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빙의종(傍憑義宗)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因明의 宗法 4가지 가운데 하나로 「소리는 無常하다」라고 말할 경우에 암암리에 無我라는 것을 의미함.
참고
인명(因明) : 범어 hetu-vidya의 번역. 五明의 하나. 因은 원인·이유, 明은 학문의 뜻. 이유를 밝혀서 論證을 행하는 論理學을 말함. ① 인도의 論理學의 始祖는, 正理派의 祖인 足目인데 일반으로 인도에서는 論理學을 니야-야(Nyaya 正理)라고 하며, 불교에서는 특히 因明이라고 한다. 因明에는 古因明(陳那이전 및 正理派)과 新因明(陳那 및 그 이후)이 있다. 古因明에 속하는 彌勒所說의 瑜伽論은 권15에서 因明을 7종의 항목으로 分編하여 說하고 있다. 이것을 七因明이라고 한다. 곧 論議의 전개에 일곱가지 요건이 있으니 (1) 論體性(論議의 本體的 요소인 言語), (2) 論處所(論議하는데 적당한 장소), (3) 論所依(立論의 근거), (4) 論莊嚴(論議가 整然한 것), (5) 論墮負(論議의 敗北), (6) 論出離(미리 잘 관찰해서 論議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 (7) 論多所作法(論議를 잘 하는 바탕)을 말함. ② 이상의 七因明중에는 제3의 論所依가 그 중심이 된다. 여기서 論證되는 바의 歸結인 所成立(약하여 所立이라고도 한다)에 2종, 곧 自性과 차별을 나누어 論證하는 주체 쪽에 속하는 能成立(약하여 能立이라고도 한다)에 8종, 곧 立宗·辨因·引喩·同類·異類·現量·比量·正敎로 나눈다. 이 能成立의 8종을 八能立이라고 한다. 無着의 雜集論 권16에는 이 8을 곧 立宗·立論·立喩·合·結·現量·比量·聖敎量이라 한다. 이 가운데 처음 5, 곧 宗因喩合結의 五項을 古來로 古因明에서 쓰는 論式의 특징으로 하고, 이것을 五分作法(五支作法)이라 한다. 대개 作法이라 함은 論證방법을 論式으로 자세히 밝힌 것, 또는 그와 같이 言說하는 것을 가리키고 뒤엣 것의 作法은 엄밀하게는 立量이라고 한다. 五分作法의 說하는 방식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世親이 如實論에서 說한 방식으로는 宗「聲은 無常한 것이다」·因「所作性(조건에 의존)이므로」·喩「비유컨대 甁등과 같다」·合「甁등과 같이 소리도 또한 이와 같다」·結「까닭에 소리는 無常하다」라고 한다. 이 五分作法은 旣知의 사항을 가지고 未知의 사항을 演繹的으로 論證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宗이라 함은 主張, 提案의 의미로, 立論者가 새로 提唱하고 論證할려고 하는 命題이며, 所立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대해서 因(범어 hetu)은 立論者가 자기의 宗을 상대에게 承認시키기 위한 論證의 근거이고, 喩는 그 例證·例喩·實例이다. 因·喩는 함께 旣知의 사실에 속하고, 能立이라고도 한다. 合(범어 upanaya)은 喩에 의거하여 宗과 因을 結付하는 것, 結(범어 nigamana)은 宗을 再出시켜 宗이 結論으로서 확정되어지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상의 五分作法은 因의 원리를 명확하게 하지 않는 不整備한 論式으로서, 陳那는 後說하는「因의 三相」에 의해서, 이것을 宗「소리는 無常하다」·因「所作性인 까닭에」·喩「모든 所作性인 것은 無常하다. 甁 등과 같다(同喩)」. 모든 常住하는 것은 所作性인 것이 아니다. 허공등과 같이(異喩)」라고 하는 三支作法으로 改良하여, 新因明을 확립했다. .......
종법(宗法) : 因明에서 세운 3支의 제1支로 2句로 이루어진 것. 또는 宗體所立이라 함. .....삼지(三支)→因明의 宗과 因과 喩를 三支라 한다. 宗은 증명되어야 할 所立의 뜻이고, 因은 宗을 성취시키는 이유이며, 喩는 宗을 성취시킴을 돕는 비유이다. 喩에는 同과 異가 있으며, 宗과 因의 두 가지 뜻이 존재하는 喩法을 同喩라 하고, 宗과 因의 두 가지 뜻이 없는 喩法을 異喩라 한다. .....종의(宗依)→因明의 三支作法 가운데 宗法중 宗依·宗體 둘이 있으며 前陳의 聲과 後陳의 無常의 2를 宗依라 이름한다. 곧 「소리는 無常하다」고 하면 이것이 宗體를 이루는 낱말이 宗依라는 것이다. 宗體는 宗依인 두 낱말을 의지하여 표현되기 때문이다. .....종체(宗體)→① 因明論理學에서 三支(宗·因·喩)중의 宗(斷案)에 宗依와 宗體의 둘이 있어서, 宗依는 主語와 述語를 가리키며 宗體는 주어와 술어가 繫辭로 연결된 命題를 일컫는다. 예컨대 “소리는 무상하다”라고 하는 문장에서 소리·무상의 두 名辭는 宗依이고 문장 전체는 宗體라 한다. ② 經宗과 經體를 합해서 일컫는 말. 예컨대 金剛經에서는 無相을 經宗으로 하고 無住를 宗體로 하며, 法華經에서는 一乘을 經宗으로 하고 實相의 원리를 經體로 함과 같다.
