ㄹ~ㅁ(리을~미음)

무명업상(無明業相)

근와(槿瓦) 2018. 8. 19. 01:44

무명업상(無明業相)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三細의 하나. 또는 業相. 은 움직인다는 뜻이다. 아뢰야식의 근본 動相, 主觀·客觀이 대립하기 이전 주관과 객관이 나뉘지 않은 순수한 動的 상태. 이것은 眞如無明和合하여 차별적인 현상을 내게 되는 첫 걸음.

 

참고

삼세(三細) : (1) 無明業相. 眞如無明에 의해 차별적 현상을 내게 되는 첫걸음으로서, 주관과 객관이 나뉘어지기 전의 상태를 말함.

(2) 能見相. 無明業相이 주관과 객관으로 나누어져 대립될 때에, 그 주관적 방면을 말한다.

(3) 境界相. 能見相主觀의 앞에 나타나는 객관적 대상의 境界를 말한다. 眞如本性契合하지 않는 虛妄한 상태를 말한다.

 

업상(業相) : 起信論에서 3의 하나. 根本不覺妄心에 의하여, 眞如一念이 처음 기동하여 생기는 최초의 상태를 말함.

 

기신론(起信論) : 大乘起信論의 약칭. 馬鳴보살의 저술. 나라 眞諦의 번역본 1권과 나라 實叉難陀의 번역본 2권이 있음. 通論的으로 여러 大乘經에 공통된 敎理를 말하였으므로 大乘通申論의 하나라 한다.

 

() : 범어 karman의 번역. 羯磨音譯한다. 造作의 뜻. 行爲·所作·意志에 의한 身心의 활동. 意志에 의한 身心의 생활을 의미한다.

일반으로 ··三業으로 나눈다. 有部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이러한 것을 하려고 하는 뜻이 意業이고, 그 의지를 신체적 행동과 言語的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 身業語業(口業이라고도 한다)이라고 한다. 意志의 활동인 思業思業이 끝나고서 행하는 思已業二業으로 나누는데 이 경우, 思業意業이고, 思已業·語 二業이다. 三業으로서의 작용의 本體(業體·業性)에 대해서, 有部등에서는 意業(意志), ·語業色法(物質的인 것)이라고 하고, 經量部大乘에서는 모두 (意志)라고 한다. 불교 본래의 입장은 후자라고 생각된다.

有部등에서는 物質的인 것을 本體로 하는 (色業) 身業語業으로, (·)無表(無作·無敎)가 있다고 한다. 表業은 밖으로 표현되어 타인에게 보일 수 있는 것, 無表業無表色이라 이름 지어지는 일종의 色法(보통의 물질과 같이 粗雜하지 않다)本體로 하고, 강한 善惡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身表業語表業과 및 등이다. 無表業3종이 있다. 受戒(어느 것이나 다 )에 의해서 일어난 律儀, 습관적이고 특히 강한 결단을 가지고 한 惡業에 의해서 일어난 바의 不律儀, 그 이외의, 때에 따라 선악의 업에 의해서 일어난 非律儀非不律儀(處中無表)3종이 그것이다. 律儀無表를 버리고 에서 나오기까지 계속되고, 그 밖에 無表는 특별한 障害가 없는 한 일생동안 계속된다. 이들 無表 중에서 無表에는 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고, 無表에는 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어서, 각기 그 사람의 後天的 성격을 형성한다고 한다. ·의 각기 無表 無表業意業을 더하여 五業이라고 한다.

선악의 업을 지으면, 그것에 의해서 그에 상응한 고락의 갚음(果報·異熟)이 생긴다. 이것을 業因에 의해서 業果가 생긴다고 한다. 非善非惡無記業를 끄는 힘이 없다. 業因業果의 관계를, 有部에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그것은 三世實在하는 것으로서, 업이 현재에 있을 때 이것이 이 되어서 어떠한 未來를 끌것인가가 결정되고(이것을 取果라고 한다), 업이 지나가 버림으로부터 에 힘을 주어서 를 현재에 이끌어 낸다(이것을 與果라고 함). 또한 經量部에서는, 은 순간에 없어져 버리는데, 를 생하는 종자를 위에 심어 주어, 그 종자가 를 끌어 일으킨다고 한다. 이 종자의 思想有部無表業說과 같은 것이다.

