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식과 자기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우리들이 언제나 ‘있다’고 생각하면서 또 집착하고 있는 ‘사물’이나 ‘나’는 실은 명칭에 의해 파악된 것이고, 그 내실은 전혀 무(無)이다. 그러나 명칭은 뭔가의 의미에서 유(有)인 세계에 대해서 세워진 것이 분명하고, 그 세계는 실로 사물 · 사건의 세계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이제까지 서술해 온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주와 객이라는 이원을 떠난 그 명칭 이전의 사물 · 사건의 세계를 굳이 이론화해 간 곳에서 세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철학 세계가 생겨난다. 내가 보기로는, 유식설은 이 사물 · 사건의 세계를 ‘식’으로서 이론화했다. “식의 대상은 오로지 식이 드러낸 것이다”(識所緣, 唯識所現)고 정의되어 있듯이, 식이란 그 대상이 실은 그 자신에 대해 드러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대상이 자기 자신인 것, 둘이 하나인 것, 이 식에 의해 세계를 통일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 유식설인 것이다. 식은 원래 대상논리적으로는 모순적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유식은 유심(唯心)과 동등하지는 않다. 유심은 어딘가 心과 物의 이원에 입각하여 그 위에서 物을 心이라는 일원에 돌리는 취의를 지닌다. 유심이라 할 때의 심에 심적 실체를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유식이라 할 때의 식은 원래 둘이 하나인 것, 원래 하나인 것이 상과 견이라는 둘의 계기를 지니는 것이다.
사물 · 사건의 세계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해 간다. 이러한 세계를 논리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니 그처럼 모순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도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식설은 유심론이 아니며, 관념론도 아니다. 유식이란 ‘오로지 사물 · 사건’(vastu-matra)이라는 점을 논리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바로 그 사물과 사건인 식에 유식설에서는 8식을 세웠던 것이다. 사물 · 사건의 세계를 8층의 식이라는 구도에서 해명했던 것이다. 여기서는 이 8식의 세계를 요약하면서 간단히 소개하고, 아울러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먼저 5감(感)이라는 식이 있다. 眼識 · 耳識 · 鼻識 · 舌識 · 身識이라는 5식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안근 ·이근 · 비근 · 설근 · 신근이라는 각 기관에 의거하여 色 · 聲 · 香 · 味 · 觸이라는 각 경(境 : 대상)을 감각한다. 그러나 그 5경은 식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식의 상분으로서 식 자체의 안에서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안식은 스스로 색이라는 법을 현출하여 이것을 보고 있다. 그러한 것이 식이다. 이들 5감의 식은 모두 색법으로서 5근에 의거하여 색법으로서의 5경을 외적 조건으로 삼는다. 또 모두가 현재에서만 활동하고, 모두가 직접적으로 인지하며(추리 등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것이나 발기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그 활동이 멈추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공통적인 성격을 지니므로, 일괄하여 전5식(前五識)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 5식은 반드시 제6의식과 아울러 일어난다. 그렇게 함께 일어남으로써 감각의 내용도 명료하게 되는 것이다.
본래 5식의 성질은 특히 번뇌에 물들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만, 제6의식의 영향으로 선 · 악 · 무기(無記)의 3성에 통하게 된다. 여기서 선이란 좋은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요, 악이란 좋지 않은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며, 무기란 그 어느 쪽도 아닌 것이다.
다음으로 의식이 있다. 5감이라는 식으로부터 헤아려 여섯째이므로 ‘제6의 식’이라고도 한다. 의식의 대상이 의식의 안에 있는 것이라는 점은 실로 자명한 일일 것이다. 이 점을 종종 표상(表象)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앞에서 말한 5감도 마찬가지로 소위 표상이다고 단정하는 것이 유식설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거기서는 특히 의식의 인식 내용이 온갖 현상(一切法)에 걸쳐 있다. 뿐만 아니라 과거나 미래도 포함하여 3세를 대상으로 활동한다. 안식 등의 전5식은 자성(自性)분별만을 특성으로 하고, 의식은 자성분별과 수념(隨念)분별과 계도(計度)분별을 특성으로 한다.
