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덕(無功德)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우리 불일암(佛日庵)의 선실(禪室)은 아무 것도 없이 휑휑그렁한데 다만 한쪽 벽에 달마상(達摩像)이 걸려 있다. 몇해 전 석정화상(石鼎和尙)이 다래헌(茶來軒)에 왔을 때 수묵으로 그린 것인데, 불꽃을 내뿜는 듯한 눈망울과 바위처럼 굳게 다문 입, 그리고 불식(不識)이라고 쓴 간결한 화제(畵題)등이 마음에 들어 족자로 꾸며놓은 것이다.
선(禪)을 이야기할 때 달마를 젖혀놓을 수 없다. 달마는 곧 「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6세기 초 그가 인도로부터 중국에 건너옴으로 해서 선불교(禪佛敎)가 세계적으로 꽃피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대장부다운 그의 당당한 기상은 후대 선승들에게 한 본보기를 이루어놓았다.
선종(禪宗)의 통설에 따르면, 그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로, 반야다라라는 스승 밑에 출가하여 심인(心印)을 전해 받는다. 스승의 유언에 따라 법을 펼쳐 어리석은 마음들을 깨우쳐주기 위해 해로(海路)로 3년이나 걸려 간신히 중국에 도착한다. 그때가 양(梁)의 보통(普通) 7년 가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1천 4백 50년 전이다.
이듬해인 527년 10월 「불심천자(佛心天子)」라고 불려질 만큼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는 양나라 무제(武帝)의 초청을 받아 대담을 나누게 된다.
무제가 먼저 말문을 연다.
「나는 즉위 이래 절을 짓고 불상을 조성하고 경전을 베끼고 스님들 공양하기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했습니다. 얼마만한 공덕이 있을까요?」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쥐고 있는 지배자들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칭찬받기를 좋아한다. 사실은 자기 혼자서 해놓은 것이 아니고 무수한 사람들의 피땀과 희생으로 이루어놓은 일임에도 마치 자기가 해놓은 양 우쭐거린다. 그래서 처음 보는 이국의 나그네를 대하자마자 먼저 자기 PR부터 늘어놓은 것이다.
내 이 빛나는 업적을 부처님의 나라에서 온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대해서 달마대사는 퉁명스럽게,
「무공덕(無功德)!」
이라고 잘라 말했다.
같은 나라 말로는 귀에 못이 박혔으니 이제는 이국어(異國語)를 통해서 실컷 칭찬을 듣고 싶었던 무제는 혹시 통역을 잘못하지 않았는가 하고 돌아보았지만, 아무 공덕도 없다는 대답에는 틀림이 없었다.
무제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아니, 이렇게까지 불교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는데 어째서 공덕이 없다고 하십니까?」라고 반문,
달마는 태연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공덕은 다만 윤회(輪廻)속의 조그만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 언젠가 흩어지고 말 것들이오. 그런 공덕은 마치 물체를 따르는 그림자처럼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있는 것이 아니오.」
「그럼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입니까?」
「청정한 지혜는 미묘하고 온전해서 그 자체가 공적(空寂)한 것. 이와 같은 공덕은 세속적인 명예욕을 가지고서는 구해도 얻을 수 없소.」
이처럼 당당한 말마를 보라. 전제군주 앞에서도 자기 할말을 굽히지 않고 떳떳이 하는 그의 장부다운 기상을 보라. 오늘의 우리는 무엇인가. 권력과 금력 앞에 허리를 펴지 못하는 무리들은 이 달마의 직립(直立)한 자세를 보고 마땅히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공덕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지은 공덕은 참 공덕일 수 없다. 인간의 선행위(善行爲)에는 어떤 공리성도 게재되어서는 안된다. 베풀 때는 허심탄회 빈 마음으로 선뜻 베풀어야지 거기에 조건이 붙거나 불순한 생각이 따른다면 결국 베풀어도 베푼 것이 못된다.
가령, 어떤 강대국에서 약소국가에 행하는 원조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남아돌아가는 것을 주고 싶은 생각에서 거저 주면 될 것을, 주면서도 무슨 절차나 의식을 거쳐야 하고 또 상대방의 처지에서 보면 굴욕적인 조건을 붙여 던져준다. 그러기 때문에 받는 쪽에서도 감사하기보다는 달갑지 않게 여길 수밖에. 기껏 주면서 인심 잃는다는 말은 바로 이런 소리이다. 받아 쓰면서도 「고우 홈」을 외쳐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물론 동방예의지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가시적(可視的)인 물량의 집적에만 눈을 팔고 있는 그가 정신적인 영역인 청정한 지혜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말문이 막혀버린 무제가 이번에는 화제를 바꾸어 이와 같이 물었다.