을 여러 가지로 분류한다. 總體로서의 일생의 果報(갚음)를 이끄는 . 人間界라든가 畜生界에 태어나게 하는 강한 힘이 있는 引業(牽引業·總報業·引因)이라 하고, 人間界등에 태어난 자에 대해서 개개의 구별을 주어서 개체를 완성시키는 滿業(圓滿業·別報業)이라고 한다. 引業의 갚음을 總報, 滿業의 갚음을 別報라고 하여, 二業總別二業이라고 한다. 더욱 有部에서는 하나의 引業에 의해서 一回을 받아 다시 그 위에 많은 滿業에 의해서 이 이 완성된다고 하고, 多業이 일생을 이끌거나, 一業多生을 끌거나 하는 것은 없다고 한다. 에는, 山河大地(器世間)와 같은, 많은 生物에 공통하는 果報를 끌어 일으키는 共業, 개개의 生物의 신체와 같은, 개개의 생물에 固有果報引起하는 不共業이 있다.

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善業(安穩法), 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不善業(惡業 不安穩法), 善惡 어떤 것도 아닌 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無記業의 셋을 三性業이라고 한다. 惡業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기 때문에 罰業 이라 하고, ··三罰業 또는 三罰이 있다. 中阿含經 三十二에는 ··三業중에서 意業이 가장 하다고 하여, 불교가 動機論에 입각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 자이나에서는 ··三罰身罰을 가장 하다고 하여, 結果論에 빠져 있다. 熟慮한 뒤에 決斷하여 일부러 한 故思業(故作業)과 그렇지 않고 뜻밖에(無意識的) 잘못한 不故思業은 그것만으로는 갚음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故思業중에 적극적으로 한 강하고 중대한 增長業이라고 하고, 소극적으로 한 약하고 가벼운 故思業不增長業이라고 한다. 점점 강하게 되는 增上業 혹은 增長業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造作業이라고 한다. 欲界惡業과 같이, ····五識으로 받는 만을 果報로 가져오는 身受業, 色界·無色界(初禪天)善業과 같이 제六意識으로 받는 만을 受果報로 가져오는 心受業이라 하고, 합하여 二受業이라 한다. 苦受樂受捨受(不苦不樂受)果報는 각기 欲界惡業欲界에서 色界 第三禪까지의 善業, 色界 第四禪 이상의 善業에 의해서 오기 때문에, 이 세 을 각기 順苦受業·順樂受業·順不苦不樂受業이라 하고, 합하여 三受業이라고 한다. 欲界善業은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福樂, 欲界惡業은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에 非福業, 色界·無色界善業은 그 禪定의 힘에 의해서 갚음()이 정해져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不動業이라 하고, 합하여 등의 三業(또는 三行)이라고 한다. 惡業黑業, 善業白業이라고도 하고, 여기에 異熟의 좋아함직()한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에 배당하면, 欲界不善業은 성질이 不善하여 異熟도 좋아하지 않는 黑黑異熟業, 色界·無色界善業은 성질은 하고 異熟도 좋아하기 때문에 白白異熟業, 欲界善業은 성질도 異熟黑白相雜하여 있기 때문에 黑白黑白異熟業, 번뇌와의 관계가 斷切無漏業은 상대적인 黑白을 초월하여 異熟을 초래하지 않기 때문에 非黑非白無異熟業이라 하고, 이것 둘을 합하여 四業이라 한다. 四業중에 앞의 3有漏業으로, 이것들은 최후의 無漏業에서 斷滅하지 않으면 안 된다. 內心을 남 모르게 감추고 아첨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曲業이라고 하고, 또한 성냄에 의해서 일어나는 穢業이라 한다. 탐냄으로 의해서 일어나는 濁業이라고 하고, 이것들을 합하여 曲穢濁三業이라고 한다. 八聖道第四支正業으로, 그 반대는 邪業이다.

