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
세상을 구원하는 자비의 보살, 관세음
현재 우리들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면 그때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깨달음일까 아니면 물질적 안락함일까? 그 둘다 아니리라. 아파서 신음하는 자에게 깨달음이나 말초적 쾌락은 사실 말장난이나 언어의 희롱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비와 사랑이다. 또 다른 하나로 그 고통을 즉각 제거해 버리는 현실적 힘을 얻는 것 이상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그런데 사실 한국불교는 자비의 측면을 너무 소흘히 하고 있지 않은지 깊이 반성해 볼 일이다.
큰 자비의 어머니 관세음보살, 그분은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의 모습에 크나큰 연민을 느껴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 천 가지, 만 가지로 활동하는 우리 민족의 어머니요 인도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전역, 아니 이제 전세계로 자비의 손길을 건네는 인류의 어머니이다.
흰옷을 입고 한 손에는 감로수가 담긴 정병(淨甁)을, 다른 한 손에는 버들가지를 들고선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는 관세음보살, 그 님을 부르는 소리는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우리 할머니, 어머니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정도였다.
관세음보살의 산스크리트 명칭은 아바로키테슈바라(Avalokitesvara)로서 아박로 혼습벌라(阿縛盧低混伐羅)로 음역(音譯)되기도 했다. 이 산스크리트 말을 접두사 아바(ava;널리)와 로키타(lokita;보다의 과거분사), 그리고 이슈바라(isvra; 자재로운 神 또는 주인)가 합성된 것으로 보면 관자재(觀自在)로 의역되며, 아바로키타스바라(Avalokitasvara)의 이름으로 쓰일 경우, 그때 로키타(lokita)를 세간을 뜻하는 로카(loka)와 결부시키고 스바라(svara)를 소리 음(音)으로 해석하여 관세음(觀世音), 줄여서 관음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본다는 뜻의 동사 원형 로크(lok)는 '빛나다'라는 뜻으로도 쓰이기에 광세음(光世音)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이 밖에도 관세자재(觀世自在)라는 이름도 있다..
이 중에서 관자재보살과 관세음보살 두 가지 명칭이 가장 널리 유포되어 왔다. 관자재보살의 경우, 그는 현재 법회 의식에서 늘상 독송되는 『반야심경』의 중심 인물로 등장하여 반야의 이치를 깨달아 일체의 고통을 뛰어넘은 뒤 사리불(舍利佛)에게 피안의 저 언덕에 이르는 길을 설한다. 그럴 경우 관자재보살은 모든 사물의 공한 모습을 관하는 이지적인 보살이라는 인상이 짙게 풍긴다. 바로 『반야경』에서는 자비의 측면보다 지혜의 면모를 강조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공의 실상을 깨우쳐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관자재라는 말보다도 관세음 또는 관음이라는 말에 더 친숙해 있다. 그만큼 이 보살은 지혜의 측면보다는 자비의 측면이 강조되어 인류의 역사 속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일러 대비성자(大悲聖者), 구세대비자(求世大悲者)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원통대사(圓通大士)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관세음보살의 능력이 어디로든 통하고 두루 미치지 못하는 바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의 명칭이 최초로 등장하는 경전이 『법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普門品)」이다. 거기에서 무진의(無盡意)보살이 부처님께 관세음보살은 무슨 인연으로 관세음으로 불리는가를 묻는다. 부처님은 답하여 말한다.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이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곧바로 그 음성을 관하여 해탈케 한다"
바로 중생의 애닯은 음성을 관하기 때문에 관세음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관세음보살의 보편적 의의를 발견하게 된다. 나아가 이 경전에서는 어떤 사람이 살해될 위기에 처했을지라도 그 분의 명호만 부르면 칼과 창이 조각조각 나고, 어떤 이유에서건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경우, 그 분을 간절히 부르면 수갑과 고랑과 칼과 사슬이 모두 부서지고 끊어져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등 갖가지의 고통에서 인간을 구제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성격은 관음이 성불을 목표로 하는 불교의 교리적 전개에 따른 결과라기보다는 인도 고유의 타력적(他力的) 신앙을 불교에서 받아들여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힌두교의 여러 신에서 보이는 성격이 관세음보살의 탄생에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힌두교의 최고신 쉬바(Siva)의 부인 우마(Uma)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고 비슈누(Visnu) 신앙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관음 신앙과 불국토
그렇다면 이 관음 신앙은 언제 태동하여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는가. 인도의 관세음보살이 형성된 시기는 1세기 말경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그 당시 『법화경(法華經)』「보문품(普門品)」이 널리 읽혔던 사실을 보면 일반 대중에게 그 영향력은 지대했을 것이다. 그후 관세음보살은 인도, 중국, 일본, 한국은 물론 티베트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쳐 생불로 추앙받는 달라이라마도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일컫게 될 정도이다.
