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唯識)

대승유식론(大乘唯識論)

근와(槿瓦) 2015. 9. 11. 01:20

대승유식론(大乘唯識論)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서문

유식론(唯識論)이란, 바로 부처님의 매우 깊은 경계(境界)요, 범부와 이승(二乘)들의 알 바가 아니다.

그리고 이 논(論)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세 가지 공(空)을 밝히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이냐 하면, 첫째는 인무아공(人無我空)이요, 둘째는 인연법체공(因緣法軆空)이요, 셋째는 진여법공(眞如法空)이다.

 

아공(我空)이란, <나>가 본래부터 없는 것이어늘 다만 범부들이 어리석고 뒤바뀌어 오음(陰)중에서 괜히 있다고 여길 뿐이다. 어찌하여 없다고 아느냐 하면, 범부들은 심(心) · 식(識)과 망상(妄想) 분별에 의하여 오음의 인연 법 중에서 <나>가 있는 것으로 보지마는, 그러나 그 아상(我相)은 五음 중에서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반야(般若)로 그를 관찰하되, 오음 중에서 하나라거나 둘이라거나 둘을 떠났다고 하는 그 실체를 모두 얻어 볼 수가 없는 것이 마치 토끼 뿔과 같다.

 

만약에 그 <나>가 하나의 가운데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응당 하나(一)의 가운데에서 볼 수가 있을 것이요, 응당 다름(異)의 가운데에서도 볼 수가 있을 것이요, 응당 화합(和合)의 가운데에서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어찌하여 하나의 가운데에 <나>가 없는 것이냐 하면, 항상함과 무상(無常)함의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에 <나>가 오음(陰)과 더불어 하나라고 할진대, 오음이 무상하니 <나>도 역시 무상할 것이다. 다시 <나>가 만약 오음과 더불어 하나라고 할진대 <나>가 항상하기 때문에 오음도 역시 항상할 것이다.

 

만약에 <나>가 오음과 더불어 둘이라고 할진대, 一편은 곧 앞에서 말한 무상함과 같을 것이요, 一편은 곧 앞에서 말한 항상함과 같을 것이다.

 

만약, 두 쪽(二邊=一과 二)을 떠났다고 한다면, 그도 또한 옳지 않나니 두 쪽을 떠난 별 다른 모양은 얻어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실로 신아(神我)가 없나니, 그와 같이 아는 이라면 인무아공(人無我空)에 들어갔다고 말할 것이다.

 

인연법체공(因緣法軆空)이란, 온갖 물질(色) 따위의 인연 법이 세속 인연을 따라 일어남을 말한다. 어떤 것을 세속 인연을 따라 일어남이라고 하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소를 보고 소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말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말을 보고 말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소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듯이, 물질(色) 따위의 법중에서도 역시 그러하여 기둥을 보고 기둥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물질(色)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물질(色)을 보고 물질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기둥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섶과 불이 서로 기다리지만, 실체가 없는 것과 같나니, 섶을 떠나서는 다시 실지인 불이 없으며, 불을 떠나서는 다시 실지인 섶이 없기 때문이다.

 

섶에 다시 실지인 불이 없는 것은, 불을 떠나서는 다시 실지인 섶이 없기 때문이며, 섶에 다시 실지인 불이 섶의 원인이 될 수가 없음은, 불을 떠나서는 다시 실지의 섶이 불의 원인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불을 볼 적에는 거짓으로 말하여 섶이라고 이름 지으며, 섶을 볼 적에는 거짓으로 말하여 불이라고 이름 짓나니 서로 기다려서 이룩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능히 이룩됨(能成)과 이룩될 것(所成)이 능히 이룩됨의 원인을 떠나지 않고 이룩될 것이 있으며, 이룩될 것의 원인을 떠나지 않고 능히 이룩됨이 있는 것이 저 섶과 불의 능히 이룩됨과 이룩될 것이 또한 실로 없는 것과 같나니, 그를 인연법체공(因緣法軆空)이라고 말한다.

 

진여법공(眞如法空)이란, 이른바 불성(佛性)의 청정한 실체는 예나 이제나 항상 일정함을 뜻함이니 그러므로 경에서 말씀하시기를,「불성(佛性)이란, 제일의공(第一義空)이라 말한다」고 하셨다. 말한 바 공(空)이란, 그 자체에 만 가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그 공(空)하여 만 가지 모양이 없다고 말함은 세상의 물질 따위의 유위법(有爲法)이 없기 때문에 만 가지 모양이 없다고 함이요, 성품 없는 법(無性法)과 같다는 것이 아니니 그는 바로 진여(眞如)인 법체(法軆)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씀하시기를,「팔해탈(八解脫)」에 들어 가는 이는 공(空)이 아닌 공(空)이라고 말하나니 그러므로 법 없는 공(無法空)과 같지 않다. 만약 그와 같이 관찰한다면 바로 진여법공(眞如法空)을 알았다 말할 수 있다」고 하셨다.