에 의해서 그 갚음을 받는 시기에 다름()이 있기 때문에, 順現業(順現法受業)·順生業(順次生受業)·順後業(順後次受業)三時業을 나누어, 각각 이 세상에서 지은 에 응해서, 그 갚음을 이 세상에서 받는 것. 다음 태어난 세상에서 받는 것, 3이후에 받는 것으로 구분한다. 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不定業(順不定受業)이라 하고, 거기에 三時業을 더하여 四業이라고 한다. 不定業을 갚음의 내용(異熟)·不定에 의해서 時不定異熟定業時不定異熟不定業의 둘로 나누고, 여기에 三時業을 더하여 五業으로 하며 또 三時業을 각기 時定異熟定時定異熟不定으로 나누어 6으로 하고 둘의 不定業을 더하여 八業이라고도 한다.

이 작용할 또는 의지할 곳이 되는 것. 혹은 有情苦樂果報(갚음)에 인도하는 通路가 되는 것을, 業道(根本業道)라 하는데, 여기에 十善業道十惡業道가 있다. 有部에서는, 十善·十惡에는 인 것과 이 아닌 것(無貪·無瞋·正見, ··邪見)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意志()가 거기에 작용하는 바의 의지할 곳이 되기 때문에 業道라 한다고 했다. 經量部大乘에서는, 十善·十惡은 모두 이어서 意志()로 하는데, 처음의 七業道에 있어서는 ·發動하는 意志(), 思惟하여 결정하는 意志()의 작용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業道라 하고, 또 그 發動의 생각에 의해서 생긴 생각의 종자도 業道라 한다. 뒤의 셋 곧 ··등은 順次, 交互로 생기기 때문에, 앞의 것은 뒤의 것 때문에 가 되고, 有情을 지옥등의 惡趣등에 인도되는 가 되기 때문에 業道라고 . 에는 준비적 행위(加行)와 목적을 수행하는 그 순간의 행위(根本)完遂한 뒤의 종속적인 행위(後起)가 있는데, 이 가운데 근본만을 業道라고 한다.

煩惱道·業道·苦道(三道).

은 갚음(果報, 異熟)을 내는 이 되기 때문에 業因·因業이라 하고, 에 의한 갚음을 業果, 業報라 한다. 業因에는 을 일으키는 원인(번뇌등)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고, 因業에는 (主因助緣)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다. 業果를 끌어 당기는 힘을 業力, 에 의한 괴로운 갚음, 또는 과 그 인 갚음을 業苦라고 한다. 惡業과 번뇌를 아울러서 業結·業惱라고 한다. 惡業 때문에 생긴 가리움, 障害業障·業累라고 한다. 에 의해서 갚음을 받는 것은 業感, 過去世(前生·前世)에 지은 宿業 또는 前業, 宿業에 의해서 받은 壽命業壽·業受. 宿業에 의한 벗을 수 없는 중한 業病, 宿業에 의해 재앙은 業厄이라고 한다. 이 갚음을 하는 도리는 天道와 같이 必然이기 때문에 業天, 은 그림자와 같이 몸을 따라다니기 때문에 業影, 업은 중생을 迷界에 묶어 놓기 때문에 業繫(繫業이라고 하여도 거의 같다)·業羂·業縛·業繩이라 한다. 은 그물과 같이 사람을 붙잡아서 迷界에 머물게 하므로 業網, 惡業은 때나 먼지와 같이 몸을 더럽히기 때문에 業垢·業塵이라고 한다. 惡業의 작용을 ··에 비유해서 業火·業魔(十魔1)·業賊등이라 하고, 지옥에는 중생의 선악의 을 비추어 내고 재고 기록하는 業鏡·業秤·業簿 등이 있다고 한다. 惡業의 힘을 바람에 비유해서 業風이라고 하는데, 惡業에 의해서 招來猛風(지옥등의)業風이라고 한다. 宿業에 의한 神通力으로서 業通(報通)이 있다.

