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유생연(中有生緣,中有)

태아(胎兒)의 성장과정(成長過程)

근와(槿瓦) 2015. 10. 18. 00:45

태아(胎兒)의 성장과정(成長過程)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태아의 성장과정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태내 오위를 살펴 보면 첫째는 갈라람(渴羅藍 : K lala )위가 있다. 이는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아라야식(因)이 부모의 정액(緣)과 혼합하여 어머니 태 안에 태어나는 최초의 인간으로 초칠일간의 상태를 이름한 것이다. 이를 응활(凝滑)이라고 번역하는데 마음인 아라야식에 의지하여 최초의 육체를 형성하는 상태로서 지대(地大)와 수대(水大)와 화대(火大)와 풍대(風大) 등 사대의 요소가 마음과 더불어 응결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를 육단심(肉團心)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음과 육체가 최초로 결합된 마음과 육체라는 뜻에서 이름한 것이다.

 

둘째는 액부담(額部曇 : Arbuda)위로서 이는 앞의 갈라람 위에서 응결된 부모의 정액과 마음의 액심(額心)이 점차 응고되어 엷은 살결이 덮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二칠일째의 기간에 형성되는 육체와 마음의 상태를 이름한 것이다.

 

셋째는 폐시(閉尸 : Desi)위로서 이는 위에서 말한 살결이 더욱 견고하게 응고되어 혈육이 생기는 상태를 말한 것이며, 그러므로 이를 혈육이라 번역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육체가 형성되는 기간은 三칠일간의 시간이 요한다.

 

넷째는 건남(鍵南-Ghana)위이니 이를 견육(堅肉)이라 번역한다. 이 기간은 제4주의 칠일간을 의미하는데 이는 매우 인간형을 갖춘 육체를 뜻한다.

 

다섯째는 발라사(鉢羅奢-Prasakha)위를 말하는데 이를 지절(肢節)이라고 번역한다. 즉 사지(四肢)와 오장(五臟) 육부(六腑)가 형성되고 나아가서 골격과 정신의 형태까지도 완비하여 밖의 세계에 어머니로부터 출생하기 이전의 태내(胎內)의 형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출생하기까지의 모든 육체가 완성되는 기간으로서 가장 길다.

 

이상과 같이 사람이 외계로 출생하기까지의 과정은 매우 복잡하다. 우리가 지혜의 눈이 없기 때문에 중유가 생유로 환생하는 찰나를 관찰할 수가 없지만 진정한 의미로 보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라야식이 어머니의 태 안에 의탁하는 찰나인 것이며, 그 찰나가 곧 생일(生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육안으로 볼 수 없고 또 외계로 출생한 날짜를 생시 또는 생일로 정하고 생일 잔치를 벌이는 것은 유형의 형상만 볼 수 있을 뿐이고, 무형의 생명을 볼 수 있는 혜안(慧眼)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생태를 유식학적으로 설명하면 아라야식이 모태에 태어나 갈라람을 형성하기 시작함은 인능변(因能變)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제8아라야식이 전생에 지은 모든 업력을 짊어지고 이것이 모든 인간의 조건을 창조해 내는 원인들을 총 대표하여 원인이 된다. 그리고 부모의 연을 만나는 즉시 인간 형태로 능히 변현하여 인간의 과보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으로 완성시켜 줄 모든 원인을 지니고 있는 아라야식 위에 점차 안, 이, 비, 설, 신, 의 등 몸(六根)과 마음(六識) 등 인간의 모든 것이 형성되는 과정을 과능변(果能變)이라 한다. 이는 태내 오위의 전체에 해당한 뜻으로 인간의 조건이 능히 조성되었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우리 인간은 완성되어 출생하게 되는데 이렇게 볼 대 우리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과의 도리에서 스스로 창조되는 것이지 다른 조물주에 의하여 창조되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이며 인과 응보의 도리이다.

 

이상을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에 비유하면 태내의 오위(五位) 가운데 전사위(前四位)는 명색(名色 : 정신과 육체)에 해당하며 최후의 지절위(肢節位)는 안, 이, 비, 설, 신, 의 등 육입(六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태내의 오위를 설명하였다. 이는 통상적인 학설로서 논전에 의하면 전오위에다 발모조위(髮毛爪位)와 근위(根位), 그리고 형위(形位)를 가하여 팔위(八位)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이들 팔위를 약간 중복되기는 하지만 논전에 의하여 간단히 살펴 보기로 한다.

 

첫째, 갈라람위는 중음신이 식이 최초로 모태에 의탁하면 중음신의 탈을 벗고 동시에 지, 수, 화, 풍 등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육체의 바탕이 마련되는 순간을 말한다. 즉 지계(地界)로 말미암아 육체(色)가 점점 부풀고 커지며, 수계(水界)를 연유(緣由)해서는 육체의 조직이 점차 구비되고 섭지(攝持)되어 이산(離散)하지 않는다. 그리고 화계(火界)를 연유하여 그 육체가 성숙되고 굳어지며 풍계(風界)를 연유하여서는 여러 가지 지절(肢節)이 각각 육체의 조직 안에 마련되고 안정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음신으로부터 인간으로 전환하여 인간의 육체와 정신 등 모든 것을 이룩할 모든 인간의 구성원인 아라야식은 어머니 태안에서 인간의 자체가 구성되고 생길 때 청정하거나 아니면 부정한 업력에 따라 얼굴이 예쁘고 밉고 둥글고 길고 또는 키가 크고 작고 또 신체가 약하고 건강한 것 등 전체의 조직(別報)이 마련된다. 그러나 그 중에도 가장 강력하고 최승한 세력은 업력에 의하여 여러 대상에 애착한 업인에 입각한 것이다.

