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봉큰스님 말씀

무자화두와 참선삼매

근와(槿瓦) 2015. 2. 20. 00:36

무자화두와 참선삼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살고 죽는 것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먼저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가령 모든 부처님이 와서 맞이한다 할지라도 마음이 거기에 팔리지 않아야 한다. 무서운 악귀들이 나타나더라도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된다면 그는 모든 법계에서 대자유를 얻어 어떤 일에도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효봉스님 법어 중에서-

 

깊고 깊은 산속, 문 없는 한 칸 짜리 토굴 속에 들어앉아 학눌은 가부좌한 자세로 용맹정진을 계속했다. 무자화두(無字話頭)를 깨치기 위해 마지막으로 선택한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다리를 뻗고 누울 자리도 없는 비좁은 토굴이다 보니 방바닥에 등을 붙일 수도 없었다. 스승인 석두스님의 배려로 하루에 한 번 법기암으로부터 아침 공양을 날라오곤 했는데, 사미승은 토굴속에 들어앉은 학눌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다만 하루 전에 갖다놓은 밥그릇이 빈그릇으로 놓여 있으면 살아 있구나 하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스님, 소승 스님의 아침공양 가지고 왔습니다. 여기 빈 그릇이 놓여있는 걸 보니 다른 걱정은 안 되옵니다만,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으신지요, 스님?"

아침공양을 가져온 사미승이 늘 토굴 안을 향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토굴 안에 들어앉은 학눌은 단 한 마디의 대꾸도 없었다.

 

".....스님, 수행하시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 달리 더 이상 말씀은 드리지 않겠사옵니다만, 정말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으신지요? 노스님께서 잘 살펴오라고 이르셨는데요, 정말 달리 뭐 필요하신 것은 없으십니까요? 예?"

 

학눌이 토굴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사미승에게 부탁하기를, 하루 한 끼의 공양을 가져오되 아무말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사미승은 공양구에 대고 언제나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학눌스님이 당부한 바를 모르는 사미승이 아니었지만, 그는 학눌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 안달이었다. 귓바퀴를 손으로 감아쥐고 공양구에 바짝 다가가지만, 그럴 때마다 캄캄한 토굴 속에서는 단 한 마디의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느낄 수 없어서 어떤 때는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

"스님, 한 마디만 일러주십시오. 정말 괜찮으십니까요?"

"알겠습니다요, 스님...그럼 소승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내일 다시 올 테니 어서 성불하십시오."

"......"

 

법기암으로부터 공양을 가져온 사미승은 줄곧 혼자서만 말을 주고받다가 이내 풀이 꺾였다. 학눌의 목소리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하고 낙담한 채 산을 내려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빈 공양그릇을 들고 산을 내려오는 사미승에게는 학눌스님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그러기를 어느덧 석달, 넉달, 여섯달.....

금강산의 높은 골짜기에는 다른 어느 것 보다도 빨리 눈발이 날리고 매서운 바람이 몰아쳐왔다. 법기암으로부터 공양그릇을 나르는 사미승의 일과는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됐다. 추위 탓으로 입술이 움츠러 들었는지 사미승의 목소리는 약간 떨고 있었다.

"간밤에 잘 지내셨습니까요, 스님? 춥지는 않으셨는지요? 이제부터는 날씨가 더 추워질 것이니 저녁에 올라와서 불을 지펴드리라고 노스님께서 분부하셨습니다요,.....내일부터는 저녁나절에 올라오겠습니다. 오늘은 불을 좀 넉넉히 지펴놓고 내려 갈테니 그렇게 아십시오, 스님"

 

사미승은 빈 그릇을 챙기고 새로 가져온 밥그릇을 안으로 들이민뒤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여전히 학눌스님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사미승도 이제는 더 이상 학눌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다. 밥그릇이 비워져 있으면 그것으로써 대답을 대신 듣고 있는 셈이었다.

 

나무를 아궁이에 쑤셔놓고 얼마나 지났을까, 사미승은 매운 연기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불을 지피고 있었다. 그때였다. 토굴 속에서 가느다란 인기척이 들려왔다. 사미승은 바짝 긴장하며 귀를 기울였다. 기침소리였다. 토굴 속에 들어간 뒤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학눌스님의 기침소리였다.