無間地獄의 갚음을 부르는 것을 無間業, 有情欲界등의 三界에 매어두는 三界繫業이라고 한다. 번뇌는 을 일으켜서 有情을 가지가지의 세계에 태어나게 한다. 을 윤택하게 하고, 이 미래의 을 부르는 潤業·潤生業이라고 한다. 또 자기의 지은 의 갚음을 자기가 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自業自得이라고 한다.

十二緣起第十支를 해석하는데, 후대에 와서는(阿毘達磨에서는) 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것을 業有라고 한다.

觀無量壽經에는 ··三福淨土往生하기 위한 正因으로, 淨業(淸淨業)이라고 해져 있다. 일반으로 염불해서 彌陀淨土往生하고자 원하는 것을 淨業이라 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 : 阿賴耶는 범어 alaya音譯. 阿梨耶識이라고도 쓰고, 약하여 賴耶 · 賴耶識이라고도 한다. 八識(······末那·阿賴耶의 각 )의 하나. 九識(八識阿摩羅識을 더함)의 하나. 無沒識 ·藏識이라 번역하고, 8· 本識 · 宅識 등 가지가지의 명칭이 있다. 無沒識이라 함은 諸法執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며, 藏識이라 함은 諸法展開의 의지할 바탕이 되는 근본 마음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八識의 최후에 두기 때문에 제8, 諸法의 근본이기 때문에 本識이라고도 하고 따라서 諸識 중 특히 識主라고도 한다.

成唯識論 卷二에 의하면, 藏識能藏 · 所藏 · 執藏三義가 있다. 이것을 賴耶三藏이라고도 藏三義라고도 한다. 能藏이라 함은 이 諸法展開生起하는 種子(能力·原因)攝持하고 감춘다는 의미이며, 所藏이라 함은 이 諸法生起하는 種子諸法으로 훈습하여 감춘다()는 의미이며, 執藏이라 함은 이 末那 思量의 뜻을 가지고 스스로를 愛著한다는 의미이다. 增一阿含經에 의거해서, 阿賴耶· · · 四義가 있다고 하는(이것을 四阿賴耶라고 한다)것도 , 여기서 말하는 執藏과 같은 의미라고 하겠다.

能藏所藏의 관계는, 阿賴耶識이 그 種子의 작용에 의해서 諸法 곧 우리들의 현실세계를 만들어 가매(이런 경우, 阿賴耶識相分 對境으로서의 객관적 境界는 종자와, ····五根에 의해서 드러나는 육체와, 山河大地 등의 器界이며, 이것을 種根器라고 한다), 만드()는 것에 의해서 으로 諸法에서, 다시 새로이 諸法을 창조하고자 하는 종자를 自己 중에 轉變 · 變異 · 成熟시켜, 감추어() 간다고 하는 相依相待 · 展轉 · 緣起의 관계이고, 執藏은 이와 같은 아뢰야식의 轉變, 諸法에 있어서 자기의 모습을 보려고 하는 아뢰야식 스스로의 愛著 작용을 原動力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執藏은 확실히 아뢰야식의 自相이다. 또 아뢰야식은 과거에 있어서의 ·不善의 결과(異熟·果報)에 의해 끌리므로 이 점은 아뢰야식의 果相이며, 그래서 아뢰야식을 異熟識(果報識)이라 한다. 또 아뢰야식이, 모든 生起하는 種子를 감춘()다는 점에서, 因相으로서의 의미에 의해 아뢰야식은 一切種識(또는 種子識)이라 불리워진다. 이를 自相 · 果相 · 因相賴耶三相이라고 한다. 唯識敎學은 이상과 같은 구조아래 일체를 아뢰야식의 變現으로서 唯心論樹立한다. 이것은 일체를 아뢰야식에서 緣起한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이것을 賴耶緣起라고 한다.

