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아함경(126)-1260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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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마땅히 설해야 하느니라. 세존께서 다시 물으셨다."아난아, 어떻게 비구가 과거를 생각하게 되느냐?"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비구가 과거의 색(色)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에 머루르며, 과거의 각(覺) 상(想) 행(行) 식(識)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서 머문다면, 이와 같은 비구는 과거를 생각하게 됩니다."
세존께서 다시 물으셨다."아난아, 어떻게 비구가 과거를 생각하지 않게 되느냐?"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가 과거의 색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과거의 각 상 행 식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비구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세존께서는 다시 물으셨다."아난아, 어떻게 비구가 미래를 원하게 되느냐?"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가 미래의 색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미래의 각 상 행 식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에 머문다면, 이와 같은 비구는 미래를 원하게 됩니다."
세존께서 다시 물으셨다."아난아, 어떻게 비구는 미래를 바라지 않게 되느냐?"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가 미래의 색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미래의 각 상 행 식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비구는 미래를 바라지 않게 됩니다."
세존께서는 다시 물으셨다."아난아, 어떻게 비구가 현재의 법을 받아들이게 되느냐?"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가 현재의 색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에 머무르며, 현재의 각 상 행 식을 즐겨하여 욕심내고 집착하고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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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문다면, 이와 같은 비구는 현재의 법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세존께서 다시 물으셨다."아난아, 어떻게 비구가 현재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느냐?"
"세존이시여, 만일 비구가 현재의 색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현재의 각 상 행 식을 즐겨하지 않아서 욕심 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비구는 현재의 법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렇게 모든 비구들을 위하여 밤에 강당에 모여 발지라제의 게송과 그 뜻을 설명하였습니다."
이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훌륭하고 훌륭하다. 내 제자는 안목이 있고 지혜가 있으며, 이치가 있고 법이 있다. 왜냐 하면 내 제자는 스승 앞에서 이런 글귀와 이런 글로써 그 이치를 자세하게 설명하였기 때문이니라. 진실로 아난 비구의 설명과 같다. 너희들은 마땅히 그와 같이 받아 가져라. 왜냐 하면 내가 이치를 살펴 설명한다고 해도 응당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존자 아난과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의행경(意行經) 제 7 [제4 분별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승림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설법하리라. 이 법은 처음도 묘하고 중간도 묘하며 마지막도 또한 묘하다. 뜻도 있고 문채도 있으며, 구족하고 청정하여 범행(梵行)을 나타낸다. 이 경의 이름은 분별의행경(分別意行經)이고, 의행[意行 : 팔리본에는 Sa kh ra로 되어 있다. 팔리어 장경의 영역본 설명에 따르면 Sa kh ra는 이 경에서 일반적인 의미와 좀 다르게 쓰였다고 한다. 즉 '의도적인 지적작용'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한역(漢譯)에서 Sa kh ra 를 행(行)으로 번역하지 않고 의행(意行)으로 번역한 것은 매우 타당하다. 영역에서는 열망 포부 열정 등의 뜻이 있는 aspiration으로 번역하였다.]대로 태어나는 것을 설한 것이니,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그때 모든 비구들은 분부대로 경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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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어떤 것이 의행대로 태어나는 것인가? 혹 어떤 비구는 욕심을 여의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여의어, 각(覺)도 있고 관(觀)도 있으며,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喜]과 즐거움[樂]이 있는 초선[初禪 :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인 초선(初禪)은 각(覺) 관(觀) 희(喜) 낙(樂) 일경성(一境性) 다섯 가지를 함유하고 있다.]을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이 선정[定]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는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 뒤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 거기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기게 되며, 목숨을 마치고는 범신천(梵身天)에 태어나게 된다. 모든 범신천은 그 곳에 태어나 그 곳에 머물며,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비구는 이 곳에 머물며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데, 이 두 가지 '여의는 데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離生喜樂]'은 차별이 없고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 범신천도 먼저 이 곳에서 선정을 행한 뒤에 그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선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익히고 이렇게 널리 폈기 때문에 범신천에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의행(意行)대로 태어나느니라. 