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군왕의 죽음(항우와 유방)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최근 독서계에 어느 유명한 원로 소설가의 <초한전(楚漢傳)>이라는 소설이 크게 성공하여 독서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꼭 읽어야 할 고전을 읽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한전이란 바로 진나라 황제가 죽고 혼란기에 겨우 2대를 세습하다가 내시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황제 즉 지도자의 무능으로 진(秦)제국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호혜라고 불리운 진제국의 2대 황제는 자신의 손발이 되어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내시들만을 믿고 모든 문무백관의 올바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들을 잡아죽였기 때문에 나라도 하루아침에 결단이 났던 것입니다. 이런 혼란기에 나라를 세우겠다고 일어선 두 영웅이 바로 천하장사 항우와 유방입니다.
항우는 조상 대대로 재상을 지낸 명문의 후예였으나 유방은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조그마한 지방 도시에서 건달로 세월을 보내던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나 의협심은 워낙 강하여 백성을 괴롭히는 관리를 혼내어주고 쫓겨다니기 일쑤이면서도 즉 자신이 지방관리를 때렸다고 지명수배를 받는 입장에 있었으면서도 친구의 어려운 일을 돕는데 앞장을 서곤 하였던 것입니다.
항우 역시 비록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워낙 배운 것이 없이 허송세월하다가 그의 숙부되는 사람에게 이름 성명을 쓸 정도의 글을 배운 다음에,
「글이란 자기의 이름 석 자만 쓸 줄 알면 족한 것」이라고 내팽개치고 무술을 익혔던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워낙이 힘이 장사였으므로 이따금 시비를 벌이기도 하며 예사로 관가로 끌려다녔으나 그때마다 숙부가 위기에서 구해주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차제에 진승이란 인물이 도적떼를 이끌고 천하를 어지럽게 만들자 항우는 휘하의 졸개들을 이끌고 반란의 무리 진승을 제거하고 천하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은 듯했었습니다. 항우는 천하의 용장인데다가 부하를 사랑하기를 마치 어버이가 친 자식을 사랑하듯 했습니다. 그리고 술과 계집을 그렇게 즐겨하지 않던 항우는 부하들의 앞에서의 처신 또한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던 지도자였습니다. 항우가 군사를 이끌어 어느 고을을 점령하여 수백 수천, 많을 경우에 수만명의 주민을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여 죽였던 것은, 행여 그들을 먹여 살리려다 사랑하는 부하들을 굶주리게 하지나 아니할까 하여 군량미 확보수단으로 많은 인민을 생매장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유방은 비록 의협심은 있다고는 하지만 부인이 있는 몸으로 부인은 시골에서 땅을 파서 부친과 아들의 생계를 꾸려나가도록 팽개치고 자신은 패거리들과 어울려 술이나 먹고 계집질을 일삼았습니다. 다분히 게으르기까지 했던 유방은 술이 취하여 늘어지게 잠이 들어있다가 항우군의 기습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경우도 한 두 번이 아니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을 마차에 싣고 항우군에게 쫓겨 도망할 때에 어린 아들 즉 당시 5살 정도에 불과한 아들의 몸무게 때문에 마차가 빨리 달릴 수 없다고 하여 마부가 모는 마차에서 아들을 마차 밖으로 내던지는 비정한 인물이기도 하였습니다. 다행히 인정이 많은 마부가 유방의 아들을 다시 마차에 주워담기는 했지만 아들을 마차 밖으로 내던지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항우가 유방의 부친을 인질로 잡아 유방의 항복을 받기 위하여 도마 위에 올려놓고 죽여 요리를 만들겠다고 위협했으나 유방은 이에 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국을 끓이거든 나에게도 한그릇 보내다오.」하는 느긋한 뱃장을 부린, 어느 면으로 볼 때 천하에 다시없는 불효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불리한 속에서도 항우는 죽어 패장이 되어야 했고 유방은 한(漢)나라의 고조가 되어 가장 추앙받는 역사상의 인물이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것은 항우가 비록 자기 부하 사랑하기를 어버이 같이 아끼고 사랑했어도 그 사랑이 부하를 위해서가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였던데 비하여 유방은 충심으로 부하를 사랑하고 잔정과 같은 것은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여 항우가 아무리 부하를 배부르게 먹인다고 하더라도 일단 전장에서 패하면 가차없이 죽여버렸지만 유방은 오히려 패했을 때 더욱 다독여주고, 승리를 하여 전리품을 얻으면 모든 것을 부하들의 논공행상에 따라 전부 나눠주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비하여 항우는 비록 먹을 것은 많이 주었으나 금은보화는 모두 혼자 독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항우는 휘하에 한신과 장자방처럼 훌륭한 장수와 참모를 거느리고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힘만을 믿고 이들을 괄시했기 때문에 이들이 결국 유방을 도와 항우를 죽이고 넓은 중원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항우와 유방의 싸움을 가리켜서 용장과 덕장의 싸움이라고 표현합니다. 유방이 얼마나 사심이 없었는가 하는 증거를 보이는 아주 좋은 예가 하나 있습니다. 처음에 항우의 휘하에 있다가 항우가 자신의 실력을 무시하고 자신을 장수에 임명하지 않고 겨우 소대장급의 낮은 계급을 주자 이에 불만을 품고 유방의 휘하에 들어왔던 한신은 퍽이나 야심만만한 인물로, 유방은 군사를 엄하게 다스릴 줄도 모르는 인물로 생각하여 유방을 마치 자신의 봉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판국에 한신은 싸우는 족족 이겼으며 유방은 패하기만 했습니다. 유방은 한신의 공을 인정하여 한왕(韓王)에 봉하였는데 한신이 거느리는 군사는 수십만이요, 한(韓)이라는 커다란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그때 유방은 겨우 일개 성(省)에 불과한 땅에서 겨우 자신의 신변을 돌보는 기천의 군사와 함께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면서 한신이 보내주는 원군의 힘에 의하여 버티고 있었습니다. 주위에서 한신은 위험한 인물이니 경계하라고 간언했으나 유방은,
「내가 그에게 덕을 베풀었는데 그가 나를 배반할 까닭이 있겠는가?」
라고 말하고 끝까지 한신을 부하로 아꼈으며, 이에 감복한 한신이 끝까지 유방을 보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 모방송국에서 인기있는 드라마 <설중매>중에서도 나왔지만 수양대군을 도와 그를 세조의 보위에 오르도록 지혜를 주어 수양이 그대는「나의 장자방」이라고 칭찬했던 장자방은 바로 무식했던 유방을 도와 유방의 머리노릇을 했던 참모였습니다.
그도 역시 항우의 휘하에 있었으나 항우가 지나치게 욕심이 많은 인물임을 깨닫고 유방에게 가서 갖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유방을 도왔습니다. 이조시대에 임금님의 얼굴을 가리켜 용안(龍顔)이라고 했던 것은 유방의 얼굴이 기이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중국인들이 유방을 얼마나 이상적인 지도자상으로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겠습니다.
출전 : 無心有心(서경보큰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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