아뢰야식의 自相凡夫로부터 보살의 제7까지, 二乘이면 有學聖者位에 있는 자가 갖는다고 하며, 이 자리를 我愛執藏現行位라 한다. 보살의 八地이후 또는 二乘無學我執이 없기 때문에 아뢰야식은 그 自相을 버리는데, 다만 異熟識果相이 남는다고 하며, 이 자리를 善惡業果位라고 한다. 佛果에 이르면 異熟識果相도 떨어지는데, 有情利益을 행하기 위해 일부러 諸法의 종자 및 五根執持하여 버리지 않고 相續케 한다고 하며, 따라서 種子識因相만이 남는다. 이 자리를 相續執持位라고 하다. 이상을 賴耶三位라 한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은 범부로부터 부처가 되는 轉迷開悟가 되는 것으로서, 如實히 그 을 알아야 할 것이고, 그 의지해야 할 곳이기 때문에, 아뢰야식을 所知依라고 한다.

특히 아뢰야식을 轉迷開悟要道論究함에 있어 아뢰야식은 번뇌에 의해 더럽혀진 妄識인가, 自性으로서 淸淨眞識인가가 중국불교 敎學에서 문제가 되어, 唯識宗妄識의 입장을 취하고, 華嚴宗起信論에 의해서 眞妄和合識의 입장을 취했으며, 地論宗眞識의 입장을 취했다.

 

진여(眞如) :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 사물의 本體로서 진실로 영원불변한 것이란 의미로 眞如라고 이름한 것이다. 如如 · 如實 · 등으로 부르며, 대승에서는 萬有本體를 일컫는다.

阿含에서는 緣起理法이 영원불변의 진리임을 진여라고 한듯하다. 異部宗 輪論에 의하면 化地部에서는 九無爲를 설하는 가운데 善法眞如 · 不善法眞如 · 無記法眞如 · 道支眞如 · 緣起眞如를 들고 있는데, 이것은 · · 無記三性이나 八聖道緣起理法이 진실로 영원불변한 일을 진여라고 한다.

대승에서는 모든 존재의 본성이 人法二無我이며 모든 차별적인 을 초월해서 절대의 하나인 것을 진여라 이름했으며, 또 이것을 여래의 법신의 自性으로 삼는다. 佛地經論卷七에는 진여란 모든 현상(諸法)實性이라고 하고 그 一味이지만 을 따라서 종종의 구별이 있으며 일체법과 不一不異로서 그 를 보고자 하면 사고도 언어도 미치지 못하는 경지지만 모든 거짓이나 그릇된 견해를 여의고 있다는 점에서 억지로 진여라 이름했다. 또 모든 이 의지하는 바가 되므로 法界, 損減을 여의었으므로 實有, 增益을 여의었으므로 空無, 다만 이것만이 진실이므로 實際, 無分別智의 깨달음이므로 勝義라고 거짓 이름했다고 한다.

진여의 異名으로 大般若經卷三百六十에는 眞如 · 法界 · 法性 · 不虛妄性 · 不變異性 · 平等性 · 離生性 · 法定 · 法住 · 實際 · 虛空界 · 不思議界十二名이라 함.

大乘阿毘達磨雜集論卷二에는, 眞如 · 空性 · 無相 · 實際 · 勝義 · 法界六名,

法華玄義卷八下에서는, 實相 · 妙有 · 眞善妙色 · 實際 · 畢竟空 · 如如 · 涅槃 · 虛空 · 佛性 · 如來藏 · 中實理心 · 非有非無中道 · 第一義諦 · 微妙寂滅14종의 이름을 들고 있다. 一如 · 一如法界 · 法界 · 眞如實相 · 眞如一實 · 眞實際 · 眞勝義등으로도 이름하며 그 모습이 절대평등함을 뜻하며 一相이라고도 한다.