또 비구는 각과 관이 이미 쉬고 안으로 고요히[內靜] 한마음이 되어[一心], 각도 없고 관도 없으며,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喜]과 즐거움[樂]이 있는 제 2 선[第二禪 :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인 제 2 선은 내정(內靜) 희(喜) 낙(樂) 일심(一心) 네 가지를 함유하고 있다.]을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는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 뒤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 거기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기게 되며, 목숨을 마치고는 황욱천[晃昱天 : 황욱천(晃昱天, bhassar deva)은 곧 광음천(光音天)으로 색계 2선(禪)의 제 3 천이다.]에 태어나게 된다. 모든 황욱천은 그 곳에 태어나 그 곳에 머물며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비구는 이 곳에 머물며 제 2 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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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 선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데, 이 두 가지 '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즐거움[定生喜樂]'은 차별이 없고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 황욱천도 먼저 이 곳에서 선정을 행한 뒤에 그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선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익히며 이렇게 널리 폈기 때문에 황욱천에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의행(意行)대로 태어나느니라. 또 비구는 기쁨의 욕심[喜欲]을 여의고, 평정하여 구함 없이 노닐며, 바른 생각과 바른 지혜로 몸에 즐거움을 깨닫는다. 이른바 저 성인께서 말씀하신 성인의 평정[捨] 생각[念] 즐거움에 머묾[樂住] 공(空)이 있는 제 3 선[禪 :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인 제 3 선은 사(捨) 염(念) 낙(樂) 혜(慧) 일심(一心) 다섯 가지를 함유하고 있다.]을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는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 뒤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 거기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기게 되며, 목숨을 마치고는 변정천(遍淨天)에 태어나게 된다. 모든 변정천은 그 곳에 태어나 그 곳에 머물며 기쁨도 없고 즐거움도 없게 되고, 비구는 이 곳에 머물며 제 3 선에 들어가 기쁨도 없고 즐거움도 없게 되는데, 이 두 가지 '기쁨도 없고 즐거움도 없음[無喜樂]'은 차별이 없고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 변정천도 먼저 이 곳에서 선정을 행한 뒤에 그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선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익히며 이렇게 널리 폈기 때문에 변정천에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의행대로 태어나느니라. 비구는 즐거움이 멸하고 괴로움도 멸하는데, 기쁨과 걱정의 뿌리는 이미 멸한 상태이며,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며 평정[捨] 기억[念] 청정(淸淨)이 있는 제 4 선[禪 :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인 제 4 선은 불고불락(不苦不樂) 사(捨) 염(念) 일심(一心) 네 가지를 함유하고 있다.]을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는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 뒤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 거기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기게 되며, 목숨을 마치고는 과실천(果實天)에 태어나게 된다. 과실천은 그 곳에 태어나 그 곳에 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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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평정과 기억과 청정의 즐거움을 누리고, 비구는 이 곳에 머물면서 제 4 선에 들어가 평정과 기억과 청정의 즐거움을 누리는데, 이 두 가지 '평정[捨]과 기억[念]과 청정의 즐거움[淸淨樂]'은 차별이 없고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 과실천도 먼저 이 곳에서 선정을 행한 뒤에 그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선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익히며 이렇게 널리 폈기 때문에 과실천에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의행대로 태어나느니라. 또 비구는 일체의 빛깔에 대한 생각을 벗어나,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멸하고, 약간의 생각[想]도 기억[念]하지 않는 한량없는 공(空)이 되고, 이 한량없는 공처[無量空處]를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이 선정[定]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는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 뒤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 거기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기게 되며, 목숨을 마치고는 무량공처천(無量空處天)에 태어나게 된다. 모든 무량공처천은 그 곳에 태어나 그 곳에 머물며 한량없는 공처의 생각을 누리고, 비구는 이 곳에 머물며 한량없는 공처의 생각을 누리는데, 이 두 가지 '한량없는 공처의 생각[無量空處想]'은 차별이 없고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 공처천(空處天)도 먼저 이 곳에서 선정을 행한 뒤에 그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익히며 이렇게 널리 폈기 때문에 무량공처천에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의행대로 태어나느니라. 또 비구는 한량없는 공처를 벗어나 한량없는 식(識)이 되고, 이 한량없는 식처[無量識處]를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는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 뒤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 거기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기게 되며, 목숨을 마치고는 무량식처천(無量識處天)에 태어나게 된다. 