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의 대화

현자의 대화

근와(槿瓦) 2016. 11. 14. 00:13

현자의 대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지난 한해 동안 우리나라의 경제는 고도로 성장했다고 한다. 국민총생산고가 부쩍 늘어났고, 수출액은 당초의 목표액보다 훨씬 앞질렀다고도 한다. 거두절미하고 반가운 소식이다. 늘 가난에 쪼들려오던 우리네 처지라 잘 살아야겠다는 것은 민족 전체의 공통된 소망이 아닐 수 없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수염이 댓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는 이 말은 소박한 진리.


그런데 행인지 불행인지 사람에게는 먹이를 담아 삭이는 위장만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가치를 따지는 머리와 뜻을 표현하고자 하는 기능도 함께 갖추고 있다. 흔히 하는 말로 밥만 먹고는 살 수 없는 이상한 식성을 가지고 있는 생물이다.


그러면, 고도로 성장한 물량(物量)의 칫수만큼 우리네 속살림도 좋아졌을까? 반만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민족다운 긍지를 누리면서 고루고루 잘 살 수 있었던가? 이 물음 앞에 우리는 풀이 죽는다.


GNP가 곧 국민 총행복량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GNP라는 개념은 개발국에 있어서도 그 근거가 박약한데, 저개발국의 경우는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그 근거가 훨씬 더 종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뮈르달이 말했던가.


굳이 뮈르달과 같은 경제학자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가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추상적이며 외형적인 숫자의 놀음에 있지 않고,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내용에 달려 있을 것이다.


요 몇해 동안 우리는 일찍이 없었던 시련을 치르고 있다. 우리 실정과 현실에 알맞은 정치제도의 실현을 위해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유보당하면서 살아오고 있다. 하고 싶은 말이나 동작도 오로지 국민 총화를 위해 삼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불만이 없지 않다. 비판정신(批判精神)과 비방(誹謗)이란 말이 일부 위정자들간에는 국가와 정부처럼 동일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소지이므로 그 불만을 확산시키지 않고 있을 뿐이다.


35백만 동포 가운데서 필자 한 사람만의 일이라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비록 성질은 다르더라도 그런 부당한 일이 많은 사람들의 선량한 일상(日常)을 침식하고 있다면 그 불만의 누적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닐 것이다. 누가 말했던가, 인내에도 한도가 있는 법이라고. 쌓이고 쌓이면 언젠가 폭발하고 마는 것이 물리현상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위한 경제개발이며 무엇을 위한 근대화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서로가 필요조건(必要條件)이지 무연(無緣)한 장벽이 아니다. 국가는 국민 각개인의 신뢰와 의존관계가 원만할 때 비로소 그 힘을 집결할 수 있다는 것은 건전한 상식이다.


산을 넘어가다가 이따금 내 초암(艸庵)에 들르는 친구들이 세상 소식을 털어놓을 때 갑자기 말을 중단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들은 누가 들을까봐 겁을 먹고 있는 표정이다. 들어보면 이 시대의 흐름에 역행될 만한 내용도 아닌 시시콜콜한 생활주변의 이야기들인데 그들은 지레 겁을 내는 것이다. 이 밝은 천지에 살면서 어째서 이런 사소한 일들로 벌벌 기어야 하는가.