 

유식론(唯識論)에서 유식(唯識)이라고 말한 것은, 다만 내심(內心)만 있을 뿐이요, 빛깔 · 냄새 따위의 바깥의 여러 경계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어떻게 그와 같이 아느냐 하면, 사람의 눈에 백태가 끼어 있으면 괜히 털 바퀴와 건달바성(乾闥婆城) 따위의 갖가지 형상(色)들을 보게됨과 같다. 실로 눈 앞에 보이는 경계가 없건마는 다만 허망으로 그와 같은 온갖 중생 따위와 그 밖의 모든 경계를 보나니 그러므로 유식(唯識=識뿐이다)이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다만 물질을 부정한다고만 말해야 할 것이요, 응당 마음을 부정한다고는 말하지 아니해야 하는가.

 

그것에도 또한 일리가 있다고 하겠으나, 마음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상응심(相應心)이요, 둘째는 불상응심(不相應心)이다. 상응심이란, 무상한 망식(妄識)이 허망하게 분별하면서 번뇌의 결사(結使)와 함께 서로 응함을 뜻함이니 그를 상응심이라고 말한다.

 

불상응심(不相應心)이란, 이른바 항상 머무는 제일의제(第一義諦)의 마음이니 예나 이제나 한 모양이어서 그 자성(自性)이 청정한 마음임을 뜻한다. 지금 마음을 부정한다고 말함은, 망식(妄識)으로서 번뇌와 서로 응하는 마음을 부정할 뿐이요, 불성(佛性)인 청정한 마음을 부정함이 아니니 그러므로「마음을 부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대승유식론(大乘唯識論) 천친보살(天親菩薩) 지음

 

도를 닦음 참으로 특수하시며

견줄 수 없는 이치 잘 연설하시므로

그 대승(大乘)의 진리에 머리 조아리고

내세움과 부정함에 대해 말하겠나이다.

 

한량없는 부처님의 닦으신 도는

장애와 장애의 근본 제거하심이니

그 유식(唯識)의 자성이 고요하거늘

우둔한 사람은 그를 믿지 않네.

 

대승(大乘)에서「삼계(三界)에 식(識)만 있을 뿐이라」고 내세움은, 경에서「불자(佛子)여, 삼계란 마음만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나니, 그는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識)에 대한 총괄적인 명칭이다. 그 마음이란, 서로 응함(相應)이 있는 법이라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뿐(唯)이라는 말은 색진(色塵) 따위를 제외하는 말로 쓰인 것이다.

 

실로 밖에 육진(六塵)이 없거늘

육진 있는듯 함은 식(識)이 생긴 까닭이니

마치 눈에 백태가 있는 사람이

털이나 두 개의 달 따위를 봄과 같네.

 

대승에서 정의를 내세우되,「밖에 육진(六塵)은 실로 있지 않다」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밖에 육진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가.

 

그러한 내용을 증명하기 위하여「육진 있는듯 함은 식(識)이 생긴 까닭이라」고 말했나니 식(識)으로 말미암아 육진(六塵)이 나타남과 비슷하기 때문에 중생들이 육진 없는 중에서 육진이 있는 것으로 보게 된다. 그러한 것이 바로 식(識)임을 밝히기 위하여 그러한 비유를 내세운 것이니, 마치 눈에 병이 있거나 안근(眼根)이 착란을 일으키게 되면 물건이 없는 중에서 第二의 달과 같은 것을 인식하게 되며 사슴의 목마름 따위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유식(唯識)이라는 내용도 역시 그와 같나니 그러므로 삼계에는 실로 바깥 육진이 없건마는 전식(轉識)에서 육진이 나타나 보임과 같다. 삼성(三性)과 이제(二諦)가 모두 무성(無性)인 성질이니 안립(安立)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장소와 시간이 모두 일정함 없고

상속(相續=몸)의 일정치 않음도 없으며

짓는 일도 모두 이룸 아니니

식(識) 뿐이라면 육진(塵)도 있지 않네.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히려고 하는가 하면, 만일 육진(塵)을 떠나면 빚깔 따위의 식(色等識)이 생기는 것이 육진으로부터 생기지 아니할 것이다.

 

무슨 원인으로 그 식(識)이 어떤 장소에서만 생기게 되고 온갖 장소에서 생기지 아니하며, 이 장소에서 혹 생기기도 하고 생기지 않기도 하고 항상 생기지 않기도 하며, 뭇 사람이 동일하게 동일한 시간과 동일한 장소에 있더라도 그 식(識)은 일정하지 아니하고 상속(相續=몸)의 생김도 한 사람만을 따르지 아니한가 하면, 사람이 눈에 백태가 있으면 털이나 두 개의 달 따위를 보나 딴 사람은 곧 보지 아니 하는 것과 같다.

 

또, 다시 무슨 원인이 있어서 눈에 백태가 낀 사람이 보는 털이나 파리 따위의 물건은 털이나 파리 따위의 사실을 능히 만들지 못하고, 그 밖의 물건을 능히 만드는가.