"콜록! ...콜록...콜록...,"

비록 기침소리였지만 사미승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리였다.

"아니, 스님. 방금 스님께서 기침을 하셨습니까요? 스님! 스님! 기침소리만 들려주셔도 반갑습니다, 스님"

아궁이에 지핀 축축한 나무 때문에 기침을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사미승은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기침소리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아이구 이런...., 연기 때문에 기침을 하십니까요, 스님?".....죄송합니다요. 내일부터는 연기가 적게 나도록 바짝 마른 나무만 골라서 불을 지피겠습니다. 오늘만 용서하십시오, 예? 스님?"

매운 연기를 걱정하면서도 사미승은 뛸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학눌스님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 기침소리도 이내 멎고 말았다. 사미승은 될 수 있는대로 마른 나무를 골라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는 한 마디 대답도 듣지 못한 채 또 산을 내려와야만 했다.

 

제자를 토굴 속에 들여보내놓고 겨울을 맞은 석두스님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하루는 법기암까지 올라와서 걱정을 하다가 사미승을 불러 앉히고는 그동안의 일들을 캐묻고 있었다.

"그래, 오늘도 공양그릇을 비웠더란 말이냐?"

"예, 스님. 그리고 며칠 전에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드렸는데요, 연기가 토굴 속에 스며들었는지 쿨록 쿨록 기침을 하셨습니다요."

"그러면 그 기침소리가 어떠하던고?"

"기침소리가 어떠하다니요?

"아, 인석아! 기침소리가 우렁차더냐, 맥이 없더냐, 그걸 묻는게다."

"원...참, 스님두...연기 때문에 쿨룩 쿨룩 몇 번 한 걸 가지고 우렁찬 것인지 맥이 없는지, 그걸 제가 어떻게 구별합니까요?"

 

사미승의 대답에는 제법 능청스런 데가 있었다. 학눌스님의 기침소리를 듣고나서 갖게된 마음의 여유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사미승의 태도가 석두스님에게는 귀엽고 기특하게만 느껴졌다.

"알았느니라. 공양그릇을 비우고 연기 때문에 기침을 했다면 아직도 버틸 기력이 남아있는 모양이다마는, 그 토굴 속에 가지고 들어간 것이 무엇 무엇이던고?"

"가지고 들어간 건 방석 석 장 뿐,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요, 스님."

"방석 석 장 가지고 이 엄동설한을 어찌 견디겠다는 말이던고?"

"그러게 말씀입니다요. 소승이 내일 토굴에 올라갈 적에 솜이불이라도 한 장 가지고 가서 억지로 쑤셔넣어 드리도록 할까요?"

 

사미승의 얼굴에는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큰스님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토굴 속의 학눌스님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어떻게 해서든지 솜이불을 집어 넣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참만에 운을 뗀 석두스님의 대답은 달랐다.

"아니다, 내버려 두어라. 설령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불을 받아들일 수좌가 아니니라!"

 

석두스님은 학눌의 마음가짐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염주를 든 노스님의 손가락 끝에서도 학눌의 무자화두는 시공을 넘나들며 쉬임없이 구르고 있었다.

겨울이 깊어가자 금강산 골짜기의 바깥날씨는 영하 이십 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젖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면 금새 얼어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학눌은 방석 석 장으로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하루에 한 번 지펴주는 군불과 한 끼 공양으로 겨우 목숨을 지탱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세찬 겨울 바람소리와 산짐승 우는 소리는 깊은 산 속의 적막을 더해 주고 있었다. 밤을 세워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소리는, 토굴 속에 들어앉은 학눌에게는 조주선사(趙州禪師)의 꾸짖음으로 다가왔다. 학눌은 결가부좌한 자세로 그 꾸짖음과 맞서고 있었다.

