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불숭유정책(排佛崇儒政策)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朝鮮王朝에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국가정책. 조선시대의 가장 중요한 국가적 지도 이념의 하나로서 고려시대의 정신적 · 형이상학적 가치체계였던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특히 새로이 도입된 朱子學)를 모든 정치 · 사회적 지도 · 실천 이념보다 우위에 두었던 정책을 말한다. 삼국시대 이래로 유교와 불교는 공존하면서 각각 나름대로 국가 사회에 공헌하여 왔다. 그러나 14세기경, 즉 고려말에 불교의 形而上學을 흡수한 유교 朱子學이 도입되자, 그 新儒學이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으로 등장하게 되어, 그 때까지 사상적 · 사회경제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불교에 대하여 개혁파 儒臣들이 斥佛運動을 일으키고 나섰다. 그러므로 麗末鮮初의 척불운동은 정치적 개혁 내지 혁명을 주도하던 세력이 사회적으로 불교적 윤리사상을 유교적 윤리사상으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또한 경제적으로 사원이 차지하고 있던 방대한 토지와 백성을 국가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에서 강행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여말의 척불운동의 양상을 보면, 이미 恭愍王 초부터 이색 · 정몽주 · 박상충 · 김용구 · 이숭인 · 권근 등 일단의 개혁파 유학자들이 사찰의 난립과 과다한 승려 수등 사원경제의 폐단과 각종 불교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그 시정을 요구하는 정도의 소극적인 것이었지 불교 자체를 이론적으로 철저히 배격한 것은 아니었다. 척불운동이 좀더 적극적으로 전개된 것은 급진적 개혁파가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昌王 때 이후로서, 먼저 조인옥 · 조준 · 윤소종 · 성석린 등은 본격적인 척불운동으로서 불교의 말폐를 비판 · 공격하는데 그치지 않고 불교교리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개혁파의 핵심인물이며 대표적 척불이론가인 정도전과 그에 동조한 金子粹 · 金貂 · 許應 · 鄭摠 · 朴礎 등이 척불운동을 전개한 시기에 이르러서는 국가경제와 國役의 확보를 위하여 불교사원의 폐단을 신랄하게 비판 · 공격하고 寺院田地와 사원노비의 몰수를 주장하며, 일반 백성이 승려가 되는 것을 엄금하도록 요청하였으며, 심지어 불교에 관대한 입장을 취한 이색 · 禹玄寶 등 개량파 인사의 축출과 사형을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급진적인 개혁파, 적극적인 척불을 주장한 신진 주자학자 및 관료들과 무장 李成桂의 결탁으로 이루어진 조선왕조에서는 배불숭유가 가장 기본적인 국가 지도이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태조 때에는 우선 수많은 승려와 사원재산을 거두어 들임으로써 국가의 재정과 국역의 인적 자원을 확보한다는 시대적 필요에 따라 사찰이 정리되고 도첩제가 강화되었다. 즉 상주하는 승려 100명 미만의 사찰은 그 전지를 몰수하여 軍資에 永屬시키고,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양반 자제는 布 100필, 庶人은 布 150필, 천인은 布 200필을 관에 납부하여야 度牒을 얻을 수 있게 하였으며 사찰의 영조나 佛書의 간행을 위하여 관사나 민간으로부터 기부를 받는 일을 일체 엄금하였다.
태종 때에는 불교 각 종파의 사원 · 寺田 · 노비 · 승려의 수를 제한하여 12宗 232寺만을 남기고, 도첩제를 더욱 강화하는 한편, 國師 · 王師의 제도를 폐지하는 등 적극적인 억불정책이 추진되었다.
세종 때에도 寺社 노비의 폐지, 선 · 교 兩宗으로의 종파병합, 寺社 · 사전 · 상주승 경비의 제정리와 각종 불교행사의 제한을 단행하였는데 특히 종파의 통합 · 정리로 선 · 교 양종 각 18寺, 도합 36寺를 本寺로 인정하고, 京中의 興天寺와 興德寺를 각각 선 · 교 양종의 대본산으로 삼아 사찰의 신축을 막고 破亡한 사찰을 정리하였다. 그와 같은 거듭된 시책으로 더욱 굳어진 배불숭유정책은 시기에 따라 다소의 변화는 있었으나 조선왕조의 전시대에 걸쳐 일관된 국가 기본정책이 되었다. 그러나 특기해야 할 사실은 조선의 그와 같은 배불숭유정책이 국가적 · 사회적 측면에서는 대체로 전통적인 기본정책으로 지켜졌으나, 오히려 왕 자신이나 왕실에서 왕왕 好佛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초기만 하여도 태조가 불교는 종교로서, 유교는 정치이념으로서 공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유신들의 격렬한 척불론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無學 · 祖丘와 같은 고승들을 가까이 하였고, 또 寺塔의 중수나 불상의 주조 및 佛事를 적지 않게 시행하였다. 또 세종도 개인적으로는 두 아들과 중궁을 연이어 잃고, 자신의 건강도 약화되었던 말년에는 오히려 호불의 군주로 자칭하였으며, 왕실의 각종 불교행사를 방관 · 협조하는 자세를 보였다. 세조도 자신의 과격한 전제정치에서 오는 후유증으로 말년에 심경 변화를 일으켜 깊이 호불하였으며, 그 외에도 왕실의 호불 경향은 자주 있었다. 그리고 민간에 있어서도 불교는 여전히 전통민간신앙으로 남아 정신세계의 한 면을 보완해 왔다. 그러나 요인으로는 유교가 정치 철학 · 윤리규범 · 학문은 될 수 있어도 초인간적인 문제에는 무력하였다는 것, 그리하여 빈번히 일어나는 천재지변과 질병 · 죽음 등의 문제는 종교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祈雨 · 祈晴과 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불교행사는 유신들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 행해졌다. 요컨대 불교는 하나의 高次元 종교였기 때문에 유교정치의 그늘 밑에서도 여전히 명맥을 이어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출전 : 불교학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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