이처럼 앞의 5식이 사실상 무분별적임에 대하여 의식은 분별의 활동이 활발하다. 공간 · 시간이라고 하는 개념을 의식하는 것도 제6의식이고, 명칭을 이용하고 있는 것도 이 제6의식 특유의 활동이다. 의식은 5감이라는 식의 하나하나의 인식 내용을 명칭에 의거하면서 정리하고, 세계의 윤곽을 틀로 짜며, 사물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 것이다. 한편 의식은 전5식과 아울러 일어나는 경우와 단독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전5식과 함께 일어난다 하더라도 동일한 대상을 외적 조건으로 삼고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후자의 경우는 보더라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사태가 될 것이다. 단독으로 일어나는 의식에는 전5식에 잇따라 일어나는 것과 그렇지도 않고 완전히 단독으로 일어나는 의식이 있다.
전자의 예는 책이라는 색법을 외적 조건으로 삼아 나중에 그 의의를 고찰하는 등이다. 후자의 예는 선정이나 꿈같은 것이며, 특히 오직 의식의 세계에서 과거나 미래를 외적 조건으로 삼는다든가 여러 가지로 추리하고 고찰하는 등이다. 이 의식은 말할 것도 없이 상응하는 심소(개개의 心작용)에 의해 선 · 악 · 무기 중의 어느 것으로도 된다. 또한 의식은 대개 언제나 활동하고 있지만, 깊은 선정이나 수면(특히 깊은 잠)이나 기절의 경우에는 활동하지 않는다.
부파불교까지는 식에 대해서는 거의 이 6종(전5식과 의식)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식설에서는 다시 두 개의 식을 설정하고 있다. 그 하나가 일곱째의 식인 마나식(末那識)이다. 이것은 아집의 작용을 지닌 식이다. 우리들은 의식이 세간적 상식이나 다양한 사상과 이념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자기라는 것에 대한 관념을 지어내고 그 자아에 집착한다. 그러나 그렇게 후천적으로 학습하여 상정된 자아를 향해 집착하는 것만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자아를 향한 집착이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그러한 근원적 아집은 우리들이 평소에 보시 등의 선행을 하고 있을 경우에도 여전히 그 밑바닥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활동하고 있는 의식이 어떠하든간에 우리들에게는 선천적이고 항상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아집이 존재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엄격한 자기반성을 통해서 의식과는 별도로, 특히 마나식이라는 식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면 마나식은 도대체 무엇을 대상으로 삼아 자아를 집착하는 것일까? <성유식론>에서 말하는 호법(護法)의 정의에 의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알라야식의 견분이라 한다. 알라야식은 개체의 밑바닥에 무시 이래로 상속하고 있는 것인데, 그 알라야식의 상분과 견분 중에서 특히 견분의 방향, 말하자면 주체의 측에서 마나식은 자아를 집착하는 것이다. 알라야식의 견분은 사실상 영원히 주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주체에 근거하여 발생한 심적 작용이 그 주체를 대상화하고 집착한다. 우리들은 언제나 자기에게서 활동하는 구극의 주체를 대상화하여 집착한다. 우리들의 자기에 대한 이해는 그처럼 언제나 도착되고 전도되어 있다. 우리들이 인식하는 자아 · 자기가 의식에 있어서 대상화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면 새로운 각성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밑바닥에는 선천적인 동시에 항상적으로 완고할 정도로 구극의 주체(자기)를 대상적으로 파악하여 이에 집착하는 식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덟째 식이 지금도 접촉되는 알라야식(阿賴耶識)이다. 다만 한자로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것은 알라야식의 몇 가지 이름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고, 달리 이숙식(異熟識)이라든가 아타나(阿陀那)식이라든가 일체종자(一體種子)식이라 하는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름들을 제8식에 대해 적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교학상 여러 가지 복잡한 규정도 있어서 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지만, 그 중에서 아뢰야식이라 할 때의 아뢰야(알라야)란 창조 즉 장(藏)을 의미한다. 따라서 알라야식을 장식이라고도 번역한다. 그러면 어째서 제8식은 장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장식이라 할 때의 장이라는 의미는 전통적으로 세 가지 입장에서 해석되고 있다. 즉 능장(能藏) · 소장(所藏)· 집장(執藏)이다. 능장이라는 것은 일체의 종자(과거의 경험이 잠복된 상태로서 미래의 경험의 원인이 된다)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장이란 물품을 보관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처럼 제8식은 일체의 종자를 보관하여 간직한다는 것이다. 소장이라는 것은 훈습(경험이 마음의 깊은 층에 인상지워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장은 새로이 물품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그처럼 제8식은 훈습을 받아들이는 장소라고 말하는 것이다. 집장이란 마나식으로부터 집착되는 것이다. 장은 그 소유자에게 있어서 도둑맞지나 않을까 타버리지나 않을까 하며 염려하고 집착하는 대상이다. 그처럼 제8식은 마나식에 의해 대상으로서 집착되는 바를 집장(所執藏)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세 가지의 의의 때문에 제8식은 장이라는 형용어를 갖게 되었다고 간주하고 있다.
