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윤회에서 벗어난 법(아난존자)

내가 윤회에서 벗어난 법

근와(槿瓦) 2016. 9. 4. 00:04

내가 윤회에서 벗어난 법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나는 출가하기 전부터 형님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지금은 나 스스로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 들어왔다. 수행인과 세속인으로 서로 다른 삶을 보낼 때는 멀리 떨어져 지냈던 우리 두 사람도 이제 수행인으로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그래서 그 전처럼 다시 친밀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친밀함이라고 하지만 실은 내 쪽에서의 관계일 뿐이다. 비석처럼 강건한 마음의 주인은 제자 모두를 사랑과 연민, 같이 기뻐하는 마음으로 대한다. 법의 뜻으로만 보시고 생각하시는 것이다.


한 가지, 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자비와 사랑을 두터이 하여 형님께 시봉했을 때 형님께서도 나를 다시 아껴 주었다. 이러한 기회가 왔을 때 그분께서 막아 두었던 문 한 가지를 억지로 열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은 다음 적당한 곳에서 자세히 밝힐 것이다.


이처럼 출가 전부터 시작되어 왔던 친밀함으로 형님과 매우 가깝게 지낼 때 적당한 말들이 있었듯이 가끔 적당치 못한 말도 있었다. 미처 알아듣지 못하고 적당치 않게 여쭈었던 말 한 가지를 지금 말하리라. 나를 낳아준 부모 나라인 사까 나라의 나가라까(Nagaraka)라는 큰 마을에 도착했을 때 일이다.


“부처님! 선하고 좋은 친구(도반)와 함께 하는 것이 가르침의 여행 중 절반은 됩니다.”


선한 이들은 교단에 들어온 다음 비록 도(막가)와 과(팔라)의 법을 얻지 못했지만 몸과 마음의 태도가 조용하여 잘 조절할 수 있는 비구들을 가리켜 여쭌 것이었다. 여기에서 절반이라고 말하지 아니할 것을 말한 것이다.


“아난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

그분께서 그 말을 금방 막으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좋은 친구, 좋은 도반과 어울리는 것은 교단 여행의 끝까지 이른다. 좋은 도반과 어울리는 수행자는 쉽게 팔정도를 키울 수 있다. 나 여래라는 좋은 도반을 가까이하므로 무량한 중생 제자들은 늙음, 병듦과 죽음, 걱정과 근심, 통곡의 슬픈 고통에서 벗어난다.”


이 말씀을 하시는 동안 그분의 음성은 부드럽기만 하고 태도는 전처럼 그대로 조용했다. 그 얼굴은 은빛 보름달처럼 밝아서 딱딱하거나 억셈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혜의 단계가 낮은 어린 동생에게 눈길을 내려서 바라보시는 연민심의 안개만을 보내 주셨다.


그러나 형님의 측은한 눈빛은 나의 부끄러움을 더욱 크게 하였다. 조용하고 편안하신 태도 역시 쪼그라든 마음을 더욱 쪼그라지도록 눌렀다. 부드러운 목소리조차 마음을 한껏 끌어 잡고 흔들어 버리는 것 같았다. 크나큰 연민심의 주인께서 법으로 적당하게 말씀하시는데 무엇 때문에 흔들렸겠는가?


그때까지 나는 부처님이란 선한 이와 함께 교단 안에 있었지만 바른 도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교단에 속해 있고 같은 밥을 먹으면서도 아직 가르침의 맛을 보지 못했던 나는 스스로의 말에 스스로 부끄러움이 더해서 그분 앞에서 뛰쳐나왔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더욱 키워서 뛰쳐나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나오고 나서는 망설였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느 숲, 어느 산, 어느 계곡에 가서 수행을 해야 하나?


형님을 좋아하는 마음과 다른 많은 이들에 휩싸여서 비구가 되었던 것이다. 수행에 관한 것 중 두 손안에 들어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찍이 말을 이어서 설하셨던 담마도 자기와는 아무 것도 상관없을 뿐, 팔정도를 키우는 것이 곧 좋은 친구와 함께 어울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 팔정도를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수행해야 하나? 모습만 갖춘 비구에서, 진리를 사실대로 본 수행자가 되려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바꾸어 가야 하는가?


