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修道)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三道의 하나. 見道位에서 온갖 知的인 迷惑을 벗어나고, 다음에 情 · 意로부터 일어나는 온갖 번뇌의 속박을 벗어나려는 수양을 쌓는 기간. 소승에서는 四向 四果 중에서 一來向 · 一來果 · 不還向 · 不還果 · 阿羅漢向의 기간. 대승에서는 初地에서 第十地까지의 기간을 말함.
참고
수(修) : 1. 닦다. 2. 다스리다. 3. 고치다.(다음,한자)
도(道) : 범어 marga의 번역으로 末伽라고 음역하며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通路. 밟아 행해야 할 길(軌路)을 뜻하는 말이다. 俱舍論卷二十五에는, 道라 함은 涅槃(깨달음)으로 가는 길이고 열반의 果를 얻기 위해 마땅히 의지할 바라고 했다. 이와 같이 道는 주로 불교의 궁극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행의 법칙을 의미한다. 또 널리 果에 이르게 하는 通路의 뜻도 있다. 예컨대 智度論卷八十四에는, 人天 · 聲聞 · 연각 · 보살의 4종의 道가 있다. 사람이나 하늘은 十善이나 布施를 道로 하여 세간적인 福樂을 구하고, 二乘은 三十七道品을 道로 하여 열반을 구하고, 보살은 삼십칠도품이나 六波羅蜜을 道로 하여 佛果를 구한다고 했다. 이상과 같은 의미의 道와는 달리 惑 · 業 · 苦를 三道라고도 하는데 이때의 惑은 業을, 業은 苦를, 苦는 惑을 가져오는 通路로서, 이 三者는 서로 바퀴와 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三惡道 · 五道 · 六道라고 할 때의 道는 善惡의 業에 의해 지옥 등의 果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는 道며, 그것은 應報가 業을 따라 각각 다르고 순환하는 道인 것이다. 또 菩提(깨달음의 지혜)를 道로 번역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구별하여 菩提를 果道라 하며 그 이전의 道를 因道라 부르기도 한다.
① 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번뇌를 制伏하거나 혹은 이것을 끊는 道가운데에 有漏道와 無漏道의 二道가 있다. 유루도는 世間道 · 世俗道라고도 하며, 앞에서의 人天의 道도 이에 해당된다. 또 三界 · 九地 가운데 有頂地를 제외한 下八地의 修惑을 끊기 위한 見道의 前에 加行位(加行道라고도 함)에서 유루지를 가지고 六行觀을 닦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구사종에서는 이와 같이 유루도에 있어서도 번뇌를 끊을 수가 있다고(有漏斷)하여 유루도도 斷道라고도 하나, 유식종에서는 유루도는 번뇌의 現行을 조복하는 번뇌의 種子까지도 끊을 수 없다고 하며, 이것을 伏道(能伏道)라고 한다. 무루도는 出世間道 · 聖道라고도 하며 未至 · 中間 · 四根本 · 下三無色의 九地를 所依로 하여, 무루지에 의해서 번뇌를 끊는(無漏斷)道로서, 유식종에서는 이것을 斷道에서도 伏道라고 한다. 여기 斷道란 能斷道의 뜻으로서 對治道· 能治道라고도 한다. 이 유루 · 무루의 道를 見 · 修 · 無學의 三道에 配對하면, 見道와 無學道는 반드시 무루도로서, 修道에는 무루도도 유루도도 있다.
삼도(三道) : ① 有情(중생)이 迷惑生死의 삶을 끝없이 계속해 나가는 3가지 상태. 또는 그 세계를 보인 것. 惑道(道理와 현상의 세계에 있어서의 마음의 迷인 煩惱) · 業道(그 번뇌에서 일어나는 身·口·意의 所作) · 苦道(惑·業을 因으로 하여 부른 3界·6道의 苦果)들을 일컬음. 惑 · 業 · 苦의 셋이 바퀴와 같이 展轉하여 斷絶하지 않기 때문에 道라고 한다. ② 見道 · 修道 · 無學道의 일컬음.
