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정도(밀행연구원)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八正道(팔정도)라는 말은 여덟가지 바른 道(도)라는 말인데 聲聞小乘(성문소승)이 苦集滅道四諦法(고집멸도사제법)을 修行(수행)함에 있어서 苦集滅道(고집멸도)라는 道諦(도제)가 곧 八正道(팔정도)를 가르킨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무엇을 가리켜 팔정도라고 하는가 하면,
첫째 正見(정견), 둘째 正思惟(정사유), 셋째 正語(정어), 넷째 正業(정업), 다섯째 正命(정명), 여섯째 正精進(정정진), 일곱째 正念(정념), 여덟째 正定(정정)입니다.
그러면 첫째 정견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정견이라는 말은 곧 바로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바로 보라는 말입니까.
첫째 우리는 肉身(육신)의 이 몸둥이를 볼 때에 깨끗하고 淨(정)하게 보며 貴重(귀중)하고 사랑스럽게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몸은 不淨(부정)하고 더러운 것이며 모든 災殃(재앙)과 苦痛(고통)의 根本(근본)이 되는 것이니 항상 이 몸을 볼 때에 淨(정)하고 깨끗하게 보는 것은 잘못 보는 것이요, 不淨(부정)하고 더러운 苦(고)의 그릇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볼 때에 樂(낙)으로 보고 살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樂(낙)이 아니라 전부가 苦(고)의 鐘子(종자)요, 苦(고)의 果報(과보)니 낙으로 보지 말고 고로 보는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恒常(항상) 있는 有(유)로 보고 든든하게 믿고 살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山河大地日月星辰禽獸草木有情無情(산하대지일월성진금수초목유정무정) 할것 없이 하나도 永久(영구)히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결국은 전부가 空(공)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있다는 有(유)로 보는 것은 잘못 보는 것이요, 없어져 버리는 空(공)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우리는 宇宙萬有(우주만유)가 物心兩面(물심양면)에 있어서 一定不變(일정불변)하는 것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물심양면의 現象(현상)으로 나타나는 宇宙(우주)의 萬有(만유)는 하나도 常住不變(상주불변)함이 없이 變化無常(변화무상)하다는 이치를 말씀하신 후에 精神界(정신계)나 物質界(물질계)가 언제나 常住不變(상주불변)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 보는 것이요, 時時刻刻(시시각각)으로 變化無常(변화무상)하게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우리는 우주만유의 모든 법이 각각 나라는 존재가 분명히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유의 현상이 地水火風空識六大(지수화풍공식육대)가 一時的因緣(일시적인연)으로 假合(가합)되어 聚散生滅(취산생멸)할 뿐이니 어떤 것을 가르쳐 참나 眞我(진아)라고 하겠느냐? 그런즉, 固定不變(고정불변)하는 내가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 보는 것이니 假我(가아)나 妄我(망아)로는 볼지언정 진실된 내가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正見(정견)이라는 말은 宇宙萬有(우주만유)가 物心(물심)과 靈肉(영육)을 막론하고 有情無情(유정무정)을 不問(불문)하고 모두다 不淨(부정)한 것이며 實在的我(실재적아)가 없다고 보는 것이 宇宙觀(우주관)이나 人生觀(인생관)에 있어서 가장 바르게 보는 정견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견을 얻지 못하고는 苦集滅道(고집멸도)라는 四諦(사제)의 진리를 분명히 알지 못하며 사제의 진리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고 하면 팔정도를 수행할 수 없게 됨으로 이 정견이야말로 팔정도라는 여덟가지의 主體(주체)가 되는 동시에 가장 중요한 修行方法(수행방법)의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둘째는, 正思惟(정사유)니 바르게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바르게 생각하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以上(이상)에 말한 바와 같이 바르게 보는 正見(정견)을 얻게 되면 그 정견에 따라서 참다운 智慧(지혜)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참다운 지혜의 눈으로서 모든 사물을 觀察(관찰)하게 되면 苦集滅道四諦法(고집멸도사제법)의 이치를 분명히 알게 되는 동시에 참다운 지혜가 더욱 밝아지게 되나니 그러므로 정견에서 얻은 지혜로써 일층 더 바르게 연구하며 생각을 거듭하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 셋째는, 正語(정어)니 바른 말을 하라는 뜻입니다.
이상에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사물에 對(대)하여 바른 정견을 가지고 바른 생각을 하였다 할지라도 實地行動(실지행동)에 있어서 입으로서 바른 말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여 남을 속인다고 하면 지금까지 닦아온 바른 所見(소견)과 바른 생각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한 바와 같이 바르고 정직한 말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넷째는, 正業(정업)이니 바른 행동을 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상에 말한 바와 같이 정견으로서 바른 소견을 얻고 정사유로써 바른 생각을 얻었으며 정어로써 바른 말을 한다 할지라도 實地(실지)로 행동하는데 있어서 은근히 남을 속이며 남을 해롭게 하여 表裏不同(표리부동)하게 奸詐(간사)한 행동을 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참으로 말할 수 없는 王莽(왕망)이나 李林甫(이임보)와 같은 僞善者(위선자)요, 奸惡(간악)한 小人(소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항상 警戒(경계)하여 말씀하시되 너희 중생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몸과 입과 뜻, 세가지를 바르고 청정하게 가지라.