한국불교도 이 관음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발달하기 시작한다. 중국에서 화엄교학을 배우고 돌아온 의상(義湘)은 맨 처음 동해변 양양으로 가 거기 그 낙산(洛山)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이 땅을 불국토화하기 시작한다. 낙산은 바로 보타락산(補陀落山)의 준말로 관음보살의 거주처다. 산스크리트 명은 포탈라카(potalaka)이다.
그런데 그 보타락산이 인도땅에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을 보면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구도의 편력을 하는 도중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보타락산과 같은 말이다.)이라는 바다에 접한 아름다운 곳에서 관음을 친견하고 대비의 설법을 듣는 구절이 있다. 현장(玄裝) 스님도 보타락가산을 언급하면서 그곳이 스리랑카로 가는 해로(海路) 가까이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에 그곳 보타락산은 인도 남단의 마라야산 동쪽 구릉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당시의 인도 관음의 항해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보문품」에는 "큰 물에 떠내려가도 그 이름을 염하면 곧 얕은 곳을 얻을 수 있다. 진귀한 보물을 얻으려 바다에 들어가 폭풍에 밀려 나찰귀국(羅刹鬼國)에 가 닿더라도 그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관음의 이름을 부르면 모두 나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라고 설하고 있다. 나찰귀국이란 사람을 잡아먹는 마귀의 일종인 나찰이 머문다고 전해지는 사자섬 스리랑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건대 조선과 항해 기술이 보잘 것 없던 당시 남해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공포스러운 풍파의 수난으로부터 보호받을 양으로 관음을 신앙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여기서 영향을 받아 중국 주산열도(舟山列島)에 보타산(普陀山)이 등장한다.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 포탈라카 궁전이 그 불가사의한 위용을 자랑하면서 굳건히 서 있다. 우리나라의 관음 도량으로서 강화도 보타산 보문사(普門寺)에도 관음보살상이 그 산 8부 능선 쯤에 바다를 멀리 바라보며 자비롭게 미소짓고 있다. 낙산사 홍련암 역시 관음보살이 이땅 동해변에 나투신 영험 있는 도량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관음보살, 관음 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관음 숭배는 그 대자비를 베푸는 님에 대한 절대 귀의를 말한다. 그러한 귀의를 통해서 우리는 점차 관세음보살의 마음을 닮아가고 그 결과 나 자신도 관음이 되어 무한한 자비심을 타인에게 베풀게 된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일심으로 관음을 불러 관음과 하나가 되면 관세음보살로부터 구제를 받음은 물론이요, 고통받는 타인에게 자연스레 자비의 손길를 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우메하라 다케시(梅原 猛)의 관음 신앙에 대한 정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귀담아 들을 만한 얘기이기에 소개해 보겠다. 그는 관세음보살에 절대 귀의하는 마음에서 안심(安心), 희망, 외포(畏怖), 감사의 네 가지 공덕이 생긴다고 한다.
안심이란 관세음보살에 귀의한 결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마음의 안정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안심과 귀의심은 미래에 대한 강한 희망을 부여한다. 외포란 관음의 무한한 변화는 그야말로 어떤 형태로든 나타나는데, 그것은 뭇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경외심을 우리에게 품도록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감사란 우리의 어머니, 나의 부인, 주변의 인물들을 모두 관음이라 생각할 때 이미 그것만으로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란다.