解深密經卷三에는 七眞如를 설하고,

(1) 緣起理法流轉眞如.

(2) 諸法實性實相眞如.

(3) 萬法唯識理法了別眞如.

(4)~(7) · · · 도의 를 차례로 安立眞如 · 邪行眞如 · 淸淨眞如 · 正行眞如라고 하는데 實相眞如이외의 6종을 진여라고 일컫는 의미에 대해서는 그 각각의 理法이 그 자체 그대로 영원불변 하므로 진여라고 한다는 설과 그 理法자체를 진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實相眞如의 나타난 모습의 種別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法相宗說. 成唯識論卷九에서는 진여란 허망한 분별법을 여읜 人法二無我의 본성으로 三性 가운데 圓性實性에 해당한다고 했다. 에서는 모든 현상은 아뢰야식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진여는 현상을 초월한 絶對靜的한 것으로 그 자체는 결코 현상이 될 수 없는 것(眞如凝然不作諸法)이라고 한다. 成唯識論卷十에는 보살은 初地에 이르러서 비로소 진여의 진리를 깨닫고 차례로 十地에 이르기까지 그 깨달음의 내용이 깊어지게 되기 때문에 十眞如의 구별을 세운다. ,

(1) 遍行眞如. 널리 萬有에 미치는 二空의 이치.

(2) 最勝眞如. 를 몸에 완전히 익힘으로 해서 깨달은 진여로 거짓이 없는 을 구족하게 갖추고 있으므로 최승이라고 한다.

(3) 勝流眞如. 진여로부터 流出는 그렇지 않은 다른 교보다 수승하다는 뜻이며 그 교의 근본이 되는 진여란 뜻.

(4) 無攝受眞如. 집착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

(5) 類無別眞如. 생사와 열반 등의 구별이 없는 迷悟一如의 뜻.

(6) 無染淨眞如. 진여는 본래 染淨을 초월했다는 뜻.

(7) 法無別眞如. 진여는 생멸의 을 여의었으므로 諸種에 갖가지로 說示되어 있지만 그 는 하나란 뜻.

(8) 不增減眞如. 번뇌의 더럽힘을 끊었지만 줄지 않고 청정한 법을 닦지만 더하지 않는, 집착을 여의었다는 뜻. 대번에 이 진여를 깨달으면 자유자재로 종종의 모습이나 국토를 나타낼 수 있으므로 相土自在所依眞如라고도 한다.

(9) 智自在所依眞如. 四無碍智에 의해 자재를 얻는다는 뜻

(10) 業自在等所依眞如모든 神通 · 總持 · 禪定 등에 있어서 · · 의 활동의 자재를 얻는다는 뜻.

이상의 10은 차례로 初地로부터 十地까지 十波羅蜜을 행하여 十重障을 끊고 깨닫는다고 한다. 人無我의 진리를 人空眞如, 法無我의 진리를 法空眞如, 이 둘을 합해서 二空眞如라고 하며 二乘人空眞如만을 깨닫지만 보살은 二空眞如를 깨닫는다고 한다.

地論宗에서는 제八阿賴耶識, 攝論宗에서는 제九阿摩羅識은 그 자체가 청정한 自性淸淨心 곧 진여라고 하고, 이 무명의 熏習을 받아서 染淨諸現象을 나타낸다고 한다.

