한 일을 이룩하여 그 근본(本覺)을 얻게 함은 큰 비(大雨)와 같다. 이 지혜에 들어간 이는 부처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고 그 자리에 들어간 이는 모든「식」이 나지 않느니라.」
<同經 本覺利品>
출전 : 성전(대한불교원효종)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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