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마음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이웃과 함께 할 때는 마음을 평등하게 가져라. 애정을 끊고 부모를 하직한 것은 온 세상을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다. 만약 가깝고 먼 것이 있다면 마음이 평등하지 못한 것이니, 그렇다면 출가한들 무슨 덕이 있겠는가.
마음에 사랑하고 미워하는 분별이 없다면 이 몸에 어찌 괴롭고 즐거운 성쇠(盛衰)가 있으랴. 평등한 성품에는 나와 남이 없고, 큰 거울에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지옥 · 아귀 · 축생 등 삼악도에 부침하는 것은 애증(愛憎)에 얽혀 있기 때문이고, 육도(六道)에 윤회하는 것은 친하고 성긴 업에 얽힌 탓이다. 마음이 평등하면 따로 가지고 버릴 것이 없으니, 가지고 버릴 것이 없다면 생사가 어디 있겠는가.
위없는 보리도를 성취하려면
항상 평등한 마음을 지니라
사랑하고 미워하는 차별 있으면
도는 더욱 멀어지고 업만 깊으리.” -野雲比丘/自警文-
중노릇하기가 갈수록 어렵게 느껴진다. 절집에서 처신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말이다.
바로 엊그제 송광사 큰절에 결젯날이라 내려갔었다. 서울에서 온 50대의 여신도 한 사람이 나를 보더니 “여우 왔습니다.”하고 아는 체를 했다. 그것은 인사말이 아니라 가시 돋친 말이요, 화살이었다. 여우가 왔다고 가시 돋친 말을 토해낸 그 여신도는 지난번 본란에 실렸던 ‘불란서 여배우’를 두고 하는 말이 분명했다.
필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절에나 있음직한 보편적인 경우를 들어, 서로가 반성하여 정법에 귀의한 바른 신앙생활을 하자는 뜻으로 그런 글을 쓴 것이다. 그런데 그 여신도는 전체의 글뜻은 생각하지 않고 귀에 거슬리는 몇 개의 낱말을 가지고,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한 말로 오해하여 스스로 ‘불여우’임을 자처한 것이다.
이러니 대중 앞에서 말을 하고 글을 쓰기가 갈수록 어렵다는 말이다. 또 남이 안하는 기능을 갖게 되면 시기 질투와 화살을 받게 되는 것이 이 사바세계의 양상이다.
우리 마음이 열려 있을 때는 곁에서 바람이 불건 파도가 치건 내 속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그런 메아리들이 우리 마음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법계가 평등하다면 우리들 마음의 바탕도 평등할 것이다. 이웃과 내가 무연한 남이 아니라 법계의 한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들이다. 그런데 엄연한 이런 실상이 일단 자기 중심적인 생각의 울타리에 갇히게 되면 엉뚱한 오해와 자격지심을 불러일으킨다.
말이 났으니 또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여 배우고 익히는 것은 성인의 교훈을 우리 생활의 지표로 삼아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한 교훈이 우리 삶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은 아무 의미도 없게 된다.
한 해에도 몇차례씩 이절 저절에서 똑같은 신앙인의 생활규범인 ‘보살계’를 받고 그 법문을 듣는 사람은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부지기수인데, 그런 법회가 일상적인 삶에 이어지지 않고 한낱 행사로 그친다면, 아무리 성인의 가르침에 귀의했기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소리다.
절 둘레에는 아직도 ‘니 신도 내 신도’가 있고, ‘니 스님 내 스님’이 엄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이런 현상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불 · 법 · 승 삼보에 귀의한 것이지 어떤 특정한 인물에 귀의한 것은 아니다. 스님들이 신도들을 인도하는 것도 부처님의 바른 법에 나아가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지, 자신의 후원자나 사병(私兵)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귀의승(歸依僧)은 특정 개인에 의지함이 아니라 보편적인 청정한 승가에 의지함이다. 그런데 어떻게 ‘니 스님 내 스님’이 있고 ‘니 신도 내 신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대승법문인 범망경(梵網經) 보살계본에는 이런 가르침이 실려 있다.
“신도가 와서 스님들을 초대하면 객스님도 함께 공양받을 분(分)이 있으므로 절 책임자는 객스님도 함께 보내야 한다. 만약 그 절에 사는 스님들만 초대를 받고 객스님을 따돌린다면, 절 책임자는 한량없는 죄를 지은 것이며 그는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 사람은 사문(沙門 : 출가 수행자)이 아니며 불제자가 아니다.”
여기 뭐라 내 경험적인 논평을 늘어놓으면 또 엉뚱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지 몰라 입을 다물지만,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교훈이 불교의 정신이요, 바른 가르침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같은 보살계본에서는 따로 초대받지 말라는 교훈도 있다.
“따로 초대를 받아 자기만 이양(利養)을 취해서는 안된다. 이런 이양은 대중이 똑같이 받을 것인데, 혼자서만 초대를 받으면 이것은 대중의 몫을 저 혼자서 독차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면서 신도는 스님들을 따로 초대(別請)해서는 안된다고 잇따라 가르치고 있다. 초대의 절차와 방식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신도가 스님을 초대할 때는 먼저 절에 가서 소임자(일보는 책임자)에게 그 뜻을 말하라. 그러면 소임자는 ‘스님들을 차례대로 초대하는 것이 모든 거룩한 스님들을 모시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5백 성자나 보살들만을 따로 초대하는 것은 차례대로 보통 스님 한 분을 초대하는 것만 못하다. 따로 초대하는 것은 이교도들이나 하는 풍습이고, 여래의 가르침에는 따로 초대하는 법이 없다.”
‘이 법이 평등해서 높고 낮음이 없다(금강경)’는 가르침은 이런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집착이 없는 마음은 열린 마음이고 집착하는 마음은 닫힌 마음이다. 우리가 안팎으로 자유롭다는 것은 집착의 얽힘에서 벗어났을 때만 가능하다.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다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막상 우리들 자신의 삶에 당해서는 아득하고 막막할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꾸준히 밀고 나아가는 정진이 따라야 한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뜻도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평등한 성품에는 나와 남이 없고, 큰 거울에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고 했는데, 그 평등한 성품과 큰 거울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더 말할 것도 없이 때묻지 않은 청정한 불성이 바로 그것이다.
남의 말에 귀기울이거나 밖으로 헛눈 팔지 말고, 자기 자신을 투철히 관찰할 때 평등한 성품과 그 큰 거울은 저절로 드러난다.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라는 말이 있다. 평상심이란 순간순간 지니고 있는 그 마음이기도 하지만, 다른 말로 하자면 너니 나니, 네것이니 내 것이니 라는 차별을 극복한 열린 마음이다.
자경문의 저자인 고려 말 야운 스님의 게송을 함께 음미하면서 이 강론을 마치려고 한다.
“위없는 보리도를 성취하려면
항상 평등한 마음을 지니라
사랑하고 미워하는 차별 있으면
도는 더욱 멀어지고 업만 깊으리.”
출전 : 텅빈 충만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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