기신론에서는 진여를 중생심의 본체라고 하고 그것은 언어나 사유를 초월해서 여의었으므로 離言眞如, 그것을 억지로 언어로 표현한 것을 依言眞如, 둘을 합하여 二眞如라고 하며, 依言眞如에 있어서 그 본체가 迷惑된 마음을 여의고 한 점을 如實空(空眞如)이라고 한다. 또 중생심 곧 진여에는 절대부동의 心眞如門과 그것이 무명의 에 의해서 染淨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心生滅門이 있어서 不動인 진여를 不變眞如, 그것이 을 따라 나타나는 染淨의 현상을 隨緣眞如라 하며 합해서 二眞如라라 한다. 일반으로 萬有生起하는 방법을 진여의 不變 · 隨緣에 의해서 설명하는 것을 眞如緣起(如來藏緣起)라고 한다. 또 이 二眞如라고 하는 같은 의미의 말에 淸淨眞如 · 染淨眞如, 혹은 非安立眞如 · 安立眞如(安立이란 만유를 내고 그 각각의 존립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가 있다.

화엄종에서는 본체 즉 현상을 性起說에 입각해서 진여 그대로가 萬法, 萬法 그대로가 진여라고 했다. 또 진여를 一乘眞如三乘眞如로 나누고 前者別敎眞如 · 同敎眞如, 後者頓敎眞如 · 漸敎眞如가 있다고 하며, 이것은 진여의 이해의 방법이 諸敎說에 따라서 같지 않음을 보인 것이다.

천태종에서는 性具說을 세워서 진여에도 본래부터 染淨善惡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諸佛自性인 진여를 無垢眞如 혹은 出纏眞如라고 하고 중생의 體性인 진여는 번뇌에 더럽혀 있으므로 有垢眞如 혹은 在纏眞如라 하며 둘을 합하여 兩垢眞如라 한다.

釋摩訶衍論卷三에는 始覺 · 本覺二智를 깨달음의 로 하여 性眞如虛空에 입각하여 淸淨虛空라는 뜻으로 無障碍義 · · 平等義 · 廣大義 · 無相義 · 淸淨義 · 不動義 · 有空義 · 空空義 · 無得義十義가 있다고 하고 이것을 性虛空十義라고 한다.

 

무명(無明) : 범어 avidya의 번역.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不如實智見을 말함. 곧 진리에 어두워서 () 사물에 통달치 못하고 사물과 현상이나 도리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不達不解不了) 정신상태로 愚癡를 그 내용으로 하며, 十二緣起第一支無明支이다. 俱舍宗이나 唯識宗에서는 無明心所(마음의 작용)의 하나로 하는 라 한다

十二緣起無明支를 해석하는데 阿含經에서는 佛敎의 진리(四諦)에 대한 無智라 하고 渴愛表裏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有部에서는 十二緣起三世兩重 因果한 것으로 보고 無明을 과거의 煩惱에 있어서의 五蘊을 가리킨다고 하며, 모든 煩惱중에 이 無明의 작용이 가장 무겁고 돋보임으로 無明이라고 이름하였다. 唯識宗에서는 二世一重因果로 해석하고 無明 등의 五果種子를 끌어 들이는 能引支로 보고, 그 가운데 第六意識相應하는 로서 善惡을 일으키는 것을 無明이라 한다고 했다

有部唯識宗에서는 無明相應無明不共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前者 등의 根本煩惱相應하여 같이 일어나는 것, 後者相應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不共無明은 홀로 일어남으로 獨頭無明이라고 하는데, 唯識宗에서는 不共無明을 다시 恒行不共無明獨行不共無明으로 나눈다. 前者第七 末那識相應하는 無明으로 등의 根本煩惱相應하여 일어나나 모든 凡夫의 마음속에 늘 쉬지 않고 나타나는 作用이란 점에서 第六意識相應하는 無明과 다르기 때문에 不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後者第六意識相應하는 無明으로 다른 근본번뇌와 상응하지 않고 홀로 일어남으로 獨行不共이라고 일컫는다. 獨行不共無明隨煩惱와 함께 일어나지 않고 홀로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다시 主獨行無明無主獨行無明으로 나눈다. 唯識宗에서는 無明種子現行으로 나누고 늘 衆生을 따라 다니며 第八阿賴耶識 속에 숨어 잠자고 있는 無明種子隨眠無明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표면에 나타나 現在意識으로 작용하고 있는 無明現行衆生에 붙어서 衆生을 얽어 生死(世界)에 묶어 놓는다는 의미에서 纒無明(전무명)이라 한다. 纒無明에는 相應하는 것과 不共이 있어서 隨眠··相應·不共四種이 있게 되므로 이것을 四種無明(四無明)이라 부른다. 根本枝末不共相應不相應, 迷理迷事, 獨頭俱行, 覆業發業種子子時行業果15無明으로 나눌 때도 있다.