「어떤 것이 성제제일의(聖諦第一義)입니까?」
불교에서는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양면이 있는데, 진제는 출세간의 길이고 속제는 세간의 길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것은 학자들의 늘어놓기 좋아하는 도그마이고, 불타 석가모니의 본뜻은 진속(眞俗)을 뛰어넘은 진리 그 자체에 있다. 「진속」이 둘 아닌 오묘한 진리야말로 성제제일의(聖諦第一義)일 텐데, 그 제일의가 좀처럼 잡히지 않는 것이다.
달마는 무제를 쏘아보면서
「활짝 드러나 성(聖)조차 없소.」
라고 답한다.
가을 하늘처럼 맑게 개어 한 점의 구름도 찾아볼 수 없는 경지. 전후좌우가 환하게 트이어 거리낌이 없는 경지다. 그런데 「성(聖)」이라고 한다면 범(凡)에 상대되는 「성」이므로 제일의일 수가 없다. 달마의 심경은 항시 맑게 개어 있어 「성 이라 이름붙일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이런 경지가 바로 제일의가 아닐까.
그런데도 세속적인 명예욕과 자기도취에 가리어 무제는 달마의 간절한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계속 당하기만 한 그는 화가 나서 다른 때 같으면 재떨이라도 던지고 싶었을지 모른다.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한손에 쥐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자행할 수 있는 전제군주, 그의 말 한마디면 검은 것도 흰 것으로 돌변하고, 낱말의 개념까지도 하루 아침에 바꾸어버릴 수 있는 그런 제왕(帝王)이 언제 이렇게 면박을 당해보았을 것인가. 요즘의 지배자들 같으면 어림반푼어치도 없었을 것이다. 당장 불경죄로 몰려 투옥되거나, 무슨 법에 걸려 고생깨나 톡톡히 치렀을 것이다.
그러나 1천 5백 년 전의 지배자 무제는 자기 분수와 사리를 가릴 줄을 알았다. 역사의 교훈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뒷날에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언론(言論)이 무엇이고 대화정신(對話精神)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고 있는 양식인이었던 것이다. 과연 불심천자(佛心天子)라고 기릴 만한 인품이었다.
무제도 만만치 않은 저력을 과시한다.
활짝 드러나「성」조차 없다는 말에,
「그럼 내 앞에 있는 것은 누구요?」라고 반문한다.
부처님의 법통을 이어받은 고승(高僧)이라고 들었는데, 그럼 당신은 도대체 어떤 존재냐는 물음이다.
달마는 내뱉듯이
「불식(不識)!」이라고 대답한다.
「나는 그런 거 모르오」라는 말이다. 성인(聖人)이 자기 입으로 성인이라 말한다면 그는 성인이 아니다. 더 수작을 해보았자 당신 같은 돌대가리는 알아들을 수 없을테니 그만두자는 말일까.
이와 같이 문답을 주고받았지만 두 사람은 끝내 맺어지지 못한다. 무제는 달마가 말한 그 뜻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 보았어도 본 것이 아니요 만났어도 만난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뒷날 무제는 지공(志公)이라는 스님으로부터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부처님의 법을 전하기 위해 멀리 인도로부터 건너온 관세음보살의 생신(生身)이란 말을 듣고 두고두고 후회한다. 하지만 기회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법.
무제와 헤어진 달마는 그 길로 양자강을 건너 북쪽 위(魏)나라로 간다. 낙양(洛陽)에 도착, 숭산(嵩山)의 소림사(少林寺)에 은거하면서 한결같이 벽을 향해 말없이 앉아 있다. 9년이 지나도록 그의 존재를 아무도 몰랐는데, 신광(神光)이라는 영특한 스님이 찾아와 그의 심인(心印)을 이어받는다.
달마상을 바라볼 때 더러는 종교와 정치의 함수 같은 걸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진리와 정의를 실현하려는 중교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불꽃을 내뿜는 눈망울과 바위처럼 굳게 다문 그의 입을 통해서 역력히 확인할 수 있다. 제왕 앞에서도 저두굴신(低頭屈身)함이 없이 「무공덕」과「불식」을 당당하게 발음할 수 있는 것은 투철한 그의 종교적 신념에서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달마는 과거완료형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 우리 곁에 살아 있어야 할 눈 푸른 사나이다.
출전 : 서 있는 사람들(법정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