대자비의 님, 관세음보살은 현재 우리 사찰의 대비전(大悲殿)이나 관음전(觀音殿), 혹은 원통전(圓通殿)이라는 편액을 단 건물 안에 모셔져 고통에 찬 뭇 생명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면서 오늘도 그렇게 미소짓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종류와 성관음(聖觀音)
관세음보살은 그 절대 자비력 때문에 많은 민중들의 귀의를 받았으며 그 결과 여러 종류의 관음상이 생겨나게 된다. 중생의 고통이 다양한 만큼 그 갖가지 고통에 시의적절한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관세음보살 역시 다양하며 변화무쌍하게 몸을 나투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변화의 신, 관음'으로 불릴 정도이다. 『법화경』 「보문품」에서는 그 변화의 모습을 33가지로 나열하고 있다. 더불어 6-7세기에 접어들면 힌두교의 영향으로 다양한 관음의 분화가 이루어진다. 이름하여 성관음(聖觀音), 천수관음(千手觀音), 11면관음(十一面觀音), 백의관음(白衣觀音), 양류관음(陽柳觀音), 불공견색관음(不空絹索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준제관음(准堤觀音) 등이 가장 유명한데, 이를 일곱 가지의 중요한 관음이라 하여 칠관음(七觀音)이라 표현한다. 이들 중 준제관음 혹은 불공견색관음의 어느 한 명을 제외하고 육관음이라고 하는데 관악산 삼막사의 육관음전은 이들을 한꺼번에 모신 대표적인 법당이다. 이 밖에도 백의관음(白衣觀音)과 양류관음(陽柳觀音)도 우리 민족에게 많이 알려진 관음이다.
여러 관음중 성관음(聖觀音: Arya avalokite)은 수많은 관음의 기본형으로 일반적으로 우리가 흔히 관세음보살이라 할 경우 이 관음을 지칭한다. 지금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 유산인 고려불화의 경우, 거기 관음보살도가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수월(水月)보살은 단연 압도적인 수를 점하고 있다. 바로 그 수월관음이 성관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수월관음은 천의(天衣)를 걸치고서 살이 살짝 비추이는 베일로 전신을 덮은 모습인데 반가(半跏)의 자세로 물가의 바위 위에 수월관음은 걸터 앉아 있다. 손에는 상서로운 꽃이 핀 나무가지를 들고 있으며 등 뒤에는 대나무, 특히 쌍죽(雙竹)이 솟아나 있고, 오른팔 앞쪽 바위 위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정병(淨甁)이 놓여 있다. 그 관음보살의 시선이 맞닿는 오른쪽에는 진리를 구하는 선재동자가 그를 치어다 보고 있다.
이러한 정경은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가 관세음보살에게 보리심을 구하는 장면과 일치하는데, 그 장소는 관음보살이 머문다는 보타락가산이다.
그리고 수월관음이라 칭한 이유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선재동자에게 가르침을 베푸는 그 지점이 물가이며 동시에 달이 떠 있는데서 연유한 듯하다. 특히 일본 장락사(長樂寺) 소장 수월관음도를 보면 두마리의 토끼가 떡방아를 찧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둥근 달이 휘영청 밝다. 한편 관음의 보관에는 화불로서 아미타불이 박여 있는데 이는 『무량수경』에서 연유한 것이다.
관음 신앙이 발생해 온 이래, 그 오랜 기간 동안 관음이라면 이러한 자비로운 관음상 밖에 없었으나 6 - 7세기 이후 힌두교나 밀교의 형향으로 십일면관음, 천수관음 등 여러 변화 관음이 발생하면서 본래의 관음의 모습을 이러한 변화 관음과 구별짓기 위해서 특히 정관음(正觀音)이라든가 성관음(聖觀音), 성관자재(聖觀自在)라 부르게 되었다.
관음보살이 남성인가 여성인가
그렇다면 이 관음보살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일반적으로 관세음보살의 모성적 자비심을 강조하여 여성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데, 전남 무위사(無爲寺) 극락전 후불벽화 뒷면의 관세음보살이나 인도 고대(古代)의 관음보살상처럼 남성상을 취한 형상도 여럿 보인다.