견도(見道) : 修行의 한 階位. 합하여 三道라고 한다. 見道는 見諦道, 見諦라고도 말하고, 비로소 無漏道를 얻어 四諦(佛敎의 眞理)를 現觀하는(明了하게 본다) 位. 따라서 見道에 도달하기 이전은 凡夫(異生)이고, 見道에 들어간 뒤는 聖者이다. 修道는 見道 뒤에 다시 구체적인 事象에 대처하여 몇 번이고 되풀이 해서 修鍊 · 修習하는 位. 見道와 修道를 합하여 有學道라고 하며, 이에 대해 無學道는 無學位 · 無學果 · 無學地라고도 하고, 궁극적 최고의 깨달음에 들어가서, 이미 배울 것이 없는 位를 말한다. 小乘에서는 三賢 · 四善根 등의 준비적 修行(七方便)을 닦은 사람이 비로소 無漏智를 얻어 見道에 들어간다고 하며, 大乘에서는 初地 入見道라 하여 보살의 初地를 見道, 第二地 이상을 修道, 第十地와 佛果를 無學道라 하고, 密敎에서도 淨菩提心이 처음으로 생기는 자리를 見道라고 한다. 無漏智에서 道理를 명확히 가려내는 것(決斷簡擇한다)을 決擇이라 하며 見道는 決擇의 일부분이므로 決擇分이라 하고, 또 열반의 깨달음 혹은 그에 이르기 위한 聖道는 邪가 아니므로 正性이라고 하지만, 특히 見道를 正性이라 한다. 모든 聖道는 번뇌를 여의게 하므로 離生이라 하지만, 특히 見道는 異生(곧 凡夫)의 生을 여의게 하므로 離生이라 한다. 따라서 見道를 正性離生 · 正性決定(決定이란 반드시 열반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見道에서 끊는 번뇌를 見道所斷(또는 見道斷, 見所斷)의 번뇌, 약하여 見惑이라고 하며, 修道에서 끊는 번뇌를 修道所斷(또는 修道斷, 修所斷)의 번뇌, 약하여 修惑이라 한다.
미혹(迷惑) : ① 헤매는 것. 도리에 어두워 헤매는 것. 마음이 도리에 어두워 헤매고 정신이 어리둥절한 모습. 또 迷는 事理의 잘못됨을 말하고 惑은 事理에 밝지 못한 것을 말함. ② 남을 미혹하게 하는 것. ③ 술 등에 耽溺하는 것.
정(情) : ①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 친절하고 사랑하는 마음. ② 혼탁한 망념. ③ 有情이란 것. ④ 인식의 機官. ⑤ 性이 일어나는 곳.
의(意) : 범어 manas의 번역으로 末那로 音譯하고, 思量의 뜻. 두루 생각하는 마음의 작용임. 마음의 인식기능의 의지할 곳으로 볼 경우에는 意根이라고 하고, 六根의 하나가 된다. 또 意處라고도 意界라고도 한다.
六識說에서는, 心과 意와 識은 비슷한 것으로, 다만 이름만 다를 뿐(곧 同體異名)인데, 八識說에서는 마음을 阿賴耶識, 意를 末那識, 識은 意識 및 眼 등의 五識에 배당한다.
번뇌(煩惱) : 범어 klesa의 번역. 吉隷捨로 음역하고, 惑이라고도 번역한다. 중생의 몸이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미혹하게 하여 더럽히게 하는 정신작용의 총칭. 그 성질은 不善 및 有覆無記이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서 업을 일으키고, 괴로움의 報를 받아 미혹의 세계(生死)에 매어 있게 된다. 이것을 惑業苦의 三道라 한다. 그래서 불교는 번뇌를 끊고 열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번뇌는 그 작용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갖는다. 隨眠 · 惑(이치에 어둡고 現象의 세계에 대해 미혹하여 알지 못하는 것) · 染 · 漏 · 結使 · 結 · 縛 · 纒 · 軛 · 暴流 · 取 · 蓋 · 繫 · 使 · 垢 · 株杌 · 燒害 · 箭 · 稠林(번뇌의 수가 많은 것을 무성한 삼림에 비유한 것) · 塵勞 · 塵垢 · 客塵 · 諍根(다툼의 근본)이라고도 하고, 또 번뇌의 體 그것을 正使(다만 使라고도 한다), 體를 멸해도 역시 남아있는 관습의 기운을 習氣라고 한다. 모든 번뇌는 因力(아직 번뇌가 끊기지 않은 것) · 境界力(욕심 등에 순응하는 대상이 나타나는 것) · 加行力(대상에 대해서 非理· 作意를 일으키는 것)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한다.
속박(束縛) : 사람을 강압적으로 얽어매거나 자유롭지 못하게 함.(다음,한자)
소승(小乘) : 범어 hinayana. 乘은 싣고 운반하는 뜻.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가 되기에는 너무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수레라는 뜻. 대승의 對. 이 교법 중에서 敎 · 理 · 行 · 果가 모두 深遠 광대하고, 따라서 수행하는 사람도 大器利根인 機類를 요하는 것을 대승이라 하고, 이와는 달리 아라한과와 벽지불과를 구하는 것을 소승이라 한다. 소승에는 성문승과 연각승이 있다.
(1) 聲聞乘. 四諦의 이치를 관하여 성문의 四果를 증득하여 열반에 이르는 것을 교리로 한다.