 

무라...무라...무라...대체 이 없을 무(無)자는 어디서 생겨났으며 그 실체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고 보일 듯 하다가도 보이지 아니하고...들릴 듯 하면 금새 세찬 바람이 불어와 덮쳐버리고.....무라...무라...무라.....학눌은 끊임없이 묻고 있었지만, 할일할(喝一喝)! 조주선사의 꾸짖는 소리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이것 보아라! 그대는 지금 바람소리를 듣고 있느냐?〉

겨울 나무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예, 듣고 있사옵니다.〉

온 세상이 바람소리 뿐이었다.

〈그대는 저 산짐승 소리를 듣고 있느냐?〉

굶주린 늑대가 밤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예, 듣고 있사옵니다.〉

크고 작은 금강산의 산봉우리와 골짜기에는 온통 늑대의 울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저 바람소리를 있다고 할 것인가, 없다고 할 것인가?〉

여전히 바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저 산짐승 소리를 있다고 할 것인가, 없다고 할 것인가?〉

늑대의 울음소리는 더 사나워져 가고 있었다.

조주선사의 음성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있다고 대답하면 삼십 방방이를 맞을 것이요, 없다고 대답해도 삼십 방망이를 맞아야 할 것이니...속히 일러라! 저 바람소리 짐승소리를 있다고 할 것이냐, 없다고 할 것이냐?〉

 

어느새 조주선사는 긴 방망이를 허리에 차고 한 손에는 커다란 죽비를 든 채 버티고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학눌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칠 기세였다. 바람소리가 들리고 산짐승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바람소리와 산짐승 우는 소리는 아무렇게나 섞여서 들려왔다. 학눌이 대답했다.

〈저 바람소리 산짐승 소리는 있다고 하면 그치고, 없다고 하면 다시 들립니다. 있다고 해도 틀린 대답이요 없다고 해도 틀린 대답이니 대체 이를 어찌해야 옳다는 말씀입니까? 조사님이시여...?〉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느니라. - 한 물건 생겨남은 한 조각 뜬 구름 생겨남이요, 한 물건 스러짐은 한 조각 뜬구름 사라짐이니 이 세상 모든 만물 그와 같은 것, 한 조각 뜬구름도 원래 없던 것 - 없을 무자 하나를 제대로 보면 세상 보는 눈이 밝아질 것이니라...〉

〈없을 무자 하나를 제대로 보면 세상 보는 눈이 밝아질 것이라구요? .....무라...없을 무...무,무,무,무,무,무라...무라...무라...〉

학눌이 정신을 차리고 없을 무자를 붙잡으려고 하자, 그 순간 무자화두는 온데간데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조주선사의 형체도 음성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세찬 겨울바람 소리만 토굴벽을 뚫고 들려왔다. 늑대 우는 소리도 들렸다. 학눌의 가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없을 무(無)자 하나를 화두로 틀어쥐고 반 칸 짜리 토굴 속에서 용맹정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생사를 건 몸부림이었다.

깊은 산 속에 폭설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쩌렁쩌렁 울려왔다.

 

어느 날이었다. 밤을 새우며 내리던 눈발은 날이 밝은 다음날에도 그칠줄 몰랐다. 올겨울 들어서 가장 심한 폭설같았다.

"스님, 스님, 큰일 났사옵니다 스님."

사미승이 급히 석두스님의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무슨 일이더냐?"

"예, 스님.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도무지 토굴까지 올라갈 수가 없사옵니다."

"무엇이라구? 아니 그럼, 토굴에 올라가다가 도중에 돌아왔다는 말이더냐?"

석두스님은 비로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미승이 걸친 옷에는 아직도 녹지않은 흰 눈이 그대로 있었다.

"눈이 어떻게나 많이 쌓였는지 허리까지 푹푹 빠지옵니다, 스님."

"그러면 토굴속에 들어앉아 있는 수좌는 어찌 되겠는고?"

"그야 뭐, 하루 정도는 어떻게 견디겠지요, 뭐....."

사미승의 말소리는 더듬거리고 있었다. 순간, 석두스님의 호통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 이놈!"

눈을 부릅뜨고 한번 소리를 크게 지르고 나서 석두스님은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이 틈을 타서 사미승은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이내 석두스님의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지만 스님....."

"저 토굴속에 들어앉은 수좌는 하루에 한 끼를 먹고 하루에 한 번 지펴주는 군불로 견디고 있거늘, 눈이 좀 쌓였다고 해서 그마저 끊는다면 이 엄동설한에 어찌 목숨을 보존한단 말이던고? 이놈!..."