여기서 종자라든가 훈습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훈습이라는 것은 애초엔 아무런 향기도 없는 의복에 꽃의 향기를 옮기면 그 향기가 배어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향기가 의복에 훈습되듯이, 경험이, 즉 알라야식 이외의 7식의 활동이 알라야식에 뭔가의 형태로 배어 들어간다고 유식설에서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배어 든 경험, 말하자면 경험의 잠복 형태를 습기(習氣)라고도 한다. 알라야식은 무시 이래로 상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시 이래의 경험을 습기라는 형태로 거기에 저장하고 보관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알라야식에 대해 인간은 아메바 이래의 기억을 저장하고 있다고 표현한 학자도 있다.
더욱이 이 습기가 미래의 경험을 산출해 간다. 온갖 조건(緣)이 구비되어 무르익으면 그 습기는 다시 7식으로서 발동하고, 그 습기에 어울리는 상태의 경험을 가져온다. 이렇게 경험을 산출하는 측면으로부터 습기를 파악할 때, 그것을 종자라고 한다. 식물의 종자에 비유한 것이다. 식물의 종자가 이윽고 발아 혹은 개화하듯이, 제8식에 매장된 종자는 드디어 7식으로서 드러나 활동한다.
종자로부터 식이 생겨 인식활동을 행하는 것을 전변한다고도 표현하는데, 따라서 7식을 7전식(轉識)이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이 7전식의 활동은 알라야식에 훈습하고 종자를 형성한다. 알라야식은 그들 종자를 간직하여 보관하고, 종자는 온갖 조건에 따라 7전식으로 전개한다. 존재의 이러한 상태를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현행훈종자(現行熏種子), 종자생종자(種子生種子)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러한 종자와 현행, 즉 알라야식과 7전식이 서로를 매개로 삼아 만남으로써 개체는 상속해 간다고 유식설에서는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과거의 경험이 의식의 깊은 층에 저장되어 있다가, 뭔가의 기연(機緣)을 얻을 때 되살아난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있게 된다. 현대의 심층심리학 혹은 정신분석 등이 밝혀 왔던 사태가 이미 독자적인 철학적 수법으로 해명되어 있었던 것이다. 양측은 먼저 의식 하에 있는 세계의 존재를 설정함에 있어서 동일한 입장에 서 있다. 유아기의 체험이 마음의 심층에 감추어져 있다가 그것이 현재의 행동을 규제하는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하는 프로이드의 주장도 알라야식을 설하는 유식설에 의해서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다.
심리학자 융은 개인적 무의식의 보다 더 깊은 하층에 집합적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고 지적했는데, 그러한 세계도 유식에서 말하는 공업(共業 : 어떤 사람들에게 공동으로 작용하는 업)이라는 사고방식 혹은 공상종자(共相種子 : 공업에 의해서 훈습된 종자로서 공통성을 특징으로 하는 종자)라는 사고방식 등을 채용하면 유식과 공통의 이해를 갖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이나 심층심리학이 과거의 체험으로부터 연유하는 심리적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을 목표로 하는 불도(佛道)와 거의 병행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유식설에 있어서의 상황 인식은 원래 어디까지나 종교적이다. 생 · 노 · 병 · 사라는 근원적 苦로부터 어떻게 해방되어 진실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하는 것이 과제이다. 이 밖에 유식설은 주저없이 3세에 걸친 개체의 상속을 인정하고 있다. 한 인간이 지닌 심리적 경향은 단지 유아기 이후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무시 이래의 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이 사자를 보고서 공포심에 싸이는 것은 과거세에 사자로부터 급습을 당했다든가 하는 등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주장도 당연한 듯이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일부의 정신분석을 초월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리하여 유식에서는 앞의 종교적 과제에 대해서 말한다면, 사람은 무시 이래의 무명에서 발생한 숙업을 떠맡고서 고해(苦海)를 표류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의식을 포함하여, 어떻게 苦로부터 해탈하여 참된 자유를 얻어 가느냐에 대한 교과과정이나 헤아려 알기 어려울 듯한 미래에 대해서까지 훌륭하리만치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
그런데 이런 심층심리에 하나의 식견으로써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고유의 방법을 갖추고 있는 유식설이, 현대사회에 있어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꼭 정신분석 등의 방법과 같은 정도의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식설에서는 단지 심층심리의 분석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심작용에 대해 정밀한 분석도 한다. 소위 심소(心所)의 분석이다. 심소란 심소유법(心所有法)의 약칭으로서 개개의 정신작용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마음의 활동을 다수의 심리적 요소로 환원하여 이것들을 분류 · 정리하며 개개의 심리적 요소에 대하여 그 고유의 기능과 발생의 순서와 소멸의 요건 등을 해명하고 있다.