(2) 緣覺乘. 12인연을 觀하여 辟支佛果에 이르는 것을 敎體로 한다. 이것은 모두 몸을 태우고 智를 멸하여 空寂 열반의 깨달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최후 목적으로 생각한다.
사향사과(四向四果) : 四向四得 · 四雙八輩 · 八補特伽羅 · 八賢聖 · 八聖이라고도 한다. 곧 預流向 · 預流果 · 一來向 · 一來果 · 不還向 · 不還果 · 阿羅漢向 · 阿羅漢果의 총칭. 小乘佛敎에서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어 들어가는 品階. 이는 婆沙論이나 俱舍論 · 賢聖品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① 預流는 범어 srota-apanna의 번역으로 須陀洹이라고 音譯 표기한다. 預流果를 初果라고 하며 見道에서 三界의 見惑을 끊어버림으로 無漏의 聖道(혹은 聖者)의 흐름에 들어간 자리이다. 이 果를 향하여 見惑을 끊고 있는 見道十五心의 사이가 預流向이다. 一來는 범어 sakrdagamin의 번역. 斯陀含이라고 音譯한다. 一來果란 欲界의 修惑에 九品(곧 上上品에서 下下品까지 九品)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앞의 六品까지의 번뇌를 끊어버린 聖者의 位를 말한다. 이 位에 있는 자가 아직 끊을 수 없는 三品의 修惑을 끊기 위해서는 한 번 天界에 태어났다가 다시 人界에 와서 般涅般의 깨달음을 얻어야 하므로 一來라고 한다. 이 6품의 修惑을 끊고 있는 자리를 一來向이라 한다. 不還은 범어 anagamin의 번역으로 阿那含이라 音譯하며 略하여 那含이라고도 한다. 不還果는 欲界의 修惑 9품중의 나머지 3품을 끊어 버려서 다시 欲界에 돌아오지 않는 자리이다. 不還向은 그 修惑을 닦아 끊고 있는 자리를 말한다. 阿羅漢은 범어 arhat의 音譯으로 應供 · 應이라고 번역한다. 阿羅漢果는 極果 · 無學果라고 하여 一切의 見惑 · 修惑을 끊고 영원히 열반에 들어 다시 生死(迷의 세계)에 流轉하지 않는 자리이다. 阿羅漢向(無學向)은 不還의 聖者가 阿羅漢果에 이르기까지의 자리를 말한다. 옛날에는 四果만 설명하고 四向은 설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四果는 또 四沙門果라고도 한다. 雜阿含經 권29에 보면, 預流果는 三結 곧 有身見과 戒禁取見과 疑를 끊는 자리이고 一來果는 三結을 끊어 貪 · 瞋 · 癡가 적은 位에 나아갔음을 말한다. 不還果는 五下分結 곧 三結과 欲貪 · 瞋恚를 끊는 자리를 말한다. 阿羅漢果는 一切의 번뇌를 끊은 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원시적인 해석이다.
대승(大乘) : 摩訶衍那 · 摩訶衍이라 음역하며, 上衍, 上乘이라고도 한다. 乘은 타는 것이란 뜻이며, 迷惑의 此岸으로부터 깨달음의 彼岸에 이르는 敎法을 가리킨다.
① 阿含經에서는 불타의 가르침을 존중하여 大乘이라 했다.
② 대승 · 소승이란 말은 釋尊의 入滅 후 그 言行의 傳承을 중심으로 불교(原始佛敎)로부터 그 註釋的 硏究의 불교(部派불교)가 전개되는 것과 동시에 따로 보살도를 說하는 불교(대승불교)가 또한 발달되었는데, 이때에 후자의 敎徒가 자신들이 받들고 있는 敎를 殊勝한 것으로 규정하여 대승이라 불렀으며, 전자를 낮추어서 小乘이라 이름하게 된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전자의 敎徒로부터는 대승은 부처님이 말씀한 敎가 아니라고 非難하는 이른바 大乘非佛說이 주장되었다. 그러나 思想史的으로 보면 小乘은 大乘敎學의 기초 내지 前驅라고 하는 의미를 갖는다.
③ 소승은 자신의 解脫만을 목적으로 하는 自調自度(調는 번뇌를 制伏하여 없애는 것. 度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의 聲聞 · 緣覺의 道이며, 대승은 涅槃의 적극적인 의미를 인정하여 自利 · 利他의 兩面을 다 갖춘 보살의 도라 할 수 있다.
④ 小乘에는 반야경 · 四分律 · 五分律 등의 律, 婆沙論 · 六足論 · 發智論 · 俱舍論 · 成實論 등이 있고, 대승에는 般若經 · 法華經 · 華嚴經 등의 經과 中論 ·攝大乘論 · 大乘起信論 등의 論이 있다.