"어떻게 해서든지 기어이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만 눈이 너무 많이 쌓여있는걸 어찌 하옵니까요, 스님..."

 

노스님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나이어린 사미승 또한 누구보다도 학눌스님의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지금껏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양그릇을 나르고 군불을 지펴오던 사미승이었다. 한 시간 남짓 토굴에 오르려고 눈길을 헤쳤지만 겨우 절반도 못 오르고 되돌아온 사미승이었다. 매일같이 오르내리던 길이었지만 하루종일 쌓인 눈은 방향조차 분간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자신의 발자국을 따라 간신히 되돌아온 사미승의 마음이야 오죽하랴.

"지팡이를 가져오너라! 내가 올라갈 것이니라."

사미승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석두스님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차분했지만 그 어조는 단호했다. 이를 만류하는 사미승의 안타까운 마음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젖어 있었다.

"아니구 스님, 아니 되십니다요. 젊은 것도 못 올라갈 지경인데 노스님께서 어찌 올라가시겠다고 하십니까요..."

"평생토록 오르내린 산길, 눈 때문에 오고가지 못한 일은 없었느니라!"

"아이구 스님....."

"우리는 토굴에 들어간 수좌와 약조를 했었다. 하루에 한 끼 공양을 날라다 주기로 했고, 겨울에는 한 번씩 군불을 지펴주기로 약조를 했어......!"

"그거야 누가 모르옵니까, 스님?

"너 이놈! 그 약조를 알고 있으면서도 어기려 드느냐?"

석두스님의 목소리는 다시 한번 높아졌다.

"어기려고 하는 게 아닙지요, 스님..."

"출가대장부가 한 번 약조한 일은 죽기를 무릅쓰고 지켜야 하는 법, 어서 그 공양그릇을 이리 내놓아라."

석두스님은 다가앉으며 다그치고 있었다. 사미승이 품고 있던 공양그릇은 이미 식어 있었다.

"아, 아니옵니다 스님. 소승이 다시 한 번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러면 앞장은 내가 설 것이니라. 어서 따라오너라."

"예, 스님....."

 

학눌이 엿장수 차림으로 금강산에 찾아왔을 때부터 그의 사람됨을 알아본 분이 바로 석두스님이었다. 석두스님은 또한 그에게 학눌(學訥)이라는 법명을 내리고 삭발출가를 허락한 스승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제자가 홀로 죽음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허리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스승이 몸소 제자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학눌이 법기암 뒤 토굴 속에서 혹독한 겨울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석두스님의 이러한 스승으로서의 도리와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따스한 봄기운은 얼어붙었던 대지를 소리없이 녹여가고 있었다.

얼음 밑으로만 흐르던 개울물도 고개를 내밀어 햇빛에 반사되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이른 봄날이었다. 여느때와 다름없이 사미승은 공양그릇을 들고 토굴 앞에 이르렀다. 빈그릇을 챙기기 위해 공양구 앞에 손을 내민 사미승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놓아둔 공양그릇이 비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행여 밥맛이 없어서 먹다가 그만둔 흔적도 없었다.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놀란 나머지 사미승은 공양구에 입을 대고 목청껏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니 세상에! 스님, 왜 공양을 안 드셨습니까요? 예? ....왜 그러세요? 왜 공양을 한 술도 안 뜨셨습니까, 스님? 왜 그러십니까요?...."

그러나 토굴 속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사미승은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소리쳤다.

"스님! 스님! 제 말씀 들리십니까요, 스님? 왜 공양을 한 술도 안 뜨셨습니까요? 왜요? 스님, 스님, 스님..."

"......."

사미승이 귀를 기울였지만 대답은 커녕 숨소리조차 느낄 수 없었다. 사미승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갑자기 무서워지고 덜컥 겁이 났다.

"스님, 스님, 스니임......!"

"......."

 

하루전에 갖다놓은 밥그릇이 비어 있으면 토굴 속의 스님이 살아있다는 표시였다. 그런데 오늘은 밥그릇에 밥이 그대로 담긴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미승이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사미승은 돌맹이를 들어 벽을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스님, 스님, 대답하십시오, 스님, 스님.....!"