 

이에 의하여 생가의 씨족과 성별과 빛이 구별되는 색력과 수명의 한계와 재산, 가구 등의 결과가 결정된다. 다시 말하면 후천적인 환경과 여건을 만나는 것은 전생의 애착심과 바로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들은 청정과 부정의 업력에 따라 결정되기도 한다. 이 세상에서 나를 중심하여 그 밖에 모든 것에 대하여 아집(我執)과 법집(法執) 등 애착심이 자연히 일어나게 된 것은 전생에 익혔던 업력과 훈습이 전생의 아라야식 안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괴로움과 즐거움 등도 자연히 발생한다고 한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전생에 지었던 순전한 업력에 의하여 나타나는 결과들이다.

 

다음은 액부담(額部曇)위로서 육체의 표리가 낙(酪)과 같은 형태를 가진 아이를 말한다. 낙(酪)이란 소, 낙, 제, 호의 일부를 의미하는 바, 예를 들면 소젖을 끓이면 점차 응고된 분유로 변하듯이 그 분유가 되는 과정에서 점차 굳어지며 그응고된 부분을 낙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아이가 태어나서 마치 육체가 젖이 응고된 형태와 같이 아직은 육체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를 액부담위라고 한다.

 

다음 폐시(閉尸)위는 이미 육체가 성숙되었으나 아직은 극히 유연한 상태를 의미한다.

 

다음 건남(鍵南)위는 이미 육체가 견고해지고 두터워진 상채로 된 것이며 그리고 만져도 견딜만한 정도의 육체가 형성된 것을 뜻한다.

 

다음으로 발라사카위(鉢羅奢佳位)는 육체의 지절이 완숙하고 골격도 튼튼하여 사람의 상호가 거의 형성된 위치를 의미한다.

 

다음 발모조위(髮毛爪位)는 이름 그대로 머리털과 손톱 등이 밖으로 나오는 상태를 말한다.

 

다음 근위(根位)는 눈, 귀, 코, 입, 몸, 뜻 등 육체의 구성이 완전히 형성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육체 위에 부분 조직이 완비된 상태를 말한다.

 

다음 형위(形位)는 근위의 모습에다 좀더 영양을 섭취하여, 육체의 전부를 완숙하게 구성된 형태이며 육체의 생김새는 하나하나가 분명히 나타나 있는 것을 뜻한다.

 

이상과 같이 아이가 태내에 태어나 자라나는 과정을 여덟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는 전생의 업력이 전체의 인(因)이 되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태내에서 따뜻한 온도와 습기 및 모든 영양 등을 연(緣)으로 하여 나타나는 과보(果報)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因), 연(緣), 과(果)는 세 발 달린 솥과 같아서 떨어질 수 없는 인과법 구성의 요건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전생에 선행을 많이 쌓아 좋은 업인으로 말미암아 좋은 부모를 만날 수 있고 또 그 결과인 육체도 튼튼하게 잘 태어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생의 모습은 전생에 자기가 지은 업력의 표현으로서 말하자면 자기에 의하여 자기 표현의 현상인 것이다.

 

이른바 자업자득이란 말과 같이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이며 이러한 운명과 결과는 보무의 탓도 아니요,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것은 스스로 고쳐나가며 미래의 결과를 좀더 개선하는 데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란 다른 종교처럼 조물주가 만들어 버리고 또 신의 섭리처럼 단정해 버리거나 아니면 조상의 원죄로 인하여 우리 후손들까지 그 죄의 댓가로 고생한다는 따위의 교리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숙명론이나 운명론에 따를 수 없으며, 또 인연의 결과라고 단정하여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리는 것은 진정한 불교의 인과법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과는 현재의 행동(業)에 따라 찰나에 새롭게 달리 창조되며 현재 익히고 배우는 지식은 다음의 지혜가 되며, 자신을 인도해 주고 성장시키는 원동력(業力)이 되며 동시에 내일의 참된 결과를 나타내 준다. 그러므로 현재의 노력은 즉시에 나타나며 내일, 모레, 그리고 금생에 완전히 나타난다. 그리고 평소의 활동과 습관이 축적되어 중음신을 통해 내생에까지 연장되어 그 결과가 나타난다.

 

좋은 약은 쓰지만 그 사람의 몸을 건강하게 하고 병을 낫게 해 주듯이 선행을 하는 것은 힘들지만 그 선행의 업력은 자신을 윤택하게 하고 마음(識)을 잘 도와주는 결과를 나타나게 해 준다. 그러므로 전생의 일들을 알려면 금생의 모습과 결과를 보면 알 수 있고, 내생의 결과를 알려면 현재의 마음씨와 행동을 관찰하면 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논전의 주를 참고하면 앞에서 말한 내용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즉 전생의 업력에 의하여 선과 또는 악과를 받으며 신체의 각 부분도 업력의 표현대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