 

또 꿈속에서 얻은 바 음식이나 의복 · 독약 · 칼 · 곤장 따위는 능히 음식 따위의 사실을 짓지 못하고 그 외의 물건만이 그를 능히 짓는가.

 

또, 건달바성(乾闥婆城)은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성(城)이라는 사실을 능히 짓지 못하고 그 외의 성만이 그를 능히 짓는가.

 

만일 동일하게 육진(塵)이 없다면, 그 네 가지 내용은 어찌하여 동일하지 아니하는가. 그러므로 육진(塵)을 떠났으며,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시간과 일정하지 않은 상속(相續)과 짓는 일인 그 네 가지 내용이 모두 성립되지 않으며 성립 안되는 것도 아니다.

 

일정한 장소 따위의 내용이 성립됨이 마치 꿈과 같다. 어찌하여 꿈 속에 온갖 물건이 있는 곳을 떠났으며, 혹은 나라와 동산과 남자와 여자 따위를 보되 온갖 곳에서가 아니며, 혹은 어떤 곳에서 어느 때에는 보고 어느 때에는 보지 아니하여 항상 보지를 아니하는가. 그러므로 육진(塵)을 떠났다.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시간이 성립하게 됨은 아귀(餓鬼)와 같고 상속(相續)이 일정하지 않음은 아귀의 상속이 일정하지 않으면서 성립되는 것과 같다. 어떻게 그것이 성립되느냐 하면, 모두가 같이 고름의 강물 따위를 보나니 고름이 강에 가득하기 때문에 고름의 강물(膿河)이라고 말하나니 마치 소(酥)의 항아리라고 함과 같다.

 

아귀들은 동일한 업보의 위치에서 모두가 함께 고름 따위가 강 안에 가득 찬 것이 하나가 아닌 것임을 보게 된다.

 

고름 강물을 보는 것과 같아서 그 밖의 똥 따위의 강물을 보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혹은 어떤 사람이 칼과 곤장을 가지고 앞을 가로 막아서 그 곳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기도 하나니, 그와 같이 유식(唯識)의 상속(相續)이 일정하지 아니하나 육진(塵)을 떠나서도 성립될 수 있는 것이 꿈속에서의 손실이나 일을 짓는 것과 같다.

 

꿈에서 남자나 여자가 성교하는 사실을 떠났으나 유정(遺精)모양이 있어서 꿈에 손실을 당하는 것이 성립되며, 일을 짓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그와 같은 비유는 장소와 시간의 일정함 따위인 네 가지 내용이 성립되는 것에 각각 비유한 것이다.

 

다시 지옥에서와 같아서, 모두가 지옥의 비유로 말미암아 네 가지 내용이 성립될 수 있다. 어떻게 성립될 수가 있느냐 하면, 옥졸(獄卒)과 그리고 핍박이나 해독을 함께 받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지옥에서 온갖 죄를 받는 사람들이 옥졸 따위의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시간을 보는 것과 같으며 개와 까마귀와 산 따위가 오는 것을 보는 것과 같아서, 동일하게 하나가 아닌 것을 보며 핍박이나 해독을 받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실로 옥졸 따위가 없건마는, 동일한 업보의 증상연(增上緣)으로 말미암아 딴 곳에서도 역시 그와 같나니 그 공통된 비유로 말미암아 네 가지 내용이 성립될 수 있다.

 

무슨 까닭으로 옥졸과 개와 까마귀 따위를 실지 중생이라고 인정하지 아니 하느냐 하면, 그런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 옥졸은 지옥에서 죄를 받는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며, 지옥의 고통을 능히 받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저 지옥의 사람이 번갈아 서로 서로 해친다면, 어떻게「이것은 지옥의 사람이고 저것은 옥졸이라」고 분별하겠는가. 만일 얼굴 모습과 역량이 동일하여 서로 서로 두렵게 하는 사실이 없다면, 붉은 쇠로 된 땅에서 불꽃이 항상 일어나고 있으니 그는 그 불에 타는 고통을 능히 참거나 받지 못하거늘, 어찌 그 속에서 딴 사람들을 능히 핍박하고 해치겠는가.

 

그것(獄卒)이 지옥의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지옥에 태어나겠는가.

 

어찌하여 축생(畜生)은 천상에 태어나게 되는가. 그와 같은 지옥에 축생과 아귀와 딴 종류들이 지옥에 태어난 것을 옥졸이라고 못 하겠는가. 그러한 사실은 옳지 못하다.

 

축생이 천상에 태어남과 같이

지옥에는 잡도(雜道)가 없나니

지옥에서 받는 그 고통을

그(獄卒)는 능히 받지 않기 때문이네.

 

만일 축생이 천상에 태어나면 잡업(雜業)으로 말미암아 천상 세계의 낙을 능히 얻게 되어 그 안에 태어나면 천상 낙의 과보를 받거니와, 옥졸은 그렇지 아니하여 지옥의 고통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축생과 아귀가 지옥에 태어나게 되는 도리가 없다.

 

죄인들의 업으로 인하기 때문에

옥졸 따위가 거기에 태어남과 같다.

