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말씀

끊임없는 정진

근와(槿瓦) 2015. 7. 17. 00:39

끊임없는 정진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가을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가을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풋풋한 소년시절에 누구나 즐겨 외웠을 시 산유화(山有花). 달빛이 휘영청 밝은 봄밤에 시집을 꺼내들고 두런두런 외워보니 감회가 새롭다.

 

산에는 요즘 한창 꽃이 피고 진다. 시에서 지적한 것처럼,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다. 그리고 혼자서 진다.

 

진달래가 벌겋게 온 산을 물들이다가 지고 나더니, 그 뒤를 이어 이 골짝 저 등성이에서 산벗꽃이 허옇게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났다.

 

얼마 전부터는 오르내리는 길섶에 연분홍 철쭉꽃이 문을 열기 시작하여 자주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또 어제 아침부터 뜰에는 모란이 피어나고 있다. 예년 같으면 5월에 필 모란이 올해는 한 열흘 앞당겨 피었다.

 

꽃은 무슨 일로 필까? 이런 엉뚱한 생각을 다 하게 된다. 생명의 신비 앞에 부질없는 생각일랑 접어둘 일이다.

 

수억만 년을 두고 철따라 어김없이 피고지는 꽃을 지켜보고 있으면, 우리가 사는 인생도 이런 꽃의 생태와 다를게 무엇인가 싶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비슷비슷한 반복이요 되풀이다. 가정에서건 절에서건 신앙생활도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굳이 종교적인 이유를 붙인다면 그 반복과 되풀이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일일 것이다.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바람이 불거나 허구한 날 거르지 않고 새벽 예불에 꼬박꼬박 참례하는 신도들이 어떤 절을 가릴 것 없이 적지 않으리라고 여겨진다. 그 절에 사는 스님들은 예불을 거르는 일이 있어도, 신심있는 신도들은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 말고는 거르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문득문득 의문이나 회의가 생길 때가 있을 것이다. 새벽마다 먼길을 찾아와 예불에 참례하는 일에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것도 타성에서 온 습관이 아닐까?

 

꽃한테 한번 물어보라. 너는 무슨 일로 철따라 그렇게 피어나고 있느냐고. 과학적인 분석으로는 적당한 기온과 햇볕과 토양과 수분의 영향으로 꽃이 피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적인 분석일 뿐 생명의 신비는 이론으로 전개시킬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말을 하자면, 그때 그 자리에서 그렇게 피어나지 않을 수 없어서 핀 것이지 다른 이유란 있을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생명의 신비요, 자연현상이다.

 

무엇 때문에 내가 새벽마다 그 먼길을 따라 예불에 참석하는지 굳이 이유를 알고 싶거든, 큰마음 먹고 일부러 몇차례 걸러 볼 일이다.

 

의식적으로 하는 일과 무의식적으로 하는 일의 성격과 그 차이를 새삼스레 체험하게 될 것이다. 꾸준히 지속해 오던 일을 걸렀을 때의 그 께름찍함과 심기가 편치 않음을 이내 느끼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일단 시작한 일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폐가 되지 않는 한 중도에 내던져서는 안된다. 우직할 정도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꾸준히 이어나갈 때, 그 안에서 꽃이 피어나고 열매가 맺히게 되는 소식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끼니를 거르면 육신의 배가 고프다.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정진은 황폐되기 쉬운 정신을 든든하게 받쳐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을 뜸도 들기 전에 도중에 내팽개치고 말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모처럼 큰마음을 내어 애써 해오다가 재미가 없다고 해서, 혹은 아무 효험도 없다고 해서 도중 하차 해버린 일이 얼마나 많은가. 무슨 일에나 고비가 있다. 그 고비도 몇 번씩 있다. 그때마다 그 고비를 극복하면 의지력과 지혜가 열린다.

 

적어도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할 때 어떤 효험이나 공덕을 바라고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해 타산이고 계약이지 바른 믿음이 아니다.