사실 보살은 여래와 마찬가지로 남성 여성을 초월한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에 관음 관계 경전의 대부분은 여성의 형상으로 그 모습을 규정짓지 않는다. 그러나 7세기 중엽 이후에는 힌두교의 여성 숭배 신앙이 불교에 유입되면서 여성적인 모습을 한 관음이 경전상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관음상으로서는 중국 송나라나 고려 시대 이후의 관음에 그러한 여성으로서의 이미지가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고려불화나 후불 탱화에 등장하는 한국의 관음상은 언뜻 보기에 자비로운 여성의 모습이라는 것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 상호(相好)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분명 여성의 모습은 아니다. 얼굴에 수염이 가느다랗게 나 있다. 바로 성(性)은 남성인 채 관음의 자비심을 최대한 부각시키려고 여성적 외모를 갖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장보살만 제외하고 다른 보살상도 이와 거의 유사한 형상이라는 데 있다. 관음상을 다른 보살상과 구별짓는 뚜렷한 특징으로서 그가 쓰고 있는 보관에 아미타불이 화불(化佛)로 들어앉아 있는 것 이외는 없다.
그러나 관음에 투영된 내용상의 특징이나 역사적 변화가 어떠하든간에 우리가 현재 인식하고 있는 관음상은 여성으로서의 관음, 사랑이 가득한 자비로운 모성으로서의 관음인 것만은 틀림없다. 인류의 보편적 감정, 아니 동양인의 가슴에 사랑과 자비의 구체적인 화신은 어머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를 애타게 찾는 목소리를 듣고 엄마는 아이에게 달려가 무조건적이고 무차별적 사랑을 베푼다.
어머니 되시는 관음은 고통받는 그 당사자가 자신을 밀고했거나 배반했다고 해서 벌을 주거나 멸망시키는 진노하는 가부장적 아버지 같은 분이 결코 아니다. 어머니 되시는 관음은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한다. 선한자 악한자, 재능이 뛰어난자 모자란자, 힘이 센자 약한자를 그모습 그대로 껴안는다. 이런 의미에서 관음보살은 어머니의 모성 그 자체여야 하며, 그러한 형상으로 조성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현재 우리들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면 그때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깨달음일까 아니면 물질적 안락함일까? 그 둘다 아니리라. 아파서 신음하는 자에게 깨달음이나 말초적 쾌락은 사실 말장난이나 언어의 희롱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비와 사랑이다. 또 다른 하나로 그 고통을 즉각 제거해 버리는 현실적 힘을 얻는 것 이상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그런데 사실 한국불교는 자비의 측면을 너무 소흘히 하고 있지 않은지 깊이 반성해 볼 일이다.
큰 자비의 어머니 관세음보살, 그분은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의 모습에 크나큰 연민을 느껴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 천 가지, 만 가지로 활동하는 우리 민족의 어머니요 인도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전역, 아니 이제 전세계로 자비의 손길을 건네는 인류의 어머니이다.
흰옷을 입고 한 손에는 감로수가 담긴 정병(淨甁)을, 다른 한 손에는 버들가지를 들고선 부드러운 미소를 보내는 관세음보살, 그 님을 부르는 소리는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우리 할머니, 어머니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정도였다.
관세음보살의 산스크리트 명칭은 아바로키테슈바라(Avalokitesvara)로서 아박로 혼습벌라(阿縛盧低混伐羅)로 음역(音譯)되기도 했다. 이 산스크리트 말을 접두사 아바(ava;널리)와 로키타(lokita;보다의 과거분사), 그리고 이슈바라(isvra; 자재로운 神 또는 주인)가 합성된 것으로 보면 관자재(觀自在)로 의역되며, 아바로키타스바라(Avalokitasvara)의 이름으로 쓰일 경우, 그때 로키타(lokita)를 세간을 뜻하는 로카(loka)와 결부시키고 스바라(svara)를 소리 음(音)으로 해석하여 관세음(觀世音), 줄여서 관음으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본다는 뜻의 동사 원형 로크(lok)는 '빛나다'라는 뜻으로도 쓰이기에 광세음(光世音)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이 밖에도 관세자재(觀世自在)라는 이름도 있다..