만일 그의 변해 달라짐이라 여긴다면

식(識)에 대해선 왜 인정 하는가.

 

지옥 사람들의 업보로 말미암아서 사대(大)가 달리 나타나게 되고 옥졸 따위의 가지 가지 차별이 생기고 빚깔과 모양의 다름이 나타난 것을 옥졸 따위라고 말하듯이, 변해 달라짐도 역시 그와 같아서, 혹 손과 발 따위의 움직임을 보여 그들에게 두려움을 내게 하고 살해하는 일을 짓는다.

 

혹은 두 산이 사납게 떠받는 양과 같이 합하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며 쇠 나무 숲에는 쇠 나무의 날카로운 가시가 숙이기도 하고 꼿꼿하게 서기도 한다.

 

그러한 말은 그러한 사실이 없지 않다는 것을 의미함이어늘, 무슨 까닭으로 식(識)으로 말미암아 업식(業識)을 일으켜서 변해 달라짐이 있다고 인정하지 아니하고 그 사대(大)에 그 같이 변해 달라짐이 있다고 말하는가.

 

다시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식(識)의 안에서 업(業)이 훈습하기에

업과(業果)가 밖에 생겼다 고집하면서

무슨 까닭으로 훈습하는 장소인

그 안에선 업과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것은 죄인의 업으로 지옥에서 그와 같은 따위의 사실과 사대(大)가 모이었다가 그것이 변해 달라지는 것을 능히 보게 된 것이니, 그것은 업의 훈습이 지옥 사람의 계속하는 식(識)속에 있는 것이요, 딴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훈습하는 곳에서 그 식(識)의 변해 달라지는 그것이 옥졸 따위와 같음이니 그것은 바로 업과보(業果報)요 본래의 곳에 있다고 인정할 것이 아니다. 훈습이 아닌 곳에서 업과가 생긴 것이라고 인정하는데 무슨 원인으로 그와 같은 집착을 내는가. 아함(阿含)이 바로 그의 원인이다.

 

만일에 다만 식(識)에서 빚깔 따위의 물건이 생긴 것과 같을 뿐이고, 빚깔 따위인 바깥 물건이 없다면, 부처님 · 세존께서「실로 빚깔 따위의 온갖 받아들임(入)이 있다」고 응당 말씀하시지 아니하셨을 것이다.

그 아함(阿含)은 원인이 될 수가 없나니 아함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빚깔 따위인 받아들임(入)이 있다는 말씀은

<나>에 고집한 사람을 교화하기 위함이니

딴 뜻에 따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라

화생(化生)이 태어남이라 말씀하심과 같네.

 

부처님 · 세존께서「화생(化生)한 중생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딴 뜻으로 말미암아 말씀하신 것이며, 상속(相續)이 끊어지지 않고 내생에까지 이르는 것을 들어 말씀하셨다.

다시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과 그리고 <나>가 있지 않고

다만 법에 인과(因果)만 있을 뿐이네.

 

라고 하셨으니, 그로 말미암아 따로 말씀하신 것은 바로 별교(別敎)라고 알아야 한다.

부처님 · 세존께서「빚깔 따위인 온갖 받아들임(入)도 역시 그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은, 받아들임(入)을 설명함을 들을만한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함이시니 그런 말씀은 교(敎)의 뜻에 의함이다.

 

별교(別敎)의 뜻은 어떠한가.

 

식(識)이 제 종자로부터 생겨서

나타나 일어나며 육진(塵)과 같다

안팎의 받아들임(入)을 성립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그 두 가지를 말씀하셨네.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히려고 함이냐 하면, 육진(塵)과 비슷한 식(識)은 제 종자의 수승한 종류로부터 변하고 달라져 생기나니 그 종자와 및 육진과 비슷한 그 나타남이 빚깔(色)과 비슷한 식(識)의 생김이 되는 방편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차례로 안입(眼入)과 색입(色入)을 말씀하셨다.

 

나아가서는 촉(觸)과 비슷한 식(識)은 제 종자로부터 변해 달라져서 차별로 생김에 이르나니 그 종자와 및 촉과 비슷한 그것의 나타남이 촉(觸=닿임)의 식(識)이 생기는 방편문이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 · 세존께서 신입(身入)과 촉입(觸入)이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 뜻을 들어서 받아들임(入)을 말한들 무슨 이익이 있는가.

 

만일 어떤 이가 그 가르침에 의하면

인무아(人無我)에 들어갈 수가 있으며

별교(別敎)로 말미암아 분별을 제거하고

능히 법공(法空)에 들어갈 수 있다.

 

만일 부처님 · 세존께서 그런 내용으로 말미암아 온갖 받아들임(入)을 말씀하시면 그 교화를 받는 제자들은 인공(人空)에 들어갈 수가 있을 것이니, 여섯 쌍(六雙)으로부터 다만 육식(識)이 생길 뿐이고, 한 법도 보는 바가 될 것이 없으며, 내지 닿임(觸)도 될 것이 없게 되어, 만일 그러한 도리를 알면 인공(人空)에 들어간다고 말할 것이요, 교화를 받는 제자들은 인아공(人我空)에 들게 될 것이다.

