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대강좌(86)-제7 無得無說分(얻을 수 없는 불법)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科解]
여기 제7장에서는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곧 「석가여래는 아무 법도 얻은 법이 없고 깨달은 법도 없으며 부처님께서 입으로 四九년 설법을 하셨지만 꼭 해야 할 말씀은 하나도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고향으로 가는 길을 모르고 딴 길로 험한 길을 가느라고 땀만 흘리고 고생을 하고 있으니 그 사람을 위해 이리 가는 것이 옳소. 이리 가시오.」했지만 꼭 그 길이 참된 길도 아닙니다. 이 마음 깨치는데 여행하는 것 같은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八만 四천가지 방편이 있지만 그것도 결정된 법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도 아무 것도 얻은 게 없고 누구를 얻도록 해 줄 방법도 없고 또 말할 수 있는 어떤 진리도 없고 석가여래 49년 동안 단 한마디도 말한 적도 없다고 잡아 떼십니다. 이것이 석가여래의 불법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아 이것을 불법이라고 남겨 놓았느냐.」고 실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법은 이 금강경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글자나 말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개념으로 규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하고 그것이 무상(無上) 최고의 정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또 그 정법은 우주 어디에고 없는 데 없이 꽉 차 있고 그것이 내 마음이라 합니다. 정법이란 사실 그대로를 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그대로를 여여(如如)하게 보고 듣는 게 없습니다. 종소리 하나를 두고 보더라도 우리는 제대로 못듣습니다. 누구나 똑같이 듣는 것 같고 똑바로 듣는 것 같지만 우리의 얼굴 · 귀가 서로 다른 것 만큼 이 오관(五官)의 조직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듣는 것도 다 각기 다르고 진실 그대로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일본사람은 <강강>, 우리나라 사람은 <땡땡> 그렇게 듣습니다. 일본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 종소리 흉내도 낼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실지로 종을 쳐봐도 강강하는데 한국 사람은 왜 땡땡한다 하는지 모르겠다.」하고 우리들은 종소리가 강강이 뭐냐고 일본 사람을 참우스운 사람들이라 그럽니다.
그러니 저의 어머니에게 어려서 종소리는 땡땡이라고 한번 들어 놓으면 죽을 때까지 땡땡이고, 어머니한테 강강으로 들어 놓으면 평생 강강입니다. 또 가령 슬픈 마음으로 있을 때 어떤 노래를 처음 들으면 그 노래의 곡은 어찌됐든지 항상 아주 슬프게 들립니다. 그 자체의 음성이나 가사가 슬픈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고 설사 재미있는 노래라 하더라도 그렇게 됩니다. 어떤 물건을 처음 볼 때 인상은 평생 못바꿉니다. 그것은 다 五官이 전부 불완전하게 인식하고 사실대로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깨끗한 마음을 깨닫고 나면 땡땡도 강강도 궁궁도 그게 한꺼번에 다 들리고 세계사람 소리가 한꺼번에 다 들립니다. 왜냐하면 그 소리를 모두 초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실 그대로를 아무 조건 없는 마음으로 사물(事物)이나 사람을 보고 대할 때 이것이 정각(正覺)입니다.
우리는 물건의 빛깔도 노란 것을 검게도 검은 것을 희게도 봅니다. 전기불 밑에서 보면 누렇지만 태양 빛으로 보면 하얗게 보입니다. 그러니 빛깔이 뭐냐. 광선의 빛깔과 물체가 조화된 빛깔이지 실제의 빛깔은 아닙니다. 태양 밑에서 희게 보인다 해서 그것이 옳은 게 아니고 태양빛깔과 섞여서 희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만일 여기다 붉은 전등을 비추면 모든 것이 빨갛게 보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五관이 제대로를 보고 듣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중생들의 생각, 개념은 다 이렇게 불완전한 五관작용에 의지하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모두 다 잘못된 것입니다. 중생의 이런 잘못된 착각을 떼어 버린 마음자리만 드러난 부처님에게는 얻은 것도 설명할 법도 없습니다. 만일 얻은 것이 있고 말할 것이 있으면 그것은 五관에 의한 착각일 뿐 마음자리가 아닙니다. 마음만 드러난 자리에서는 주관도 객관도 끊어지고 시간 공간이 벌어지기 이전의 자리이므로 얻은 법도 얻을 주관도 없습니다. 또 마음을 깨쳤다고 하여 새로운 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본래부터 있던 마음 그대로 이므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얻을 것도 말할 것도 없는 도리를 말하는 절이란 뜻으로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이라 한 것입니다.
출전 : 금강경대강좌(청담큰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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