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행(영원한 자유)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일본 비예산(比叡山)은 천태종 본산으로 여기에 연역사(延曆寺)는 절이 있습니다. 천태종이 전교(傳敎)대사에 의해 그곳에서 개종한 지는 약 1,200년이 되었는데, 1,200년을 계속 내려오면서 12년을 단위로 농산행(籠山行)이라는 수행을 합니다. 그 당시 전국적으로 가장 영리하고 가장 신심있는 사람을 골라서 12년 동안 비예산의 정토원(淨土院)이라는 절에 앉혀두고 공부를 시켰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농산행이라고 합니다.
12년 만기가 되기 전에는 절대로 밖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공부 방법이 1,200년 동안 한번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왔습니다. 12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들어가서 대를 잇고 또 12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이 들어가기를 100명째 계속 해온 것입니다.
들어가는 첫째 조건은 대승계를 받는 것인데 그 때의 계는 부처님에게서 직접 받아야 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부처님에게서 받느냐 하면 기도를 간절히 하면 부처님께서 나타나 계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상(瑞相)을 본다’는 것입니다. 농산을 할 때는 반드시 기도를 하여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기도하느냐 하면 하루에 삼천배씩 절을 합니다. 이때 삼천 불명경이란 것이 있어서 이것을 펴 두고 부처님 명호를 한번씩 부르면서 절을 하는데,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아주 정성껏 해야 하며, 절을 한번 하고는 가루 향을 한번씩 사루고 다시 절을 해야 합니다. 아주 천천히 하루종일 스물네 시간 동안 절만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백련암에서 삼천배 절을 시켜보면 어떤 사람은 제트기가 날아가듯 빨리 하여서 세 시간이나 네 시간만에 끝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농산행을 할 때는 이렇게 아주 시간을 많이 들여 천천히 절을 하되 부처님께서 직접 나타나서 계를 주기 전에는 그칠 수가 없습니다. 삼천배를 마치고 나서는 또 쉬는 것이 아니라, 가사 장삼도 벗지 못하며 앉고 눕지도 못하고, 변소 갈 때 이외에는 언제나 장좌(長坐), 곧 그대로 앉아 지내며 누워서 자지도 못합니다.
2년이든 3년이든 부처님이 나타나서 계를 줄 때까지는 그치지 않고 삼천배를 하면서 온 정성을 다 바쳐 기도하며 고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몇 달만에 부처님이 나타나는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3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1,2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농산에 들어가서 부처님의 서상을 못 본 채 12년 동안 농산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두 다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몇 해 전에도 12년 동안 농산을 하여 성취한 사람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났습니다. 그는 지극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드리니 부처님이 나타나서 계를 설하더라고 했습니다.
농산행을 할 때는 그 먼저 농산행을 한 사람이 스승이 됩니다. 그것은 실제 부처님에게서 계를 받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인데, 자신들이 직접 체험했으니 다른 사람은 그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1,200년 동안 농산행을 계속하여 이어내려왔으니, 농산행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에게서 직접 계를 받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한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일본의 모든 불교 단체와 불교도가 다 아는 일입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부처님이 돌아가셨으니 그만이라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못 본다고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눈 감은 봉사가, 누군가가 “해가 참 밝고 좋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눈앞이 캄캄하다고 해서 그를 미친놈이라고 욕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나 진리의 눈을 뜨면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습니다.
천태 지자(天台智者) 선사가 혜사스님을 찾아가서 공부를 하고 바로 깨쳤습니다. 그러고 나서 영산회상의 엄연부산(儼然不散)함을 자기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 말은 곧 영축산에서 부처님이 상주하여 수많은 대중을 거느리고 법을 설하는 것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지 수천 년인데 지금도 영축산에서 법문을 설한다는 말은 도저히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세상을 나느니 죽느니 하는 것은 꿈속에 사는 눈 먼 중생들이 하는 말이요, 참으로 꿈을 깨어 눈이 뜨이게 되고 귀가 열리면 부처님이 항상 계시면서 법을 설함을 보고 들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천백억의 몸으로 나투어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다니시며 중생을 구하십니다. 그래서 설사 꿈을 깨지 못한 사람이라도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님을 보려 하면 누구든지 다 볼 수 있는 것이니, 보지 못하는 것은 다만 그 사람의 정성이 부족한 탓입니다. 우주 전체의 중생들이 정성만 지극하면 한 날 한 시에 다같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정성을 들여 병을 고친 사람, 큰 액난을 면한 사람, 죽을 것을 살아난 사람 등 그밖의 여러 가지 기적이 수없이 많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신통력 갖추고
널리 지혜 방편 닦아
시방 모든 국토에
어느 곳에든 현신 않는 곳 없다.
具足神通力
廣修智方便
十方諸國土
無刹不現身
달이 뜨면 천 개, 만 개 강에 달 비치듯이(千江有水 千江月), 부처님은 시방세계 어느곳 어느 나라 할것 없이 현신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아주 돌아가 없어졌으면 모든 기적들은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께 정성을 들여 그 정성의 정도에 따라 가피를 입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꿈속의 중생들이 대하는 부처님이어서 잠깐 동안입니다. 그러나 꿈을 깨어 법(法)의 눈을 밝게 뜨면 부처님을 항상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는 것이니 부지런히 공부해서 속히 마음의 눈을 뜰 것입니다.
흔히 염기염멸(念起念滅)하는 것 곧 생각이 일어났다가 생각이 없어지는 것을 생사(生死)라고 합니다.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가 없어졌다 하는데, 이러한 생멸하는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염기염멸하는 그 생각이 없으면 생사도 없습니다. 이것이 철저하여, 제8아뢰야식의 근본무명, 무시무명(無始無明)까지 모두 끊어지면 마래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완전한 해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교를 참으로 잘 믿으려면, 불교의 근본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믿어야 합니다. 눈 먼 망아지가 요령소리만 듣고 따라가다가는 똥구덩이에 빠지고 흙구덩이에 처박히고 덫에도 걸리고, 심지어는 죽기까지도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 목표는 생사해탈에 있습니다. 해탈이란 일시적인 자유가 아니라 영원한 자유입니다. 영원한 자유라 함은 생전사후(生前死後)를 통해서 또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통해서 영원히 자유로운 것입니다. 결코 전설이나 신화가 아닙니다. 실제로 영원한 자유가 없다면 굳이 부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욕심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면 아무도 고생하면서 수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자유, 영원한 해탈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희생하고 고행의 문턱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천자(天子)보다 더 높은 이라도 죽고 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어도 그만이 아닌 영원한 자유를 구하기 위해 천자도 내버리고 참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출전 : 영원한 자유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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