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경문(自警文)

자경문(自警文)

근와(槿瓦) 2014. 11. 24. 00:46

자경문(自警文)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야운 비구(野雲比丘) 지음

 

주인공아! 나의 말을 들으라. 종종 사람들은 공문(空門)안에서 도를 깨치고 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윤회고해의 세계에 빠져 길이 헤매는가? 그대는 비롯함이 없는 옛적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깨달음을 등지고 번뇌에 계합하고 어리석음에 떨어져서, 언제나 악업을 일삼아 삼도(三途)의 고통스러운 윤회에 들어가 제반선업을 닦지 않고 사생(四生)의 업해(業海)에 잠기는구나.

 

몸은 여섯 도적(六賊)을 따르기 때문에 악취(惡趣)에 떨어지면, 몸은 고생하고 아주 괴롭게 되며, 마음은 일승(一乘)을 등지므로 인간세상에 난다 해도 부처님이 세상에 계시기 전이나 입적하신 후의 세상에 태어난다. 지금 다행히 사람 몸을 받았더라도 마침 부처님 가신 뒤의 말세이니, 오호, 아프도다.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비록 그렇더라도 그대가 마침내 돌이켜 성찰하여 애증(愛憎)을 끊고 출가하여 발우를 받아지니고 훌륭한 법복을 입고 번뇌를 벗어나는 지름길로 나아가 샘(漏)이 없는 미묘법을 배운다면, 마치 용이 물을 얻음과 같고 범이 산을 의지한 것과 같아서 그 뛰어나게 오묘한 이치는 아무리 좋은 말로 해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옛과 지금이 있을지언정 법(法)에는 멀고 가까움이 없으며, 사람에게는 어리석음과 지혜가 있을지언정 도(道)에는 번성함과 쇠멸함이 없다.

비록 부처님 재세시에 살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으며, 비록 말세를 만났다 할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행한다면 무슨 상함이 있겠는가.

 

때문에 세존께서, “나는 어진 의사와 같다. 병을 알고 약을 베풀지만 먹고 안 먹는 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니다. 또한 나는 좋은 안내자와 같다. 사람들에게 좋은 길로 가르쳐 인도하지만 듣고도 가지 않는 것은 안내자의 허물이 아닌 것이다. 스스로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은 법에 다 갖춰져 있으므로 내가 이 세상에 오래 머문다 한들 다시 더 이익될 것이 없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나의 모든 제자들이 (여래의 법륜을) 굴려 행하면 여래의 법신이 항상 머물러 불멸할 것이다”고 말씀하셨으니 이와 같은 이치를 안다면, 다만 스스로 게을러 닦지 못함을 한탄해야지, 어찌 말세만 걱정하고 있겠는가.

 

간절히 바라노니, 그대는 반드시 결연하고 열렬한 뜻을 일으켜 특별히 뛰어난 생각을 열어서 모든 인연을 다 버리고 뒤바뀐 소견을 없애고, 참으로 생사의 큰 일을 위해 조사의 화두(公案)에서 마땅히 잘 참구하여서 큰 깨침으로서 법칙을 삼고 결코 가벼이 물러나 뜻을 굽히지 말아야 한다. 생각하건대 이 말법 세상은 성인이 가신 지도 오래되어 마(魔)는 강하고 법(法)은 약하며 사람들은 삿되고 사치함이 많아져서 사람다움을 이루는 자는 적고 사람다움을 망치는 자는 많으며, 지혜로운 자는 적고 어리석은 자는 많아서 자기 자신은 도를 닦지 않고 또한 남만 괴롭힌다. 무릇 도를 가로막는 인연이 많음은 그것을 말로서는 다하지 못한다.

그대가 길을 착각하여 잘못 들까 걱정이 되는 까닭에 좁은 소견(管見)으로 열 가지 문을 마련해 그대들에게 경책이 되게 하노니, 부디 믿고 하나라도 어기지 말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비노라. 게송으로 이른다.

