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멸(斷滅)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모든 法의 因果가 각각 다르므로 常이라 하지 않고, 因果가 相續하므로 斷이라 하지 않는다. 이 因果는 상속하는 이치가 없다고 물리치는 것을 斷滅의 見이라 한다. 즉 斷見은 邪見 가운데 極惡에 속한다.
참고
일체법(一切法) : 一切諸法 · 萬法이라고도 한다. 모든 것, 一切의 事物, 모든 現象, 정신적 · 物質的인 것. 일체 現象的 존재를 말함. 원 뜻은「緣起로 된 모든 존재」곧 有爲法을 가리켰으나 뒤에 이와 對立하는 無爲法도 추가되었다. 法에 관하여 여러 가지 분류방법이 있다. 그러나 일체법은 모두 所緣이 된다.
유위법(有爲法) : 인연법에 의해 爲作 · 造作되는 法. 곧 인연에 의해 離合集散하는 생멸하는 法을 말한다.
인과(因果) : ① 원인과 결과를 말함. 결과를 낳게 하는 것이 因이고 그 因에 의해 생기는 것이 果이다. 시간적인 因果 관계로 볼 때 因은 앞에 있고 果는 뒤에 있으므로 因果異時라 한다. 그러나 묶은 갈대를 서로 의지해서 세우는 것은 넓은 의미의 인과관계이니 이와같은 인과관계에서 보면 因果同時이다. 唯識派에선 種子에서 종자가 생기는 관계는 因果異時이고 종자에서 現行이 생기고 現行에 의해 종자를 熏하는 관계는 因果同時라 한다. 六因 · 五果 중에서 異熟因과 異熟果와의 관계 및 同類因 · 遍行因과 等流果와의 관계는 어느 것이나 因果異時로 俱有因 · 相應因과 士用果와의 관계는 因果同時이다. 能作因과 增上果와의 관계는 양쪽에 다 통한다. 또 同類因과 等類果와의 관계는 前生의 자기가 因이 되어 後世의 자기를 낳게되는 관계임으로 이것을 自類因果라 한다.
② 우리의 行爲(業에 대해서 異時의 因果를 세울 때 善의 業因에는 반드시 善의 果報가 있고 惡의 業因에는 반드시 惡의 果報가 있다. 이것을 善因善果 · 惡因惡果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善因樂果 · 惡因苦果라고 해야 될 것으로 본다. 善한 業을 因으로 善한 業이 생겨 善業이 계속할 경우도 있다. 이는 바로 善因善果이다. 善惡의 業因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에 相應하는 苦樂의 果報가 있다. 因果의 이치가 엄연해서 조금도 흩어지지 않는 것을 因果應報라고 한다. 因果의 이치를 무시해서 인정치 않고 邪見에 빠지는 것을 因果를 撥無한다고 한다.
③ 因果關係를 실천수도상에서 본다면 수행의 因에 의해서 깨달음의 果를 얻게 됨으로 이것을 修因得果 · 修因感果 · 酬因感果라고 한다. 感이란 果를 불러 들이는 것이다.
④ 모든 外道의 說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外道四執 또는 四執이라 함. 곧 邪因邪果는 萬物生起의 원인을 大自在天의 能力으로 돌리는 것. 無因有果는 현재의 現象的 世界를 果로서 인정하고 그 果에 대한 因은 결국은 얻기 어려움으로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有因無果는 현재의 현상적 세계를 因으로 인정하고 그 因에 대한 果는 얻기 어렵다고 부정하는 것. 無因無果는 그 양쪽을 다 부정하여 因果를 撥無하는 것. 또 따로 두 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因中有果論은 婆羅門敎 및 數論에서 주장하는 說로 果로서 나타난 현상적 현상세계는 반드시 因 가운데 들어 있다. 따라서 因과 果는 성질이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 이에 대해 因中無果論은 婆羅門敎에 대립하는 소위 일반사상계 및 勝論에서 주장하는 說로 독립한 많은 요소(곧 因)가 결합해서 현상적세계(곧 果)가 되었다고 봄으로 因과 果는 성질이 같지 않고 因 가운데 果는 없다고 한다. 따라서 차라리 果中有因論이라고 하여도 된다.
