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1)-非心非佛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本則]
馬祖 因 僧問하되 如何是佛이니꼬 祖왈 非心非佛이니라
<譯>
마조스님에게 어느 때 중이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조스님 대답하기를, 비심비불이니라.
<설명>
마조스님의 법을 이어 받은 복우산자재(伏牛山自在)선사는 마조스님께서 말한「即心即佛」은 무병구약(無病求藥)의 구(句)이고「非心非佛」은 약병대치(藥病對治)의 句라고 했다. 이 말은 전자는 병 없는데 약을 구하려고 하는 격이고, 후자는 약으로 병을 치료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전자는 쓸데없는 수작이고 후자는 마땅하다는 말로 풀이되나, 이는 그 사람 그 사람의 견해겠지만, 전자나 후자나 선지(禪旨)에서 다룰 때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것을 30則「即心即佛」에서 밝혀 두었다.
마조스님에게 어느 때 중이 묻기를, 어떤 것이 불입니까. 불(佛)은 부처님 즉 절에 모신 불상을 말한 것이 아니고, <禪>에서 잘 쓰는 말, 불법의 적적대의(的的大義)는 어떤 것입니까, 또는 진리란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이었다. 아직 깨치지 못한 사람으로선 물어 볼만한 일이다. 대체 불법이란 어떤 것이며, 진리란 무엇이기에 예로부터 그다지도 야단 법석이고 또 그것을 갈구(渴求)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선종 외에도 불교의 각 종파 그리고 철학에 이르기까지 진리 진리하고 입버릇처럼 부르짖고 있지 않은가.
요즘 과학의 발달로 진리 문제를 상당히 다루고 있다. 과학이 진리의 소산이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왜 과학이 진리의 소산이냐 하면 과학은 어디까지나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禪>은 어떠한가. 털끝만큼이라도 틈새가 있어선 천만리를 격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빈틈 없는 것이 <禪>이라면 합리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禪>을 근본과학이라고 일컫는다.
어느 학술연구회의 모임 또는 종교설법회에서는 유달리 진리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결론에 있어서는 유야무야하고 마는 것이 일수라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일이다. 진리를 운운하는 그 사람자체가 아직 진리를 파악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진리는 글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말로 이치를 캘 수도 없으므로 무리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사탕」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이 사탕 맛을 어떠한 지식이나 어떠한 구변으로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은 불 보기보다 더 훤한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자기자신이 스스로 깨물어 맛보기 전에는 안되는 얘기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면 진리처럼 알기 어려운 것이 이 세상에는 없는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 알기 쉬운 것이 진리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즉 일거 일동이 모두 진리에 계당(契當)되지 않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것이 용이하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속담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과 같이, 너무도 가까우니 도리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기에 진리는 가까이 구하라고 옛 어른들은 타 일러 왔건만, 왜 그런지 모르나, 진리라면 깊은 산중에나 파묻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멀리만 구하는 것이 우리들이 아닌가. 중국에 임제종(臨濟宗)을 일으킨 임제대사는 구심헐즉무사(求心歇即無事)라고 갈파했다. 이 말은 구하려는 마음을 쉬(休)면 된다는 뜻이다. 구하려하면 할수록 점점 더 멀어진다. 돈도 벌려고 할수록 손해만 본다는 것이 그 이치와 같은 말이다.
마조스님은, 누가「불법이란 어떤 것입니까」하고 물으면, 어떤 때는「即心即佛」이라고 대답하고, 또 어떤 때는「非心非佛」이라고 대답한다. 이를 풀이하면 전자는 곧 마음이 불이고, 후자는 마음도 아니고 불도 아니라고 했다. 정 반대의 말이다. 왜 같은 물음에 정 반대의 말을 썼을까 하는데 궁금증이 난다. 이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이 바로 <禪>이다. 이런 수작은 <禪>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禪>에는 이러한 수작들이 수두룩하다. 하나 예를 들면, 제1則에 조주스님은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물으면, 어느 때에는 없다고 대답하고 또 어느 때에는 있다고 대답했다.
마조스님의 수제자인 대매는, 어떤 것이 불입니까 물으니「即心即佛」이라고 대답했을 때 그 한 마디에 대오철저했다고 하는데, 이 중은「非心非佛」이라고 하니 멍청했다. 그러면「即心即佛」과「非心非佛」이 어떻게 다른 점이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젯거리가 된다. 바꾸어 말하면, 전자에는 깨칠 어떤 요인이 있고 후자에는 요인이 없어서 깨치지 못했을까.