 

마음이 어리석어 배우지 않으면 교만한 마음만 더하고,

뜻이 어리석어서 닦지 않으면 아상 ․ 인상만 기른다.

진정한 마음은 비고 기분만 높이면 마치 주린 범과 같고,

앎이 없이 방일하면 재주만 많은 잔나비 같아진다.

 

삿된 말과 마구니의 말은 즐겨 받아 듣고,

성인의 가르침과 현자의 글은 짐짓 듣지 않는구나.

선한 도의 인연이 없으면 누가 그대를 건네주겠는가?

길이 악취에 빠져들면 괴로움이 자신을 얽어 맬 텐데.

 

첫째 : 부드러운 의복이나 맛있는 음식은 결코 받아쓰지 말라.

밭갈고 씨 뿌릴 때부터 입과 몸에 이르기까지 사람과 소의 공력이 많고 무거울 뿐만 아니라 또한 이에 축생의 손해가 다함이 없거늘, 힘쓴 저 공이 곧 나를 이롭게 할지라도 오히려 그렇지 않은데, 다른 목숨을 죽여서 자기를 살리는 그런 일을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는가.

 

농부도 굶주리고 추운 고통이 자주 있고, 베 짜는 여인도 몸가릴 옷이 없을 때가 있는데, 하물며 나는 길이 손을 놀리면서 주리고 추움에 어찌 싫어하는 마음을 내겠는가?

 

부드러운 옷과 맛있는 음식은 당연히 은혜가 무거워서 도를 덜고, 기운 옷이나 푸성귀 음식은 반드시 시주가 가벼워 음덕을 쌓는다.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한다면 한 방울 물의 은혜도 녹여 없애기가 어려우리라. 게송으로 이른다.

 

푸성귀와 나무 열매로 주린 창자를 위로하고

소나무 겨우살이 잎새와 풀옷으로 몸을 가리며

들에 노는 학과 푸른 하늘의 구름으로 벗을 삼고

높은 봉우리 깊숙한 계곡에서 여생을 보낼지어다.

 

둘째 : 내 재물은 아끼지 말고, 남의 재물은 탐하지 말라.

삼악도의 괴로움에는 탐내는 업이 첫 번째이고, 육바라밀의 실천문(門)에서는 보시를 행하는 것이 맨 앞에 있다. 아끼고 탐욕함은 선도를 막게 하고, 자비로운 베풂은 악한 길을 막게 한다. 만일 가난한 사람이 와서 구걸하면 비록 궁핍한 처지라 하더라도 인색함이 없어야 한다. 세상에 나올 때 한 물건도 없이 왔듯이 갈 때도 또한 빈손으로 간다. 자신의 재물임에도 연연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거늘 다른 이의 재물에 어찌 마음을 두겠는가? (죽을 때 가서는)갖은 재물 가져갈 수도 없고 자신을 따르는 업이 있을 뿐이다. 삼일만 마음을 닦아도 천 년 누릴 보배와 같고, 백 년 동안 탐욕으로 재물을 모은 것은 하루아침에 날아갈 티끌과 같다. 게송으로 이른다.

 

삼악도의 고(苦)는 본디 무엇으로 일어나는가?

오직 다생의 탐욕과 애증의 마음으로 일 뿐.

부처님의 법의와 발우만으로도 삶이 충분하거늘

어찌 길이 무명만을 축적하랴?

 

셋째 : 입은 말이 많지 않아야 하고, 몸은 가벼이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몸이 가벼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지러움을 쉬고 선정을 이루며, 입이 많은 말이 없으면 어리석음을 돌려서 지혜를 이루게 된다. 실상(實相)은 말을 떠나 있고, 진리는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은 화의 문이니 반드시 엄하게 지켜야 하고, 몸은 곧 재앙의 바탕이니 가벼이 움직이면 안 된다. 자주 나는 날짐승은 느닷없이 그물에 걸리는 재앙이 있고, 가벼이 나다니는 길짐승은 화살에 맞아 상하는 화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설산에서 육 년 동안 앉으셔서 움직이지 않으셨고, 달마대사는 소림굴에서 구 년 동안 묵묵히 말이 없으셨다. 후세에 선에 참여하는 이들이 어찌 옛 자취를 의거하지 않으리. 게송으로 이른다.