이 중에서 관자재보살과 관세음보살 두 가지 명칭이 가장 널리 유포되어 왔다. 관자재보살의 경우, 그는 현재 법회 의식에서 늘상 독송되는 『반야심경』의 중심 인물로 등장하여 반야의 이치를 깨달아 일체의 고통을 뛰어넘은 뒤 사리불(舍利佛)에게 피안의 저 언덕에 이르는 길을 설한다. 그럴 경우 관자재보살은 모든 사물의 공한 모습을 관하는 이지적인 보살이라는 인상이 짙게 풍긴다. 바로 『반야경』에서는 자비의 측면보다 지혜의 면모를 강조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공의 실상을 깨우쳐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관자재라는 말보다도 관세음 또는 관음이라는 말에 더 친숙해 있다. 그만큼 이 보살은 지혜의 측면보다는 자비의 측면이 강조되어 인류의 역사 속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일러 대비성자(大悲聖者), 구세대비자(求世大悲者)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원통대사(圓通大士)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관세음보살의 능력이 어디로든 통하고 두루 미치지 못하는 바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의 명칭이 최초로 등장하는 경전이 『법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普門品)」이다. 거기에서 무진의(無盡意)보살이 부처님께 관세음보살은 무슨 인연으로 관세음으로 불리는가를 묻는다. 부처님은 답하여 말한다.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이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곧바로 그 음성을 관하여 해탈케 한다"
바로 중생의 애닯은 음성을 관하기 때문에 관세음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관세음보살의 보편적 의의를 발견하게 된다. 나아가 이 경전에서는 어떤 사람이 살해될 위기에 처했을지라도 그 분의 명호만 부르면 칼과 창이 조각조각 나고, 어떤 이유에서건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경우, 그 분을 간절히 부르면 수갑과 고랑과 칼과 사슬이 모두 부서지고 끊어져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등 갖가지의 고통에서 인간을 구제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성격은 관음이 성불을 목표로 하는 불교의 교리적 전개에 따른 결과라기보다는 인도 고유의 타력적(他力的) 신앙을 불교에서 받아들여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힌두교의 여러 신에서 보이는 성격이 관세음보살의 탄생에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힌두교의 최고신 쉬바(Siva)의 부인 우마(Uma)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고 비슈누(Visnu) 신앙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관음 신앙과 불국토
그렇다면 이 관음 신앙은 언제 태동하여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는가. 인도의 관세음보살이 형성된 시기는 1세기 말경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그 당시 『법화경(法華經)』「보문품(普門品)」이 널리 읽혔던 사실을 보면 일반 대중에게 그 영향력은 지대했을 것이다. 그후 관세음보살은 인도, 중국, 일본, 한국은 물론 티베트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쳐 생불로 추앙받는 달라이라마도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일컫게 될 정도이다.
한국불교도 이 관음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발달하기 시작한다. 중국에서 화엄교학을 배우고 돌아온 의상(義湘)은 맨 처음 동해변 양양으로 가 거기 그 낙산(洛山)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이 땅을 불국토화하기 시작한다. 낙산은 바로 보타락산(補陀落山)의 준말로 관음보살의 거주처다. 산스크리트 명은 포탈라카(potalaka)이다.
