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萬海,韓龍雲)와 오세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오세암(五歲庵)은 오랜 역사와 더불어 많은 현인달사(賢人達士)가 소요한 영지(靈地)였다. 특히 조선조의 시대적 고뇌(苦惱)를 이 오세암에서 달래고자 하였던 유생들도 적지 않았으니 그 중에서도 매월당(梅月堂,金時習,法名은 雪岑禪師)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곳에서 낭인선객(浪人禪客)으로 일세(一世)를 비예(睥睨)하며 많은 시론(詩論)을 남기면서 사색하였다. 일찍이 금강산에서 수업한 바 있는 이율곡(李栗谷)은 매월당을 가리켜 「그는 유가(儒家)의 종지(宗旨)를 잃지 않았으니, 마음은 유(儒)요, 자취는 불(佛)이다.」라고 평하였지만 매월당은 오히려 마음은 불이요, 자취는 유(儒)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매월당은 「법화경별송-法華經別頌」을 지은 자서(自序)에서 「내가 오세암에서 기거함은 오세(傲世)의 뜻을 취함-吾居五歲 取傲世之意」이라고 적고 있다. 매월당의 탈속적(脫俗的) 사색(思索)에서 이른바 조선사회의 「외유내불-外儒內佛」을 너무나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오세암은 근대정신(近代精神)을 열어 한국불교의 지향(志向)을 모색하였던 만해(萬海)선사와도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만해(萬海,1879~1944)선사는 18세 때에 이미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출하고 민중의식을 일깨우고자 동학(東學)운동에 가담하여 고향인 홍성(洪城)에서 때로는 두령(頭領)으로 때로는 참모로서 역사적인 의거(義擧)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가 종횡으로 활약하였으나 사세부족으로 관군(官軍)앞에 밀리게 되매 그는 몸을 피하여 오세암(五歲庵)에 입산하였으니 이로써 만해는 처음으로 불문에 입도(入道)한 동기가 되었다.
만해선사는 오세암에 입산이래 조석예경을 통하여 관음대성에 귀명(歸命)하였으며, 불교의 교리(敎理)를 연수(鍊修)하였다. 그의 종교적 신앙으로는 특히 관음신앙을 돈독히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입산한지 10년 째이며 그의 나이 27세 되던 해(1905) 백담사(百潭寺) 김연곡(金連谷)화상을 사부(師傅)로 모시고 득도(得道)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가 이 산중에서 득도를 전후한 약 15년간을 통하여 불교의 진제(眞諦)를 익혀 깨달았으니, 후일 논술한 「불교유신론-佛敎維新論」을 비롯하여 「불교대전-佛敎大典」·「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등 불교교리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민족시(民族詩) 「님의 침묵(沈黙)」은 겨레의 심혼(心魂)을 일깨웠으며, 이 밖에도 소설(小說)과 많은 논설(論說)을 통해 민족의 자각과 불교의 생활화 등 불변의 방향타(方向舵)를 제시하였다.
특히 그는 「삼일독립선언문-三一獨立宣言文」과 옥중항쟁(獄中抗爭)에서 일체를 질책(叱責)한 「독립이유서-獨立理由書」등 그가 민족에게 남겨준 경륜은 금과옥조(金科玉條)의 산교훈 아닌 것이 없다. 또한 대일항쟁(對日抗爭)에서 백절불굴의 투지를 보여준 화력(火力)은 민족혼(民族魂)으로 길이 남을 것이요, 그의 이러한 이타행(利他行)은 불후(不朽)의 광명으로써 후세를 밝혀줄 것이다. 이는 실로 관음신앙을 바탕으로 한 관음 대비문(大悲門)의 이타적 보살행(菩薩行)이라 할 것이다.
만해선사가 오세암에 있을 때이니, 1905년 이른바 일본과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민족적 노호(怒號)가 거세게 일고 있었으며, 1910년의 이른바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의 파산(破産)이 수반된 일대비극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선사는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15년간의 산중 수도생활에서 분연(奮然)히 일어나 1911년 망국지한(亡國之恨)을 품고 조국광복을 위해 몸바쳐 싸우고 있는 애국지사(愛國志士)를 찾아 북간도(北間島)로 발길을 옮겼던 것이다.
