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修行)도움말씀

참마음을 가리는 망념을 쉼(眞心息妄)

근와(槿瓦) 2015. 4. 3. 00:49

참마음을 가리는 망념을 쉼(眞心息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어떤 이가 물었다.

“참마음이 미망 속에 있는 것이 범부일진대, 어찌하여 미망에서 나와 성인을 이룰 수 있겠는가?”

나는 답하였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허망한 마음이 없어지는 그곳이 보리요, 생사와 열반이 본래 평등하다’하였다.

또 경에 이르기를,

‘중생들의 허깨비의 몸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의 마음도 사라지고, 허깨비의 마음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의 대상도 사라지며 허깨비의 대상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의 사라짐까지도 사라지고, 허깨비의 사라짐이 사라지는 까닭에 허깨비가 아닌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거울을 갈 때 때가 없어지면 밝은 빛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영가스님도 말하기를,

‘마음은 뿌리요 법은 티끌이니 두 가지는 마치 거울 위의 먼지 같다. 먼지와 때가 다할 때에 비로소 나타나고 마음과 법을 모두 잊을 때에 성품은 곧 참되어진다’하였으니 이것이 곧 허망에서 벗어나서 참을 이루는 모습이다.”

 

그가 또 물었다.

장자는 말하기를,

‘마음이란 뜨겁기는 타는 물이요 차갑기는 언 얼음이며, 빠르기는 내려오고 올려보는 사이에 사해(四海)밖을 두 번 어루만진다. 가만히 있을 때는 깊고 고요하며 움직일 때는 하늘까지 멀리 가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 뿐이로다’하였다.

 

이것은 장자가 범부의 마음을 다스릴 수 없음을 이와 같다고 이미 설파한 것이거늘 선문(禪門)에서는 어떤 법으로 허망한 마음을 다스립니까?”

나는 답하였다.

“무심(無心)의 법으로 망심(妄心)을 다스린다.”

그는 다시 물었다.

“사람이 무심이 되면 초목과 같게 될 것이니, 무심이란 말씀에 대하여 방편을 베풀어 주소서.”

 

나는 답하였다.

“무심이라 한 것은 마음의 본체가 없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무심이라 할 뿐이다. 마치 빈병을 말할 때 병 속에 물건이 없는 것을 빈병이라 하고, 병 자체가 없는 것을 빈병이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하기를,

‘그대가 다만 마음에 일이 없고, 일에 마음이 없으면 자연히 텅비어 신령스럽고 고요하여 묘하리라’하니, 이것이 마음을 말한 참뜻이다.

 

이에 의하건대 허망한 마음이 없을지언정 참마음의 묘한 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부터 여러 스님네가 무심의 공부를 한 것이 여러 가지가 각각 다르니, 지금 그 대의를 한데 뭉쳐 대략 열 가지로 밝히리라.

첫째는 깨달아 살핌이니, 공부를 할 때에 항상 잡념을 끊어서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즉 한 생각이 겨우 일어나거든 곧 그것을 깨달아 부수는 것이니 망념이 깨달음에 부서지면 다음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므로 깨달은 지혜마저도 버려야 한다. 망념과 깨달음을 함께 잊어버리면 그것을 무심이라 한다.

그래서 조사께서는,

망념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며 오직 깨달음이 더딤을 두려워하라‘고 하였다.

또 게송으로 말하기를,

‘진심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다만 소견을 쉬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깨달아 살피어 망념을 쉬는 공부다.

 

둘째는 쉬고 쉬는 것이니, 이른바 공부할 때에 선도 악도 생각하지 않으며 마음이 일어나거든 곧 쉬고, 인연을 만나거든 곧 쉰다는 것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한가닥 흰 비단인 듯, 싸늘하여 가을비 내리듯, 옛날 사당안의 향로같이 하라’하였다.

즉 망상을 끊고 분별을 떠나 바다와 같고 말뚝과 같게 되어야 비로소 참마음과 합친다 하였으니, 이것이 망심을 쉬는 공부다.

 

셋째는 마음을 없애고 경계를 남기는 공부니, 공부할 때에 모든 망념을 다 쉬어 바깥 경계로 돌아보지 않고 다만 스스로 마음을 쉬는 것이니, 망심만 쉬면 경계가 있다고 무엇이 방해가 되리요? 즉 옛 사람의 말에‘사람만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다’는 법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말하기를,

‘여기 꽃다운 풀은 있는데, 다정한 친구는 하나도 없다’하였다. 또 방공(龐公)이 말하기를.

‘다만 스스로 만물에 무심하면 만물이 항상 나를 둘러싸고 있다 하더라도 무엇이 방해가 되리요 ’하였으니 이것이 곧 마음을 없애고 대상을 두어 망심을 쉬는 공부다.

 

넷째는 경계를 없애고 마음을 두는 것이다. 공부할 때에 안팎의 모든 대상을 다 비워 고요하다고 관찰하고 오직 한 마음만을 남겨서 외로이 우뚝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이 말하기를,

‘모든 법과 짝하지 않고 모든 대상과 상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일 그 마음이 대상에 집착하면 그것은 곧 망심이라. 지금에 이미 대상이 없어졌는데 무슨 망심이 있겠는가? 즉 참마음이 홀로 비추어 도에 걸리지 않는 것이니, 옛 사람의 이른바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동산에 꽃은 이미 다 떨어졌는데 수레와 말은 아직도 붐빈다’하였고 또 ‘삼천명의 검객은 지금 어디에 있는고? 홀로 장주(莊周)가 태평 이룩했네’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대상을 없애고 마음을 남기는 마음 쉬는 공부이다.

