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金剛般若波羅蜜經)

금강경대강좌(277)-하이고 여래자~

근와(槿瓦) 2016. 9. 22. 00:45

금강경대강좌(277)-하이고 여래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說義]

현상계의 모든 것이 환인 줄을 확실히 알면 현실에 구애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신통조화를 부리게 되지만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은 제 마음으로 주위 환경을 만들어 가지고 구속이 되고 속는데 사실은 속는 것도 아닙니다. 밥 먹고 물 긷고 산에 가서 나무하고 장사하고 농사짓고 하는 것이 모두 신통묘유(神通妙有)입니다.


그러므로 있다 하면 용(用)이고 또 없다 하면 체(體)이고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라면 체와 용을 초월한 것이며,「이렇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런 것을 체와 용이라 이름할 뿐이다」하면 체와 용을 겸한 것이 되는데 이것이 불교의 사구(四句)가 됩니다.


이것을 현상계의 삼라만상은 있는 것이 공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는 소견을 第一구(句)의 유문(有門)이라 하고, 모든 것은 그 근본을 자세히 따지고 보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공이라고 보는 것을 第二구(句)의 공문(空門)이라 하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면 第三句인 역유역공문(亦有亦空門)이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면 第四句의 비유비공문(非有非空門)이라 그럽니다.


나쁘다고 보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은 반드시 좋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데 또 한 사람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반합(正反合)의 서양 논리로는 이렇게 긍정 부정해서 그 양자를 종합해서 진보하는 정반합의 법칙으로 끝나지만 불교에서는 하나가 더 있습니다.「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그러면 이론이 다 끝난 것 같지만 하나 더해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래야 마지막 이론이 끝납니다. 그러니 이것으로 보더라도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보다 불교의 四句논법이 훨씬 완전한 논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문학이나 자연과학이나 모든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도 이 四句의 이론으로 하면 더욱 완전하게 더욱 빨리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서 활용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四句에 사구백비(四句百非)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까지가 아니다, 곧 온갖 것 온갖 이치를 다 부정하여 어떠한 존재나 이론 · 원리 무엇이든지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백비(百非)라 한 것이고 四句 자체에 이미 백 가지로 부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사구백비라 한 것입니다. 四句로 네 번 부정하는 것만 가지고는 만족할 수 없어서 百非란 말을 붙였지만 사실은 사구 가운데 이미 백비의 원리가 다 들어 있는데 그 뜻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풀이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처음에 있다 하는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부정으로 봐서 第一비(非)가 되고 다음에 없다 하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란 <第二非>입니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第三非>가 되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하는 말은 <第四非>가 됩니다. 그런데 또 중생들이 이 사구의 논법에 집착해서 사구의 본래의 뜻을 바로 깨달을 줄을 모르고「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그것만을 주장하니까 그런 주장을 부정하는 第五非가 나오게 됩니다. 마치 아인쉬타인이 물질의 본질은 에네르기도 아니라고 했듯이 물질의 본질을 원소라 하지만 원소의 근본체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 연구돼야 하고 원자 · 전자라고 하더라도 역시 원자 · 전자를 이루는 본질이 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반합을 부정하고 사구를 부정하고 거기다 다시 아닐비(非)자 하나 더 붙이면 긍정이 되는데 다시 또 비(非)자를 붙이면 부정이 됩니다. 이렇게 비자를 천 자 만 자 지구를 몇 바퀴 돌 수 있는 비자를 붙여서 사고 · 관념을 초월하자는 구극적인 뜻을 밝히려는 목적으로 백비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이 자리, 산 보고 높은 줄 아는 이 자리는 사구로도 설명될 수 없고 백구(百句)로도 안됩니다. 말을 붙이면 붙이는 대로 모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작다고 하면 바늘로 찌를 수도 없이 작고 몇 천만억배로 확대해 볼 수 있는 현미경으로 살펴 볼 수 없는 자리입니다. 또 크다고 할 때는 천만억배의 우주를 제망중중 무한대 수로도 비교할 수 없이 마지막으로 큰 이 마음자리는 작으면 작은 대로 큰거고, 크면 큰 대로 작은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무엇이 가고 올 것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천백억 화신을 나타내서 천백억 세계에 부처님의 몸을 한 분씩 나누어 중생들을 모두 제도했지만 오고 간 것이 아닙니다. 소승경전만 잘못 본 사람은 싣달 태자가 이 세상에 실제로 오셔서 팔상성도(八相成道)하셨고 七九세에 진지를 잘못 잡수시고 혹은 돼지고기 잡수시고 잘못되어 돌아가신 것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승경의 도리를 아는 이 부처님의 참 모습, 마음자리를 아는 이는 부처님이 몸뚱이로 이 세상에 출현하셨지만 온 것이 아니고 가셨어도 간 것이 아닌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의 지혜, 대승의 지혜로 볼 때는 신이 나타나고 하느님이 나타나는 것이 다 도깨비이고 설사 시방제불이 나타났다 해도 다 도깨비들이 나타난 것밖에 안됩니다.


상(相)으로 나타난 그것을 참으로 있는 것으로 보면 속는 것이고 견성성불과는 천리만리 떨어진 것입니다. 하물며 부처님이 오시고 가시고 앉고 눕고 하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부처님의 육신상을 보고 하는 말이므로 참 부처를 본 것이 아닙니다.



출전 : 금강경대강좌(청담큰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