모든 무량식처천은 그 곳에 태어나 그 곳에 머물며 한량없는 식처의 생각을 누리고, 비구는 이 곳에 머물며 한량없는 식처의 생각을 누리는데, 이 두 가지 '한량없는 식처의 생각[無量識處想]'은 차별이 없고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 식처천(識處天)도 먼저 이 곳에서 선정을 행한 뒤에 그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선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익히며 이렇게 널리 폈기 때문에 무량식처천에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의행대로 태어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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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비구는 한량없는 식처를 벗어나 무소유가 되고, 이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는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 뒤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 거기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기게 되며, 목숨을 마치고는 무소유처천에 태어나게 된다. 모든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은 그 곳에 태어나 그 곳에 머물며 무소유처의 생각을 누리고, 비구는 이 곳에 머물며 무소유처의 생각을 누리는데, 이 두 가지 '무소유처의 생각[無所有處想]'은 차별이 없고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도 먼저 이 곳에서 선정을 행한 뒤에 그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선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익히며 이렇게 널리 폈기 때문에 무소유처천에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의행대로 태어나느니라. 또 비구는 일체 무소유처의 생각을 벗어나 비유상비무상이 되고, 이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를 성취하여 노닌다. 그가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그는 이 선정을 좋아하여 거기에 머무르려고 한 뒤에 반드시 그렇게 되어 거기에 머무르고 그것을 즐기게 되며, 목숨을 마치고는 비유상비무상처천에 태어나게 된다. 모든 비유상비무상처천은 그 곳에 태어나 그 곳에 머물며 비유상비무상처의 생각[非有想非無想處想]을 누리고, 비구는 이 곳에 머물며 비유상비무상처의 생각을 누리는데, 이 두 가지 생각[想]은 차별이 없고 두 가지가 똑같은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들 비유상비무상처천도 먼저 이 곳에서 선정을 행한 뒤에 그 곳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선정을 이렇게 닦고 이렇게 익히며 이렇게 널리 폈기 때문에 비유상비무상처천에 태어난 것이다. 이와 같이 의행대로 태어나느니라. 또 비구는 일체 비유상비무상처를 벗어나 상(想)과 지(知:受)가 멸한 촉(觸)을 성취하여 노닐고, 혜(慧)로 모든 번뇌가 사라진 지혜[諸漏盡斷智]를 본다. 저 모든 선정[定] 가운데서 이 선정을 가장 제일이요, 가장 위대하며,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하며, 가장 묘하다고 말한다. 마치 소로 인해 젖이 있고, 젖으로 인해 낙(酪)이 있으며, 낙으로 인해 생소(生酥)가 있고, 생소로 인해 숙소(熟酥)가 있으며, 숙소로 인해 소정[酥精 : 제호(醍醐)라고도 한다.]이 있는데, 이 소정을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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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이요 가장 위대하며,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하며, 가장 묘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저 모든 선정 가운데서 이 선정을 가장 제일이요 가장 위대하며,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하며, 가장 묘하다고 말한다. 이 선정을 얻어 이 선정에 의지하고 이 선정에 머무르고 나면 다시는 생 노 병 사의 괴로움을 받지 않나니, 이것을 괴로움의 끝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구루수무쟁경(拘樓瘦無諍經)제 8 [제4 분별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바기수[婆奇瘦 : '바기국(婆奇國)'의 라는 뜻이다.]의 도읍인 검마슬담(劍磨瑟曇)이라는 곳을 유행하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내가 너희들을 위해 설법하리라. 이 법은 처음도 묘하고 중간도 묘하며, 마지막도 또한 묘하다. 뜻도 있고 문채도 있으며, 구족하고 청정하여 범행(梵行)을 나타낸다. 그 이름은 분별무쟁경(分別無諍經)이니 너희들은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라."그 때 모든 비구들은 분부를 받고 경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극히 하천(下賤)한 업이고 범부의 행인 탐욕의 즐거움을 구하지 말고, 또한 지극히 괴롭고 거룩한 행이 아니며 이치와 서로 걸맞지 않는 자신의 고행(苦行)도 구하지 말라. 이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면 곧 중도(中道)가 되나니, 그것은 눈을 이루고 지혜를 이루어 자재로이 선정[定]을 이루며,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간다. 또 칭찬하는 경우도 있고, 꾸짖는 경우도 있으며, 칭찬도 꾸짖음도 없이 사람을 위해 설법하는 경우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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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재(齊)를 결정하며, 결정된 사실을 안 뒤에는 언제나 마음속의 즐거움을 구하라. 서로 끌어 들여 말하지 말고, 또한 면전에서 칭찬하지도 말며, 절도 있게 말하고 절도 없이 말하진 말라. 그 나라의 풍속과 법을 따라 옳거니 그르거니 따지지 말라. 이것이 분별무쟁경(分別無諍經)이니라.'
지극히 하천한 업이고 범부의 행인 탐욕의 즐거움을 구하지 말고, 또한 지극히 괴롭기만 하고 거룩한 행이 아니며 이치와 서로 걸맞지 않는 자신의 고행을 구하지 말라' 함은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
지극히 하천한 업이고 범부의 행인 탐욕의 즐거움을 구하지 말라' 함은 하나의 치우친 견해를 말한 것이고, '
또한 지극히 괴롭기만 하고 거룩한 행이 아니며 이치와 서로 걸맞지 않는 자신의 고행을 구하지 말라' 함은 또 다른 치우친 견해를 말한 것이다. '
지극히 하천한 업이고 범부의 행인 탐욕의 즐거움을 구하지 말고, 또한 지극히 괴롭기만 하고 거룩한 행이 아니며 이치와 서로 걸맞지 않는 자신의 고행을 구하지 말라' 함은 이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니라.'