그런데 그 보타락산이 인도땅에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을 보면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구도의 편력을 하는 도중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보타락산과 같은 말이다.)이라는 바다에 접한 아름다운 곳에서 관음을 친견하고 대비의 설법을 듣는 구절이 있다. 현장(玄裝) 스님도 보타락가산을 언급하면서 그곳이 스리랑카로 가는 해로(海路) 가까이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에 그곳 보타락산은 인도 남단의 마라야산 동쪽 구릉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당시의 인도 관음의 항해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보문품」에는 "큰 물에 떠내려가도 그 이름을 염하면 곧 얕은 곳을 얻을 수 있다. 진귀한 보물을 얻으려 바다에 들어가 폭풍에 밀려 나찰귀국(羅刹鬼國)에 가 닿더라도 그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관음의 이름을 부르면 모두 나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라고 설하고 있다. 나찰귀국이란 사람을 잡아먹는 마귀의 일종인 나찰이 머문다고 전해지는 사자섬 스리랑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건대 조선과 항해 기술이 보잘 것 없던 당시 남해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공포스러운 풍파의 수난으로부터 보호받을 양으로 관음을 신앙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여기서 영향을 받아 중국 주산열도(舟山列島)에 보타산(普陀山)이 등장한다.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 포탈라카 궁전이 그 불가사의한 위용을 자랑하면서 굳건히 서 있다. 우리나라의 관음 도량으로서 강화도 보타산 보문사(普門寺)에도 관음보살상이 그 산 8부 능선 쯤에 바다를 멀리 바라보며 자비롭게 미소짓고 있다. 낙산사 홍련암 역시 관음보살이 이땅 동해변에 나투신 영험 있는 도량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관음보살, 관음 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관음 숭배는 그 대자비를 베푸는 님에 대한 절대 귀의를 말한다. 그러한 귀의를 통해서 우리는 점차 관세음보살의 마음을 닮아가고 그 결과 나 자신도 관음이 되어 무한한 자비심을 타인에게 베풀게 된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일심으로 관음을 불러 관음과 하나가 되면 관세음보살로부터 구제를 받음은 물론이요, 고통받는 타인에게 자연스레 자비의 손길를 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우메하라 다케시(梅原 猛)의 관음 신앙에 대한 정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귀담아 들을 만한 얘기이기에 소개해 보겠다. 그는 관세음보살에 절대 귀의하는 마음에서 안심(安心), 희망, 외포(畏怖), 감사의 네 가지 공덕이 생긴다고 한다.
안심이란 관세음보살에 귀의한 결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마음의 안정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안심과 귀의심은 미래에 대한 강한 희망을 부여한다. 외포란 관음의 무한한 변화는 그야말로 어떤 형태로든 나타나는데, 그것은 뭇 생명 있는 것들에 대한 경외심을 우리에게 품도록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감사란 우리의 어머니, 나의 부인, 주변의 인물들을 모두 관음이라 생각할 때 이미 그것만으로 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란다.
대자비의 님, 관세음보살은 현재 우리 사찰의 대비전(大悲殿)이나 관음전(觀音殿), 혹은 원통전(圓通殿)이라는 편액을 단 건물 안에 모셔져 고통에 찬 뭇 생명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면서 오늘도 그렇게 미소짓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종류와 성관음(聖觀音)
관세음보살은 그 절대 자비력 때문에 많은 민중들의 귀의를 받았으며 그 결과 여러 종류의 관음상이 생겨나게 된다. 중생의 고통이 다양한 만큼 그 갖가지 고통에 시의적절한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관세음보살 역시 다양하며 변화무쌍하게 몸을 나투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변화의 신, 관음'으로 불릴 정도이다. 『법화경』 「보문품」에서는 그 변화의 모습을 33가지로 나열하고 있다. 더불어 6-7세기에 접어들면 힌두교의 영향으로 다양한 관음의 분화가 이루어진다. 이름하여 성관음(聖觀音), 천수관음(千手觀音), 11면관음(十一面觀音), 백의관음(白衣觀音), 양류관음(陽柳觀音), 불공견색관음(不空絹索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준제관음(准堤觀音) 등이 가장 유명한데, 이를 일곱 가지의 중요한 관음이라 하여 칠관음(七觀音)이라 표현한다. 이들 중 준제관음 혹은 불공견색관음의 어느 한 명을 제외하고 육관음이라고 하는데 관악산 삼막사의 육관음전은 이들을 한꺼번에 모신 대표적인 법당이다. 이 밖에도 백의관음(白衣觀音)과 양류관음(陽柳觀音)도 우리 민족에게 많이 알려진 관음이다.
여러 관음중 성관음(聖觀音: Arya avalokite)은 수많은 관음의 기본형으로 일반적으로 우리가 흔히 관세음보살이라 할 경우 이 관음을 지칭한다. 지금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 유산인 고려불화의 경우, 거기 관음보살도가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수월(水月)보살은 단연 압도적인 수를 점하고 있다. 바로 그 수월관음이 성관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수월관음은 천의(天衣)를 걸치고서 살이 살짝 비추이는 베일로 전신을 덮은 모습인데 반가(半跏)의 자세로 물가의 바위 위에 수월관음은 걸터 앉아 있다. 손에는 상서로운 꽃이 핀 나무가지를 들고 있으며 등 뒤에는 대나무, 특히 쌍죽(雙竹)이 솟아나 있고, 오른팔 앞쪽 바위 위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정병(淨甁)이 놓여 있다. 그 관음보살의 시선이 맞닿는 오른쪽에는 진리를 구하는 선재동자가 그를 치어다 보고 있다.