<禪>에는 깨치는 요인이나 요소가 있어서 깨치는 것이 아니다.「即心即佛」은 곧 마음이 불이고「非心非佛」은 마음도 아니고 불도 아니라고 풀이되는데, 여기서 크게 문제되는 것은「마음」이다.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인가. 본 사람은 있던가. 네모난 것이던가, 세모난 것이던가, 길쭉하던가, 둥글던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별나라에 다니는 사람은 있어도 이를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마음 마음 하는가.「即心」에도 마음,「非心」에도 마음,「即」자와「非」자를 떼면 양쪽 다「마음」이다. 그러면 어느 쪽이건 마음으로 통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위에「即」자와「非」자가 있으니 의미는 달라지는 것이 일반에서 보는 견해이나, <禪>에서는 그러한 시를 가리지 않는다. 둘을 저울질 해 보라. 어느 쪽이 무겁고 가벼운가를. 가볍고 무거운 양단(兩端)을 <禪>에서는 가장 꺼린다. 양단을 초월해서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마조스님이 어느 때는「即心即佛」이라고 하고 또 어느 때는「非心非佛」이라고 한 것이 바로 둘을 초월한 경지에서 한 말이다. 만약에 초월한 입장이 아니라면 마조스님은 정신 빠진 사람이라고 조소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조소라기 보다 미친 사람이고, <禪>에는 문외한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마조스님은 당대 선계(禪界)의 거물이었으니 허튼 수작이 아니었다는 것을 능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대매가「即心即佛」에 깨쳤다는 것은 그때 대매의 기연(機緣)이 다다랐을 때임을 증거한다. 만약에「非心非佛」이라고 했어도 깨쳤을 것이다. 즉 기연만 다다르면 어떠한 작략(作略)에도 깨친다. 그러나 기연이 다다르지 못하면 어떠한 교묘한 설법이나 언구에도 깨치지 못한다. 그런데 이 기연이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수행을 거쳐서만 가능하다. 돈오(頓悟)란 말이 있다. 당장 깨친다는 뜻인데, 수행도 쌓지 않고 곧 깨친다는 의미가 아니고 깨치는 찰나에는 간발의 여유를 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 한다.
요는 <禪>은 말에 걸려서는 아니된다. 이 언구에 구애되지 않으려면 역시 수행을 쌓아야 한다는 얘기다. 옛날 어느 집 주인이 하인을 보고 너 내일 일찍이 아무개네 집에 다녀오라고 일러 두었다. 주인이 일찍 하인을 부르니 대답이 없다. 이 애가 어디로 갔단 말이냐고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이때 하인이 어슬렁 어슬렁 들어온다. 네 어디 가 있었단 말이냐고 주인은 고함을 질렀다.「주인장께서 아무개네 집에 갔다 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시키는 대로 일찍이 아무개네 집에 다녀오는 길입니다」고 대답하더라는 얘기가 있다. 이런 등속의 사람은 말에 걸리기 일수이다. 그러니까「即心即佛」이라고 하면,「即心即佛」에 걸리고「非心非佛」이라고 하면「非心非佛」에 걸린다. 말에 걸리니 자유롭지 못하다. 마조스님도 이제는 나이 많아 노망 쓴다고 코웃음칠 정도에 이르러서 비로소 자유로울 것이다. 다시 말하면,「即心即佛」이고「非心非佛」이고 마음대로 지껄여 보라고 할 정도의 배짱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는 이 칙을 보지 못한다. 공안(公案)에는 어떤 것이 불입니까,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또는 불법의 대의(大義)는 무엇입니까고 물은 칙이 허다하다. 이의 대답에는 스님에 따라 모두 다르다. 그렇다면 불법이란 그렇게 많은 종류를 가지고 있는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다. 진리에 여러 종류의 가지 가지가 있을 수가 없다. 누가 무어라고 대답하건 진리는 하나다. 즉 대답은 달라도 그것이 모두 진리의 당체라는 얘기다.
그러니까「即心即佛」도 진리의 당체를 표현한 말이고,「非心非佛」도 진리를 표현한 말이다. 왜 딴 말인데 똑 같다고 보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두 눈이면서 한 눈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이 따위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에 <禪>의 특징이 있고 묘취가 있다고 한다. 어떤 학문이나 이론으로서는 도저히 엿볼 수도 없는 <선>의 장점이기도 하다. 요는 마음이 불이니, 마음도 아니고 불도 아니라고 하는 말에 걸리거나, 이를 이론적으로 풀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둘을 한데 뭉쳐서 뭉친다는 것도 없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이때를 <禪>에서는 깨친 때라고 한다.
출전 : 無門關(이 희익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