그분께 이러한 것을 여쭈었으면 알기 쉽고 보기 쉽게 한 가지 방법으로 말씀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화살이 다 떨어졌다. 진리를 사실대로 본 비구가 되기 전에는 그분의 얼굴을 다시 뵐 용기가 없었다.


나는 일생에 참을 수 없이 슬픈 일을 세 번 만났었다.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께서 몸과 마음이 완전한 닙바나에 드실 때가 한 번이고 형님 부처님께서 몸과 마음이 다한 닙바나에 드실 때가 또 한 번이었다. 일생 중에 제일 먼저 만났었던 큰 슬픔이 바로 이 때였으며 어느 누가 떠나간 것도 아니었다. 모래 언덕에 오르지도 못하고 물 속에 들어간 것도 아닌 것 같은 내 처지가 그렇게 슬픈 상태였다.


출가하여 교단에 들어올 때, 친척과 권속, 온 나라가 떠들썩하도록 시끄러웠다. 지금 교단에 들어온 다음에도 의지할 것, 가진 것 없이 빈손 그대로다. 그렇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는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다시 돌아가기 부끄럽다고 가사만 입고 지내기에는 더욱더 어려운 일이었다. 법을 알지 못하고, 얻지 못하는 한 이 크나큰 어려움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법을 알기 위해서 생각을 거듭하던 나는 발길 닿는 대로 걷고 있었다. 의지할 법을 각자 얻은 비구들은 밝고 편안한 얼굴로 대중에게서 벗어나 천천히 걸어다녔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만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인적이 없는 곳을 찾아서 걸었다.


그때 어느 한 분과 마주치게 되었다.

“아난다, 어디를 그렇게 걸어가느냐?” 너의 얼굴색이 편치 못하구나."


법랍이 높으신 한 비구께서 정면으로 다가오며 말씀을 건네셨다. 나는 급히 무릎을 꿇고 예배드렸다. 괴로워 스스로 만든 근심에 잠겨 있었으므로 그냥 의무로서 절을 드렸다. 그 전에 이 분과 마주쳤을 때는 마음이 그냥 즐거웠었다. 만나시(Mannasi)라는 여자 브라만의 아들인 이 분은 법사로서 아주 유명하신 분이었다.


도저히 비켜 갈 수 없었으므로 있는 대로 모두 말씀드렸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스님, 불편한 이 얼굴을 미루어 보시어 제자의 마음속 고통을 살펴보아 주십시오.”


“아난다, 모든 고통의 뿌리는 ‘나’를 집착함으로써 생긴다. ‘나’는 아름답다. 나는 예쁘다. 내 재산이다. 나는 권력이 있다.’ 라고 하는 등 ‘나’라고 집착하는 일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 ‘나’라고 하는 것을 세간에서 말하는 대로는 알기가 쉽다. 그러나 법의 편에서 생겨나는 ‘나’라는 집착들은 그처럼 쉽게 알거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라는 눈을 아주 가늘고 섬세하게 얽어서 덮은 백태일 뿐이다.”


“그 백태들이 덮어씌운 모습을 말씀해 주십시오.”


비구들이 안 계신 곳을 찾으려는 마음으로 뛰쳐나왔던 나는 그분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아난다, 그 백태들이 덮여서 그렇게 얼굴이 일그러진 것이 아닌가? 자기 스스로 자기의 허물을 보지 못하면 치료할 수가 없다.”


“제자를 불쌍히 여기시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치료해 주십시오.”

