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선일미(茶禪一味)

다선일미-2

근와(槿瓦) 2016. 11. 15. 00:49

다선일미-2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임어당(林語堂)은 그의 <다론(茶論)>에서 이렇게 말한다.

「차의 성질 중에는 우리들을 한가하고 고요한 인생의 명상에로 이끄는 힘이 있다. 어린애들이 울고 있는 곳에서 차를 마신다거나 시시덕거리기를 좋아하는 여자들이나 정치를 논하는 무리들과 더불어 차를 마신다는 것은 비오는 날이나 흐린 날에 차를 마시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차의 성질 자체가 맑고 향기로운 것이므로 비오거나 흐린 날에는 제맛이 나지 않을뿐더러 그 분위기가 적합하지 않다. 차는 고도로 승화된 미의식(美意識)의 세계다. 그러므로 먼저 그 분위기와 조건이 가려져야 한다. 흔히 다도(茶道)의 정신으로 화경청적(和敬淸寂)을 들고 있다. 화평하고 예절있고 맑고 고요한 분위기여야 한다는 것. 따라서 차맛을 진짜로 알게 되면 「화경청적」의 덕이 곧 그 사람의 인품으로까지 배이게 될 것이다.


차를 즐겨 드는 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바지만 함께 마시는 사람의 수가 적어야 차맛을 제대로 알 수 있다. 객(客)이 많으면 시끄러워지고 시끄러우면 차의 은은한 매력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초의선사(艸衣禪師, 1786~1866)도 그의 <동다송(東茶頌)>에서 밝히고 있다.「차를 마시는 법은 객이 많으면 수선스럽고 수선스러우면 아늑한 정취가 없어진다. 홀로 마시면 신묘하고, 둘이서 마시면 좋고, 서넛이 마시면 유쾌하고, 대여섯이 마시면 덤덤하고, 칠팔인이 마시면 나눠먹이와 같다.」


나는 남에게 무얼 주고 나서 후회한 적이 별로 없는데(그렇게 기억이 되는데), 재작년 늦가을 어느날 아는 친지들에 섞여 내 암자를 찾아온 한때의 나그네들에게 다로에 숯불까지 피워 차를 달여 주고 나서 며칠을 두고 짠하게 생각한 일이 있다. 한두 사람을 제하고는 차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눠먹이와 같다는 표현으로는 미진할 만큼 주고 나서도 못내 짠한 생각이었다.


그들은 차를 마시기 전에 코로 씽씽 냄새를 맡는가 하면, 입맛을 쩝쩝 다시지 않나, 꿀꺽꿀꺽 소리내어 마시지 않나, 후후 불면서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 찾아온 나그네들에게 내놓을 거라고는 차밖에 없었으므로 차를 달인 것이지만, 화경청적이 없는 그런 자리에 차를 내놓은 것부터가 주인의 불찰임을 못내 후회했었다. 일본인들처럼 차보다도 오히려 그 격식을 위한 것 같은 번거롭고 까다로운 범절(凡節)을 차릴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차를 마시는 데 있어서 최소한 기본적인 예절쯤은 갖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홀로 거처하기 때문에 혼자서 차를 마실 때가 많다. 혼자서 드는 차를 신묘(神)하다고 했지만, 그 심경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길이 없다. 선(禪)의 삼매(三昧)에서 느낄 수 있는 선열(禪悅), 바로 그것에나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육우(陸羽)는 <다경>에서 말한다.

「깊은 밤 산중의 한간 집에 앉아 샘물로 차를 달인다. 불이 물을 데우기 시작하면 다로(茶爐)에서 솔바람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찻잔에 차를 따른다. 부드럽게 활활 타오르는 불빛이 둘레의 어둠을 비추고 있다. 이런 때의 기쁨은 도저히 속인들과 나눌 수 없다.」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이 글은 추사(秋史)가 즐겨 읊던 다시(茶詩)다. 서투른 솜씨로 옮기면 이렇다.


조용히 앉아서

반쯤 차를 달이니 향기가 비로소 들리고

일어서 움직이면

물이 흐르고 꽃이 피더라.


(아마 이 시의 경우는 잎으로 된 녹차가 아니고 다로에 넣어서 달이는 단다(單茶)나 전다(錢茶)의 경우를 말한 듯싶다.)



출전 : 서 있는 사람들(법정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다선일미(茶禪一味)'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선일미-3   (0) 2016.11.22
다선일미(茶禪一味)-1  (0) 2016.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