 

몸과 마음은 정에 들어 동하지 않음을 으뜸으로 하고,

띠풀 엮은 암자에 묵연히 앉아 거래를 끊으라.

적적하고 휑한 마음으로 하나의 일조차 없이 하여

오직 마음의 부처를 보고 스스로 귀의할지니.

 

넷째 : 오직 선한 벗을 가까이 하고 그릇된 벗을 사귀지 말라.

새들이 쉬려 할 때는 반드시 숲을 가리고, 사람이 배움을 찾을 때는 곧 스승과 벗을 가린다. 숲과 나무를 가리면 그 쉬는 자리가 편안하고, 스승과 벗을 가리면 그 배움이 높아진다. 그러므로 좋은 벗을 섬기는 것은 마치 부모와 같이 하고, 나쁜 벗을 멀리 여의는 것은 원수의 집과 같게 하라.

 

학도 까마귀와 벗하고자 꾀하지 않는데, 붕새가 어찌 뱁새와 벗하기를 꾀하겠는가? 솔숲의 칡덩굴은 (소나무에 의지해) 천길을 오르고, 띠풀 속의 나무는 세 자(三尺)를 면하지 못한다. 어질지 못한 소인배는 매 번 멀리하고, 뜻을 성취한 훌륭한 이들은 자주 가까이하라. 게송으로 이른다.

 

머물거나 길을 감에 모름지기 벗을 잘 사귀고,

몸과 마음은 결연히 가려서 가시 같은 장애요인을 없애라.

가시 같은 장애요인을 다 소제하여 앞길이 훤히 트이면,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조사의 관문을 통과하리라.

 

다섯째 : 삼경(三更)외에는 잠자지 말라.

아득한 세월 동안 도를 가로막는 것은 수마(睡魔)보다 큰 것이 없으니, 12시진(十二時辰 : 24시간)내내 똑똑히 깨어 의단을 일으키되 어둡지 말며, 행(行) ․ 주(住) ․ 좌(坐) ․ 와(臥)의 거동으로 촘촘히 혜광을 되돌려 비춰 스스로 보라.

 

한평생 헛되이 지나면 만겁에 한이 따르리니, 변하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는지라 나날이 놀라고 두려워해야 한다. 사람의 목숨은 잠깐이라 실로 시간시간 보장할 수 없도다.

아직 조사의 관문을 뚫지 못하였다면 어찌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겠는가. 게송으로 이른다.

 

졸음뱀이 구름처럼 둘러치니 심월(心月)이 어두워지고,

수행자가 이에 따르면 다 길을 헤맨다.

여기에서 취모검의 예리한 칼날을 세워 쓰면

졸음뱀의 구름은 저절로 모습이 사라지고 심월도 절로 밝으리라.

 

여섯째 : 결코 망령되이 스스로 높이고 자만심으로 남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어짊을 닦아 어짊이 이루어지는 데는 겸손과 사양이 근본이 되고, 벗과 친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데는 공경과 믿음이 근본이 된다.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점점 쌓이면 삼악도의 바다는 더욱 깊어지나니, 밖으로 위엄을 드러내는 것은 마치 존귀한 듯하지만 안으로 얻을 것이 없음은 썩은 배와 같다.

벼슬이 높은 사람일수록 마음은 더욱 삼가고, 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뜻은 더욱 낮춰야 한다. 인 ․ 아(人我)의 상(相)이 무너지는 곳에 무위도(無爲道)가 저절로 이루어지나니, 무릇 하심(下心)이 있는 사람은 만 가지 복이 저절로 돌아오게 된다. 게송으로 이른다.

 

교만한 번뇌 속에 반야 지혜 감춰지고,

아상 인상의 굳은 집착에는 길이 무명을 기른다.