이와 같이 할말도 제대로 못한 채 남의 눈치와 코치를 살피기만 하면서 어떻게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정신을 북돋울 수 있을까. 이렇듯 잔뜩 움츠려가지고 어떻게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기약할 수 있으며, 신념과 긍지를 지니고 민족의 슬기를 모아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국민의 뜻이 한데 모여 총화를 이루려면 우선 이해와 협조가 따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미를 지닌 인간의 말이 막힘없이 교환되어야 할 것이다. 말문이 막혀가지고서야, 어떻게 뜻을 모을 수 있을 것인가. 억지로 막으면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 한입 두입 건너 쉬쉬 하면서 풍문(風聞)이 된다. 그러다 보면 갖은 억측과 유언비어가 떠돌게 마련.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의 무왕이 사람을 보내어 은나라를 정탐하게 했다. 돌아와 보고하기를 은나라는 어지러워 있습니다라고 했다. 어느 정도로 어지러워 있더냐?고 묻자 악한 자들이 착한 사람을 억누르고 있습니다무왕은 아직 멀었다라고 말했다. 얼마 후 다시 나갔던 첩자가 돌아와 보고했다. 대단히 어지러워졌습니다」「어느 정도로?」「어진 사람들이 밖으로 달아나버렸습니다」「아직 멀었다그뒤 나갔던 첩자가 다시 돌아와 보고했다. 몹시 어지러워 있습니다」「어느 정도까지 갔더냐?」「백성들이 불평을 입밖에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무왕은 됐다, 이제는하고 급히 태공(太公)에게 알리자 태공은 이렇게 말했다. 악한 자들이 착한 사람을 억압하고 것을 폭륙(暴戮)이라 하고, 어진 사람이 달아나는 것을 붕괴(崩壞)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불평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형벌로써 억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갈 데로 다 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차 3백 대와 용사 3천 명을 뽑아 갑자날 아침을 기해 출전, ()를 사로잡았다는 기록.


우리가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는 것은 죽어버린 과거가 아니라 현재 속에도 살아 있는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역사는 현대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금년부터 시작되는 45개년계획 기간에는 국민의 복지향상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할 거라고 한다. 문공 당국에서는 연초부터 문예진흥기금을 대폭 늘려 작가들에게 원고료를 몇곱절 올려주겠다고 했다. 모두가 고무적인 소식이요 고마운 배려이긴 하지만, 우리가 긴요하게 바라는 것은 고료 인상보다는 오히려 표현의 자유 쪽이다. 지금처럼 극도로 제한된 표현을 가지고는 결코 바람직한 문학의 진흥과 예술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문학이나 예술이 돈으로 이루어진 예는 그 어떤 나라에서도 없었다. 위대한 문학과 예술은 오로지 자유정신에 기반을 두고 창조되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광장(廣場)의 대화가 없다. 밀실에서 끼리끼리의 수군거림과 메아리 없는 독백, 그리고 종적(縱的)인 명령만 있지 인간 상호간의 신뢰와 이해를 돕기 위한 횡적인 대화가 끊어진 지 오래다. 그러기 때문에 온갖 억측과 뿌리없는 뜬소문이 얼마나 많이 나돌고 있는가. 이런 현상이 결코 국가이익에 보탬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대화란 끼리끼리의 수군거림이 아니다. 입장과 견해가 다른 사람끼리 마주앉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막혔던 길이 트이고 오해의 장벽 대신 이해의 지평(地平)이 열리는 것이다. 입장이나 견해가 같다면 굳이 대화의 필요성은 없다. 광장의 대화란 더 말할 것도 없이 직접 간접으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다.


<밀린다 왕의 물음>이란 경전이 있다. 이 책은 기원전 2세기 후반 서북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희랍의 왕 밀린다(메난도로스)와 불교 승려인 나가세나의 대담을 통해 불교 교리를 대화형식으로 서술한 것. 나가세나는 왕이 대화 도중 말문이 막히면 어떤 무례한 짓을 하게 될지도 몰라 우선 대화의 태도부터 밝힌다.


당신이 현자(賢者)의 자세를 가지고 대담하겠다면 기꺼이 응하겠지만, 왕자(王者)의 자세로써 대한다면 나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밀린다 왕은 현자와 왕자의 대담이 어떻게 다른가를 묻는다.

현자의 대담은 설명하고 반박하고 시정되더라도 조금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들은 흔히 어떤 사항만을 인정하고 그 사항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으면 벌컥 화를 내면서 저놈을 벌하라고 명령하기 일쑤입니다.


밀린다 왕은 쾌히 현자의 자세로써 대화하겠다고 응해왔다. 그가 권력을 휘둘러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는 전제군주였다면, 그와 같은 세기적인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대화에는 상대편의 처지를 충분히 인정하는 관용(寬容)의 정신이 따라야 한다.


오늘처럼 굳게 닫혀진 사회가 열리려면 먼저 이와 같은 현자의 대화가 각계각층에서 활발히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 결과에서 오는 이해와 협조는 물량의 집적(集積)과는 비교될 수 없는 막강한 국력이 될 것이다.



출전 : 서 있는 사람들(법정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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