 

별교(別敎)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유식교(唯識敎)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법아공(法我空)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법공(法空)에 들어가느냐 하면, 온갖 법이 유식(唯識)에서 생겨서 색진(色塵) 따위와 비슷하고 한 법도 색진 따위 모양이 된 것이 없나니, 만일 그와 같은 도리를 알면 법공에 들어가게 된다.

 

만일「온갖 법이 한결같이 모두 없고, 그 유식(唯識)도 또한 응당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성립되겠는가. 온갖 법이 한결같이 없는 것을 법공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며, 그러한 도리를 아는 것을 법공에 들어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법공에 들어갈 수가 있는가. 성(性)과 상(相)을 분별함을 제거함으로 말미암아 법공에 들어갈 수 있다.

 

범부들이 온갖 법상(法相)을 분별함은, 그 법상인 온갖 법이 공하여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말미암아 그를 법공이라고 말한 것이요, 말할 수 없는 부처님의 경계로 말미암아 법공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유식(唯識)은 별식(別識)과 소분별(所分別) 자체가 있는 바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공(空)함이니, 만일 그런 도리에 들어가면 유식이 성립되고 법아공(法我空)에 들어가리니 온갖 법을 없다고 부정해 버리는 것이 된 것은 아니다.

 

만일 그와 같이 식(識)을 식별하지 못하면 응당 별식(別識)의 경계(界)가 되고 유식의 내용이 성립되지 못하리니 육진(塵)이 실로 있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를 어떻게 믿을 것인가. 그러한 내용으로 말미암아 부처님 ·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빚깔(色) 따위인 받아들임(入)은 바로 있는 것이다. 참으로 있는 것은 아니나 빚깔 따위인 받아들임은 안식(眼識) 따위의 경계가 된다」고 하셨으니 그와 같은 도리로 말미암아 그를 믿을만하다.

 

바깥 육진(塵)이 인허(隣虛)와 더불어

하나도 아니고 또한 다름도 아니며

저 모임도 또한 티끌도 아니니

인허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네.

 

그 게송은 무슨 내용을 밝힌 것이냐 하면, 그 빚깔 따위인 받아들임은 각각 안식(眼識) 따위의 경계가 됨이다. 그를 인허진(隣虛塵)과 더불어 하나라고 하면, 방분(方分)이 있는 색(色)과 같다고 하는 비세사(鞞世師)가 고집한 것과 같다. 그를 하나가 아니라 한다면, 인허진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허가 모인 것이라고 한다면, 색입(色入)이 인허로 더불어 하나가 되어 안식(眼識)의 경계가 되리니 그 뜻이 옳지 못하다. 그것이 방분(方分)이 있는 색(色)이라고 한다면, 방분 중에서는 다른 자체를 볼 수가 없다. 또한 많은 인허도 아니니 각각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인허가 모여서 티끌을 이룬 것도 아니니 인허가 하나의 물체를 이루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이루지 않는가.

 

일시에 여섯이 함께 모였다면

인허(隣虛)가 육방(方)을 이루며

만일 여섯이 동일한 곳이라면

모인 분량도 인허와 같으리라.

 

여섯의 인허가 육방(方)으로부터 와서 하나의 인허와 함께 모였다면, 그는 하나의 인허가 하나의 물건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여섯의 방분이 있기 때문이며, 그 하나의 인허가 있는 곳에 타방(他方)의 인허는 머무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의 인허가 있는 곳이 바로 여섯의 곳이라면, 모두가 동일한 곳이므로 곧 모인 온갖 물체의 분량이 인허와 같아서 서로가 서로 지나치지 못하여, 인허의 분량이 모인 것과 같아서 또한 응당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말하기를「인허는 모인 것이 아니니 방분이 없기 때문이며, 그런 허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는 바로 인허의 모임이 번갈아 서로 응함이다.

 

계빈국(罽賓國)의 비바시(毘婆沙)스님들이 그와 같은 말을 하는데, 곧 그이들에게 묻겠다. 그대들이 말한 바와 같이,「인허가 물체에 모인다」고 하면, 그 모임은 인허와 다르지 아니할 것이 아닌가.

 

만일 인허가 합하지 아니 한다면

모인 가운데에 무엇이 화합했는가

다시 또 방분(方分)이 없다고 한다면

인허의 모임이 성립되지 아니하리라.

 

만일에 인허가 화합함이 없다면, 모인 중에서 그 화합은 어느 법에 속하는가. 만일에 그대가 말하기를,「인허가 번갈아 서로 화합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 내용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인허에는 방분(方分)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화합이 성립하지 못한다면, 어찌, 하물며 모임이라 가명(假名)함이 응당 그와 같이 모임에 방분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에 화합의 내용이 성립되지 못한다면, 방분이 없는 인허가 어찌 화합이 성립되랴. 그러므로 인허는 하나의 물체를 이루지 못한다. 인허의 화합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지금 논하지는 않겠다.