남을 가벼이 여기며 배우지 않고 종종걸음치는 늙은이 되면,

병들어 누워 신음하게 될 때 한탄함이 다함 없으리라.

 

일곱째 : 재색(財色)을 보되 반드시 정념(正念)으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몸을 해치는 요인은 색을 밝히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도를 잃는 근본은 재화(財貨)에 미칠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이 계율을 베푸시어 특별히 재물과 색을 엄중히 금하셨으니, “(女)색을 보거든 마치 범이나 독사를 보듯 하고, 몸에 금이나 옥 등 재물이 생기거든 목석과 같이 보라”고 하셨다.

 

비록 캄캄한 방에 (혼자)있더라도 마치 큰 손님을 대하듯이 하되, 안 보일 때나 보일 때나 한결같아야 하며 안과 밖을 달리하지 말라. 마음이 맑으면 선신이 반드시 보호하려니와, 색을 그리워하면 온갖 하늘이 용납지 않으리라. 신이 기필코 보호하면 비록 험난한 곳에 처하여도 어렵지 않게 되고, 하늘이 용납하지 않으면 곧 편안한 곳이라 해도 불안할 것이다. 게송으로 이른다.

 

이익에 욕심내면 염라대왕이 지옥에 데려다 가두고,

청정하게 행하면 아미타불께서 연화대로 영접하리라.

쇠사슬에 얽매여 지옥에 가면 고통스런 벌이 천 가지나 되고,

반야선을 타고 연화대에 나면 즐거운 일이 만 가지나 되리.

 

여덟째 : 세속과 교류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미워하고 질투하게 하지 말라.

마음속에서 애증을 여의어야 사문이라 하고, 세속을 연연하지 않아야 출가라 할 것이다. 이미 애증을 끊고 세속을 떨쳐냈는데 다시 어찌 속인들과 무리지어 놀겠는가. 세속을 애착하여 그리워함은 음식이나 재물을 탐내는 도철이 되는 것이니, 도철이란 본디 도 닦는 마음이 아닌 (짐승인)것이다.

 

인정이 진하고 두터우면 자연 도 닦는 마음이 성글어진다.(인정을 냉정히 하여 다시는 돌아보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만일 출가의 본뜻을 저버리지 않으려면 모름지기 훌륭한 산에 가서 미묘한 이치를 궁구하되 한 벌의 옷과 한 벌의 발우로 인정을 끊으라. 주리고 배부름에 무심해지면 도는 저절로 높아질 것이다. 게송으로 이른다.

 

남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는 것이 비록 작은 선(善)일지라도,

모두다 생사를 윤회하는 원인이다.

바라건대 송풍나월(松風蘿月)의 산중에 들어가서

무루의 조사선(祖師禪)을 길이 관할지어다.

 

아홉째 : 남의 과실을 말하지 말라.

비록 선하거나 악한 말을 듣더라도 마음은 움직이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덕 없이 칭찬을 듣는 것은 참으로 나의 부끄러움이요, 허물이 있어서 헐뜯음을 듣게 되면 진실로 나의 기쁨이다.

(허물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허물을 알아 반드시 고칠 것이고, (칭찬을) 부끄러워한다면 도에 나아감에 게으름이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마침내 자신을 헐뜯음으로 돌아온다. 남을 해치는 말을 들으면 마치 나의 부모를 헐뜯는 말처럼 들으라. 오늘 아침에 비록 남의 허물을 말하지만 다른 날엔 (그 말이) 머리를 돌려 나의 허물을 논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렇더라도 무릇 상(相)이 있는 것은 다 헛되고 망령된 것이니, 욕하고 헐뜯고 기리고 칭찬함에 어찌 근심하고 어찌 즐거워하리오. 게송으로 이른다.

 

날이 다가도록 남의 장단점을 어지러이 말하다가

결국 밤이 되면 몽롱하여 잠만 즐기게 되나니

이와 같은 출가는 헛되이 시주만 받는 것이니

반드시 삼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리라.

 

열째 : 대중 생활에서 마음은 항상 평등해야 한다.