 

도원 선사는 <정법안장(正法眼藏)>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를 위해서 하려고 하는 온갖 종교적인 태도는 돌을 안고 물 위에 뜨려는 것과 같다. 먼저 ‘나’라고 하는 무거운 돌을 내던져라. 그러면 불법의 드넓은 바다에 떠올라 진실한 자기를 살리게 될 것이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아집(我執) 곧 자기 자신의 집착에서 떠나라는 말이다. 자기 중심적이요 이기적인 고정관념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자신을 옴짝 못하도록 옭아매게 된다. 그러니 자기를 텅텅 비워 무심(無心)해지면 어디에도 거리낌이 없어 불법의 바다에서 마음대로 유유자적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선사는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불법은 어떤 명예나 이익, 혹은 과보나 영험을 얻기 위해서 닦아서는 안된다. 다만 불법을 위해서 불법을 닦아야 한다. 무엇인가를 위해서 하려고 하는 언동은 아직도 아집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법을 위해서 불법을 닦아야 한다.’는 말은 아주 요긴한 가르침이다.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불법을 배우고 익힌다면 그것은 순수하지 못하며, 계약조건처럼 지극히 세속적이다.

 

불법을 위해서 불법을 닦으라는 말은 자기 밖에서, 혹은 마음 밖에서 따로 불법을 찾지 말라는 뜻이다. 불법을 위해 불법을 닦을 때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그대로 불법이 된다. 자기 자신의 일상생활 그대로가 불법이 되고 법계(法界)가 된다는 뜻이다.

 

선사의 수도이념은 모든 선각자들과 마찬가지로 본래청정(本來淸淨)의 입장이다. 우리는 본래부터 청정한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정화(정진)하여 그 본래 모습을 활짝 드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깨달음을 얻기 위한 닦음(수행)이 아니라 닦는 일 그 자체가 부처님이나 조사의 살아 있는 모습이다. 이것을 일러 본증묘수(本證妙修)라 하고, 무소득(無所得), 무소기(無所期)의 수행이라 한다. 닦음(修)속에 깨달음(證)은 저절로 갖추어져 있고, 깨달음 속에 닦음은 저절로 행해진다. 표현의 형식은 다를지라도 그 바탕은 같은 시대인 고려 보조 선사의 돈오점수(頓悟漸修)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본래 청정이기 때문에 무한히 정화하여 그 청정한 본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가르침은, 우리들이 어째서 무엇 때문에 날이날마다 순간 순간 정진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다.

 

산은 저절로 높고 물은 저절로 흐른다. 누구에게 높이 우러르라고 해서 높이 솟은 것은 아니다. 물이 저절로 흐름도 또한 그렇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듯이, 그때 그곳에 그렇게 있지 않을 수 없어 그렇게 있는 것이다.

 

몸소 참되게 살고 남을 참되게 살리는 길을 깨달은 부처는 자기가 부처라고 의식하지 않는다. 부처는 스스로 부처임을 잊어버린다. 자신이 깨달았다거나 부처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부처가 아니다.

 

‘나’라는 생각이 남아 있는 한, 부처라고 할 수 없다.

덕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덕을 잊어버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스스로 지혜를 잊어버림으로써, 참된 덕인이고 참된 지자일 수 있다.

 

선사는 <좌선의(坐禪儀)>에서 또 말씀하신다.

“설사 도를 얻고 마음을 밝혔다고 할지라도, 남에게 자랑삼고 깨달음을 자부한다면, 그는 살아갈 길(出身活路)을 잃고 말 것이다.”

 

애써 정진 끝에 알음알이가 좀 움텄다고 해서 다된 걸로 착각하고 뻐기려는 풋내기들에게 경계하는 간절한 말씀이다. 뜻있는 사람들은 마음에 깊이 새겨둘 일이다. 영혼의 선각자 요가난다는 그의 <영적일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명상을 항상 규칙적으로 행하고, 욕망과 감정은 스스로 조절하겠다고 결심하라. 그리고 자신의 길에서 달인(達人)이 되어야 한다.”

 

“정신적으로 깊이 추구하는 사람은 새로운 샘물만을 끝없이 찾아 헤매서는 안된다. 그러기보다는 그중 가장 맑은 샘물을 하나 정해놓고 그 샘으로부터 날마다 물을 길어 마시는 것이 좋다.”

 

끊임없는 정진을 통해서만 본래 청정한 자신의 모습을 활짝 드러낼 수 있다는 가르침을 거듭 새겨두자.

 

 

출전 : 텅빈 충만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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