 

만일 물체에 방분이 있다면

하나의 물체를 이루지 못하리라.

 

인허의 동쪽 방분(方分)은 그 외의 五방(方)과 다르며, 내지 아래의 방분도 역시 그와 같다. 만일 방분에 다름이 있다면, 인허는 방분을 취하여 그 자체가 되었거니 어찌 하나의 물체를 이루겠는가. 그리고 그림자의 가리움은 또 어떠함인가.

 

만일 인허에 방분이 없다면, 해가 뜰 적에 어찌하여 한쪽에 그림자가 있는가.

 

무슨 까닭으로 그와 같은 질문을 하는가. 그 인허(隣虛)에는 별 다른 방분(方分)이 없고, 바로 태양이 비춘 바가 된 것이다.

 

다시 또, 이 인허가 저 인허와 더불어 만일 모두 방분이 없다면, 어찌하여 서로 장애하는가.

 

왜냐하면, 그 인허에는 딴 방분이 있지 않고 그 자리에 서로 합해졌으므로 딴 것이 오게 되면 곧 장애할 뿐이다. 만일 장애가 없으면 온갖 육방의 인허가 동일한 장소이므로 곧 온갖 모임이 인허의 분량과 같을 것이다. 그런 내용은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그 그림자와 장애는 모임에 속하고 인허에 속하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그런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가.

 

그대가 지금에 그 모임이 인허와 다름이 있다고 인정하는가. 그러므로 그림자와 장애가 모임(聚)에 속한다고 말하는가. 만일 동일하다면, 둘이 없을 것이요, 만일 모임이 인허(隣虛)와 다르지 않다면, 그 그림자와 장애가 곧 모임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만 형상을 분별하여 모임이라고 말할 뿐이다. 어찌 그러한 사량(思量)을 할 필요가 있는가.

 

그 빚깔(色) 따위의 온갖 물체의 체상(軆相)을 부수지 아니해서는 어느 것이 그 자체가 되겠는가. 눈 따위의 경계와 푸름 따위의 종류인 그런 내용을 곧 응당 사량해야 할 것이다. 그 눈 따위의 경계와 푸름 따위의 종류를 그대가 물체(塵體)가 된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이 많은 물체인가, 하나의 물체인가.

 

만일 그렇다 한들, 무슨 허물이 있는가.

 

만일 많은 것이라 한다면, 그 허물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고, 만일 하나라고 하여도 역시 허물이 있나니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만일 하나라면 차례로 다님이 없으며

이미 얻거나 얻지 못함이 모두 없고

많은 딴 종류나 많은 딴 사실이 없으며

미세해서 보기 어려움이 또한 없으리라.

 

만일 온갖 푸름, 누름 따위가 눈의 경계와 간격이 생겨서 다르게 되는 것이 아니므로 해서 하나의 물체라고 고집한다면, 땅에서 차례로 다님이 있지 아니하여 한번 발을 디딜 적에 응당 모든 곳을 두루 밟아야 하고, 이 쪽에는 이미 얻었는데 저 쪽에서는 아직 얻지 못하는 그런 것이 일시에 둘다 성립되지 아니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시에 하나의 물건에서 이미 얻음과 아직 얻지 못하는 그러한 것이 있지 아니하며 많은 딴 종류인 코끼리 · 말 따위와 군사와 같은 것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딴 사실도 있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하나의 물건이 있는 곳에 많은 물건이 곧 그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니 이것과 저것의 차별이 어떻게 성립되겠는가. 다시 어떻게 하나가 되랴. 그 둘이 이르는 데에는 중간이 곧 공(空)해진다.

 

다시, 그 가장 미세한 물 벌레가 사대(大)와 더불어 형체가 같아서 볼 수 없는 내용도 없게 된다.

 

만일에 그대가 모양이 차별된 빚깔(色) 따위의 모든 진(塵)으로 말미암아 딴 물건이 있다고 고집하고, 딴 내용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결정적으로 인허의 딴 종류를 들어 응당 진(塵)의 차별을 분별해야 할 것이니 곧 인허는 하나의 물건을 이루지 아니하며, 빚깔 따위 오진(塵)도 눈(眼) 따위의 경계가 아니리니 그러므로 유식(唯識)의 내용이 성립된다.

 

모든 진(塵)이란, 식(識)과 법을 인식하는 것으로 그 자체가 된 것을 말함이니,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를 떠났기 때문에 증가함이 없고 바른 인과(因果)를 세우기 때문에 줄어들지 않는다. 무인(無因)과 불평등인(不平等因)과 이공(空)과 십이연생(緣生)이 없는 그것이 바로 그의 자성(自性)이니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 있다 하거나, 없다고 함은, 모든 양(量)에 의하여 그 시비를 결정함이니 온갖 양 중에서는 증량(證量)이 가장 수승하다.

 

만일, 진(塵)에 실로 그와 같은 증지(證智)가 없다면, 이른바「내가 그와 같음을 증명한다」는 것이 어떻게 일어나게 될 것인가.

 

증지(證智)도 꿈속과 같느니라.