⑤ 善惡의 業因에 의해서 樂苦를 가지고 오는 것을 나타내는 異熟因 · 異熟果와 그 중에서 특히 福德(世間的인 善業)에 의해 人 · 天의 樂果를 가져오는 福因 · 福果, 智慧를 修習하여 깨달음의 결과를 가져오는 智因 · 智果의 세 가지 因果關係를 三因三果라 한다.
현행(現行) : 有爲의 諸法(모든 것)이 현재에 나타나서 나오는 것. 有部宗에선 모든 法은 雜難하게 住하고 있는 미래라는 領域에서 인연의 화합으로 現行한다고 생각한다. 유식종에서는 아뢰야식으로 일체의 것이 생기는 능력이 있다고 보고, 種子라 한다. 이 종자에서 모든 것이 생기는 것. 혹 그렇게 생긴 法(곧 現行法)을 現行이라고 한다.
훈(熏) : 마치 향이 그 냄새를 옷에 배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身 · 口 · 意로 하는 바 선악의 언어 · 동작 또는 생각하는 것 등이 그냥 없어지지 않고, 어떠한 印象이나 세력을 자기의 心體에 머물러 둠을 말한다.
상(常) : ① 常住라고도 한다. 영원히 변하지 않고, 생하거나 멸함이 없는 것. 간단없이(不斷) 계속해서 다함이 없는(相續) 것. 緣起法性의 이치나 如來의 法身은 常住라 하고, 또 범부의 四顚倒나 열반의 四德의 하나에도 樂 · 我 · 淨과 같이 常을 넣는다. 일반적으로는 常住하는 것을 無爲法이라고 한다. 大乘莊嚴經論 卷三이나 佛地經論 卷七에는, 3身은 어느 것도 다 常住하지만 각기 의미가 다르다고 하여 3종의 常(三常)을 설함. 곧 自性身(眞如法身)은 원래 절대 평등하여 본질적으로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自性常(本性常 · 凝然常), 受用身(報身)은 법을 설하고 또는 즐거움을 받는데 간단함이 없으므로 無間常(不斷常), 變化身(化身)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隱現(나타나거나 감추어 짐)하여 생멸은 있어도 나타나는 것은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에 相續常이라고 한다. 다만 뒤의 2는 無爲法으로서의 참다운 의미의 常은 아니다.
② 無常은 非常이라고도 한다. 生滅變化하여 變易하고 잠시도 같은 상태에 있지 않은 것. 모든 有爲法은 生 · 住 · 異 · 滅의 四有爲相(四相)이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시간적 존재이기 때문에 無常이라고 한다. 온갖 것(有爲法)이 無常한 것을 諸行無常이라 하고, 三法印(불교의 세 가지 진리)의 하나로 여긴다.
智度論 卷43에는 2종의 無常(二無常)을 설함. 곧 (1) 有爲法이 다만 1刹那만 현재에 머무르고 곧바로 滅하여 과거에 沒入하는 것(刹那滅임)이 念念無常(刹那無常)이며,
(2) 相續의 法이 무너져 없어지는 것. 예컨대 사람의 목숨이 다하여 死滅하는 것과 같은 相續無常(一期無常)이라 한다.
또 金七十論 卷上에는, 數論學派의 說이라고 해서, 暫住無常과 念念無常의 2종의 無常을 드는데, 이에 의하면 불교와 달리, 轉變하는 것을 無常이라 하고, 自性은 常住한다고 한다. 辯中邊論 卷中에는, 遍依圓의 三性에 대해서, 遍計所執은 그 體가 전혀 없으므로 無性無常(無物無常), 依他起는 인연에 의해 生한 것으로 生滅이 있기 때문에 生滅無常(起盡無常), 圓成實은 眞如본연의 상태에 변화가 있는 것이므로 垢淨無常(有垢無垢無常)이라고 하여, 3종의 無常을 설함. 無常의 덧없음을 꿈 등에 비유해서, 如夢 · 如幻 · 如泡 · 如影 · 如露 · 如電이라고 하고, 그 可恐할만한 것을 無常의 이리(狼), 無常의 범(虎)등, 또 죽음이 찾아 오는 것을 無常殺鬼 · 無常의 風 · 無常의 刀 · 無常의 使 등이라 하고, 無常의 例로서 生者必滅 · 盛者必衰 · 會者定離 등을 든다. 無常을 觀하는 것을 無常觀 · 非常觀, 無常을 說한 偈頌을 無常偈, 病僧이 기거하는 집을 無常院 · 無常堂이라고 하고, 臨終 때에 치는 磬을 無常磬이라고 한다.