그래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자, 사미승은 더 큰 돌맹이를 집어와 벽을 두드렸다. 토굴벽이 허물어지든 말든 그런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몇 군데에서 조그마한 흙덩이들이 떨어졌다. 그때서야 인기척이 들려왔다.

 

"허허.....거 오늘은 왜 이리 야단인고?"

사람의 목소리였다. 틀림없는 학눌스님의 말소리였다. 토굴 속에 들어간 지 일 년 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또 한번 놀란 사미승은 들고 있던 돌맹이를 놓치는 바람에 자신의 발등을 찍을뻔 했다.

'아이구...살아계셨군요, 스님. 난 또 스님이 돌아가신줄 알았습니다요.....그런데 대체 왜 공양을 한 술도 뜨지 아니하셨습니까요? 예?"

"공양을 들지 아니했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던고?"

"어제 갖다놓은 공양그릇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 말씀입니다요"

'공양은 하루에 한 끼면 된다고 했거늘 어쩌자고 하루에 두 번씩 가져와서 소란을 피우는고?"

"예에? 하루에 두 번이라니요? 아닙니다 스님, 여기 놓인 이 공양그릇은 분명히 제가 어제 갖다놓은 것입니다요.".

"아니다, 너는 오늘 두 번 왔을 것이다."

"아이구 참, 스님두.....제가 언제 오늘 두 번 왔다고 이러십니까요?'

사미승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미승은 허벅지를 꼬집어보고 눈을 비벼보기도 했지만 분명히 꿈은 아니었다.

"공연히 소란 떨지말고 어서 그만 내려가지 못하겠느냐?"

학눌스님은 오히려 사미승을 질책하고 있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애당초 당부한대로 공양은 하루에 한 끼만 가져오너라."

"허허, 나원 참, 내가 언제 두 번 왔다고 이러시는지 모르겠네."

영문을 모른 채 사미승은 혼자서 투덜거렸지만 학눌스님은 게속 다그치고 있었다.

"어서 그만 내려가거라."

"알았습니다 스님, 알았다구요....."

사미승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하는 수 없이 공양그릇을 들고 토굴을 내려왔다. 토굴에 다녀온 사미승으로부터 전후사정을 전해들은 석두스님은 깜짝 놀랐다.

 

"무엇이! 어제 갖다놓은 공양을 들지 않았더라구?"

"예, 그래서 처음에는 이 스님이 토굴 속에서 돌아가셨나 했습니다요."

"그런데 살아 있기는 살아있더란 말이지?"

"예, 살아있기는 살아있는데 아무래도 좀 이상스러웠습니다요."

'이상스럽다니? 무엇이....."

사미승은 토굴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그쎄요 제가..., 왜 어제 갖다놓은 공양을 한 술도 뜨시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엉뚱한 소리를 하시지 뭐겠습니까요?"

"엉뚱한 소리...? 도대체 뭐라고 하더란 말이냐?"

"소승더러 왜 하루에 두 번씩 공양을 가지고 와서 소란을 피우느냐고 꾸짖지 뭐겠습니까요. 저더러 공양을 하루에 두 번 가지고 왔다고 우기시니 아무래도 정신이 오락가락 하시는 모양입니다요...그렇지 않습니까요, 스님?"

".....그러니까 널더러 공양을 왜 하루에 두 번이나 가져왔느냐고 꾸짖더란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요."

"흐음......그래......"

"저러시다가 정말로 정신이 나가버리기라도 하면 어떡하지요, 스님?"

 

여전히 사미승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석두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깐 미소를 머금는 듯 하더니 이내 엄숙한 표정으로 돌아와 말했다.

"걱정할 일이 아니니라!"

"걱정할 일이 아니라니요?"

사미승의 의문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사미승의 동그랗게 뜬 두 눈을 바라보며 석두스님은 타이르듯 말했다.

"옛 조사께서 이르셨느니라!......선정삼매에 들면 해가 뜨는 것도 모르고, 해가 지는 것도 모르게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선정삼매에 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느니라...."