애정을 끊고 부모를 떠나는 것도 법계가 평등해서인데, 만일 친하다든가 소원하다든가 함이 있다면 마음이 평등치 못한 것이라. 설령 출가를 결행하였더라도 무슨 덕이 있겠는가?

 

마음속에 미워하고 사랑하고 취하고 버림이 없다면 자신에게 어찌 고락의 성함과 쇠함이 있겠는가. 평등한 성품에는 본래 너와 내가 없고 아주 깨끗한 거울에서는 친하고 소원함이 없다.

삼악도를 드나듦은 미워함과 사랑함의 정에 얽혔기 때문이요, 육도에 끊임없이 오르내림은 친함과 소원함의 업연에 묶였기 때문이다. 마음이 평등에 계합하면 본래 취함과 버림이 없는 것이니, 취함과 버림이 없다면 태어남과 죽음인들 어찌 있겠는가. 게송으로 이른다.

 

더 이상 없는 깨달음의 도를 이루려 한다면,

항상 평등한 마음을 품음이 중요하다.

친하다, 소원하다, 미워하다, 애착하다의 꾀함이 있으면

도(道)는 멀어지고 업(業)은 더욱 깊어지리라.

 

주인공아!

 

그대가 인도(人道)를 만난 것은 (그때가) 눈먼 거북이가 (아득한 바다에서)구멍 뚫린 널빤지를 만나듯 한 귀하디귀한 시간이거늘 한평생이 얼마나 된다고 닦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가?

사람의 삶은 얻기 어렵고 부처님 법은 만나기 어렵다. 이번 생에서 잃어버린다면 만겁을 지나도 만나기 어려우리니, 부디 이 열 가지 문을 수지하여 날로 새롭게 부지런히 수행하며 물러나지 말고, 속히 정각을 이루어 중생을 제도해야 할 것이다.

 

나의 본래 서원은 그대만 홀로 생사의 대해에서 나오라고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이에 널리 중생을 위하라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대 스스로 알 수 없는 옛적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항상 사생(四生)을 만나 나고 죽을 때마다 다 부모를 의지해 나고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세생생에 부모되었던 이가 한량없고 가없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육도의 중생이 그대의 다생에 걸친 부모 아니었음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리들이 다 악취에 빠져서 밤낮으로 큰 고통을 받으니, 만일 건져내지 않는다면 어느 때나 벗어나겠는가? 오호라! 슬프고 애닲도다. 아픔이 마음을 얽어매는구나.

 

천번만번 그대에게 바라노니, 어서 속히 큰 지혜를 밝혀서 신통한 힘과 자재한 방편의 권도(權道)를 구족하여 속히 큰 파도에서 지혜의 노가 되어 욕심 많은 세상의 미욱한 무리들을 널리 제도할지어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예부터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도 모두 옛날에는 우리와 같은 범부였는데, 그 분들은 이미 대장부가 되었다. 그대 또한 그러하니, 다만 하지 않을 뿐이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도가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도를) 멀리 하는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내가 어질고자 하면 그렇다면 곧 어짊에 이를 것이다’고 하였으니, 진실되도다. 옳은 말씀이여!

 

만일 믿는 마음이 물러서지 않는다면 누구인들 자성을 보아 성불하지 못하겠는가?

내 이제 삼보전에 증명하옵고 하나하나 그대에게 경책하노니, 그른 줄 알면서도 짐짓 범한다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 (그러하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느뇨? (진정)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느뇨? 게송으로 이른다.

 

달은 뜨고 지며 늙은 모습은 재촉하고,

해는 오고 가며 세월을 재촉하누나.

명리를 구함은 마침 아침나절 이슬과 같고,

괴롭다거나 영화로움은 저녁나절 연기와 같도다.

그대에게 은근히 선도 닦기를 권하노니,

속히 불과(佛果)를 이뤄 미욱한 무리들을 제도하라.

금생에 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다음 세상에서는 당연히 한스러움이 만 갈래나 되리라.

 

 

출전 :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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