당시 북간도 일대에는 독립쟁취를 위하여 망명(亡命) 우국지사들이 각처에서 모여들어 의병학교(義兵學敎)를 세워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하며 독립전쟁을 고취하고 있었다. 이때 환인현(桓仁縣)에 동창학교(東昌學敎), 흥경현(興京縣)에는 흥동학교(興東學敎)가 있었으니, 그는 이 북간도 일대의 독립군 훈련현장을 순방하면서 우국동지들과 뜻을 같이하기를 다짐하고 있었다. 이곳의 독립투사로는 이시영(李始榮) · 김동삼(金東三) · 이동하(李東廈) · 이동녕(李東寧) · 윤세이(尹世茸) · 박은식(朴殷植) · 윤세준(尹世俊)이었으니 망국의 한(恨)을 달래며 조국광복의 의지와 경륜(經綸)을 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북간도 일대에서 독립운동가를 두루 순방하고 있던 만해는 독립정신을 일깨우며 담론(談論)하는 행각(行脚)을 계속하였다. 하루는 회인현(懷仁縣,혹은 通化縣)의 독립군 훈련장을 순방하던 도중 소야가(小也可)의 한 고갯길을 넘어 가는데, 돌연 괴한 수인이 나타나 장총을 겨누며 4발의 총탄을 쏘니 한 개가 만해의 두골(頭骨) 후부에 명중하여 유혈이 낭자하였다. 의식을 잃은 만해는 영상(嶺上)에 쓰러져 혼수(昏睡)에 잠긴채 거의 시체화(屍體化)되어 있었다. 이때 흰옷으로 소복한 여인이 나타나 미소를 띄우면서 「이 꽃을 받으라, 그리고 너의 길을 찾으라.」고 하였다. 깜짝 놀라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선사는 정신을 회복하고 생각하되 「백주에 이렇듯 기이(奇異)한 일이.....」하고 중얼거렸다. 이는 필시 <관세음보살의 위신력(威神力)으로 유연(有緣) 중생에게 구고구난(救苦救難)의 대자대비를 베풀어주신 광대무량한 영감(靈感)이 아니냐, 보살이 아니고서는 이런 이적(異跡)이 있을 수 없다>고 경탄해 마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너의 길을 찾으라>는 한 마디 말이 좀체로 잊혀지지 않았다.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가 깨어난 선사는 간신히 병원을 찾아 치료를 청하였다. 「후두골에 박힌 총알을 빼내려면 그 아픔을 견디기 어려우니 마취(痲醉)부터 합시다.」의사는 이렇게 권하였다. 만해는 「뭐, 마취? 한번 죽었다 살아난 것도 끔찍한데 두 번 죽을 수는 없어! 참고 견딜터이니 염려 말고 그대로 빼어 달라.」고 했다. 의사는 안된다고 하다가 만해의 완강한 고집에 못이겨 마취약을 쓰지 않고 집도(執刀)하여 뼈를 긁어 총탄을 꺼내는 것이었다. 귓전에 울리는 소리가 빠각빠각 들려왔으나 그는 마치 선정(禪定)에 든 도인(道人)처럼 추호의 동요도 없이 태연하였다. 수술을 끝낸 의사가 오히려 놀라면서 경탄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뒤에 선사의 목이 조금 비뚤어지고 요두증(搖頭症)이 있게 된 것은 바로 그때의 일로 인(因)한 증세라 한다.
총을 맞은 직후 총을 쏜 괴한들은 바로 독립군 동지임을 알았지만 그들의 과격한 행동을 조금도 책(責)하지 않고 사태가 위급한 중에서도 <우리의 광복운동(光復運動)과 조국독립(祖國獨立)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의명분을 가려 오히려 그들을 격려하였다. 그들은 크게 감동하였다는 것이니 독립전선(獨立前線)에 있엇던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이렇듯 만해선사가 총탄에 쓰러졌다가 백의(白衣)관음보살의 명훈가피(冥熏加被)를 힘입어 소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너의 길을 찾으라>는 수기(授記)에 따라 그는 불교의 진리를 찾아 그 민중화를 부르짖고 또 1919년 삼일독립운동(三一獨立運動)에 앞장서서 백절불굴의 철석같은 투지로써 일관하였다. 그는 실로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최후의 일인(一人)까지 항거하여 싸운 거화(炬火)였으며 이리하여 연년세세(年年世世)토록 자주독립하기를 외쳤으니, 이 두려움없는 용맹은 오로지 관세음보살의 무외력(無畏力)에 의한 이타행(利他行)이요, 보살행(菩薩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험실화(靈驗實話)는 만해선사의 일기초(日記抄)에서도 살필 수 있지만 특히 그에게 늘 가까이 하였던 김관호(金觀鎬)거사에게 직접 실토하였던 바를 가리고 추려서 이에 수록하는 것임을 밝혀 둔다.
출전 : 관음신앙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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