勝鬘經에서는 見惑 三界修惑 등과 相應하는 相應無明四住地(見一處住地·欲愛住地·色愛住地·有愛住地의 넷으로 처음의 見惑, 뒤의  三界修惑을 의미한다)이라고 부른다. 獨行不共無明無始無明住地이라 하고(합하여 五住地) 無明住地는 모두 번뇌가 일어나는 根本이며 오직 如來菩提智만이 이것을 끊을 수 있다고 한다.

起信論에서는, 無明不覺이라고 하고 이 不覺根本無明枝末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根本無明根本不覺·無始無明·元品無明·忽然念起無明이라고도 한다. 元初一念이라고도 한다. 眞如平等眞理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忽然히 차별·대립의 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그 元初라고 하는 것은 모든 煩惱元始이고 迷妄의 시작이므로 다른 煩惱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忽然이라고 한다. 지극히 微細하므로 心王(마음)心所(마음의 作用)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즉 無始無明住地이 아닐 수 없다고 보인다. 枝末無明枝末不覺이라고도 불리우며 根本無明에 의하여 일어난 末稍的 染汚心으로 三世微麤惑業이다.

天台宗에서는 ··三觀에 의하여 각기 見思·塵沙·無明三惑을 끊는다고 한다. 無明非有非空의 진리에 迷惑되어 中道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無明을 끊음에 있어서는, 別敎에서는 十廻向位에서 항복하여, 初地이상의 12階位에서 12無明(모두 12품의 무명이 있다고 한다)을 다 끊어 마친다고 한다. 이 경우 十廻向最後第十廻向에서 처음의 無明을 끊고 初地에 들어가지만 이 처음의 無明을 또 三品으로 나누어 끊으므로 이것을 三品無明이라고도 한다. 圓敎에서는 初地 이상의 42階位에서 42품의 無明(모두 42無明이 있다 한다) 끊어 마치는데, 이 경우 제51等覺最後心에 의해 妙覺智 또는 佛智가 나타나고 이에 의해 끊어지는 最後無明元品無明·無始無明·最後品無明이라 한다. 다만 이것은 일반적인 로서 실은 圓敎에서는 三觀에는 순서와 차례를 세우지 않고 一心을 가지고 함으로 三惑은 동체로 동시에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차별(差別) : 現象界에 있어서 個個事象은 이것과 저것이 서로 別異한 특성을 가지는 관계에 있음을 차별이라 하며, 萬象의 보편절대한 本體(眞如)는 차별이 없는 것을 平等이라 한다. 다만 차별과 평등을 아주 隔離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差別卽平等으로 보는 것이 大乘佛敎이다. 또 다른 것과 구별되는 어떤 사물의 특수성을 殊勝하다는 의미로 차별이란 말을 쓰기도 하다. 因明(論理學)에서는 命題()主辭自性이라고 하는데 대해 그 賓辭를 차별이라고 한다.

 

만상(萬象) : 모든 물건의 드러난 형상.(국어사전)

 

본체(本體) : 諸法의 근본자체. 應身에 대하여 眞身을 본체라고 함.

 

현상(現象) : 관찰할 수 있는 사물의 형상. 본질과의 상관적인 개념으로서의 본질의 외면적인 .(국어사전)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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