상속(相續) : 因은 果를 내고, 果는 또한 因이 되어 또 다른 果를 내므로 이렇게 因果가 차례로 연속하여 끊어지지 않는 것.
인(因) : 狹義로는 결과(果)를 가져오는 직접 내적 원인을 因(內因)이라 하고, 이것을 외부에서 도우는 간접적 원인을 緣(外緣)이라 하지만, 廣義로는 두 가지를 합해서 因이라고도 하고 緣이라고도 한다. 유식종에서는 10因을 말한다.
(1) 隨說因. 말은 사물을 표현함으로 말은 곧 사물의 因이다.
(2) 觀待因. 잘 받들리는 것. 예를 들면 손을 들어서 물건을 잡는 동작을 행할 때 손을 잡는 물건의 因이다.
(3) 牽引因. 種子가 먼 미래에 스스로 果를 끌어 당기는 것.
(4) 攝受因. 種子 이외의 여러 가지 緣.
(5) 生起因. 種子로부터 가까운 미래에 자신의 果가 생긴다.
(6) 引發因. 種子 혹은 現行이 同類의 훌륭한 果를 끌어당기는 것.
(7) 定別因. 일체의 有爲法이 자신의 果를 끌어 오지만 亂雜하지 아니함.
(8) 同事因. 因이 果와 和合하는 것.
(9) 相違因. 사물이 생기는데 障碍가 되는 것.
(10) 不相違因. 함께 장애가 되지 않는 것.
단(斷) : 惡을 끊는 것. 斷惑·滅한다는 뜻.
단멸견(斷滅見) : 斷見과 같음. 인간의 色身과 일체의 만상은 반드시 斷滅되어 空으로 돌아간다는 견해로서, 인과의 이치를 무시하는 삿된 견해를 말함.
단견(斷見) : 萬有는 無常한 것이어서 실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인간도 죽으면 心身이 모두 없어져서 空無에 돌아간다고 고집하는 그릇된 所見을 뜻함.
사견(邪見) : 五見의 하나며, 十惡의 하나. 因果의 도리를 무시하는 옳지 못한 見解. 온갖 妄見은 모두 正理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邪見이라 함.
오견(五見) : 다섯가지의 見. 見은 생각·見解·思想의 뜻인데, 여기서는 나쁜(惡) 생각, 그릇된 견해를 의미한다. 근본번뇌 가운데 見(惡見)을 다섯가지로 나눈 것. 곧, (1) 薩迦耶見. 번역해서 有身見. 略하여 身見이라고도 하고, 또 僞身見·壞身見이라고도 번역한다. 我가 있다고 하는 我見과, 나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는 我所見이 그것. (2) 邊執見. 邊見이라고도 한다. 편벽된 극단을 집착하는 見解란 뜻. 나는 死後 常住(永久不變)라고 하는 常見(有見)과, 나는 死後 斷絶한다고 하는 斷見(無見)이 그것. (3) 邪見. 因果의 도리를 부정하는 견해. (4) 見取見. 잘못된 見解에 집착하여 진실한 견해라고 하는 것. (5) 戒禁取見. 戒取見·戒盜見이라고도 한다. 바르지 않은 戒律이나, 禁制 등을 涅槃(깨달음)에 인도하는 바른 戒行이라고 고집하는 것.
십악(十惡) : 열 가지 죄악. 身3[殺生(斷生命)·偸盜(不與取·劫盜)·邪婬(欲邪行·婬妷·邪欲)]·口4[妄語(虛誑語·虛妄·속임)·兩舌(離間語·破語)·惡口(麤惡語·惡語·惡罵)·綺語(雜穢語·非應語·散語·無義語)]·意3[貪欲(貪·貪愛·貪取·慳貪)·瞋恚(瞋·恚·害)·邪見(愚癡)].
극악(極惡) : 四重罪와 五逆罪를 범한 죄악.(불교학대사전). 몹시 악하다(국어사전)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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