이 두 가지 극단적 견해를 여의면 곧 중도로서, 눈이 되고 지혜가 되어 자재로이 선정을 이루며,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간다' 함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가?
8지성도(支聖道)가 있으니 바른 소견[正見]에서부터 나아가 바른 선정[正定]까지의 여덟 가지이다. '이 두 가지 극단적 견해를 여의면 곧 중도로서, 눈이 되고 지혜가 되어 자재로이 선정을 이루며,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열반으로 나아간다' 함은 이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니라.'
칭찬하는 경우도 있고, 꾸짖는 경우도 있으며, 칭찬도 꾸짖음도 없이 사람을 위해 설법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말했는가?
왜 칭찬하거나 꾸짖고 설법은 하지 않는가? 만일 탐욕과 서로 호응하고 기쁨 즐거움과 함께하여 지극히 하천한 업인 범부의 행을 짓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苦]이 있고 번민[煩]이 있으며, 흥분[熱]이 있고 걱정[憂]과 슬픔[慼]과 삿된 행[邪行]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몸소 꾸짖는다. 무슨 까닭인가? 탐욕이란 무상(無常)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닳아 없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는 탐욕은 무상하므로 저들 모두에게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게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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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몸소 꾸짖는 것이니라. 지극히 괴롭고 거룩한 행이 아니며 서로 호응하는 어떤 이치도 없는 자신의 고행(苦行)을 하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몸소 꾸짖는다.
무슨 까닭인가? 저 사문 범지는 괴로움을 두려워하여 수염과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지극한 믿음으로 출가하여 집 없이 도를 배우는 자들이다. 그런데 저 사문 범지가 도리어 이 괴로움을 끌어안는다면 저들 모두에게는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게 될 것이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몸소 꾸짖는 것이니라. 가령 유결[有結 : 유결(有結, bhavasa yojana)의 유(有)는 생사(生死)의 과보를 말하고, 결(結)은 그 과보를 초래하는 번뇌를 말한다.]이 다하지 않은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몸소 꾸짖는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유결(有結)이 다하지 않으면 그 생명[有]도 또한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 모두에게는 번민이 있고, 흥분이 있으며,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게 된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몸소 꾸짖는 것이니라. 유결(有結)이 다한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도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이 없고, 바른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몸소 칭찬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유결이 다하면 그 생명[有]도 또한 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 모두에게는 괴로움이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도 없으며, 바른 행이 있게 된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몸소 칭찬하는 것이니라. 마음 속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몸소 꾸짖는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마음 속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는 자라면 또한 마음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 모두에게는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게 된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몸소 꾸짖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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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의 즐거움을 구하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도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이 없으며, 바른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몸소 칭찬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일 마음 속의 즐거움을 구하는 자라면 그는 또한 마음도 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 모두에게는 괴로움도 없고 번민도 없으며, 흥분도 없고 걱정과 슬픔이 없으며, 바른 행이 있게 된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몸소 칭찬한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칭찬하거나 꾸짖고 설법은 하지 않는다. 칭찬하거나 꾸짖지 않고 사람을 위해 설법하는 경우가 있다. 왜 칭찬하거나 꾸짖지 않고 사람을 위해 설법하는가? 만일 탐욕과 서로 호응하고 기쁨 즐거움과 함께하여 지극히 하천한 업인 범부의 행을 짓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설법한다. 왜냐 하면 '탐욕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으로서 닳아 없어지는 법이다'라고 저 사람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탐욕은 무상한 것이므로 저들 모두에게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게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이 법을 알지 못하여 오직 괴로운 법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설법하는 것이니라. 지극히 괴롭고 거룩한 행이 아니며 서로 호응하는 어떤 이치도 없는 고행을 하는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설법한다. 왜냐 하면 '지극히 괴롭고 거룩한 행이 아니며 서로 호응하는 어떤 이치도 없는 고행을 하면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고 저 사람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이 법을 알지 못하므로 오직 괴로운 법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기 때문에 곧 설법하는 것이니라. 유결(有結)이 다하지 않은 자가 있다고 하자. 이 법은 괴로움이 있고 번민이 있으며, 흥분이 있고 걱정과 슬픔과 삿된 행이 있다. 그는 이것을 알고는 곧 설법한다. 왜냐 하면 '만일 유결이 다하지 않으면 그 생명[有]도 다하지......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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