무상(無常) : 범어 anitya의 음역. 物 · 心의 모든 현상은 한 순간에도 生滅 變化하여 常住하는 모양이 없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 2種이 있다.
(1) 刹那無常. 찰나 동안에도 生 · 住 · 異 · 滅하는 것.
(2) 相續無常. 한 평생 동안에 生 · 住 · 異 · 滅의 四相이 있는 것을 말함.
무아(無我) : 非我라 번역하기도 한다. 我는 영원히 변하지 않고(常), 독립적으로 自存하며(一), 핵심적인 所有, 곧 주인공으로서(主), 지배적 능력이 있는 주체(宰)로 생각되는 영혼적 또는 本體的 實體를 의미한다. 모든 物體에는 이런 我가 없고 我가 아니라고 설하는 것을 諸法無我라고 하며 無我를 觀하는 것을 無我觀이라 한다. 無我는 불교의 근본교리로서 三法印의 하나인 無我印에 해당된다. 이 諸法無我印에서의 我의 뜻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我의 뜻과는 구별해야 할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인도에서는 고래로 brahman교의 교설에 의해 atman(我) 사상이 젖어 잇었기 때문에 釋尊은 일차적으로는 그런 의미의 我의 관념을 부인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석존은 我가 될 수 없는 것, 我가 있지 않은 것, 我라는 집착에서 떨어질 것, 我가 아닌 것을 我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으며, 我라는 관념, 나의 것이라는 觀念을 배제하는 사고방식, 我는 존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었다. 팔리어 聖典에서의 無我의 원어는 anattan이다. 그 뜻은 「我가 아니다」라는 의미와 「내가 있지 않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초기 佛敎에선 결코 「我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은 없었다고 한다. 원래는 「我에 대한 집착에서 떨어진다」는 뜻이다. Upanisad 철학에서는 我를 實體視하는 것에 비해서 佛敎에서는 이런 見解를 거부한 것이다. 이것은 我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고 客體的, 기능적인 我를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반대한 것이다. 我의 存在 · 不存在라고 하는 形而上學的 문제에 대한 대답은 석존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참다운 나의 문제는 존재적 존재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문제이므로 존재 · 非存在의 관념적 · 논리적 차원을 초월한 영역이기 때문에 석존은 일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석존은 다만 곧 「나의 것」이라는 觀念을 버리라고 가르쳤다. 원시불교에서는「五蘊의 하나하나가 苦이므로 非我이다」라는 敎說, 또「無常이므로 無我이다」라는 敎說(雜阿含經 卷三)이 있다. 이것은 我가 아닌 것을 我, 곧 我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특히 身體를 나의 것, 我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라는 觀念」을 排除하고자 했다. 說一切有部에서는 人無我를 말하며 아를 부정하였으나 諸法을 實有라 하고 法無我는 말하지 않았다. 뒤에 와서 차차 「我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無我說이 확립되었으며, 이런 입장은 說一切有部, 초기 大乘佛敎에도 계승된다.
이렇게 하여 無我에는 人法二無我의 說이 있게 됐다. 有情(살아 있는 것들 : 衆生) 은 五取蘊(凡夫의 생존을 이루는 物心의 다섯가지 요소(五蘊))의 假和合的 존재이므로 이런 五蘊的 假和合體를 實體的인 생명의 주체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人無我라고 칭한다. 또 모든 것은 因緣(結果를 내는 親因은 因, 結果를 내는데 보조되는 것은 緣)에 따라 나타난 것(假로 성립되는 것)이므로 그것에는 원래 고유한 獨自的 本性(自性)이 없다고 하는 것을 法無我라고 한다.
① 阿含에는 모든 것은 조건에 의존하며, 이에 따라 변천하고 사라져 가는 無常한 것이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 苦이므로 無我라고 한다.
② 有部에서는 我空法有라 하여 人無我를 說하고 있지만,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는 각각 自性이 있다고 보아 法無我를 설하지 않는다.
③ 成實論에서는 五蘊안에 참된 自我가 없다고 보고 人無我를 觀하는 것을 空觀, 五蘊의 法이 다 無常이어서 참된 自性이 없다고 보아 法無我를 觀하는 것을 無我觀이라고 한다.
④ 대승불교에서는 이 無我說이 空觀과 관련되어 無我란 사물에서 나(영원불멸의 本體, 고정적 실체)가 없다. 곧 無自性의 뜻이 있다고 論하여(中論 卷二二 · 二三) 無我(人無我와 法無我 我法二空) 를 설했다. 〔二種無我相謂人無我及法無我 楞伽經卷一〕특히 唯識宗에서는 三性說에 따라 三無我를 세우고 또 阿賴耶識과 관련시켜 無我를 고찰하여서 阿賴耶識의 本性은 空이므로, 諸法은 阿賴耶識중의 種子의 顯現에 불과함으로 無我라고 論하고 있다. 實我實法은 情有理無로 참된 我의 相이 없으므로 無相無我, 依他起의 似我似法은 如幻假有로서 집착된 我의 相과는 다르므로 異相無我, 圓成實은 識의 實性으로 無我의 상태에서 나타난 眞如를 自相이라고 하므로 自相無我라고 한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