이 세가지는 모든 業(업)을 짓는데 있어서 근본이 되나니 身口意三業(신구의삼업)을 바르고 깨끗하게 가지지 못하면 貪瞋癡三毒(탐진치삼독)을 제거하지 못하게 되는 까닭에 죽은 후에는 무서운 三惡道(삼악도)에 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바른 정업을 짓는다고 곧 正當(정당)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 修道上(수도상)에 있어서 얼마나 중대하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다섯째는, 正命(정명)이니 정명이라는 말은 정당한 방법으로써 직업에 종사하여 생명을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상에 말한 바와 같이 바른 소견과 바른 생각으로써 뜻을 바르게 가지며 바른 말로써 입을 깨끗하게 하고 바른 행동으로써 몸을 청정하게 가진다고 하면 자연히 身口意三業(신구의삼업)이 청정하고 정당한 사람이 될 것만은 사실입니다만은 萬一生活(만일생활)하는 방법이 바르지 못하여 부정한 직업으로써 생활하게 된다고 하면 자연히 修道(수도)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수에 넘치는 貪慾(탐욕)의 생활을 취하지 말고 오로지 정당한 직업으로써 정당한 생활을 하되 수도에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써 근근히 생명을 보존하라는 뜻입니다.
여섯째는, 正精進(정정진)이니 바르게 정진하여 부지런히 닦으라는 말입니다.
이상에 말한 바와 같은 여러가지 방법으로써 몸과 입과 뜻 세가지가 청정하게 되며 정당한 방법으로써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부지런히 精進修行(정진수행)하는 노력이 없다고 하면 신속히 열반의 大道(대도)를 성취할 수가 없으므로 戒定慧三學(계정혜삼학)과 四正勤(사정근)같은 수행방법에 의지하여 참다운 지혜로써 부지런히 바르게 정진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일곱째는, 正念(정념)이니 정념이라는 말은 수행할 때에 항상 참 지혜로써 바른 正法(정법)을 생각하며 一心精力(일심정력)으로 散亂心(산란심)을 일으키지 말고 一念萬年(일념만년)의 정신으로써 勇猛精進(용맹정진)하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 여덟째는, 正定(정정)이니 정정이라는 말은 바른 禪定(선정)을 수행하여 精力(정력)을 얻으라는 말입니다.
이상에 말한 바 일곱가지 正道(정도)를 수행함에 있어서 항상 邪心邪慾(사심사욕)에 끌리지 말고 煩惱忘想(번뇌망상)을 일으키지 말며, 오직 淸淨無漏(청정무루)한 眞智(진지)의 法力(법력)으로써 解脫無漏(해탈무루)의 禪定(선정)을 수행하여 泰山不動(태산부동)의 定力(정력)을 얻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에 말씀드린 팔정도는 聲聞小乘(성문소승)이 苦集滅道四諦法(고집멸도사제법)을 수행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道諦(도제)가 되나니 도제라는 말은 곧, 사람의 가는 길을 밝혀주신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에 말한 팔정도 곧 여덟가지 正道(정도)가 있는 반면에는 八邪道(팔사도) 곧 여덟가지 邪道(사도)가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그러면 팔사도란 무엇인가? 邪見(사견), 邪思惟(사사유), 邪語(사어), 邪業(사업), 邪命(사명), 邪精進(사정진), 邪念(사념), 邪定(사정)이라는 여덟가지가 되는데 팔정도에 바를 정자를 빼고 奸邪(간사)할 邪字(사자)로 붙이면 곧 팔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팔정도를 수행하지 않으면 팔사도에 떨어져 갖은 罪惡(죄악)을 짓게 되므로 六祖檀經(육조단경)에 말씀 하시되 부처를 멀리 求(구)하지 말고 極樂(극락)을 다른 곳에서 찾지 말라. 오직 十善業(십선업)과 팔정도를 수행하면 곧 네 自性(자성) 가운데 부처가 있고 네 앉은 곳이 곧 극락이 되거니와 그와 반대로 萬一十惡業(만일십악업)과 팔사도를 行(행)하게 된다면 네 아무리 부처를 찾고 극락을 원한다 할지라도 부처와 극락은 너와 더불어 十萬八千路(십만팔천로)의 먼 거리에 있게 되나니 十惡業(십악업)은 十萬(십만)에 비유하셨고 팔사도는 八千(팔천)에 비유하시와 十萬八千路(십만팔천로)라는 먼 거리를 말씀하신 후에 부처와 극락을 구하지 말고 먼저 十惡八邪(십악팔사)를 除(제)하라고 간절히 훈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불자가 된 이상에는 반드시 일상생활에 있어서 팔정도의 생활을 해야만 될줄로 믿습니다만은 과연 우리가 얼마만큼 佛敎眞理(불교진리)에 대한 正見(정견)과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身口意三業(신구의삼업)에 있어서도 얼마만큼 청정한 수행을 하고 있는지 항상 스스로 반성하고 참회하며 奮發精進(분발정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출처 : 밀행연구원(조계종)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