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종교,철학,윤리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불교가 종교요, 철학이요, 윤리라는 것을 밝히기 이전에 한 걸음 더 나아가면서 불교사상의 내용을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만약 불교 이외의 종교를 신(神)을 중심으로한 신본주의(神本主義)종교라고 할 수 있다면, 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한 인본주의(人本主義)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여타의 종교는 신을 주로 하여 신의 구제력에 의하여 인간이 구제되는 것이라고 보는데 대하여 불교는 이와 같은 절대적인 신의 실재를 부정하고 인생의 문제는 인간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해결되는 것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중요한 근원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각자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은 불교 각종 각파의 공통적인 기본교리입니다. 다른 종교가 신이 있어 인류를 창조하였기에 인류가 있게 되었다는 사상에 대하여 인류가 있은 다음에 종교와 철학 · 윤리학이 있고 문화가 형성된 것으로 이것들 모두가 우리 인류의 정신 즉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성 종교 중에서 종교의 위대한 존엄한 교권 때문에 종교가 선재(先在)하고 인류가 나중에 생겨난 것처럼 잘못 생각하기 쉬우나 이것은 그릇된 사고방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의 존재를 알 수 없는 것도 우리 인간이지만 신의 실재를 인정하는 것도 아이러니칼하게 우리 인간입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작용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업을 저지르면 무간지옥에 떨어진다든가 마귀라든가 악마와 같은 것도 모두 우리의 마음작용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도 창조하고 지옥과 마구니도 만들어내는 우리의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마음은 어떠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이란 오직 그 작용에 의해서만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달마대사와 그 제자와의 사이에 주고 받은 문답을 통하여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어느날 혜가(慧可)가 달마대사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항상 마음(一心)이 불안하니 저에게 안심을 주옵소서.」
그러자 달마대사는 말하기를,
「너의 마음을 내 앞에 내어놓아라.」
「마음을 내어놓을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달마대사는 드디어,
「나는 이미 너에게 안심을 주었노라.」라고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이상의 문답 중에서 마음이 불안하니 안심을 달라는 말은 마음의 작용이 뚜렷이 존재한다는 뜻이고, 마음을 내어놓을 것이 없다는 말은 마음의 실체가 없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작용은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대체로 3가지로 작용하고 있으니 지(知) · 정(情) · 의(意)의 작용이 그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는 애착심을 일으키고 싫어하는 대상에 대하여는 혐오감을 갖는 작용과 같은 것은 바로 정(情)의 작용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일이든지 마음 속에서 한가지를 선택하여 그것을 결행하고자 하는 것을 마음의 의(意)작용 즉 의지작용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죄악을 범한다든가 음주와 끽연 등은 나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작용을 마음의 지(知)작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이와 같은 3가지 작용 중에서 정적 작용(情的作用)은 종교의 설립을 보게 되며, 지적작용(知的作用)은 철학을 구성하기에 이르며, 의적작용(意的作用)은 윤리학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위의 마음작용에서 비롯되는 철학의 목적하는 바는 진(眞)이며, 종교가 목적하는 바는 미(美), 윤리학이 목적하는 바는 선(善)입니다. 이들을 다시 불교적인 용어로 풀이한다면 지적인 욕망에 의하여 구하는 진(眞)은 결국 미혹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의하여 마침내 그 완결을 볼 수 있는 것이며, 정적인 욕구에 의하여 이룩할 수 있는 종교적 목표인 미(美)는 고해를 건너 피안에 이르는 이고득락(離苦得樂)에 의해서 이룩할 수 있으며, 의적 욕구에 의하여 얻어질 수 있는 선(善)은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이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논의되는 철학이니 종교니 윤리니 하는 것은 모두가 마음의 작용에 의하여 나타나는 부분적인 학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종교는 인간이 무한한 생명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요, 철학은 존재 전체에 관한 지적인 만족을 구하는 것이며, 윤리는 무한한 인격의 확충을 기하는 것이라 보겠습니다. 또한 이러한 특색들은 거의가 동일한 것으로서 그 목적실행의 실천방법상의 차이 즉 지 · 정 · 의의 독자적인 추진력에 의하여 이룩되는 것이며 이러한 특색을 상실하지 않고 추진해 나갈 때 일심(一心)의 원만 즉 완전한 발전을 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는 처음부터 철학이나 종교 윤리학과 같이 어느 한 가지만을 구성하기 위하여 출발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싯달타 태자는 자기의 미혹한 마음의 정체를 명확히 찾고자 했었으며 그 미혹한 마음은 자기의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자신의 마음에 지배되던 싯달타태자가 도리어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부처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마음의 자유경에 도달하자 마음의 지적인 작용은 철학을 구성하게 되고, 그 정적 작용은 종교적 정서를 발전시켰으며, 또한 의지적 작용은 윤리학을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불교는 철학인 동시에 종교요 윤리이며, 종교인 동시에 철학이요 윤리이며, 윤리인 동시에 종교와 철학인 것으로 종교 · 윤리 · 철학이 3위 1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적인 욕망과 지적인 욕망, 의지적 욕망은 무엇이였던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석가모니의 정적인 욕망은 인간의 삶 그 자체는 무한한 고(苦)임을 깨닫고 이러한 인간고(人間苦)에서 해탈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인간고는 객관계에 타존(他存)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자기의 마음에 내재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마음을 극복하는 무한고의 투쟁 끝에 마음을 정복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정복하고부터 그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고는 안개와 같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그의 지적인 욕망은 모든 사물을 대할 때 사사건건 그것이 미혹임을 깨닫고 그 미혹의 장벽을 제거하기 위하여 항상 동요가 그치지 않는 자기의 심원의마(心猿意馬)로 더불어 악전고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악전고투 끝에 자신의 마음의 본래면목에 접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오도(悟道)요 정각(正覺)의 경지인 것입니다. 즉 깨달음이 있음과 동시에 미혹도 사라진 것입니다.
끝으로 부처님의 의지적 작용은 인생의 고(苦)는 반드시 멸해야 하는 것이고 인생의 낙은 반드시 얻어져야 하는 것이며, 인류의 미혹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며 인류의 깨달음은 얻어야 하는 것이라는 굳은 신념하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치셨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이룩된 것이 바로 철학으로의 불교요, 종교로서의 불교이며, 나아가 윤리로서의 불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철학의 이면에는 종교와 윤리가 내포되어 있으며, 종교로서의 불교 안에는 철학성과 윤리성이 내포되게 되었고, 윤리로서의 불교에는 깊은 철학성과 종교성이 내포되어 불교는 복잡다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건강한 사람의 인체를 구성하는 갖가지 요소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컴퓨터처럼 작동하고 있을 뿐 원리를 깊이 알고 보면 아주 간단하고 오히려 자학적임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출전 : 무심유심(서경보큰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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