 

꿈 꿀 때에는 진(塵)을 떠나서 산이나 나무 따위의 물질을 보나니 바깥 육진(塵)이 있지 아니하다. 증지(證智)도 역시 그와 같다.

 

그 때는 증지(證智)와 같이

그 때엔 진(塵)을 보지 않나니

어찌 진(塵)을 알겠는가.

 

그대가 말한 바와 같아서, 증지(證智)가 일어날 때에「내가 그와 같이 안다」고 말한다면, 그 때에는 그대가 진(塵)을 보지 아니하고 다만 의식(意識)으로만 분별하나니 안식(眼識)이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라 그 진(塵)을 어떻게 알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찰나에 사라짐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 때에 빚깔(色)과 내지 닿임(觸)이 이미 사라진 것을 고집한 것이다.

 

(문)

만일 오식(識)으로 해아릴(量) 바가 아니라면, 의식(意)도 능히 기억하여 지니지 못할 것이니, 그러므로 오진(塵)은 결정코 오식으로 헤아릴 바가 아닌가. 헤아림(量)이란 바로 봄(見)이라고 말하나니, 그러므로 빚깔 따위의 육진(塵)을 바로 알 바(所證)라고 말하는가.

 

(답)

그 뜻은 옳지 못하니 말하자면, 먼저 진(塵)을 이미 안 후에야 비로소 기억하여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진(塵)과 비슷한 식(識)이라 말함과 같다. 빚깔 따위 육진(塵)을 떠나 눈 따위 육식(識)에서 육진이 일어남과 비슷함이니 그 내용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그로부터 기억과 지님이 생기네.

 

(문)

그로부터 진(塵)과 비슷한 식(識)에서 분별하는 의식이 있어 기억과 지님과 더불어 서로 응하며 전에 일어났던 바와 같은 진(塵)이 그 다음에 생기게 되나니, 그러므로 기억과 지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고 고집하지 아니할 것이다. 말하자면, 먼저 식(識)으로써 진(塵)을 인식하는 것이, 꿈속의 식(識)에는 진(塵)이 없되 깰 때를 일으키게 됨과 같다.

 

만일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꿈의 식(識)에 진(塵)이 없음을 스스로 아나니, 또한 응당 깰 적에도 진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어늘, 이미 그러한 사실이 없으니 그러므로 깰 적에 진(塵)을 보는 것이 꿈속에서 보는 것과 다름을 알 수 있다.

 

또, 꿈에는 다시 일으키는 내용이 있는데, 깰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니, 모두가 진(塵)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답)

그런 말은 증거가 되지 않는다.

 

꿈에 본 진(塵)은 있지 않건마는

꿈 깨기 전에는 그를 아지 못하네.

 

그와 같은 허망한 분별과 관습과 어둠이 짙어서 세상 사람들이 진실 아닌 진(塵)을 보는 것이, 꿈에 본 것을 실로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꿈을 깨면 그렇지 아니하여 꿈에 본 진(塵)이 있는 것 아님을 실답게 능히 안다.

 

그와 같아서 만일 관행(觀行)하는 사람이 출세간(出世間)의 도를 닦으면, 분별 없는 지혜(無分別智)를 얻어 내세움이 아닌(非安立) 거룩한 진리에 들어가고 도를 보는 위치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리니, 그 때에는 분별이 없는 지혜를 증득하고, 그 다음에는 청정한 세속의 지혜를 얻어 진리대로 육진(塵)이 실로 있지 않고 그 이치가 평등한 것임을 볼 것이다.

 

만일, 자상속(自相續=몸)으로 말미암아 더욱 달라지는 차별이 더하기 때문에 중생의 육식(識)이 육진(塵)과 비슷하게시리 일어나나 실로 육진으로부터 생기는 것은 아니다.

 

착한 벗과 나쁜 벗을 섬기기 때문에 바른 법과 사뙨 법을 받고 들으며, 그로 말미암아 중생에게 사정(邪定)과 정정(正定)이 있게 되는데, 그 친근함과 말하는 것이 실로 없다는 것이 어떻게 성립되겠는가.

 

번갈아 서로 증상(增上)하기 때문에

두 식(識)인 정정과 사정이 이루어지네.

 

일체 중생에게는 번갈아 서로 인식하는 힘이 증상함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식(識)이 꼭 이루어지나니 혹 정정(正定)과 사정(邪定)이 그것이다.

 

번갈아 서로라 함은, 자타(自他)가 함께 자타의 일을 이룸이다. 그러므로 딴 식(識)과 딴 상속(相續)의 수승한 공능 때문에 딴 식과 딴 상속에서 수승한 공능이 생기게 되고, 바깥 육진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꿈의 식(識)에 경계가 없는 것과 같이 깰 적의 식(識)도 역시 그와 같다.

 

어찌하여 꿈속에서와 꿈 깬 뒤의 두 사람이 선과 악을 행함에 있어서 좋은 과보나 나쁜 과보의 두 과보는 미래가 동일하지 않는가.