⑤ 대승이 殊勝한 이유로서, 菩薩善戒經 卷七등에서는 七을, 世親의 攝大乘論釋 卷六에서는 十一을 들고 있는데, 보살선계경에서 말하는 七大乘이란 十二部經 가운데 最上의 경인 毘佛略의 敎에 기초를 두고(法大), 菩提心을 일으켜서(心大), 그 교를 이해하고(解大), 청정한 마음으로(淨大), 보살의 복덕과 지혜가 몸에 나타나며(莊嚴大), 三大阿僧祗劫의 수행을 쌓아(時大), 마침내 相好를 갖추며 無上菩提를 얻는것(具足大)이라고 했다.
⑥ 印度의 대승에는 대략 中觀 · 瑜伽의 2系統과 밀교가 있다.
십지(十地) : 地는 범어 bhumi의 번역으로, 住處, 혹은 住持, 生成의 뜻.
그 자리(住)를 사는 집으로 하고, 또 그 자리에 있어서의 法을 보존하고 육성하는 것에 의해서, 果를 낳게 됨을 말한다.
① 乾慧등의 十地. 大品般若經 권6, 권17 등에 說해 있고 三乘에 공통된 것이기 때문에 三乘共의 十地, 共地라 하고, 천태종에서는 通敎의 十地라고 한다. 대품반야경 권六에는, 乾慧 내지 佛의 十地에 대해, 보살은 方便力에 의해서 六波羅蜜을 행하고, 또 四念處 내지 十八不共法을 차례로 행해서, 前九地를 지나 佛地에 이른다고 하여, 이 十地는 보살이 갖추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서, 여기서 말하는 佛地라 함은 佛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보살이 佛과 같이 十八不共法 등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또 智度論 권75에는, 이 十地를 각기 三乘의 階位에 배당하고 또 智顗의 法華玄義 권四下, 摩訶止觀 권六上에도 이 뜻을 받아서 해석하고 있다.
梵文大事에는 또 다른 十地를 說함. 十地의 해석은 한결같지는 않은데 慧遠의 大乘義章 권十四에는,
(1) 歡喜地. 처음으로 聖者가 되어서 크게 기쁜 마음이 일어나는 자리로, 淨心地 · 聖地 · 無我地 · 證地 · 見地 · 堪忍地라고도 한다.
(2) 離垢地. 잘못을 일으켜 戒를 破하고, 번뇌를 더하는 마음을 여읜 자리로, 具戒地 · 增上戒地라고도 한다.
(3) 明地. 禪定에 의해서 지혜의 빛을 얻어, 聞 · 思 · 修의 三慧를 닦아, 진리가 밝혀지는 자리.
(4) 炎地. 前三地의 조처에 의한 見解를 여의고 지혜의 불이 번뇌의 섶(薪)을 태우는 불꽃으로 하여, 지혜의 본체를 깨닫는 位. 곧 그 깨달음에 의해서 일으키는 阿含光이 구슬의 光炎과 같은 位란 뜻.
(5) 難勝地. 확실한 지혜를 얻어서 그 이상을 넘어서 올라가기가 곤란하다는 位. 또 出世間의 지혜를 얻어서 自由自在한 방편을 가지고 구하기 어려운 중생을 구원하는 자리라고도 한다.
(6) 現前地. 般若波羅蜜을 듣고서 大智가 눈앞에 나타나는 자리.
(7) 遠行地. 無相行을 닦아서 마음의 작용이 世間을 뛰어 넘은 자리로, 方便具足地(無相方便地), 有行有開發無相住라고도 한다. 이 자리에서는 위로 구해야 할 菩提도 없고 아래로 구원할 중생도 없다고 보아, 無相寂滅의 理에 잠겨, 수행을 할 수 없게 될 걱정이 있다. 이것을 七地沈空의 難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때 十方의 諸佛이 7종의 法을 가지고 勸勵하기 때문에 다시 수행의 용기를 분발시켜 第八地에 나간다고 하여 이것을 七勸이라고 한다.
(8) 不動地. 無相의 지혜가 간단없이 일어나서 번뇌에 결코 움직이지 않는 位로서, 色自在地 · 決定地 · 無行無開發無相住라고 한다.
(9) 善慧地. 보살이 거리낌 없는 힘으로 설법하여 利他行을 완성하므로 지혜의 작용이 자재한 位로, 心自在地 · 決定行地 · 無礙住라고도 한다.
(10) 法雲地. 大法身을 얻어서 自在力을 갖춘 자리로, 究竟地 · 最上住라고도 한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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