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말씀

큰절 · 작은절

근와(槿瓦) 2015. 9. 11. 01:13

큰절 · 작은절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석달 동안의 겨울철 안거가 끝나는 해젯날, 그러니까 출가 수행자에게는 법랍(法臘)이 한 살씩 보태지는 날, 해제법문의 자리에서 있었던 일들이 아직도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해젯날을 다른 말로 자자일(自恣日)이라고도 한다. 안거의 마지막 날에 함께 정진하던 스님들끼리 모여, 서로 보고 듣고 의문이 난 일들을 가지고 안거 중에 지은 허물을 고백하고 참회하는 행사다. 요즘은 ‘자자’란 말조차 듣기 어려울 정도로 생략되어 버렸지만, 부처님 생존 당시부터 승단에서 행해져 오던 중요한 행사다. 나는 지금 부처님 앞에 자자하는 심경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법회시간은 오전 9시로 앞당겨 대종소리가 울렸는데, 대중들은 겨우내 법회장소로 쓰던 누각으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대웅전으로 모여들었다. 법회장소를 미리 알려주지 않은 데서 온 차질과 혼란이었다.

 

불기가 없이 썰렁한 법당에 대중이 다 모였는데도 한참 동안 법회는 지연되었다. 뒤늦게야, 법상에 딛고 올라갈 발판이 다른 장소에 있어 그걸 가져와야 하므로 좀 늦겠다고 알렸다. 그날의 법회를 주관하는 소임자가 분명히 있었을텐데, 그래서 마이크 시설까지 해놓고 그걸 시험하는 소리까지 들렸는데 정작 법상에 올라갈 발판은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 발판을 가져오느라고 공백이 된 시간에 또 이런 일이 한쪽에서는 벌어졌다. 불단을 향해 오른쪽 맨 뒷줄에 법문을 듣기 위해 외부에서 찾아온 남자 손님 두 분이 앉아 있었다. 이때 젊은 스님 한 분이 잽싸게 나와 그분들을 일으켜 세운 뒤 깔고 있던 방석을 아무 말도 없이 가로채듯 거두어 한쪽에 던져버렸다. 돌아보았더니 일반 대중이 깔고 있는 방석하고는 그 빛깔이 달랐다. 대중들은 가사빛이었는데 그 손님들이 깔고 있던 방석은 노란색이었다. 아마 전면에 노덕스님들이 까는 방석인 모양이었다.

 

무안하게 방석을 회수당한 그분들에게 대신에 깔고 앉을 방석을 주지 앉은 채 그 스님은 제자리로 들어가고 말았다. 누군가 다른 방석을 드려야 할게 아니냐는 말을 듣고 다른 스님이 갖다 주었다. 누군가 미리 그분들에게 깔고 앉으라고 내주었을 방석이다. 그 방석이 놓일 자리가 바뀌었다면 조용히 사정을 이야기하고 다른 방석으로 바꾸어주었어야 했다. 깔고 앉았던 방석을 아무 양해도 없이 회수당한 채 대신에 깔 방석도 주지 않는 것을 보고, 그들은 얼마나 무안하고 면구스러웠을 것인가. 손님을 대하는 주인의 태도치고는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정월보름이면 아직도 겨울 날씨다. 문이란 열고 닫으라고 달아놓은 것이다. 그날따라 썰렁한 법당 안이라 두 군데나 문이 열린 채 있어 자꾸만 뒤돌아보게 했다. 맨 나중에 들어온 사람이 마땅히 닫아야 하는데 열어놓은 채 들어온 것이다. 법당에 모인 대중이 조용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이때 누군가 ‘거기 문 좀 닫으시오’하고 큰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문은 닫겼지만 이 큰소리가 조용한 법석에 불협화음을 가져와 몹시 언짢았다.

 

법사가 등단하여 마이크의 위치를 손수 조절해야 할 만큼 사전에 손씀이 없었거나 모자랐다. 법상 위의 탁자도 앞뒤가 바뀐 채 놓여 있었다.

 

법문이 있기 전에 이런 ‘법문(광경)’을 미리 보고 듣고 나자, 실제 법문의 내용이 내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이것이 이 도량에서 이루어진 겨울철 안거의 결산인가 싶으니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겉으로 드러난 일들은 내면생활의 실상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그날의 그 절에서만 있었던 일은 결코 아닐 것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느 절에서나 흔히 있음직한 일이다. 이것이 이 집안 소식이요, 이 나라 불교의 현주소라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하고 반성해야 한다. 이런 바탕 위에서 쌓인 법랍은 그저 부끄러운 나이일 뿐이다.

 

도원선사(道元禪師)의 상당법어(上堂法語)를 수록한 <영평광록(永平廣錄)>에 다음과 같은 법문이 있다.