苦로부터의 해탈을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 부르고, 보리와 열반의 성취를 진실한 자기실현이라 부른다면, 불도든 정신분석 등이든 그 추구하는 바는 동일하다고 말해도 잘못됨이 없을 것이다. 유식설에 있는 그러한 주장들을 현대의 심층심리학이나 정신분석이 담당하는 역할에 응용하고, 또 정신의학과 종교의 교류를 통해서 진실한 자기상(自己像)을 정립해 가는 일이 앞으로는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데 알라야식(제8식)의 의미는 그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개체는 경험한 것을 간직하면서 시작도 없는 먼 옛날로부터 영겁의 미래로 상속해 가고 있다는 한 측면 외에 또 한편으로 개체는 그대로가 거대한 세계 그 자체라고 하는 한 측면도 알라야식의 교설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바로 이 점에서 알라야식의 의의가 강조되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알라야식이 스스로 대상으로서 삼고 있는 것은 종자와 5근과 현상 세계(器世間)이다. 이 알라야식의 활동은 알 수 없는 것이라 하므로 5식이나 의식의 경우처럼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識인 이상은 그 자신의 대상을 갖고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지금 종자는 제쳐 두고서 알라야식이 5근이나 기세간(山川草木)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말하자면 신체와 환경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라는 것이 8식으로서 존재하고 알라야식을 그 근저로 삼고 있다면, 자기는 신체만이 아니라 환경도 그 내용으로 삼고 있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심적 세계와 환경이 서로 교류하는 교차점이 되는 신체의 그 모두를 포함할 때, 자기는 진실로 자기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알라야식은 단순한 무의식의 영역이나 심층심리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보통 자기를 생각하길 기껏해야 5척의 신체와 거기에 깃들어 있는 마음 정도라고밖에 여기지 않는다. 환경은 나의 밖에 있는 세계로서 자기와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자기의 대부분은 의도적으로 생각된 자기, 의식된 자기이다. 대상화된 자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의식이라는 것이 활동하는 곳에서는 의식된 것과는 별도로 의식하는 것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의식하는 것은 대상적으로 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명확하게 그의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자기라는 당체는,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상상하고 있는 정도로는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은 자기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자기의 진실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에 신체적인 제한을 초월하여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진실한 자기를 우리들은 볼 수 있는 것이다.