 

꿈의 식(識)은 잠에 무너졌기에

미래의 과보가 동일하지 않다.

 

그 바른 원인은, 능히 꿈속의 마음으로서는 과보가 있지 않게끔 하나니, 혼수(昏睡)에 무너진 바가 되었기 때문에 마음이 약세(弱勢)가 되어 선악의 업을 이루지 못함을 의미한다.

(문)

모두 식(識)만 있을 뿐이고 몸과 말(言)이 없다면, 어찌하여 소와 염소 따위의 축생들은 백정에게 살해 당하여 죽은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의 죽음이 백정의 한 짓이 아니라면 백정은 어찌하여 살생한 죄를 받는가.

 

(답)

다음 게송으로 말하리라.

 

다른 식(識)의 변이(變異)로 말미암아

죽이는 사실이 거기서 성립되나니

남이 마음을 잃는 것등은

귀신 따위의 마음으로 인함과 같네.

 

귀신 따위의 마음이 변해 달라지기 때문에 다른 이로 하여금 혹 정신을 잃게 함과 같다. 혹은 꿈을 얻거나, 혹은 귀신에게 홀리는 따위는 온갖 변해 달라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 신통이 있는 사람이 마음에 바라는 것이 있으므로 해서 그와 같은 사실이 있나니 사라나왕(娑羅那王) 따위가 꿈을 얻음은, 대가전연(大迦旃延)의 마음에 바라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은 것이다.

 

다시, 아련야(阿蘭若) 선인(仙人)의 성내는 마음 때문에 비마질다라(毘摩質多羅)왕이 두려워 하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그와 같은 것들은, 다른 이의 식(識)이 변해 달라짐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의 목숨을 능히 끊은 것이니, 그러한 사실로 인하여 동류의 상속(相續=몸)이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그러한 내용을 알아야 한다.

 

다시 게송으로 말하리라.

 

어찌하여 단타(檀陀) 숲이 쓸쓸한가 하면

선인(仙人)이 성을 내었기 때문이네.

 

만일 다른 이의 식(識)이 변해 달라짐이 증상(增上)함으로 말미암았다고 한다면, 중생의 죽음을 인정하지 아니할 것이다. 세존께서 마음의 중한 죄가 가장 큰 죄가 되는 것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우파리장자(優婆離長者)에게 물으셨다.

 

「장자여, 그대는 일찍이 들었는가. 어찌하여 단타가(檀陀柯) 숲과 가릉가(迦陵伽) 숲과 마등가(摩登伽) 숲이 쓸쓸하여 말쑥하게 되었는가.」

 

장자는 대답하였다.

「고오타마(瞿曇)시여, 일찍이 듣건대, 성인의 성내는 마음 때문입니다.」고 하였다.

 

마음의 중한 죄가 가장 큰 죄라 함이

만일 그렇다면 어찌 성립되랴.

 

만일에 그대가 고집하기를,「모든 귀신들이 다른 이가 선인(仙人)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유 때문에 그 중생들을 살해한 것이요, 선인의 성내는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그 업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중한 죄가 몸이나 입의 중한 죄보다 다하겠는가. 선인의 성내는 마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고, 그와 같이 많은 중생이 죽었기 때문에 마음의 중한 죄가 큰 죄를 이루게 된다.

 

만일 모두가 유심(唯心)이라면 타심통을 한 사람은 남의 마음을 아는가. 알지 못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이 있는가. 만일에 남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 어찌 타심통을 얻었다고 할 것이며, 만일 남의 마음을 안다면 어찌 식(識) 뿐이고 경계가 없다고 말하겠는가.

 

심통을 한 사람의 지혜가

어찌하여 경계와 같지 못하느냐 하면

제 마음을 아는 것과 같기 때문이고

부처님의 경지처럼 알지 못함이네.

 

그 타심지(他心智)는 어찌하여 경계와 같지 않느냐 하면, 지혜가 없음으로 말미암아서이다.

만일 말할 수 없는 자체인 타심지라면, 곧 성불(成佛)의 경지이니 그와 같게 알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두 경계와 같지 못하니 그는 그것이 나타남이 아니기 때문이며, 능취(能取)의 분별과 소취(所取)의 분별을 없애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유식(唯識)의 이치는 무궁하고 간택함과 그 품류도 매우 깊어서 끝이 없다.

 

유식(唯識)의 이치를 성취하여

내가 지은 것은 제 능력을 따랐을 뿐이고

여리(如理)와 그리고 여량(如量)은

생각하기 어려운 부처의 경지이네.

 

우리네가 지은 것은, 온갖 공용(功用)으로 지은 것 뿐이요, 그의 이치는 능히 생각하거나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 이치는 각관(覺觀)으로 반연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사람이 그 경지를 능히 두루 통달하겠는가. 그는 바로 부처님의 경계이다. 왜냐하면, 부처님 · 세존께서는 온갖 법에 대해 아시는 것이 걸림 없기 때문이다. 여량과 여리인 그 경지는 부처님만이 볼 수 있는 바이다.

 

 

출전 : 한글대장경133(유가부六)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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