이러한 정경은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가 관세음보살에게 보리심을 구하는 장면과 일치하는데, 그 장소는 관음보살이 머문다는 보타락가산이다.
그리고 수월관음이라 칭한 이유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선재동자에게 가르침을 베푸는 그 지점이 물가이며 동시에 달이 떠 있는데서 연유한 듯하다. 특히 일본 장락사(長樂寺) 소장 수월관음도를 보면 두마리의 토끼가 떡방아를 찧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둥근 달이 휘영청 밝다. 한편 관음의 보관에는 화불로서 아미타불이 박여 있는데 이는 『무량수경』에서 연유한 것이다.
관음 신앙이 발생해 온 이래, 그 오랜 기간 동안 관음이라면 이러한 자비로운 관음상 밖에 없었으나 6 - 7세기 이후 힌두교나 밀교의 형향으로 십일면관음, 천수관음 등 여러 변화 관음이 발생하면서 본래의 관음의 모습을 이러한 변화 관음과 구별짓기 위해서 특히 정관음(正觀音)이라든가 성관음(聖觀音), 성관자재(聖觀自在)라 부르게 되었다.
관음보살이 남성인가 여성인가
그렇다면 이 관음보살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일반적으로 관세음보살의 모성적 자비심을 강조하여 여성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데, 전남 무위사(無爲寺) 극락전 후불벽화 뒷면의 관세음보살이나 인도 고대(古代)의 관음보살상처럼 남성상을 취한 형상도 여럿 보인다.
사실 보살은 여래와 마찬가지로 남성 여성을 초월한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에 관음 관계 경전의 대부분은 여성의 형상으로 그 모습을 규정짓지 않는다. 그러나 7세기 중엽 이후에는 힌두교의 여성 숭배 신앙이 불교에 유입되면서 여성적인 모습을 한 관음이 경전상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관음상으로서는 중국 송나라나 고려 시대 이후의 관음에 그러한 여성으로서의 이미지가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고려불화나 후불 탱화에 등장하는 한국의 관음상은 언뜻 보기에 자비로운 여성의 모습이라는 것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 상호(相好)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분명 여성의 모습은 아니다. 얼굴에 수염이 가느다랗게 나 있다. 바로 성(性)은 남성인 채 관음의 자비심을 최대한 부각시키려고 여성적 외모를 갖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장보살만 제외하고 다른 보살상도 이와 거의 유사한 형상이라는 데 있다. 관음상을 다른 보살상과 구별짓는 뚜렷한 특징으로서 그가 쓰고 있는 보관에 아미타불이 화불(化佛)로 들어앉아 있는 것 이외는 없다.
그러나 관음에 투영된 내용상의 특징이나 역사적 변화가 어떠하든간에 우리가 현재 인식하고 있는 관음상은 여성으로서의 관음, 사랑이 가득한 자비로운 모성으로서의 관음인 것만은 틀림없다. 인류의 보편적 감정, 아니 동양인의 가슴에 사랑과 자비의 구체적인 화신은 어머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를 애타게 찾는 목소리를 듣고 엄마는 아이에게 달려가 무조건적이고 무차별적 사랑을 베푼다.
어머니 되시는 관음은 고통받는 그 당사자가 자신을 밀고했거나 배반했다고 해서 벌을 주거나 멸망시키는 진노하는 가부장적 아버지 같은 분이 결코 아니다. 어머니 되시는 관음은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한다. 선한자 악한자, 재능이 뛰어난자 모자란자, 힘이 센자 약한자를 그모습 그대로 껴안는다. 이런 의미에서 관음보살은 어머니의 모성 그 자체여야 하며, 그러한 형상으로 조성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출처 : 조계사 홈페이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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