 

“옛날 자명 초원(慈明楚圓)선사의 법회에서 대총림(大叢林 : 큰 수행도량)과 소총림의 논쟁이 있었다. 그럼 말해보라. 무엇을 대총림이라 하고 무엇을 소총림이라 할 것인가. 대중이 많고 집이 크고 여러 채 된다고 해서 대총림인가, 도량이 빈약하고 대중이 적다고 해서 소총림인가? 만약 대중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집채의 크고 작음을 들어 총림을 논의한다면 그것은 한낱 허튼 소리(戱論)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대중이 많이 모여 사는 큰절이라 할지라도 보리심을 발한 사람이 없다면 이것은 소총림이다. 설사 도량은 허물어져 가난하고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거기 보리심을 발한 수행자들이 모여 산다면 이것은 대총림이다. 인구가 많고 국토가 넓다고 해서 큰 나라라고 할 수 없고 군주가 덕스럽고 총명하며 백성들이 어진 것을 큰 나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분양의 선소(善昭)스님 회상에는 대중이 겨우 7,8인뿐이었고, 조주 스님 회상에서는 20인이 채 안되었으며, 약산 스님 도량에는 대중이 10인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런 회상에서는 항상 밤에도 설법(晩參)을 거르지 않을 만큼 도량이 빛을 발했다. 요즘은 5백명, 7백명, 혹은 천 명의 대중이 모여 사는 곳이 여기저기 있지만, 도심(道心)과 눈을 갖춘 진정한 수행자가 주관하는 도량은 별로 없다. 이런 모임을 어찌 대총림이라 하면서, 저 약산 조주 분양 등의 회상에 견줄 수 있겠는가.”

 

겨우 7,8인 혹은 10명 안팎이거나 20명도 채 안된 대중이 사는 도량이지만 저마다 출가장부로서 한몫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에 선종사(禪宗史)에 찬란하게 기록될 만큼 대총림이 되었던 것이다. 양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질을 문제 삼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겉으로 드러난 겉모습만을 보고 가치판단을 성급히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떤 것이 진짜고 사이비인가는 겉모습에 있지 않고 내실에 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집채가 눈부시게 즐비한 도량이라 할지라도 거기 사는 수행자들이 수행자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곳은 한낱 무위도식배들의 소굴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가난해서 집에 빗물이 새고 내일 먹을 양식이 없다 할지라도 그 안에 청정한 발심 수행자들이 모여 법다운 삶을 이루고 있다면 그 도량은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선사의 법문은 우리에게 어떤 것이 대총림이고 소총림인가를 열어보인 것만이 아니다. 우리들 일상생활 속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를 암시해 주고 있다.

 

우리 속담에 ‘닭이 천이면 봉이 한 마리’라는 말이 있다. 여럿이 모인 데는 반드시 뛰어난 사람도 있다는 말일 것이다. 승가에서도 예전부터 이 말을 그대로 답습해 오는 경향이 있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상해서 하는 비유일 뿐 사실 여부와는 관계가 없다.

 

제대로 수도 도량의 기능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거기 모이는 사람들의 자질이 선별되어야 한다. 중이 되려 오는 입산 희망자부터 엄격히 가려서 받아야 한다.

 

우선에 아쉬운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수행자 될 인품이나 자질은 고려하지 않고 되나캐나 받아들이면 반드시 후환을 가져온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겪어온 어김없는 공식이다. 그리고 일단 선발해서 받아들이게 되면 철저한 교육을 시켜야 한다. 철저한 교육 없이는 출가 수행자로서 틀이 잡히지 않는다.

 

기성 출가자를 받아들이는 일(방부)만 하더라도 엄격히 선별해야 할 것이다. 결제 임박해서 오는 사람은 수행자의 예절과 양식 및 그 성실성에 문제가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예로 보면, 결제 당일에 오는 그런 사람들까지 숫자를 채우기 위해 모두 무사 통과시키고 있다. 안거 대중이 많아야 그 절의 체면이 서고 주관하는 사람의 위신이 서는 걸로 착각하는 그런 맹점이 우리에게 있다. 그 도량에 어떤 사람들이 모여 어떻게 지내느냐가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데, 그저 한방 가득히 모이는 것만을 능사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허세와 체면치레 때문에 승가에서는 일찍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불미한 일들이 일어날 소지가 있는 것이다. 한 도량을 운영하는 크고 작은 소임자들은, 개인의 명예와 함께 자신에게 위임된 소임의 막중함을 하나같이 지켜나가야 한다.

 

대총림과 소총림의 갈림길은 일차적으로 수도 도량을 맡아 운영하는 사람들의 그 안목과 진실성, 그 위에 대중을 보살피는 한결같은 성실성 여하에 있다.

 

그리고 그 도량에 몸담아 정진하는 대중은 자신이 객이 아니고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함께 걱정하고 같이 겪어 나가려는 의지를 드러내야 한다. 불법 자체가 그렇듯이 수도 도량은 주인과 객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 모두가 한 부처님 법 안에서 만난 도반들이기 때문에 내 몸과 마음이 깃든 그 자리가 바로 내 도량인 것이다.

 

6년에 걸친 송광사의 집 짓는 불사는 그동안 신심있는 시주들의 정성과 주관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는 눈을 안으로 돌려 진정한 승보도량의 기능을 해야 할 때가 왔다. 진실한 수행과 교화를 통해서 겉치레의 불사에서 내실을 기하는 불사로 전향해야 한다. 수행과 교화가 없이 빈 집들만 덜렁 서 있는 곳을 우리는 도량(道場)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건물의 집합일 뿐이다.

 

큰절을 만드느냐 작은절을 만드느냐는 이 도량에 몸담아 살고 있는 대중 전체가 순간순간 어떻게 수행하고 어떻게 교화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엄숙한 과제이다.

 

 

출전 : 텅빈 충만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