"아니, 그러면 스님....?"

"토굴 속에 들어간 학눌수좌가 이제야 참선삼매에 들어갔음이니 기뻐해야할 일이니라....."

이제서야 사미승은 의문이 어렴풋이 풀려가는 듯했다.

석두스님의 짐작대로 학눌의 참선삼매(參禪三昧)는 봄눈이 녹는줄도 모르고 깊어갔다.

 

문을 막아버린 토굴 속에 들어앉아 오로지 무자화두 하나에만 매달려 수행을 시작한 지 어느덧 1년 6개월의 세월이 흘렀다. 눕지 않고 앉아서만 수행하는 장좌불와(長座不臥)의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1931년 여름 장마비가 개인 아침나절이었다. 토굴벽이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마침내 학눌이 자리에서 일어나 토굴벽을 발로 차 허물었던 것이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학눌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헝클어져 내린 머리는 얼굴을 반 쯤 뒤덮고 있었고 수염은 한 뼘이나 되었다. 그러나 1년 6개월 만에 바깥세상에 몸을 내민 학눌은 단 한 걸음도 내디딜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길고 긴 장좌불와로 두 다리가 모두 마비되다시피 한 때문이었다. 학눌은 엉금엉금 기어서 흙더미 사이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토굴 밖 산 속에 비스듬히 드러누웠다. 비 개인 맑은 여름 하늘을 쳐다보면서 학눌은 입속으로 오도송(悟道頌)을 읊조렸다.

 

바다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타는 불 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대체 무슨 일로 이리 소란을 떠는고...?"

문을 연 석두스님은 헐레벌떡 뛰어온 사미승에게 꾸짖듯 묻고 있었다. 문앞에 서 있는 사미승은 거친 숨만 몰아쉴뿐 얼른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웬 소란이냐니까.....?"

".....나왔습니다요, 스님! 나왔다구요."

"아니 인석아, 나왔다니 대체 무엇이 나왔다는 말이더냐?"

사미승은 몇 번 침을 삼키고 나서 말했다.

"토굴 속에 들어갔던 스님이 토굴벽을 박차고 나왔습니다요, 스님...!"

"무엇이? 아니 그럼.....학눌수좌가 토굴에서 나왔단 말이더냐?"

"예, 스님. 지금 토굴 밖 숲속에 앉아 계시온데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옵니다요...."

"어서 대중들을 데리고 가서 부축해 오너라. 내가 바삐 만나보고 싶구나!"

토굴 속에 들어갔던 제자와 그 제자를 토굴 속에 들여보냈던 스승은 일 년 반 만에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동안 자라난 머리카락과 수염, 씻지 않은 얼굴. 그러나 학눌스님의 두 눈에서는 깊은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이러한 학눌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스승은 대뜸 제자가 한 소식 했음을 알아보았다.

"그래...자네가 기어이 한 소식 얻었네 그려..."

"그동안 베풀어주신 은혜 막중하옵니다, 스님."

'그럼 이제 나한테 한 소식 일러주시게."

"예, 스님."

학눌은 스승 앞에서 다시 오도송을 읊어드렸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제자의 오도송을 듣고나서 석두스님 또한 전송(傳頌)을 내려 이에 화답했다.

 

봄이 오니 온갖 꽃 누굴 위해 피는고

동으로 가면 서쪽으로 가는 이익 보지 못하네

흰머리 자식이 검은머리 아비에게 나아가니

두 마리 진흙소가 싸우다 바다에 들어간다

 

금강산 법기암 뒤 문없는 토굴에서 장좌불와 끝에 깨달음을 얻은 것은 학눌의 나이 마흔 네 살 때의 일이었다. 출가득도한 이후, 삼천리 방방곡곡에 걸친 운수행(雲水行)과, 경행(經行)도 마다하고 엉덩이가 짓물러 터져 피고름이 맺히도록 철저했던 동안거(冬安居), 그리고는 문없는 토굴 속에 들어가 장좌불와(오랫동안 눕지 않는 수행)의 끊임없는 참선삼매 끝에 마침내 조주선사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깨쳤던 것이다.

 

 

출전 : 그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고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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