유식설에서는 자기의 밑바닥에 있는 알라야식이 신체는 물론 환경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할 점은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먼저, 어떤 개체(자기)를 구체적으로 파악함에 있어서는 그 개체의 주체(心)가 놓여있는 장(場)을 사상(捨象)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개체 즉 자기는 어떤 주체가 환경과 하나의 초점에서 교류할 때, 그 주체와 환경의 전체로서 비로소 구체적일 수 있다. 자기는 心이 환경세계와 기관을 통하여 교섭할 때 비로소 그 사건의 총체로서 진실로 구체적인 자기인 것이다. 따라서 자기는 오히려 환경세계까지도 자기 안에 지니는 것이다. 거꾸로 그러한 자기야말로 진실한 자기인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자기는 세계 전체가 된다. 오히려 세계가 자기가 된다. 주체와 환경이 어떤 한 개체의 초점에서 교류할 때 그 되어 가는 사건에 자기가 있고, 무수한 초점에서 주체와 환경이 교류할 때 거기에 여러 개체의 세계가 있다. 즉 거기에 인간의 세상이, 중생의 세상이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자기의 당체는 일단 대상화된 측보다도 오히려 대상화하는 주체에 있다는 점이다. 이는 심적 · 신체적 · 환경적 일들을 초월하여 나아가 그것들을 성립시키고 있는 것에 자기의 당체가 있다는 말이다. 결국 알라야식에는 그 상분의 측에 종자 · 5근 · 기세간(器世間)이 있고, 그것들을 성립시키는 견분이 있음은 말할 것도 없으며, 거기에서 자기의 구극을 발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진실한 자기, 즉 주체가 되어 객체가 되지 않는 자기는 의식된 영역을 초월한다. 그것은 5척에 지나지 않는 신체를 초월한 뭔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세계 그 자체까지도 초월하고, 나아가 이 기관을 초점에서 주체와 환경이 교류하는 그 사건을 성립시키고 있는 바로 그곳에 자기의 당체가 있는 것이다. 마치 우주의 삼라만상을 내부에서 띄우는 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유식설은 언제나 반드시 사물 · 사건을 식이라고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삼라만상이란 별개의 단순한 심적 실재만을 인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알라야식의 견분만을 채취하여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상분을 안에 갖추고서 그 위에서 주체인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실한 자기를, 세계를 초월하여 세계를 성립시키는 주체에서만 생각하는 것도 부정확하다. 결국 절대로 대상화할 수 없고 불가득하여 진실한 주체인 것에 기초하여, 주체와 환경이 어떤 하나의 초점에서 교류한다. 그 전체가 진실한 자기인 것이다. 그것을 분석적으로 말할 때, 한 쪽에서 보면 자기는 그 당체가 불가득한 것이다. 오히려 불가득이라는 점에서 영원의 주체(진실한 생명)를 입증한다. 그리고 다른 한 쪽에서 보면 자기는 세계 전체의 규모이다.
5척의 신체를 초월하여 세계 그 자체가 자기이다고 하는 점에서 오히려 자기의 진실한 ‘신체’를 얻는다. 알라야식을 포함한 8식에서 자기를 볼 때, 그러한 자기 이해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세계로부터 자기를 생각하는 입장인 것이다. 자기를 그렇게 이해할 때, 우리는 미망으로 덮인 자아관 · 자기관을 해체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직접 대하는 세계는 ‘사물’도 ‘나’도 아니고, 다만 ‘사물 · 사건’(事)의 세계일 뿐이다. 이 事들은 저마다 각기 자기를 구성하고 있다. 세계에는 다수의 개체가 있을 수 있다. 그 하나의 개별적 사물 · 사건으로서의 자기를 분석해 보면, 거기에는 주체와 환경이 하나의 기관을 매개로 하여 교류하고 있는 모습이 있다. 그 세 가지의 계기 모두가 한 사물 · 사건의 구성 요건이요 한 개체라는 자기의 전체이다.
이러한 사실을 유식은 나아가 8층의 식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특히 알라야식을 세움으로써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그 사물 · 사건 위에서, 즉 8층으로 이루어진 식이 활동해 가는 위에서 명칭 등에 의해 ‘어떤 것’과 ‘나’를 가설하고서는 오히려 거기에 집착된다. 그런 집착을 버리고 편견을 떨쳐 갈 때, 진실한 자기는 곧 진실한 생명이요 나아가 입장을 바꿔 남의 그 진실한 자기도 영원한 생명임을 실현하는 데에 접근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자아의 해체’를 통한 ‘자기의 구축’이 가능할 것이다. 인류의 진정한 공동체는 응당 그래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쉽게 말해서 나는, 내가 단지 어떤 것으로서는 있을 수 없고 오히려 세계가 나의 생명이다는 사실에서 깨우쳐 가고, 대비(大悲)에서 깨우쳐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사회에서 선전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대개는 자아를 의심함이 없이 그것을 전제로 하여 성립해 있다.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반성을 결여한 채, 아집의 확충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반성이 없는 그런 세속적 사유가 무명에서 생겨나고 있다고 지적하여 그런 것을 부정한다. 무아(無我)를 근본으로 하여 출발한다. 알라야식의 이론은 그렇게 ‘무아가 곧 진실한 자기’라는 교설을 논리적으로 세련시킨 극치였던 것이다.
출전 : 유식의 구조(다케무라 마키오, 동경대 인도철학불교학 교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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