 

다섯째는 마음과 대상을 모두 잊는 공부다. 공부할 때에 먼저 바깥 대상을 비우고 다음에 안으로 마음을 멸하는 것이다. 이미 안팎으로 마음과 경계가 모두 고요해졌는데, 망심이 무엇을 좇아 일어나겠는가?”

관계(灌溪)스님이 말하기를 ‘방에 벽이 없고 사방에 문도 없어 발가벗은 듯 맑디맑다’하였으니, 이는 조사들이 말한 사람과 대상을 함께 빼앗는 법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말하기를‘구름이 흩어지고 물이 흘러가니 고요하여 천지가 비었다’하고, 또 말하기를 ‘사람과 소를 모두 볼 수 없으니 바야흐로 달 밝은 때라’하니, 이는 마음도 없애고 대상도 없애 망상을 쉬는 공부다.

 

여섯째는 마음과 대상을 모두 남기는 공부이니, 공부할 때에 마음이 마음의 지위에 머무르고 대상이 대상의 자리에 머물러서, 때로는 마음과 대상이 마주쳐도 마음이 경계를 취하지 않으며, 경계가 마음을 따르지 않아 제각기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자연히 망념이 생기지 않고 도에 걸림이 없으리라.

경에 말하기를,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 세간의 모습이 항상 머문다’하시니 이는 곧 조사께서 말한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한 법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가 말하기를‘한 조각의 달이 바다 위에 떠오르니 몇 사람이나 누대 위로 오르는고?’하였으며, 또 어떤 이는 ‘산의 꽃 천만송이에 노는 사람 돌아갈 줄 모른다’하니, 이것이 마음과 대상을 모두 남기고 망심을 없애는 공부다.

 

일곱째는 안팎이 모두 본체인 공부다. 즉 공부를 할 때에 산 ․ 강 ․ 땅 ․ 해 ․ 달 ․ 별 ․ 몸 ․ 세계 등 모든 법이 다같이 참마음의 본체가 되는 것이므로, 고요히 비고 밝아, 털끝만큼도 다름이 없어 대천세계의 모래처럼 수많은 세계를 한덩이로 두드려 만드는 것이니, 또 어디서 망심이 오겠는가?

그러므로 승조(僧肇)법사도 ‘천지가 나와 한 뿌리요, 만물이 나와 한 몸이다’하였으니, 이것이 안팎이 완전히 본체가 되어 망심을 멸하는 공부이다.

 

여덟째는 안팎이 모두 작용(用)인 공부이니, 공부할 때에 일체 안팎의 몸과 마음과 세계의 모든 법과, 또 일체의 행동과 베품을 모두 진실의 묘한 작용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온갖 생각이 겨우 일어나자 곧 묘한 작용이 앞에 나타나니 모두가 그 묘한 작용인데, 망심이 어느 곳에 발 붙이겠는가?

영가 스님이 말하기를 ‘무명의 진실한 성품이 곧 부처성품이요, 허깨비같이 빈 몸이 곧 법신이다’하시며, 지공(誌公)의 열두시가(十二時歌)에 말하기를 ‘첫새벽 인시(寅時)여, 미친 탈춤 속에 도인의 몸이 숨었도다. 앉고 누움이 원래 도인줄 모르고 공연히 바쁘게 고통만 부르도다’하시니, 이것이 안팎이 완전히 작용하여 망을 쉬는 공부이다.

 

아홉째는 본체 그대로가 작용인 공부이니, 즉 공부할 때에 비록 본체에 가만히 합하여 한결같이 비어 공적하나, 그 가운데에 안으로 신령한 밝음이 숨어있으니 그것의 본체가 곧 작용이다.

그러므로 영가스님은 말하기를 ‘또렷또렷(惺惺)하고 고요함(寂寂)은 옳고, 또렷또렷하고 망상이면 그르며, 고요하고 또렷또렷함은 옳고, 고요하고 무기(無記 : 감각이 없음)인 것은 그르다’하였으니, 고요함 가운데에 무기를 용납지 않고 또렷또렷한 가운데 망상을 용납지 않으면 온갖 망상이 어찌 생길 수 있는가? 이것이 본체 그대로가 작용이어서 망심을 없애는 공부이다.

 

열 번째는 본체와 작용을 뛰어넘는 공부니, 즉 공부할 때에 안팎을 나누지 않으며 동서남북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사방과 팔면을 몽땅 하나의 큰 해탈문으로 삼아 원만한 자리에서 본체와 작용을 나누지 않는다. 그리하여 털끝만큼도 빈틈이 없이 온몸을 한덩이로 두드려 만드는데 그 망심이 어디서 일어나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온몸에 꿰맨 자리가 없어 위아래가 온통 둥글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곧 본체와 작용을 뛰어넘어 망심을 멸하는 공부이다.

 

이상의 열 가지 공부하는 방법을 다 쓸 필요가 없으니, 다만 한 부분만을 찾아서 공부가 익어지면 망심은 저절로 사라지고 참마음이 곧 나타날 것이다. 그 근기와 전생 습성에 따르되 어느 법에 인연이 맞는지를 살펴서 닦아 익혀라. 그러면 이 공부는 공부가 없는 공부이므로 애를 쓰는 공력이 아니다. 이 망심 쉬는 법문이 가장 긴요하므로 가장 말이 많아진 것이니 번거로운 것이 아니다.”

 

 

출전 : 禪門撮要(眞心直說)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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