“좋다. 아난다, 잘 듣고 놓치지 않게 두 손에 꽉 잡아두어라. 너의 얼굴을 일그러지도록 한 것은 ‘나’라는 집착 바로 그것뿐이다. 다른 이들은 의지할 곳, 머무를 곳, 담마를 각자 얻었다. 나야말로 어떤 법도 얻지 못했다. 이렇게 나와 남을 구분하는 마음 때문에 혼자서 뛰쳐나온 것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좋다. 아난다, 계속해서 귀를 기울여라. 아난다라고 부르는 이름의 그 몸을 자세히 보라. 몸(Rupa 루빠), 느낌(Vedna 왜다나), 생각(Sanna 산냐), 마음의 구성(Sankhara 상카라), 인식의 작용(Vinnana 윈냐나) 등 이렇게 다섯 가지 모임(五蘊) 다섯 가지 덩어리가 영원한가? 영원치 아니한가?”

“물론 항상하지도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그 영원하지 아니한 것, 그것들이 행복인가, 고통인가?”

“물론 고통입니다.”


“변해서 무너지고 사라져서 영원치 못하고 고통뿐인 이 다섯 가지 덩어리를 나라고 볼 수 있겠는가? 나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좋다. 아난다, 계속해서 잘 들어라. 이 모든 덩어리, 다섯 가지 덩어리를 나라고 볼 수 없다. 이 다섯 가지 덩어리는 나와는 어떤 관계도 없다. 그러나 나라는 집착은 이 오온, 이 다섯 가지 모임의 덩어리와 떨어지지 않는다. 이 다섯 무더기를 원인으로 해서 나라는 집착이 생겨나는 것이다.”


“세상의 비유로서 볼 수 있도록 말하리라. 잘 단장하여 치장한 젊은이들과 처녀들이 자기 얼굴이 비친 모습을 거울 속에서 바라본다. 깨끗한 물그릇에서도 바라본다. 거울과 물 속에 떠오르는 얼굴 그림자는 그 대상의 공덕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거울과 물의 은혜가 없지 않지만 거울도 아니고 물도 아니다. 거울과 물도 역시 얼굴 그림자가 아니다.


그와 같이 아난다라고 부르는 이름, 명칭으로만 정해놓은 이 오온 다섯 가지 덩어리를 원인으로 해서 나라는 집착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나’는 오온도 아니고 오온 역시 ‘나’가 아닌데 오온을 나라고 집착한다. 그 나로 법을 얻고, 법을 알고, 법을 깨닫고 싶어한다. ‘나’가 아닌 법을 나를 앞에 두고 찾는 한 고통과 만나야 할 것이다. 아난다여”


그렇습니다. 제자가 이해하였습니다.”


‘나’라는 집착의 백태를 스스로 보도록 하여서 치료해 주신 스승님의 은혜에 공손히 큰절을 세 번 올렸다. ‘나’를 앞에 두고서 그른 길을 따라가던 나는 좋은 스승님, 지혜로운 스승님, 좋은 도반에 의지하여 바른 길로 들어왔다.


바른 길에 이르기 위해서 ‘나’의 힘이란 아무 것도 필요치 않았다. ‘나’의 힘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나’를 앞에 두고 가던 그른 길을 계속해서 가지 않을 뿐. ‘나’라는 것이 없다’는 지혜를 키운 것뿐이다.


‘나’라고 집착해야 할 일 어느 한 가지도 없는 세계 안에서, 죽을 때까지 ‘나’는 법을 얻지 못했다’라고 하는 마음으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었다. 뜨거운 번뇌가 없는, 원래 그대로의 조용한 비구들의 행복을 ‘나’가 아닌 지혜로 즐길 뿐이다.


“보아서 아는 지혜(Dasananana)를 본 다음에 수행(Bhavana)을 함께 하라. 아난다.”


합장을 올리는 두 손 앞에서 그분께서는 천천히 돌아서서 가셨다. 얻은 법의 지혜를 계속 수행해서 수행자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부끄러운 마음이 넘쳐서 등을 돌리고 뛰쳐나왔던 그 황금 같은 얼굴을 다시 뵙고 즐겁게 여쭈어야 하리라.


“좋은 도반, 좋은 스승과 어울려 함께 있는 것은 수행의 여행 전부가 됨을 스스로의 지혜로 보았습니다. 부처님!”



출전 : 아난존자의 일기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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